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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22화


1622화.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2)

제갈자인은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본디 과거의 인연이 현재를 만들어 내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은 과거를 뛰어넘으려 한다.

그러나 제갈자인의 눈에는 보였다. 이 현상의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사실이.

맹소는 분명 청명의 의견에 반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뜨겁게 그 의견에 찬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의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아니, 최소한의 의문조차 느끼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이 온당해 보이므로.

이를 가능케 한 건 모두 맹소의 건너편에 앉은 한 사람이다.

‘화산검협 청명.’

그가 한 말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비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저 꿈같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이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믿게 된다. 어처구니없게도. 저 사람이 한 말에는 진실이 어려 있으리라 의심치 않게 된다. 그건 사람을 한곳에 묶는 데는 꼭 필요한 자질일 터.

정파와 사파, 문파와 세가, 그리고 중원과 새외까지.

도무지 섞이려야 섞일 수 없던 이들이 한곳에 모인 천우맹. 꿈에서도 생각하기 어렵던 그 형태가 어찌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었다.

제갈자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모용세가는 어떻습니까? 아직 마음이 변치 않으셨습니까?”

모용위경은 고립된 제 처지를 깨달은 듯 창백해진 낯빛으로 입술을 잘게 씹어 대었다.

“……짓궂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무슨 반발을 하겠습니까?”

“아니, 그런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등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권한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곳에 다른 뜻을 품은 이가 함께한다면, 연맹의 기초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갈자인의 눈은 담담하다 못해 냉정했다. 모용위경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리 정론인 척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의욕적으로 연맹에 참여할 게 아니라면 애초에 발 들이밀지 않고 나가라는 의미가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나, 저 말을 한 게 제갈자인이라는 게 문제다. 화산검협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사람이 어찌 이리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친우였던 그를 압박해 온단 말인가?

“제갈가주님. 어찌…….”

“이곳은 공석(公席)입니다.”

모용위경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입을 뗐으나, 제갈자인은 고저 없는 어투로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천하에 도래한 위기를 논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응할 자리가 아닙니다.”

모용위경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모용위경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휘권을 넘긴단 말인가? 저들이 무엇을 벌일지 알고? 심지어 당장 새로운 연맹의 지휘를 누가 하게 될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모용위경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정말 그러실 수 있습니까? 가주께서는 정말 가솔들이 저 사파 놈의 지시를 받고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용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예. 할 수 있습니다.”

모용위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제갈자인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제갈세가가 녹림왕의 명을 받는 꼴을 볼 바에야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겠지요.”

“내, 내 말이 그 말이지 않소!”

“하지만 우리에게 명을 내리게 되는 건 녹림왕이 아닌 맹의 군사입니다. 그 역시 자신의 모든 권한과 직위를 내려놓는 순간 더 이상 녹림왕이 아닐 테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모용위경이 말문이 막힌 것처럼 말끝을 흐리자, 제갈자인이 단호히 노려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라…….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권한을 내려놓았다는 것만으로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갈자인은 이 길을 거부할 생각이 없다.

때로는 그 모든 사사로운 사정과 입장을 뛰어넘는 게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걸을 만한 그릇은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멍청이가 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대답은 무엇입니까?”

제갈자인이 흔들림 없이 다시 압박하니 모용위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럼 되었습니다.”

“예?”

그런데 이번엔 제갈자인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용세가는 빠지는 것으로 하시지요.”

“아, 아니, 가주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그걸 가주님께서 마음대로…….”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제 권한을 내려놓기 싫어하는 이와 불만에 가득 차 있을 가문에게 제 가솔들의 등을 맡기란 말입니까?”

순간 모용위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보는 주변 이들의 시선도 그리 곱지는 못했다.

‘이런…….’

감정이 격앙되는 바람에 이곳이 연맹이란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구파일방은 연맹이란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법정의 말이 곧 법이 되는 형태였다. 반면에 이곳은 말 그대로 모두가 쉬이 입을 열 수 있다. 정말로 ‘연맹’의 형태.

이 말인즉, 저들이 모용세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의지가 어떻든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모용위경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정(正)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이 모두 한 지붕 아래로 모이는 판국에 모용세가만 단독으로 행동할 순 없다. 모용세가가 그만한 위치를 확보한 가문이 아니란 것쯤은 모용위경이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저 역시 여러분들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리 명쾌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답이 흘러나왔다.

가늘게 뜬 눈으로 슬쩍 모용위경을 보던 제갈자인이 현종과 당군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은 그들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듯이.

하지만 최종적으로 시선이 가 닿은 곳은 청명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저요?”

“예, 총사.”

“그건 뭐 맹주님께서 정하실 일이긴 한데…….”

청명이 슬쩍 엉덩이를 빼려 들자 제갈자인이 붙잡았다.

“물론 그렇지만, 저는 총사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겁니다.”

제갈자인이 압박해 오자 청명이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저 사람은 임소병처럼 만만히 굴려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뭐,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모용세가는 맹이 내건 대의에 공감하지 못함에도 말입니까?”

“일단…… 저부터도 대의니 뭐니 하는 거창한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령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그 말에 완벽하게 호응하며 따르는 이들만 함께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 끝이야 뻔하지 않겠어요? 벽을 허물겠다고 한 사람이 너는 허물 수 없는 사람이니 나가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꽉 다물려 있던 제갈자인의 입꼬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이신 거라면 저도 찬성하겠습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현종이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께서는 이견이 없으십니까?”

대부분의 문주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남은 건 해남인데…….”

현종의 말에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었다.

“해남은 문파를 대표할 만한 이가 참가하지 못했으니 섬서에 도착하는 대로 그 뜻을 따로 묻겠습니다.”

제대로 된 절차는 아니나, 굳이 이에 대해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해남이 어떤 선택을 할지야 너무도 뻔히 보였으니까.

게다가 당장 해남은 지금 내세울 권한이나 지켜야 할 권위가 없는 거나 매한가지이다. 이번 일이 기회가 되면 기회가 되었지, 손해는 아닐 테니 불만이 있을 리 없다.

“또 이견 있는 분 계십니까?”

현종이 마지막으로 물었지만, 이번엔 모두가 침묵하였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큰 감회가 스쳤다. 내심 가능하지 않으리라 믿었건만 이리…….

그의 눈빛이 새삼스럽게 청명에게로,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백천에게로 향했다.

기존에 이끌던 이들만 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이 모든 걸 이뤄 낸 건 다름 아닌 젊은 강호의 미래들이다. 그저 화산에 국한되지 않은.

“맹주님.”

당군악의 재촉에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실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더 골치 아픈 일들이 산재해 있을 터. 벌써 감회에 젖기엔 일렀다.

“그럼 이것으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현종이 폐회를 선언하려던 순간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종리곡이 돌연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문주님들 앞에서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발언할 권한을.”

“무슨 말씀을……?”

의외의 인물이 끼어들자 현종의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맹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종남에 대해, 그리고…….”

종리곡의 눈이 현종에게 똑바로 가 닿았다.

“화산에 대해 해야 할 말입니다.”

눈을 살짝 크게 뜬 현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예.”

종리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두룩한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호기심, 의아함, 그리고 청명이 품은 한없는 어둠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종리곡은 모두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믿음을 담은 이의 눈빛을 보며 마침내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종남은 화산과 묵은 원이 있습니다.”

순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구태여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낸다는 말인가?

“물론 묻어 둘 수도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리하길 원한다면 화산의 태상장문께서도 굳이 이 일을 끄집어내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묵은 상처를 도려내지 않으면, 결국은 썩고 온몸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잠시 방황하는 듯하던 종리곡의 두 눈이 차츰 더 단호해졌다. 그가 현종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종남은 화산에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현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자, 장문인.”

“이는 종남의 선대들과, 종남의 장문인인 제가 저지른 일입니다. 그 죄는…….”

“확실히 좀 그렇긴 했죠.”

그 순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불쑥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중인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청명이 제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대 늘어졌다. 이 모든 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 망한 문파랑 교류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애들을 쥐 잡듯이 팬 게 정파라는 양반들이 할 짓은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뭐…… 우린 별로 상관없어요. 우리도 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은근슬쩍 사과하고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시죠. 이제 우리 차례니까요.”

그 말에 몇몇 이들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고, 몇몇 이들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화종지회. 종남은 종화지회라 부르는 두 문파의 교류. 아니, 교류라는 이름을 빙자한 찍어누르기. 확실히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었으니 이참에 털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종리곡은 그런 청명을 빤히 보았다. 청명이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말했다.

“그러니까, 시간 그만 뺏고 그만 파하죠. 할 일이 많거든요.”

이윽고 종리곡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묻어 둘 수 있는 일을 기어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고는, 이제 와 자신이 먼저 용서하려 하고 있다니.

그때, 현종도 청명을 거들고 나섰다.

“맞습니다, 장문인. 우리 화산은 화종지회에 대하여 원을 품지 않았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화종지회가 우리 화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고 이제는 외려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현종은 당황하여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현종을 빤히 보던 종리곡은 천장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한 사람을 눈에 오롯이 담았다.

진금룡.

언젠가는 그를 대신하여 종남이라는 두 글자를 어깨에 지고 걸어갈 한 사람을.

종리곡이 말했다.

“종남은…… 과거 화산이 마교 잔당의 침공을 받을 당시 여력이 충분함에도 화산을 돕지 않고 방조했습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쩌적 얼어붙었다. 종리곡이 입술을 짓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 기회를 틈타 화산의 매화검법을 탈취하였고, 이를 종남의 무학으로 바꾸는 일을 획책했습니다.”

“자, 장문…….”

“대체 무슨……?”

충격을 받은 문주들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종리곡의 시선은 이제 오로지 현종에게만 가 있었다.

“그로도 모자라, 화산이 완전히 망하도록 지속적인 수작질을 하였지요. 과거 마교대란에서 화산이 무엇을 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은혜를 원수로 갚았고, 협과 도에 어긋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 누구도 차마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문파들은 물론이고, 현종과 진금룡, 심지어는 청명조차 얼어 버린 듯 침묵했다.

“이 모든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종남의 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저 당연히 여겨 왔던 저의 죄입니다. 그러니…….”

종리곡이 고개를 숙였다. 땅에 정수리가 닿을 듯 깊게. 아주 깊게. 평생 그가 짓밟는 게 당연했고, 실제로 늘 그래 왔던 현종을 향해서 말이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제가 온전히 감당하겠습니다. 부디…… 화산의 처벌을 부탁드립니다.”

수그러든 그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짊어지고 있는 이름의 무게만큼, 그가 짊어진 죄의 무게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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