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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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1화


…..저 용맹 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마저도 때로는 그의 어린 종자 후치 네드발의 도움을 받았다는 믿을 만한 기록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신빙성 없는 자료로 생각하곤 하는데, 한낱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던 후치 네드발이 세상에 그 이름이라도 전하게 된 것은 오로지 위대한 샌슨 퍼시발이 그를 가엾게 여겨 종자로서 데리고 다녔다 는 사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수많은 옛노래와 가인들의 하프에서 울려퍼졌던 진리를 다시 한번 밝힌다. 가장 현명한 자도 때로는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배울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현명함을 더욱 빛나게 할지언정 그 광휘를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 법이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12권 15쪽.


1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맹렬히 일어나는 먼지 구름의 모습이 보였다.

이 광막한 황야에서 먼지 구름은 천 큐빗 거리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저 뒤쪽의 먼지 구름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면서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우리 바로 뒤에서 일어나 는 짙은 먼지 구름은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흡사 먼지 구름이 우리를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랴! 하, 하! 하! 하! 하아아!”

“달려라! 이스트 그레이드를 단숨에 돌파하라!”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선두에서는 다부진 황소가 일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렇다. 황소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건장한 전사가 앉아서 목청껏 고함을 질러대며 기세를 북돋우고 있었다. 길시 언과 선더라이더다. 선더라이더는 쭉쭉 뻗어나가는 발로 대지를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날씬한 여도적, 그리고 여행 초보자의 모든 특징을 다 보여주고 있는 소녀가 거대한 흑마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네리아와 레니, 그리고 에 보니 나이트호크다. 기다란 트라이던트를 안장 옆으로 느긋하게 비껴들고 등 뒤에 소녀를 태운 채 붉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달려가는 네리아의 모습은 이야기 속의 주 인공 같았다.

그녀의 옆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다부진 전사와, 그에 비해 볼 때 가냘파 보이는 프리스트를 태운 거대한 말이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달려가고 있었다. 샌슨과 제레인 트, 그리고 슈팅스타. 샌슨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고 그 고함소리를 듣는 말들은 마왕의 소환을 받은 악마들처럼 질풍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로브를 걸치고 약간 피로해 보이지만 그것이 원숙미를 더해 주는 얼굴의 마법사가, 원숙함이 넘치는 얼굴이지만 파랗게 질려 있어서 그 원숙미 를 대폭 삭감시키고 있는 드워프를 등 뒤에 태운 채 쭉쭉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 그리고 세레니얼…………이란다. 아프나이델이 수도에서 타고 온 말 인데, 거참. 이름이 왜 항상 저렇지?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꿰뚫을 듯이 날카로운 눈의 전사가 입을 꾹 다물어 강직한 성격을 마구 노출시키면서 고삐를 놀리고 있었다. 운차이와 앰뷸런트 제일이다. 그 리고 왼쪽으로는 꿰뚫릴 듯이 부드러운 눈의 독서가가 입을 꾹 다물어 먼지를 마시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달리고 있었다. 칼과 트레일이다.

그리고 일행의 후미를 지키는 남자.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낸 자.’라고 할까? 어쨌든 풍문의 느린 속도 때문에 아직 그 위명이 대륙에 퍼지지 않았을 뿐 영웅의 모든 자질을 갖춘 불세출의 전사가, 그 사자와도 같이 들끓는 피를 굴복시켜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버린 고귀한 레이디의 이름을 딴 용맹한 말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 다!

아! 젠장! 요 따위로 말해 봐도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아! 제일 뒤쪽에서 달리니까 일행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모조리 내 입으로 들어온단 말이다! 일행의 말들이 갈겨 대는 똥도 모조리 내 앞으로 떨어지고!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지평선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우리 뒤쪽으로 아스라하게 보이던 붉은 산맥도 이제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한없이 넓은 이스트 그레이드의 평 원을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구름은 하나의 산만큼이나 거대했지만 이 넓은 평원에 비해 보면 한 줌 티끌처럼 보인다.

“하아, 하아, 하앗!”

“에, 에, 에하! 타!”

머리 위로 부드러운 구름들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도 한없이 넓어 구름은 길을 잃고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람과 우리 외엔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는 듯한 평원은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선두의 길잡이가 외치는 쾌활하고도 힘찬 응원에 고무되어 지칠 줄 모르고 달려 갔다.

기수들은 물론이거니와 말들도 분명히 지치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 문제니까. 샌슨의 등 뒤에서 제레인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황소의 뒤를 따라가지도 못한다면, 그게 말이냐아!”

“이힝! 힝힝힝히!”

아프나이델은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는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들이 지치는 기색이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브 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 가 이상하게 생긴 고약 같은 것을 허공으로 던지며 캐스트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말들은 새로운 힘을 얻어 고고성을 터뜨리듯 포효했다. 그러고는 바람마저 따돌려 버릴 속도로 달려 나가곤 했다. 아, 물론 그렇게 말들이 급가속할 때마다 엑셀핸드는 구슬픈 비명을 질러대었다.

“오우, 카리스 누멘! 신실한 드워프를 돌보소서!”

풀썩. 말발굽이 땅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난다.

거친 황야 가운데 서 있는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막막한 대지 위에 한 점 얼룩처럼 자리잡은 도시였다. 주위는 온통 황야였고 그 황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엄청난 양의 흙먼지를 아낌없이 도시에 퍼부어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그 회색의 성벽은 희미하게 보였고

게다가 저녁 무렵이라 햇빛의 양도 부족했다. 춤추는 먼지들과 붉은 햇빛 때문에 성벽 전체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 만들어진 성 같아. 콜록!”

네리아의 잔뜩 쉰 목소리.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땀에 절어붙은 먼지가 턱 아래를 근질거리게 만들었다. 힘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긁어보았지만 손가락에는 머 리카락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걸렸다.

대장장이의 모루만큼이나 질기고 강인한 의지로,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하프 현보다 더 곧은 직진을 계속하여, 우리는 그날 해를 추적하며 열두 시간 동안 장장 24펜

큐빗의 거리를 주파했다. 그리고 지금 석양 무렵, 우리는 해를 따라 달려와 석양이 마지막으로 스치는 도시에 이른 것이다.

“쿨럭쿨럭, 뭐하는 도시지?”

칼 역시 잔뜩 쉰 목소리였다. 샌슨은 배낭을 꺼내더니 먼저 그 위에 쌓인 먼지를 거칠게 털어내었다. 자욱한 먼지 구름이 일자 그 옆에 있던 길시언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날 묻어버릴 작정이오? 지도를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여기가 어딥니까?”

“칸 아디움입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중앙 도시.”

“흐음. 이런 곳에 도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군요.”

“교역 도시지요. 이스트 그레이드의 여행자들이 들르면서 만들어진 도시.”

“아아. 물이라도 나오나 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색의 여행자들이 되어 칸 아디움으로 들어섰다.

성문에 접근하자 성문 옆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던 통행인을 감시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모두 포차드를 들고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마도 햇빛과 먼지를 막기 위한 것인가 보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한 병사가 일어나더니 말했다.

“칸 아디움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행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우리들을 다시 관찰했다. 여행자치고는 구성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으니까. 짐수레나 짐말 같은 것이 없으니 상인은 아니고, 모두들 무장을 하 고 있는데다가 지위고하를 구분할 수 없도록 모두 말에 타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황소에 타고 있는데다가, 드워프도 끼여 있었고 마법사와 성직자의 모습도 보였 다. 그 병사는 최선을 다해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모험가 분들인가 보군요.”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모험가는 들어가면 안 됩니까?”

길시언의 밝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장 인원이 도시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동시에 떠들기 시작했다. 허헛, 참. 모두들 쓰러져 죽을 듯한 얼굴이더니 잘도 떠드네. 네리아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뭐라고 떠들긴 했는데 엑셀 핸드의 고함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프나이델은 세상의 종말 신호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거의 떨어지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려서서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제레인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가만히 선 채 몸의 고통을 다스리더니 잠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죽겠군…….”

제레인트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로드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병사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한 70살 먹은 노인 이라고 오해되기에 적당한 걸음걸이였다. 그 동안 병사는 참으로 안쓰럽다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처절한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신의 미력한 지팡이에게…… 제발 하룻밤 쉴 자리와 목을 축일 한 모금의 물을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병사는 이미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제레인트가 말하지 않았어도 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과 허락을 내주었을 것이다.

“죽었어요?”

“죽는다는 것이 불멸의 영혼만이 움직일 뿐 그 육신에 대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난 현재 죽어 있어.”

제레인트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관 주인장에게 장의사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제레인트는 드러누운 채 무서운 신음소리를 뱉어내었다.

지금 제레인트는 여행자들의 흙 묻은 발이 수없이 밟고 지나갔을 홀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완전히 끝장난 술주정뱅이라도 이렇게 볼품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성스러운 프리스트의 옷을 입고 있는 제레인트가 그러고 있음에야. 하지만 제레인트는 땀 때문에 그 머릿결이 밧줄만큼이나 굵게 엉겨 있는데 다가 몸을 좀 움직이기만 하면 곧 자욱한 먼지 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래서 여관 주인장도 프리스트의 허물을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관 주인장은 융통성까지 제법 갖추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누워 있는 제레인트의 몸을 보자 가볍게 건너 뛰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손에 든 맥주잔에서 한 방울의 맥주도 흘리지 않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맥주잔을 돌리면서 말했다.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오신 모양이군요.”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쓰러져 있던 아프나이델은 여관 주인장의 말에 힘들게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가 다시 네 개를 펼쳤다. 여관 주인장은 큼직 하고도 붉은 자신의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2펜큐빗 4000큐빗?”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위로 들어올린 손가락만 좌우로 까딱거렸다.

“설마 24펜큐빗?”

그러자 아프나이델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까딱거렸고 그러자 주인장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한 말들이니, 잘 좀 부탁합니다.”

“염려 마시오. 말들은 임펠리아에 있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그 말에 우리 일행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여관 주인장은 설마 길시언이 왕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여관 주인장은 우리의 미소를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빙긋 웃 었다.

“엑셀핸드, 일어나요. 맥주 왔어요.”

엑셀핸드는 급조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죽은 드워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노커라서 그런지 테페리의 프리스트처럼 바닥에 마구 드러눕지는 않을 정도 의 분별이 있는 엑셀핸드는 의자 두 개를 딱 붙여서 자신의 키에 들어맞는 침대를 만들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엑셀핸드는 참으로 드워프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필요없어.”

여관 주인장은 자신의 홀에 누워 있는 드워프가 혹시 드워프처럼 생긴 인간이 아닌가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긴, 드워프가 맥주를 거절하다 니.

문가에 서서 몸을 털고 있던 샌슨은 여관의 정문에 먼지 구름을 만들어놓고 돌아왔다. 우리들 모두 이스트 그레이드의 먼지란 먼지는 모조리 몸에 덮어쓰다시피 한 상태였다.

샌슨에게 잔을 건네고 나서 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허어억!”

하아! 카! 하루 종일 달려서 말라붙다시피 한 목구멍으로 맥주가 넘어가니 목이 찢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머리가 빙빙 돌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호롱불이 세 개로 보일 정도였다.

칼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졸면서 맥주를 마시느라 옷에 상당량의 맥주를 흘려버렸다. 운차이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맥주잔을 든 채 엑셀핸드의 곁으로 걸 어갔다.

“이봐, 드워프, 담배 좀 내놔.”

엑셀핸드는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뜨면서 운차이를 노려보았다.

“이놈이! 말버릇 한번 고약타!”

그러나 운차이는 묵묵히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을 뿐이다.

“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어.”

그러자 엑셀핸드는 신음을 흘리고는 누운 채로 품 속에서 담배 쌈지를 꺼내어 운차이에게 건네었다. 운차이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고맙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파이프는?”

“크아아아악!”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꺼내어 운차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으나 운차이는 그것을 입으로 척 받아내었다. 여관 주인장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운차이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발을 올리고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호롱불로 불을 붙이고 나서 운차이는 팔을 들어 머리를 받치며 느긋하게 연 기를 뿜어올리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침착하게 운차이에게 말했다.

“담배에 대한 보답으로 엑셀핸드 씨를 침실로 좀 안내하시지?”

운차이는 물끄러미 길시언을 쏘아보더니 곧 가벼운 동작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의자 위에 있던 엑셀핸드를 마치 짐짝 다루듯이 들어올려 어깨에 들어메었고 반항 할 기운이 없는 엑셀핸드는 욕설만 줄기차게 해댈 뿐 잠자코 운차이에게 들려갔다. 둘이 침실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뭘 집어던지는 둔한 소리가 나더니 엑셀 핸드의 비명소리도 좀 들려왔다.

그리고 운차이는 손을 털면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파이프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자 운차이는 심드 렁하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침대에 갖다놨으니.”

“……수고했소.”

칼은 그렇게 말하고는 운차이의 옆에 나란히 엎어져버렸다. 그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웅얼거렸다.

“나를 침실로 안내해 줄 필요는 없소. …………조금 있다가 내 발로………… 걸어갈 테니…………. 그르렁!”

길시언은 애처로운 얼굴로 칼을 내려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후우. 피곤한 하루였소. 그래도 잘들 달렸습니다. 이제 수도는 하루 반 정도의 거리입니다.”

샌슨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달린 것과 똑같이 달렸을 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맙소사. 내일도 오늘처럼 달린다니! 난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뜨여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샌슨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뿐이다.

“내일도 굉장하겠군요.”

굉장굉장이라고 했나? 난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 말들의 편자를 모두 뽑아놓고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잠깐, 편자라구? 그렇

지!

“어, 우리야 괜찮지만 말들의 편자가 괜찮을까요?”

그러자 샌슨은 기특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흠.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치. 내가 다 살펴보고 왔어. 괜찮더군.”

아아아! 망할! 말들이 모두 감기라도 걸려서 쓰러져버리면 좋겠다! 난 샌슨에게 힘없이 웃어준 다음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때 홀 한켠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네리 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후치야. 나 좀 도와줘!”

“어? 왜 그래요?”

돌아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와 레니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목욕탕으로 직행해 버린 참이었다. 그런데 왜 날 부르는 거 야?

“레니가 뻗어버렸어. 그런데 나도 힘이 없어서 못 일으키겠다구.”

“자, 잠깐! 그럼 지금 알몸이란 말이에요? 거절!”

“아냐. 옷 다 입고 나서 기절했어. 걱정 말고 들어와.”

난 넌더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다리가 풀려버릴 지경인데 누구를 부축하라는 거야.

네리아를 따라 욕탕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나무통 몇 개와 아궁이, 그리고 아궁이 위에 놓인 커다란 가마솥 등이 보였고 바닥은 물바다였다. 음. 틀림없이 물장난을 쳤으렸다. 다른 쪽의 긴의자에는 목욕을 끝낸 다음이라 그런지 젖은 머리에 바알간 볼을 한 레니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앉았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것 으로 짐작되는, 꽤나 귀여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뒤집어쓴 먼지들을 말끔히 씻어낸 다음이라 그런지 레니의 모습은 싱그럽고 촉촉하게 보였으며 게다 가 목욕통에서 방금 나와서 따뜻하기까지 했지만, 나에겐 끔찍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짐일 뿐이었다. 으으으! 레니를 업고 그녀들의 침실에 데려다주는 길이 왜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내가 레니를 눕혀놓고 돌아오자 샌슨이 아프나이델을, 그리고 길시언이 제레인트를 부축하여 침실로 옮겼다. 결국 침대로 옮겨진 그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칼 의 경우에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있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들은 욕탕으로 들어섰다.

욕탕에서 나와보니 저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녁 테이블에 남은 것은 길시언,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와 테이블에 여전히 엎드려 있는 칼뿐이었다. 제레인트의 말 에 따르자면 칼은 죽은 셈이고, 따라서 저녁 식사는 상당히 칼잡이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기이하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 이 전개되었다.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서 지골레이드의 해방이 의미하는 바는 몹시 중대하오. 거기 소금 좀 줘.”

“여기 있어요. 음. 자이펀이 이미 선보인 무기, 그러니까 디바인 마크를 이용한 세이크럴라이즈의 위협이 현재하는 가운데 바이서스의 야전 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 국면이라 할 것 같은데요. 샌슨! 식탁에서 제발 다리 흔들지 마!”

“옳은 말이야, 후치. 쩝쩝, 따라서 지골레이드는 절대로 해방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야. 꿀꺽. 그런데 이미 해방된 채로 돌아다니고 있어. 전선 지휘관들이 돌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이상하군. 야, 괴물 눈알! 네 생각은 어때?”

·질문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질문하면서 포크를 휘두르지는 마라. 이 인간 같잖은 녀석아.”

여관 주인장은 대경실색해서는 우리들의 식사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차마 바라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괜히 닦은 테이블을 또 닦으면서 우리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길시언은 침울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빵을 위엄 있게 쪼개면서 말했다.

“칼 씨가 제시한 해안 봉쇄 전략이 성공할 수만 있었어도 전선의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만일 그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전선에서 적당 기간 소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었을 거요.”

“예. 무익한 희생을 상당히 줄일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의 발안자는 펠레일이라는 젊은 마법사였습니다.”

“흠. 그 마법사를 만나봤으면 좋겠군요. 이 상황에 대해 해석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내가 해줄 수도 있지.”

길시언은 쪼개던 빵을 점잖게 내려놓았지만 샌슨은 물어뜯던 빵을 좀 튀겼다. 난 놀란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설명할 수 있다고요?”

운차이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스푼과 포크, 그리고 접시를 평행이 되게 놓았다. 그 동작은 완만하면서도 완성을 지향하는 엄숙함이 스며 있었지만 샌슨은 그 동작을 바라보면서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운차이는 그 동작을 완료한 다음에도 다시 느긋한 동작으로 물컵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샌슨은 기어코 포크를 어깨 위 로 들어올려 투창 자세를 취했다.

“말하지 않으면 던진다!”

“그럼 맨손으로 먹겠군.”

운차이의 대답에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운차이는 그제야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초점을 옮겨보지.”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초점을 옮기다니?”

“지금 지골레이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군. 돌맨에게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돌맨 할슈타일 말인가? 그가 왜?”

“그 역시 현존하는 드래곤 라자다. 확실한 드래곤 라자이지. 더구나 지골레이드를 놓아줌으로서 현재는 드래곤이 없는 드래곤 라자가 된 셈이고.”

길시언과 샌슨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기로 마음먹 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운차이의 생각은…………… 돌맨 할슈타일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바보 왕자와 인간 같잖은 전사보다는 좀 낫다.”

길시언은 이 냉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화를 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샌슨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이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운차이는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것이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붉은 머리 소녀, 즉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고 있었다. 너희들이 찾아낸 그 레니 말이야. 그런데 현재 레니는 너희들의 수중에 있다.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 기필코 크라드메서를 획득하고 싶다면, 게다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뺏긴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하면 될까.”

길시언은 빵이 목에 걸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지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대신 크라드메서를?”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고 샌슨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는 구운 감자를 대상으 로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이프로 감자를 이리저리 찔러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샌슨은 나이프를 놓으면서 말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말해 봐.”

“어, 그러니까, 에, 이거 봐. 확실한 자기 여자 팽개치고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달려가는 남자는 바보 아냐?”

…무슨 비유가 저래. 운차이는 더욱 심각한 경멸을 담아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당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에, 그게 아니라. 음. 잡은 토끼 팽개치고 다른 토끼를 쫓아가는 사냥꾼은 바보다, 이런 말이야.”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샌슨의 말이 맞아. 지골레이드는 할슈타일 가문의 드래곤이지만 크라드메서는 그렇지 않아. 왜 확실한 자기 소유의 드래곤을 포기하고 대신 불확실한 드래 곤을 노린단 말이지?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그 계약은 쌍방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쌍방의 동의에 의해 결렬되는 거잖아.” 운차이는 냉랭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하는 자는 얻는 것이 없지.”

“허어…………, 참. 그거. 지골레이드는 블루 드래곤이고 크라드메서는 이그누스 드래곤이니까? 지골레이드보다는 크라드메서가 더 좋다, 이 말인가? 그거 왠지 어린애 의 논리 같잖아.”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칼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휘둘리는 느낌이군. 퍼시발 군. 나 거기 맥주 좀 주게.”

샌슨은 테이블 한켠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칼에게 건네었다. 칼은 천천히 목을 축이고 나서 말했다.

“커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군. 큼. 에, 엎드려서 나누는 말씀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 내 생각을 말해 보지요.”

칼은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운차이 씨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최선을 다해 레니 양을 찾아왔지요. 하지만 현재로선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이 오. 그러니 최후 수단으로 돌맨 할슈타일로 하여금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게 하는 임시 방편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임시 방편이라구요?”

“지골레이드는 온전한 상태지만 크라드메서는 정신이 이상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길시언은 손을 딱 부딪쳤다. 샌슨은 아직 이해를 못한 표정이 되었고 그러자 칼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의 위기를 막아보려 한다는 거지. 그래서 지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돌맨을 자유롭게 만든 다음, 그를 크라드메서에게 연결시켜 크라드메서 를 안정시킨다는 말일세.”

“아……!”

음. 그렇긴 하네. 우리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으려 애쓴 이유도 크라드메서가 돌아버렸을지 모르기 때문이지. 크라드메서는 드래곤 라자를 잃고 발광해 버린 전력이 있고 여전히 발광한 상태라면 대륙이 위험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대륙의 동쪽 끝 일스까지 달려가서 레니를 데려온 거지.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을 구하기 위해 지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돌맨을 내세울 수도 있는 문제로군. 흐음. 말이 되는 거 같다. 나는 테이블 위의 호롱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그 토대가 좀 불안합니다.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의 말씀에 의하면 돌맨 할슈타일은 역대 최악의 드래곤 라자라고 하지요. 과연 그 최악의 드래곤 라자가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문제입니다.”

으. 그게 문제인가? 길시언은 턱을 쓸면서 말했다.

“확률이 약한 판에 걸고 도박입니까? 하지만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 같은 도박입니다.”

칼은 관자놀이를 문질러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휘젓고 나서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라면 크라드메서도 획득하지 못한데다가 지골레이드도 잃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경우

의 전형적인 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하함. 설령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는 지골레이드의 대역은 될 수 없을 겁니다.”

“예?”

“음…………, 크라드메서는 균형을 지키는 이그누스 드래곤입니다. 그가 인간의 싸움, 지골레이드의 말처럼 인간들의 쓸모 없는 싸움박질을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되 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바이서스로서는 크라드메서의 안정은 얻게 되지만 전선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겠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 가설이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때 운차이가 말했다.

“바이서스로서는 그렇다는 말씀이시겠지.”

운차이의 말은, 마치 따뜻한 방 안에서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힌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의미지?”

“초점을 다시 바꿔보자는 말이지. 왠지 오늘 저녁에 내가 하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군.”

“초점을………… 어떻게?”

“바이서스가 아니라 할슈타일 가문만을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면 할슈타일 가문으로서는 지골레이드라는 투 정심한 드래곤 대신 미드 그레이드를 박살낸 전력을 가진 크라드메서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창문을 열어젖힌 듯한 운차이의 말 때문인지 테이블 위의 호롱불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시언은 어두운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숨겨진 의도는 상당히 기분 나쁜데.”

“당신 기분을 맞춰줘야 할 의무는 없어.”

“……할슈타일 가문은 바이서스의 안보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냐? 오로지 더 강한 드래곤을 가지기만을 원한다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바이서스가 없다면 할슈타일 가문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길시언은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귀가 타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하지만 운차이의 차가운 얼굴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웃기는군. 바이서스가 할슈타일의 존속에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할슈타일 가문이 공신의 후손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운차이는 구태여 차갑게 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고 진실은 차갑다. 길시언은 자신의 입을 악기로 삼아 귀에 거슬리는 음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은 원래 바이서스에 대해서는 반란자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가문이 후작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누대에 걸쳐 상당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가문 출신들의 비할 데 없는 충성심 때문이었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멍청이 왕자?”

“그렇지는 않다.”

길시언은 여전히 똑바른 자세였지만 그 목소리는……………, 심리적으로 복부 아래를 가격당한 기분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왕자님. 항상 속마음을 감추는 데는 능숙하 지 못하시군요. 당신은 너무 솔직해요.

어쩔 수 없군. 길시언이 지금부터 해야 될 말은 왕족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말이겠지. 난 맥주잔을 옆으로 조금 밀면서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운차이. 결국 힘이 있으면 만사 그만이다는 식의 간단한 처세술을 설명하려는 건가요?”

운차이는 딱딱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가문은 강력한 드래곤과 그 드래곤을 조절할 수 있는 라자를 계속해서 배출할 수 있는 한, 결국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한 자신들이 어느 깃발 아래 에 무릎을 꿇는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길시언으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사도를 진창에 팽개치는 말이니까. 길시언 씨. 다음에 언제 나한테 한번 그럴듯하게 대접해야 돼. 운차이는 미소 비슷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똑똑하군. 그들이 계속 강력한 드래곤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자이펀의 지배를 받아도, 헤게모니아의 지배를 받아도 상관없어. 그 나라들도 바이서스의 경우 를 좋은 예로 따르겠지. 바이서스 왕가는 시조의 원수였던 그들에 대한 원한을 고작 4대 만에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운차이는 지금 제4대 국왕 에리네드 전하의 북방 정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리네드 전하는 드래곤 로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토벌하고 북방을 안정시켰지만 할슈 타일 가문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가문은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가문인 것이다. 그래서 에리네드 전하는 할슈타일 가문에 대해 높은 지위를 보장하며 바이서 스의 귀족으로 귀속시켰다. 실리 앞에서는 명분이 사라진다는 좋은 예인 것이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입을 조심하시지………. 그 지하실의 약속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세상의 모든 전사들 중에, 아니, 세상의 모든 전사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으니까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이 여관의 홀 안에서 저런 식의 협박에 흔들 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인 것 같다. 운차이는 냉엄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지금 난 자유롭고, 무기도 가지고 있다. 약속을 잊을 수 있는 것이 당신만의 특권은 아니지. 당신을 베고 도주해 버림으로써 나의 인생을 쾌적하게 만드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길시언은 일어날 뻔했다. 그는 거의 일어나며 테이블을 걷어차면서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 뻔했다. 칼이 그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장담해도 좋아!

“그만들 하시오.”

길시언은 홱 고개를 돌려 칼을 노려보았다. 칼은 깊은 눈으로 길시언의 눈빛을 빨아들였다. 길시언의 호흡소리가 하도 거창해서 여관 주인이 불안한 눈으로 우리들

을 쳐다볼 정도였다. 칼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기운 없이 말했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고, 그 관계에 따라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들 하지요.”

어, 어, 저게 누구의 말이더라? 길시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넬의 대답이군요.”

아, 그래. 저 이야기는 차넬의 말이로군. 제로딘이 차넬에게 유능한 전략가는 어떤 사람이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았을 때 차넬이 대답한 말이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첫째, 그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민첩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상황에 어울리려면 당연히 그 상황을 폭넓게 이해하는 영 리한 머리와 적절한 행동의 타이밍을 맞출 수 있는 민첩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민첩하기는 하지만 영 리하지는 못하다. 악화시키는 것도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민첩하다는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영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호전시키 지는 못한다. 그리고 셋째, 그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민첩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이 경우는 셋 중에서 가장 나쁘다. 상 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최소한 현재 상황에서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는 행동일 경우 행동에 투입된 시간과 물자, 모든 힘의 낭비만 있을 뿐 현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흐음. 이 정도면 나도 쓸 만한 기억력이야. 하하하.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처럼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5분 전까지만 해도 상황과 행동의 관계 중 첫 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소. 그런데 지금은 세 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운차이는 천장을 노려보았고 길시언은 얼굴을 붉히며 칼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 구절을 써먹어야겠군. 누군가 왕족으로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길시언 바이서스는 거기에 속한다. 그러나 누 군가 왕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칼 헬턴트는 거기에 속한다. 오오! 나의 재능은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발달해 있 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던 토론은 칼의 일갈로 완전히 끝나버렸다. 길시언은 바람이나 쐬고 싶다는 형편없는 변명을, 그것도 우물거리듯이 말하고는 홀 밖으로 나갔으며 운차이는 홀 구석의 긴의자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서 말없이 엑셀핸드의 담배 쌈지를 축내기 시작했다.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히 굴뚝이네. 그렇게 계속 피우면 머리나 목 안 아프냐?”

“걱정해 주나?”

“아니. 네가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이건 드워프제야. 질이 좋은 거지.”

운차이가 그런 식으로 버티고 있자 곧 여관 주인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괜히 의자들을 밀었다 당겼다 하기도 하고 천장에 걸린 램프를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곧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손님. 난 이만 들어가 자야겠는데.”

음. 여기는 외진 곳의 외진 여관이라 그런지 여관 주인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군. 지금까지 들러본 여관 중에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 드는 여관 주인은 본 적이 없는데. 운차이는 능글맞은 무표정으로 여관 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오.”

“손님이 여기 계시면 내가 잠자리에 들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 여기서 자오?”

운차이의 이 쌀쌀맞은 대답에 주인장은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에게는 당연히도 이런 무례한 대답에 대해 화를 벌컥 낼 권리, 심지어 이런 식으로 행동하려거 든 내 집에서 나가라! 고 외칠 권리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잊어먹게 만드는 모양이다.

사실 여관 주인장은 흘긋 봐도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쟁과 국가, 그리고 국왕과 귀족의 이름이 함부로 거론되는 우리들의 대 화라든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여정, 그리고 검을 든 전사가 네 명이나 되는데다가 희귀한 마법사도 섞여 있고 거기에 성직자까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드워 프와 날렵해 보이는 처녀에 소녀 등 신비로운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우리들을 보면서 그의 상상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참으로 흥미로운 문제다.

그래서 그는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샌슨이 여관 주인의 편을 들었다.

“일어나라, 자식아. 내일도 오늘만큼 달려야 돼. 올라가서 침대에 쓰러지자구. 이봐, 후치! 너도 밖에 나가서 길시언을 찾아서 데리고 들어와.”

“알았어.”

샌슨에 의해 거칠게 일으켜지면서 화를 바락바락 내는 운차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서, 나는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곧 모래가 섞인 맹렬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팔을 이마까지 들어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샌슨! 이런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

난 홀 안으로 먼지와 모래가 들어가면 주인장이 싫어할 것을 생각해서 재빨리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나의 친절함은 여관 주인에게 다 써버리게 되었다. 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가서 길시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난 문을 등지고 선 채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길시언! 길시언!”

대답이 없었고 그러자 난 앞으로 더 걸어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더 크게 외쳤다.

“이런 바람을 쐬고 있다면 당신은 이상한 호칭으로 불릴지도 몰라요! 아, 그렇지! 사람들이 이런 바람을 쐬고 있는 당신을 보면 틀림없이 무슨 고행을 해야 될 극악 범죄를 저지른 전사로 생각할 거라구요!”

잠시 후 시커먼 어둠과 시끄러운 바람 사이로 길시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깃을 세우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다시피 한 자세로 걸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짓으로만 빨리 들어가자고 했고 우리 두 사람 모두 홀 안으로 들어서자 길시언은 몸을 털면서 말했다.

“그래, 휴.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군.”

정말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었다.

황야 한 가운데 잘못 돋아난 뿔처럼 자리한 칸 아디움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모래와 먼지들에 대하여 가장 완벽한 저항, 즉 무저항을 채택하고 있었다. 들어오면서 보 았던 도시의 외곽 성벽은 꽤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벽은 대책 없는 모래와 바람까지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든 교역 도시 칸 아디움에 우리들의 대인원을 모두 수용할 여관이 남아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 찬성했으며, 따라서 그 여관에 방이 두 개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네리아와 레니가 차지하고 나서 남게 된 하나의 방에는 모두 네 개의 침대가 있었다. 네 개의 침대 위로 아프나이델, 칼, 제레인트, 엑셀핸드를 집어던지고 나 자칼잡이들에게는 침대를 고를 권한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길시언과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는 홀을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침실의 바닥에서 자는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벽난로가 있는 홀 쪽에 더 점수를 주 게 되었다. 주인장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홀에서 자겠다고요?”

“어쩔 수가 없군요. 설마 마구간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주인은 우리를 마구간으로 쫓아내지는 않았고, 그래서 운차이는 심술궂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들은 짐 속에서 모포를 꺼내와서 홀 바닥에 깔고 드러누 웠다.

운차이는 치사스럽게도 눈빛을 번쩍거리더니 홀 구석에 있는 긴의자를 차지했다. 그곳은 홀 옆벽에 있는 벽난로 쪽으로 발, 또는 머리를 두고 드러누울 수 있어서 참 으로 고려해 볼 만한 자리였지만 운차이는 우리들이 그런 고려를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윽.

길시언은 벽난로 바로 앞에 모포를 깔고는 드러누웠다. 물론 그는 운차이와는 달리 품위를 아는지라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러자 그 공간에는 샌슨이 냉큼 끼 어들었다. 곤란해, 곤란해. 난 약간 궁리한 다음 홀에 있던 테이블 두 개를 바싹 붙여서 그 위에 모포를 깔고 드러누웠다. 아무래도 바닥에서 잤다가는 땅에서 올라오 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내일 아침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잠시 후 나는 테이블에서 황급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테이블이 아우성을 질렀기 때문이며, 테이블이 그렇게 아우성을 칠 때마다 나 머지 세 남자들도 불안감에 떨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샌슨을 옆으로 밀어붙인 다음 그 옆에 드러누워 조금이라도 더 벽난로 쪽에 가까워지려 애썼다. 잠시 소란과 투 덜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결국 모두들 자리를 잡고 눕게 되었다. 바닥에 나란히 세 명,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로 벤치 위에 한 명. 네 남자는 그렇게 누워 불 꺼진 캄캄한 홀, 하지만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든 홀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탁탁.

벽난로 속의 장작개비는 이글거리며 잘도 타올랐다. 그리고 바깥의 모래바람 역시 쉼없이 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머리카락이 타버릴 정도로 벽난로에 바싹 붙어 있던 샌슨이 말했다.

“이거 참. 내일 아침엔 삽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는걸.”

“?”

“모래를 퍼내야 걸어갈 거 아냐.”

“그것보다는 낙타를 수입하는 것이 낫겠군. 아, 그렇지. 운차이?”

운차이는 뒤척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벽난로 불빛에 발갛게 물들어 있는데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낙타는 사막을 달리는데 왜 발이 빠지지 않아요? 말보다 덩치가 작아요?”

난 질문을 던지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옆에 누워 있던 샌슨과 길시언이 동시에 운차이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차이는 내 질문에 대한 대 답을 천장으로 날려보냈다.

“낙타가? 훗. 낙타의 어깨 높이는 약 4큐빗 정도 된다.”

“4큐빗? 우와? 말보다 훨씬 크네. 그런데 발이 빠지지 않아요?”

“낙타는 말과는 달리 발가락이 두 개다. 그리고 그 사이가 크게 벌어져 있지. 모래밭에서도 잘 빠지지 않는 발이다.”

“그래요? 흠.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크네. 그렇게 높은데 어떻게 탈 수 있지요? 탈 때마다 무슨 받침대 같은 것을 가져다 놓나요?”

“아니. 낙타는 무릎을 꿇어 그 기수를 태운다. 기수에 대한 완벽한 충종을 표시할 줄 아는 선한 생물이지.”

“무릎을 꿇어요?”

“낙타는 튼튼하면서도 유연한 다리를 가지고 있지. 그는 무릎을 꿇고 차분히 기다린다. 그리하여 기수, 혹은 짐이 완전히 실리고 나면 그는 일어서 타오르는 사막의 아지랑이를 향해 걸어가지.”

“허어. 낙타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떻게 생겼냐고?”

“예. 말은, 음, 어, 날카롭게 생겼잖아요. 바람을 앞지르는 종족답게.”

“낙타는 바람과는 별 상관이 없지. 그는 사막의 동물들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않고 뜯을 풀이 있느냐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 낙타는 시간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않아. 말은 시간에 대해 너무도 근심해서 바람과 같이 빠른 다리를 선사받았지. 그렇지만 낙타는 시간에 대해 아무런 근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혹을 선사받았지.” “혹?”

운차이는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들어 벤치 아래에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던 엑셀핸드의 파이프와 담배 쌈지를 들어올렸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파이프에 불을 붙인 운차이는 어두운 홀 안으로 파르스름한 담배연기를 흘려보냈다. 위이잉…… 윙. 바람소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낙타에겐 혹이 달려 있다. 그 기박한 운명에 어울리는 선물을 받은 모든 생물들 중 낙타만큼 경이로운 선물을 받은 생물도 드물지.”

“혹이 선물이에요? 불편한 것 아닌가요?”

운차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다. 천장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서 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난로의 탁탁거리는 소리와 바깥의 바 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느 유목민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예?”

“넓은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 어떤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시무룩한 상태였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년을 가리켜 ‘Dsifaruum-lethena.’, 그러니까 항상 불 만스러운 소년이라고 불렀지.”

“왜 시무룩했나요?”

“그 소년의 눈에는 사물의 불합리함과 만물의 약점이 극명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 소년은 자신이 실수투성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겨서 그렇게 불만족 스러운 상태였다. 그 소년은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지.”

“하하, 그래요?”

“그래. 그래서 소년의 Arra-bi-fanumosa, 그러니까 너희 말로는 추장 정도 될까? 아버지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어쨌든 추장은 소년이 항상 시무룩한 것을 보 다 못해 어느 날 소년을 사막으로 보내었지.”

“사막으로요?”

“그렇지. 대사막, 사막은 넓고, 볼품 없고, 황량하지만, 묻는 자에게 대답을 해주거든. 그리고 현명한 추장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 소년은 추장의 조언에도 명백한 모 순을 발견했지만 잠자코 그 조언에 따랐다. 그래서 소년은 낙타젖이 든 주머니 하나를 든 채 사막으로 나아갔지.”

잠시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눈을 떠보니 운차이는 파이프를 빨고 있었다. 다시 담배 연기로 홀의 모습을 어지럽혀 놓은 다음 운차이는 말했다.

“소년은 해가 뜰 때 출발했지. 그리고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사막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어. 그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야. 가장 뜨거울 때의 사막은 어 떤 생물도 견디지 못하거든. 게다가 길을 잃을 가능성도 엄청나고. 햇빛이 뜨겁게 내려쪼일 때의 사막은 움직이지.”

“움직인다고요?”

“꿈틀댄다…………., 춤을 춘다. 음. 너희들의 말에는 사막의 춤을 설명할 말이 없군. 어쨌든 그런 상태야. 사막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거든. 거기엔 모래밖에 없지만.” 춤을 춘다라. 모래들이? 난 잠시 상념에 잠겨 바람에 따라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모래벌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 공기의 움직임, 그리고 바람 이 불 때마다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래들. 그리고 그때마다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선인장 부스러기, 전갈, 검은 곤충들과 붉은 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 상 념들 사이로 운차이의 말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듯 들려왔다.

“그러나 소년은 걸어갔어. 한참을 걸어갔지.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에 빗발 같은 땀을 흘리다가 소년은 낙타젖을 꺼내어 마시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소년은 Katzhita, 에, 너희 말로는 전갈이지? 전갈을 만났지. 소년은 더위를 탄데다가 지쳤지만 전갈의 모습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어.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은 채 소년은 말했지.

‘이봐, 저걸 좀 보란 말이야. 우습지도 않잖아. 전갈의 무기는 그 무서운 독침이지. 그런데 왜 그게 뒤에 달려 있느냔 말이야. 전갈이 뒤로 걷는 생물이기라도 한가? 전갈도 앞으로 걸어. 그러니까 당연히 그 무기인 독침은 앞에 달려 있어야지. 뒤에 달려 있다 보니까 꼬리를 꺾다 못해 허리까지 꺾으면서 공격해야 되잖아.’

소년은 불만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

길시언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왼팔로 몸을 기댄 채 운차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전갈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지.

‘멍청한 소년아. 독침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떨어져버리면 난 무력해진다. 그런데 그 독침을 마치 선물 보따리라도 되는 양 앞에 내밀고 다녀야 된단 말 인가? 누구든지 뜯어갈 수 있도록?”

그러자 불만스러운 소년은 말했어.

‘그건 궤변이다. 독침은 쓰기 위해 달려 있지, 보호하라고 달려 있지 않단 말이야.’

‘글쎄. 만일 독침을 써야 할 지경에 빠진다면, 그게 앞에 달려 있는가 뒤에 달려 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난 그런 지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겠어.’ 소년은 전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갈은 그냥 걸어가 버렸고 소년도 자신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둘은 그냥 헤어졌지.”

“말 되는 거 같은데. 어. 하긴 언제든 안전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다닐 수야 없지. 손이 비어 있어야 식사라도 할 테니까.” 샌슨이 맞장구를 치자 운차이는 빙긋 웃었다. 위이이잉………….. 윙윙.

“소년은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에 받으며 걸어갔지. 잠시 후 소년은 멈춰 서서 목을 축이기 위해 주머니를 들어올렸지. 소년은 낙타젖을 마시다가 Pinnack-voe, 그 러니까………… 방울뱀을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방울뱀은 꼬리를 촤르르 흔들면서 두 마리의 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쥐들의 등 뒤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지. 쥐들은 뭔가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꼬리를 흔들어?”

“방울뱀은 꼬리를 흔들어 소리를 낼 수 있지. 우리는 그것을 죽음의 음악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방울뱀의 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지. 그 광 경을 본 소년은 또 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소년은 혼잣말로 말했어.

‘이건 정말 지독한 고문이야! 방울뱀은 고기를 먹고 산단 말이야. 그래서 사냥을 해야 돼. 그런데 그런 방울뱀에게 소리 나는 꼬리를 달아주다니! 저건 평생을 따라다 니는 족쇄나 다름없어!’

소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어. 갑자기 방울뱀이 휙! 날았지. 그리고 쥐들 중 작은 놈 하나를 덥석 물었어. 작은 놈이 잡힌 덕분에 큰 놈은 달아날 수 있었지. 소년은 어이가 없었어.”

“어이가 없다라……….”

“달아난 큰 쥐는 멀리서 애처로운 눈으로 방울뱀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지. 소년은 기가 차서 말했어.

‘이봐,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어?”

‘물론 들었지! 여기 달려 있는 귀가 보이지 않아?’

그러자 소년은 벌컥 화를 내면서 말했어.

‘그런데 왜 달아나지 않았던 거야? 바로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왔잖아?”

그러자 쥐는 슬픈 가운데서도 어리석은 소년을 타이르듯이 점잖게 말했지.

‘방울 소리가 어쨌다는 거야? 방울 소리가 우리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우리의 문제는 방울뱀의 이빨에 있지 그 꼬리에 있지 않아..”

샌슨은 배를 잡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점잖고도 냉랭하게 저 멍청한 말을 했고 그런 식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말 웃겼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근 엄하게 말했다.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때 방울뱀은 식사를 끝내었지. 그러자 소년과 이야기하던 쥐는 바삐 달아났어.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년은 투 덜거렸지.

‘우습지도 않아. 멍청한 쥐 같으니. 방울 소리가 들리는 곳에 방울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잖아. 도대체 꼬리와 몸이 따로 다니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소년은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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