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25화
1625화.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5)
“이렇게 끝내도 되는 겁니까?”
“뭘?”
“종남 말입니다, 종남!”
조걸이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백천은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태상장문인께서 문제 삼지 않기로 하셨잖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당한 게 있는데!”
조걸은 생각할수록 영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백천이 그런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런데 좀 새삼스럽기는 하네.”
“예?”
백천의 표정이 어째 뚱했다.
“몰랐냐? 전혀?”
“…….”
“우리가 매화검법을 배웠고, 두 눈으로 저놈들의 설화 어쩌고 하는 검법을 봤는데도?”
“기, 기억이 잘……. 그 순서도 반대 아니었나? 아닌가? 아니,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제가 망할 종남 놈들 검법을 일일이 기억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열렬한 항변에도 백천의 시선이 풀리질 않자 조걸은 이번엔 획 윤종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사형! 사형은 아셨습니까?”
“짐작은 했지.”
“이거 보십쇼! 짐작은……. 예? 짐작했다고요?”
“……바보가 아니면 그렇겠지.”
조걸은 허탈한 얼굴로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그리고 멍하니 ‘그래……. 또 나만 등신 새끼지, 나만.’하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윤종은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백천이 물었다.
“짐작했더냐?”
“매화검법을 배우고부터 간간이 그 검술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유사했으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마 저런 방식으로 그 요체를 가져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화산에서 나간 이들을 받아들여 실전된 검술을 복원한 정도겠거니 했지요.”
“그렇지…….”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설마 종남이 이런 식으로 화산의 검법을 훔쳐 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저 자존심 높고 고고한 문파가 화산의 무학을 탐내다니, 어디 쉬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소소가 알면 종남산에 있는 개울이란 개울에는 죄 독을 타 버릴 거라고 난리를 칠 겁니다.”
“걔는 이제 당가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런다냐.”
“당가가 아니니까 그러지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 하는 게, 당가도 안 그럽니다. 그냥 소소가 과격한 겁니다.”
“……그도 맞는 말이구나.”
양손에 바늘을 낀 채 거품을 물 당소소를 생각하니 벌써 골치가 아파 오는 백천이었다.
그 순간, 조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그럼 청명이 놈은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겠지. 정황상 어젯밤에 청명이 놈과 종리 장문인께서 밀담을 나눈 듯한데, 그때 이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을까?”
“세상에……. 화산의 무학이 탈취당한 걸 알고도 청명이가 종남 놈들을 살려 뒀다고요?”
“……나도 지금 그걸 믿기 힘들다.”
그들이 아는 청명이라면 종남까지 일직선으로 숨도 안 쉬고 달려가 조사전에 냅다 불을 싸질러 버리고도 남았다. 아니, 고작 그 정도로 끝나면 ‘드디어 청명이 놈이 도를 깨우쳤구나’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도 그간 꾹 참아 왔다? 대체 뭐가 그 개망나니를 자제하게 만든 걸까.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그러게나 말이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 자리에서 검을 날리지 않은 걸 보면 오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겠죠? 끄응…….”
조걸도 백천도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직 윤종만이 복잡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진짜 이렇게 넘어가실 겁니까?”
“으음.”
백천은 살짝 앓는 소리를 흘리다 입을 뗐다.
“솔직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게 사실이지만…… 큰일을 앞두고 있으니 일단은 봉합해야겠지. 후에 다시 논의하는 일이 있더라도.”
“봉합은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저놈들이 입 한번 잘못 놀리면 말 그대로 파탄이 날 텐데.”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해 봐야지. 너도 일단은 사제들에게 말을 잘 전해 두거라. 괜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조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사제들이야 사숙께서 그리 정하셨다고 하면 따라가기는 하겠지요. 겉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뒤에서는 결국 사숙이 종남 출신이고 진금룡과 형제라서 그냥 넘어가 준다는 말이 나올…….”
“그 조동아리!”
“아, 아니! 제가 그런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뭔 말만 하면 저보고 그러십니까?”
“시끄럽다!”
윤종의 호통에 조걸이 입을 삐쭉거렸다. 그래도 무섭긴 한지 입을 다물어 주기는 한다. 반면 정작 당사자인 백천은 담담했다.
“……감수해야겠지. 나만 떳떳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속이 타 봐야 지금껏 이 일을 혼자 알며 속에 품고 앓아 온 청명이 놈만 하겠느냐?”
“으음.”
윤종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백천이 두 사람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너희는 최대한 문제가 벌어지지 않도록 사제들을 단속하거라. 백자 배는 내가 백상이 녀석에게 단단히 일러 두겠다.”
“예, 사숙.”
무덤덤하게 답한 윤종과 달리, 조걸은 여전히 불만이 있어 보였다. 표정에서 그 속내를 읽어 낸 백천이 한숨을 쉬었다.
“청명이가 일을 이런 식으로 푼 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죠.”
“그 성질 더러운 놈이 제 성격을 내려놓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답시고 벌인 일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자꾸나.”
“끄으응.”
조걸이 갑갑함을 눌러 참는 것처럼 희미하게 앓았다.
“하기야…… 속이 터져도 나보다 그놈이 더 터지겠죠.”
“……그래, 걸아.”
“알겠습니다. 사숙의 입장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제들도 청명이가 그리하기로 정했다면 다들 이해할 겁니다. 놈이야말로 종남을 갈아 마시지 못해 한이 맺힌 인간이라는 걸 다 아는데, 그런 놈이 한 선택에 누가 입을 대겠습니까?”
“그래. 잘 말해 주거라. 아무래도 나는…….”
“예. 입장상 완전히 나서기가 좀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정작 화산의 제자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지만, 백천 스스로는 종남과 관련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다소 찝찝한 면이 있다.
백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지금 가장 머리가 아플 건 청명이 놈이겠지.”
그 말에는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들은 감정만 논하면 그만이지만, 청명이는 이제부터 자신이 벌인 일을 구체화해야 하니까.
“잘될까요?”
“글쎄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극적으로 상황이 풀리기는 했지만, 청명이가 가려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걸.
“마냥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를 바라야겠지.”
“……만약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이면요?”
“그럼 뭐…….”
백천이 상쾌하게 웃었다.
“망하기밖에 더 하겠느냐?”
불길한 정적이 흘렀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윤종과 조걸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 * *
제갈자인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녹림의 제왕이자 천우맹의 군사, 그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로 불리는 이의 얼굴은 이 시각에도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생각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으시다?”
“응.”
“미리 세워 둔 계획이란 게 정말 저언혀 없으시다?”
“응.”
“그런데 그냥 대책 없이 이래야 한다고 질렀다?”
“그렇지.”
임소병이 방긋 웃었다.
“그게 말이 되냐, 이 미친 작자야!”
“왜 소리를 질러! 이 사파 놈이!”
“이게 사파고 뭐고를 따질 일입니까?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일을 저지른 겁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아아아아아악!”
임소병이 위장까지 토해 낼 기세로 괴성을 질렀다. 품위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제갈자인도 저 사파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뭐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대는 거야? 대충 섞어서 사람 수대로 나누면 그만이잖아.”
청명의 말에 임소병은 아예 두피에 피가 날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관이 비뚤어지고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헝클어졌다.
“내가 미쳤지……. 그냥 산적 노릇이나 할걸.”
“그럼 뒈졌지.”
“……죽는 게 낫지.”
“진짜? 그건 지금도 도와줄 수 있는데.”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진지한 대책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개는 잡아 놨을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대책이 없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끄응. 고려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아니, 대충 나누라니까?”
“연맹에 대충은 없습니다! 대충한 것처럼은 있어도!”
“……누가 보면 네가 만든 맹인 줄 알겠다? 언제부터 그렇게 소속감이 강하셨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격렬하게 아웅다웅하는 산적과 말코를 지켜보던 제갈자인은 참다못해 어색한 얼굴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날이 다 새도록 말 한마디 못 할 테니.
“그런데 저기…….”
“네.”
“저는 왜 여기에?”
“아.”
드디어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낸 제갈자인을 보며 청명이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좀 나눠 보니까 머리를 잘 쓰시는 것 같더라고요.”
“천하의 제갈세가 가주에게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이 천자문도 다 못 뗀 무식쟁이가!”
“누가 그래? 어느 새끼가 그딴 말을 해?”
“저번에 글 쓰는 거 보니까 자획 다 틀리더구만!”
“증거 있어? 어? 증거 있냐고!”
또다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다. 제갈자인은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아직 씩씩거리기 바쁜 모용위경의 투정을 들어 주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 청명이 본론을 꺼냈다.
“아, 뭐 딱히 대단한 건 아니고요.”
“예.”
“편제를 새로 짜야 하는데, 가주님이 잘 짜실 것 같아서요.”
“…….”
“그렇죠?”
제갈자인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저더러 맹의 편제를 다시 짜는 일에 참여하라는 겁니까?”
“아니죠.”
제갈자인의 얼굴에 ‘그러면 그렇지.’하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확실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참여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하시라고요. 주도적으로.”
“……예?”
“아무리 망쳐도 산적 새끼가 짜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래도 배우신 분인데.”
임소병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저도 배운 사람입니다. 이래 봬도 제가 거인(擧人: 향시 합격자) 출신…….”
“아오, 진짜 시끄러워서!”
청명이 던진 신발이 임소병의 얼굴에 적중했다. 뒤로 쿵 나자빠진 임소병에게 욕지거리를 한 청명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제갈자인을 보았다.
“해 주실 수 있죠?”
제갈자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도, 도장. 저는 그…… 이제 막 맹에 들어온 제갈세가의 가주입니다. 아, 아니, 이제 가주 직위의 권한도 내려놓았으니 그저 갓 입맹한 맹도에 지나지 않지요.”
“네, 뭐 그렇죠?”
“그런데 제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긴다는 겁니까? 심지어 얼마 전까지 저는 천우맹과 반목해 왔습니다. 아니,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너와 머리채를 붙들고 서로 욕설을 주고받던 사이가 아니었느냐? 이건 차마 잇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청명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상관이 있나요?”
“……예?”
“오히려 좋은 거죠. 사람은 원래 내부에서는 모든 걸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거든요.”
“그…….”
“해 주실 수 있죠?”
다시 나온 질문에 제갈자인은 입을 다물었다. 말은 ‘해 주실 수 있겠냐?’였지만 눈빛과 기세는 달리 말하고 있었다.
‘죽어도 네가 해야 한다.’
제갈자인은 황당함을 이기지 못하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적임이라는 겁니까?”
“네.”
“적임이라면 출신이고 성분이고, 하물며 어떤 관계였는지도 상관이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소꿉장난하자고 모인 것도 아닌데.”
그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세력과 군주들이 그 당연한 걸 하지 못해 무너졌음을 제갈자인은 잘 알고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가 아까와 달리 자세를 바로 했다.
“적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해야 할 일임은 알겠습니다. 이 제갈 모, 최선을 다해 총사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보며 청명이 살짝 움찔했다.
“아니. 하하, 그렇게까지 진지하실 필요는…….”
“우선 천우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의 인적도와 섬서로 넘어온 중소문파의 인명부, 그리고 천우맹에 비치된 재물과 군량에 대한 서류가 필요합니다. 아, 각 문파에 정통한 이들을 한 명씩 차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문파에 소속된 이들의 무공 수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야 하고, 더불어 아직 섬서에 합류하지 못한 문파들에 대한 대략적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개방을 통하는 편이 나은데, 역시 개방에서도 실무진을 파견해 달라고 하는 쪽이 좋겠군요. 이게 일단 일차적으로 급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청명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잠시도 멈추질 않는다. 청명의 눈이 이리저리 뒤룩뒤룩 구르기 시작했다.
“총사? 듣고 계십니까?”
“그, 그럼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 아닙니까. 아, 그리고 가장 먼저 해 주셔야 할 일은…….”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일을 좀 편하게 해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일이 배로……. 아니, 열 배로 늘어나게 생겼다. 썩을…….
이렇게 제갈자인이 합류하며 천우맹의 편제 개편은 말 그대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를 합류시킨 이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