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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24화


1624화.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4)

윤종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수많은 격전과 위기를 넘어왔지만 이만큼이나 긴장되는 상황은 그리 많이 겪지 못했다. 숨통을 죄는 압박감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며 나가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곁에 있는 조걸의 낯빛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상 둔해서 까불거리기만 하던 저놈까지 긴장한다는 건 지금 직면한 이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겠지.

살 떨리는 정적. 그리고 손끝이 싸늘해질 만큼의 긴장.

그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장인이 정성을 다해 옥을 섬세히 깎고 빚은 듯한 얼굴이 지금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은…… 그저, 장문인의 입장이실 뿐…… 그게 모든 종남인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띄엄띄엄 가까스로 말을 늘어놓던 그는 이내 입을 다물고 이를 악물었다. 말을 하면서도 이 말을 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듯이.

고금을 막론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내세울 논리가 무너지고 나면 결국 남는 건 강짜뿐이란 사실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 해서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헛된 생각을 품는다면 현실을 처절히 알게 해 줄 것이다!”

언뜻 살기까지 섞인 일갈이었다. 하지만 건너편에 앉은, 그와 똑 닮은 이는 외려 여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래. 비급 도둑놈이.”

“끄윽…….”

꽉 죄어오는 통증을 느끼며 진금룡은 제 심장 어림을 움켜잡았다. 힘줄이 불거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반면 만면에 여유가 한껏 넘치는 백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뭐…….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뭐?”

진금룡은 순간 제 두 귀를 의심하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게, 대체 어떻게 또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형님’이란 말까지 구태여 꺼낸단 말인가?

그리고 과연 백천은 백천이었다.

“약하고 실력이 부족한데 뭐 어쩌겠습니까? 정정당당히 화산을 이길 방법이 없었을 테니 심정은 이해합니다. 오죽하…….”

“사형! 검은 뽑지 마십시오! 여기서 검 뽑으면 다 끝장입니다!”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려는 진금룡을 이송백이 온몸을 던져 붙잡고 늘어지며 막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핏기가 모두 가셔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으…….”

눈에 핏발을 세운 진금룡은 금방이라도 백천을 잡아먹을 듯했다. 그러나 백천의 여유는 점점 더 기세를 더해 갔다.

“아이고, 그러다 찌르시겠습니다? 하기야…… 뭐 그럴 수 있는 문파시니까.”

“사, 사형! 검은 뽑으면 안 된다지 않습니까!”

이 꼴을 지켜보던 윤종이 결국 기나긴 숨을 내쉬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게 맞냐, 걸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긴 합니다.”

백천이 낄낄 웃어 대는 모습 위로 청명이 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조걸은 그 모습을 보다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치만 사숙의 마음도 좀……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하나?”

……그것만은 윤종도 공감했다. 콧대 높던 종남 놈들이 스스로 머리를 숙였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검을 잡고 한참 씩씩대던 진금룡은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하나 그 와중에 저 밉살맞은(하지만 그를 똑 닮은) 얼굴을 보니 또다시 속에서 무언가 울컥 솟구쳤다.

“여하튼…….”

겨우 진정한 진금룡이 별안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더니 정색하며 백천을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백천이 웃음기를 거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이 죄는 모든 종남의 제자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죄임을 알고 있소. 내가 종남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럴 것 없습니다. 진 소협.”

백천이 단호한 목소리로 진금룡의 말을 끊었다.

“진 소협께서 종남을 대표하실 수 없듯이, 저 역시 화산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장문대리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지요. 애초에 귀문의 장문인과 자문의 태상장문께서 끝낸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그리 옳지 않다 여겨집니다.”

담담하고도 힘이 실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면, 태상장문인께서 말씀하셨듯 세상에 갚으시면 됩니다.”

진금룡과 백천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지만, 진금룡의 두 눈에 복잡한 감회가 스쳐 갔다.

“……감사합니다, 백천 도장.”

“별말씀을.”

이런 식으로 백천과 마주하는 날을 상상한 적이 있었던가? 진금룡은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백천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저렇게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윗대에서 원만하게 합의를 끝냈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상대의 죄를 추궁하려 들었을 것이다. 다시는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게. 아니, 어쩌면 웃어른들의 합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천은 아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를 배려해 주고 있다. 물론 진금룡에게는 그 행동이 더 큰 부담이나, 그 점을 노린 것이든 노리지 않은 것이든 진금룡이 할 수 없는 대처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앞에 앉아 있는 동생이……. 아니, 화산의 백천이 이제는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 버렸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건 화산의 대제자 백천으로서의 입장이고.”

“……응?”

조금 당황한 진금룡이 살짝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어느새 백천은 등을 한껏 뒤로 기댄 채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명이 보았다면 ‘또 저 지랄이네, 저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일갈하고도 남았을 얼굴로.

“인간 진동룡으로서는 사과를 좀 받아야겠는데?”

“…….”

“뭐? 화산 따위? 화산 같은 곳? 그딴 망한 문파?”

“…….”

“아이고오. 종남은 아주 대애단하신 문파인가 보네. 그래서 그 망한 문파의 비급을 그리 살뜰히 훔쳐 가셨나? 이야, 내가 아는 대단함이라는 단어와 그쪽이 쓰는 대단함이라는 단어가 뜻이 다른 모양이네. 하긴 너무 대단해서 단어도 막 만들어 쓰나 봐, 엉? 그 대단한 문파의 장.문.제.자라 아주 자랑스러우시…….”

쾅!

거칠게 문을 닫고 나온 진금룡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곳에 조금만 더 있었다면 끝내 검을 뽑고 말았을 것이다.

“저 망할……!”

대체 저따위로 재수 없는 표정과 싹퉁 머리 없는 말투는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적어도 집에 있을 때는 정도를 지키는 인간이었는데.

끓어오르는 속을 억지로 달래려 애쓰는 그때, 문이 도로 슬며시 열리더니 이송백이 따라 나왔다. 그 모습을 흘끗 돌아본 진금룡이 미련 없이 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 같이 가시죠, 사형.”

이송백은 발걸음을 맞추며 재빨리 따라붙었다. 숙소까지 걷는 동안 둘 사이에는 다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사형. 이번 일은…….”

“알고 있다.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것을.”

“…….”

“알았으니 더 말하지 마라.”

이송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뭐가?”

“백천 도장 말입니다.”

진금룡이 슬쩍 이송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송백이 조곤조곤 말했다.

“사실 백천 도장이 정색하며 따져 물었다면 앞으로 화산과 종남의 관계가 말 그대로 얼음장처럼 변해 버렸을 터인데, 그래도 저리 나서서 장난스레 대해 주니 말이라도 붙여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송백이라고 이번 일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어찌 모를까.

타문의 비급을 탐낸다는 건, 서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전쟁을 치러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이리 넘기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사제들도 지금 화산의 제자들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천 도장이…….”

“그래. 그놈도 알고 하는 짓이겠지.”

“……그렇겠죠?”

백천의 영향력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문파 내의 영향력으로만 따지자면 진금룡이 종남에 끼치는 영향력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이가 저리 분위기를 풀고 나오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서로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백천 역시 그걸 노리고 진금룡과 자리를 함께하며 그 모습을 보인 것이겠지.

“그래서 마음의 짐은 조금 덜었습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진금룡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이송백을 뚫어지게 보았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그리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형?”

“우리가 뭘 했는데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거냐? 무얼 했다고? 고작 그 앞에서 고개 한번 숙였다고?”

순간 아차 한 이송백의 얼굴이 굳었다.

“입장을 바꾸어 보아라. 너는 종남이 망하길 기원하며 종남이 위기에 처한 틈을 타 종남의 비급을 탈취한 이들이 고개 잠깐 숙인다고 다 이해해 줄 수 있느냐?”

“그건…….”

진금룡이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용서라는 건 최소한 그에 합당한 보상과 대가를 치렀을 때나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조건 없이 받는 용서는 그저 자비를 구한 것일 뿐이지. 너는 화산이 종남을 가엾게 여겨 줘서 감사하다고 지껄인 것이다.”

이송백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쏘아붙이던 진금룡은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꾸 속이 답답해서였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제가 잘 안 되었다. 잘못을 한 건 이송백이 아닐진대 괜한 그를 쏘아붙인 것만 해도 그렇다.

이송백이 조심히 물었다.

“그럼…… 저희가 어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갚아야지.”

진금룡이 다시 그에게 시선을 맞추며 단호히 말했다.

“저런 용서를 받았으니 이젠 떳떳하다고 여길 게 아니라, 우리도 저들도 이제는 충분하다 싶을 때까지 갚고 또 갚아야지. 당당함이라는 건 그렇게 얻는 것이다. 타인의 용인으로 얻는 게 아니라.”

“……도의를 저버린 잘못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에서 다 갚지 못한다면 다음 대에,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그다음 대에 걸쳐 갚으면 된다. 힘든 일이겠지만, 적어도 종남이라는 문파가 떳떳하지 못한 문파가 되는 것보다는 천 배 낫다.”

이송백도 이에 동의하여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에게도, 사질들에게도 똑바로 전해라. 경거망동하는 놈들이 있으면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러겠습니다, 사형.”

잠시 이송백을 바라보던 진금룡이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그는 자신이 이송백에게 화를 쏟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화가 치솟았던 건, 그와 같은 생각을 진금룡도 똑같이 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만약 이 일이 지금 터지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자신이 장문인이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때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그 대가를 감당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진금룡뿐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도 이 화약고를 건드릴 용기는 선뜻 나지 않을 테다.

그러니 진금룡은 그저 속에다 어찌할 수 없는 죄를 묻어 둔 채 몰래 썩어 갔을 것이다. 누구든……. 그래, 누구라 해도 말이다.

그때, 딱 한 사람을 떠올린 진금룡이 피식 웃었다.

‘녀석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 고개를 숙였겠지.’

저와 똑 닮은 동생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좇는 처지인가?’

쓴웃음이 어렸지만, 기분만큼은 선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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