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26화
1626화. 좋은 게 좋은 거잖습니까? (1)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고?”
“편제가 바뀐다지 않습니까.”
“편제라니? 천우맹에 편제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
“그래서 이번에 그걸 바꾼다고 합니다. 맹의 체제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다나.”
“뭘 어떻게?”
“당을 여러 개 신설해서 각 문파의 문도들을 소속 문파와 관계없이 뒤섞어 배치할 예정이랍니다.”
“뭐? 정말?”
“그렇다니까요?”
천우맹의 체제가 뒤바뀔 거란 소식은 안 그래도 북적대던 화음을 말 그대로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딱히 넓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다 보니 구석구석 말이 퍼져 나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굳이 발 없이도 천 리를 가는 말이나, 바람보다 빠른 소문의 도움이 없어도 말이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그러게. 저 사파 놈들이 당장 내일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팔자 늘어지게 장부 놀음이나 하고 있겠다는 소리 아냐?”
“그게 대체 지금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 그 시간에 검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열 배는 더 도움되겠다.”
누군가는 부정적이었고.
“생각해 보면 필요한 일일지도.”
“따지고 보면 사패련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저 지리멸렬하던 놈들이 패군 아래 고하 없이 정렬한 뒤로 강해진 거지요. 그게 아니었으면 저들이 무슨 수로 소림과 구파를 이겼겠습니까? 저는 온당한 일이라 봅니다.”
“어찌 되었든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라면 뭐든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긍정적이었다.
“……하면 좋아지는 건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효용이 있는 일일지.”
“효용이 있다고 치더라도 새로 만든 편제에 적응하는 데도 문제가 있을 텐데. 과연 잘 돌아갈지가…….”
“윗분들이 다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막연히 불안해할 뿐이었다.
성공과 실패를 점치고 논하는 것도 사실 예측이 가능할 때 일이다. 지난 수십 년간 강호는 서로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눠 왔다. 그 경계가 어찌나 뚜렷했던지, 서로 다른 지역의 문파가 가까이 왕래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런 와중에 낯선 이들과 뒤섞여 등을 맞댄다? 이 과감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힘든 건 당연지사였다.
그중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게 뭔 헛짓이야!”
타앙!
단단한 주먹이 강하게 다탁을 내리쳤다.
“나는 평생을 내 사형제들과 손발을 맞춰 왔는데, 이제 와 갑자기 난생처음 보는 놈들과 호흡을 맞추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일단은 진정하고…….”
“심지어 사파와 새외마저 구분하지 않고 뒤섞는다고? 그럼 나더러 산적 놈들이나 저 새외인들에게 등을 맡기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놈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이 듣겠어! 진정 좀 해!”
“이게 어디 진정할 일이냐고!”
씩씩대던 사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절대 인정 못 해. 이건 헛짓거리야. 저 사패련 놈들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거라고! 대체 윗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야?”
“……그렇게 불만이면 가서 직접 말해 보든지.”
“뭐?”
“이번 일을 추진한 사람에게 따져 보면 되잖으냐고.”
“이번 일을 추진한 사람이 누군데!”
“화산검협.”
“……누구?”
“화산검협이라고. 천우맹 총사.”
“…….”
“왜? 가서 따지시려고?”
씩씩대던 사내가 다소 어색하게 딴청을 피우다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방안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는 헛짓이라고 게거품을 물어 놓고는?”
“내,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참 못났다.”
노상 의견이 갈리는 중에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더 크게 터지기 마련이나, 적어도 화음 내에서는 영 기를 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간 청명이 쌓아 둔 위아래 없이 지랄 맞은 성정에 대한 명성이 모든 불만을 강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괜히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눈에 불을 켠 화산의 검귀 놈이 제 숙소 문을 박차고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무슨 배짱으로 입을 떼겠는가?
사람의 목숨은 하나뿐인 것을.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군사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쨌든 저기서 편제에 대한 기본적인 사안이라도 발표해 줘야 제대로 된 의견 교환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며칠이나 걸릴까?”
“열흘은 족히 걸릴걸요?”
“열흘이나?”
“아니, 사형.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많은 문파 사람들을 일일이 나눠야 하는 일이고, 각 당의 힘과 적당히 구색을 갖춰 줄 자리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인데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열흘이나 잡아먹다니.”
“열흘 안에 끝나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자칫하면 보름은 갈 겁니다.”
“끄응.”
모두의 마음에 불안이 들어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되레 그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천우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늘 그러하듯,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 * *
“여깄습니다.”
“오! 그럼 끝난 거죠?”
“……예.”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오래? 제갈자인은 순간 제 입술 새로 터져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다른 이들이 했으면 못해도 백에 가까운 인원이 족히 보름을 달려들었어야 할 만한 업무량이었다. 그걸 고작 이틀 만에 끝낸 사람에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니! 저 요망한 조동아리를 그냥…….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체면은 세웠네. 고생하셨어요.”
제갈자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이번엔 임소병을 힐난하듯 노려보았다.
“저 무능한 새끼에 비하면 진짜 고생하셨지.”
“무능이라니!”
임소병이 불을 뿜었다.
“말조심하십시오, 무능이라니! 다른 말은 다 참아도 그 말은 못 참습니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제갈씨가 나서 주니까 일이 빨리 끝나잖아. 이래서 핏줄은 못 속인다고, 어디 산적질이나 하기 딱 좋은 인간이 머리를 쓴답시고 나서! 근본이 다르지, 근본이!”
“그게 어디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겁니까? 제가 일할 때 고려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는 압니까? 뭐 꼬투리 잡을 거 하나만 있어도 저 산적 놈이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짓거리를 한다고 거품 물며 달려올 놈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임소병이 격하게 제갈자인을 향해 삿대질해 댔다.
“저도 성이 제갈이나 사마 같은 거였으면 이 고생 안 한단 말입니다! 이건 제가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럼 제갈이나 사마로 태어나지 그랬냐?”
“끄, 끄으으…….”
“지, 진정 좀 하시고.”
제갈자인은 식은땀을 닦아 가며 임소병의 발작을 힘겹게 만류했다. 왜 때리는 청명을 두고 얻어맞는 임소병을 말리는가 하면, 청명은 어차피 말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한참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임소병의 진노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댁은?”
“내가 왜?”
“댁은 뭔 도움이나 됐습니까? 뭐? 시간 낭비 말고 제비뽑기로 뽑자고? 그게 어디 할 소립니까?”
“그랬으면 빨리 끝났을 거 아냐?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제비뽑기보다 빠르고 공평한 방법이 어디 있어?”
“공평이야 하겠지. 다들 공평하게 지옥으로 가서 그렇지!”
“그래도 공평하긴 하잖아.”
“어?”
제갈자인은 순간 저도 모르게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그보다 공평한 결과는 없는 건 맞지.
임소병이 ‘제발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주십시오!’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제갈자인은 냉정하게 외면했다.
말 한마디 잘못 보탰다간 괜히 속만 썩는다. 이곳에선 제정신을 더 많이 잡고 있는 사람이 손해라는 걸 이미 질릴 정도로 경험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충 얼개는 잡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맹주님의 재가가 필요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금방 받아 올게요.”
청명이 완성된 다섯 권의 명부를 안아 들었다. 제갈자인이 황급히 만류했다.
“자, 잠시만. 제발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좀…….”
“아, 또 뭐요? 바빠 죽겠는데.”
“다른 건 저희가 정할 수 있지만, 각 당의 당주만은 저희가 고를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협의를 거친 후에 정해 주셔야…….”
그 말을 들은 청명이 별거 아니라는 듯 씨익 웃었다.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뭘 협의까지. 그건 제가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생각’해 둔 바가 있다고요? 정……말입니까?”
진짜 생각이란 걸 해 본 건 맞느냐는, 무척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의를 따져 가며 물을 정신 따윈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근묵자흑라는 말이 틀리질 않아, 청명을 가까이한 인간은 다들 청명처럼 되고 만다.
“별걱정을 다 하신다. 진짜라니까.”
히죽히죽 웃은 청명이 명부를 내려놓더니 세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각 명부의 첫 장을 펼쳐 비어 있는 당주란에 몇 개의 이름을 일필휘지로 써 넣었다.
“어…….”
“어어?”
“도, 도장, 잠시만! 자, 잠깐만, 이건 진짜……!”
“됐다! 그럼 가서 허락받고 올게요.”
“자, 잠시! 아니, 잠깐만! 이 미친 인간아!”
임소병의 안타까운 절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양손으로 명부를 끌어안은 청명은 문을 열어젖히고 바람처럼 달려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멍하니 허공만 움켜쥐었던 손을 힘없이 내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사파와 정파라는 구분도, 명문과 천것이라는 경계도 무의미했다.
“괜……찮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시각, 현종의 얼굴에선 내내 깊은 근심이 가실 줄 몰랐다.
지금쯤 천우맹 최고의 두뇌들이 새로운 편제를 짜기 위해 고심 중일 터. 그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또 그렇기에 애가 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종에겐 그 일을 도울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할 뿐.
‘분명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진대…….’
벌컥!
“이거 도장 찍어 주십시오, 맹주님!”
푸웃!
현종이 마시던 차를 허공에 직선으로 뿜어냈다.
“처, 청명아!”
“편제 왔습니다! 편제!”
“아, 아니……. 벌써?”
“네.”
뭔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었나? 학당에 새로 들어온 애들 스승 정하는 일도 이보다는 오래 걸리겠다.
“여기요! 보시고 도장 찍어 주시면 돼요.”
“아, 아니 이게 이리 급하게 해서 될 일이…….”
“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시간을 끌어요. 후딱후딱 해 버리면 그만이지.”
현종은 반쯤 넋이 빠진 얼굴로 청명이 들이민 인명부를 얼결에 받아 들었다.
‘이래도 되나?’
이게 원래 이렇게 후루룩 정하는 거였나? 해 본 적이 있어야 옳은지 그른지를…….
영혼 빠진 눈으로 인명부를 넘기던 현종이 순간 움찔했다.
‘아니. 잠깐.’
뭘 잘못 봤나?
현종은 대충 넘겼던 인명부를 다시 앞으로 되넘겼다. 그러니까 여기 적힌 게 그…… 당주인데, 그러니까 당주가…….
“……백…천?”
청명이 고개를 신나게 끄덕거렸다.
“동룡이가 좀 못 미덥긴 하지만 말은 잘 들으니까.”
현종이 떨리는 손으로 다른 권의 앞 장을 펼쳤다.
“윤…종?”
“마찬가지로.”
“…….”
다음 권에는 조걸이, 그리고 심장 떨어지는 마음으로 펼쳐 든 또 다른 앞 장에는…….
“소, 소……소?”
“아, 맞다. 그건 솔직히 좀 고민했어요. 그냥 금룡이도 한자리 줄까 하고요.”
청명이 헤헤 웃었다.
“근데 좀 재수 없기도 하고. 어차피 한마음 한뜻으로 일하자고 정하는 자린데, 기왕이면 말 잘 통하는 쪽이 좋은 거잖아요? 아닌가요?”
현종은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청명이 묘하게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기회에 얻을 것도 좀 얻고, 좋은 게 좋은 거잖습니까? 아시죠? 태상장문인? 척하면 착? 그쵸?”
멍하니 그 말을 곱씹던 현종이 한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야, 이 쌍놈시키야!”
“아악! 왜! 왜 때려요!”
“나가라! 이 망할 놈의 자식아아아아아아!”
현종이 전력을 다해 날린 인명부가 달아나는 청명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이날의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주로 그 마무리가 ‘종남을 용서한 대자대비한 현종도 차마 청명이 놈만은 용서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