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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54화


1654화. 좋은 날이군. (4)

“무당이라니…….”

현종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당연히 생각해야 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그가 아둔하기 때문이 아니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당이라는 문파가 그만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현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제갈자인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상황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경향이지요.”

“경향이요?”

“예. 돌이켜 보면 장일소의 움직임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그는 항상 힘이 모이지 않은 곳을 노려 왔으니까요.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양을 집요하게 노리는 늑대처럼 말입니다.”

이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일소는, 사패련은 그러했다. 강호가 장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을 때는 가장 먼저 외딴 섬에 고립된 해남을 노렸고, 중원의 힘이 장강에 집중되자 외곽에 고립된 사천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혼을 빼놓는 계책이 난무해서 그렇지, 사실상 크게 보자면 장일소의 행동 방식은 오히려 단순하고 명확하다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총사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가장 고립된 이들은 무당입니다. 그 무당을 치고 나면 남은 소림마저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을 겁니다. 사패련의 입장에서 고려했을 때, 병법적으로 더없이 옳은 수입니다.”

“…….”

“무당을 지원해야 합니다, 맹주님! 우린 이미 공동과 팽가를 잃었습니다. 그들마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제갈자인의 말에 현종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당……. 저들이 정말 무당을 노릴 거란 말입니까?”

제갈자인의 강력한 주장에도, 현종은 뭔가 개운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무당이라고?’

제갈자인의 말에 일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묘하게 찝찝하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만일 지금 장일소가 천우맹을 노린다면 천우맹은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아직 새로이 짠 편제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장일소가 이런 기회를 버리고 무당을 노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장일소가?

“글쎄요.”

그리고 그 순간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마치 현종의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되물으며 돌아보는 제갈자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만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불쾌함이라기보다 의아함에 가까웠다.

“확실히 제갈가주님의 추론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장일소의 수가 대체로 그러한 ‘경향’을 보여 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요.”

“그런데 왜…….”

“호북에서 소림을 상대하기 전까지의 장일소라면 말입니다.”

그 말에는 제갈자인이 흠칫했다.

“그건…….”

“소림을 상대할 때 사패련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과거의 사패련, 즉 장일소는 제게 가장 유리한 곳으로 상대를 끌어들여 일방적인 희생을 치르게끔 해 왔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입술을 짓깨문 채 잠시 침묵하던 제갈자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의 말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달랐……었네. 분명…….”

“예. 장일소는 더 이상 위험 요소를 피하지 않습니다. 소림을 상대할 때 그는 가장 유리한 곳에서 적의 피해만을 유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피해를 크게 감수하고, 가장 위험한 곳에 스스로 뛰어들었지요.”

그 전쟁이 어찌 돌아갔었는지를 아는 이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지금껏 몸을 사렸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몸을 사릴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장일소는 함부로 예측해서는 안 되는 자입니다.”

“그럼 군사께서는…… 장일소에게 다른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제갈자인의 물음에 임소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제 손에 쥔 부채를 활짝 펼쳤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무엇을 노린단 말이오?”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임소병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각 답했다.

“우리지요.”

“우, 우리?”

제갈자인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제갈세가의 가주답게 삽시간에 사태를 파악하며 얼굴을 굳혔다.

임소병이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준비가 덜 된 적을 상대하는 건 쉽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쉬운 건,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끌어들여 상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제가 장일소라면, 무당을 미끼로 천우맹을 끌어낼 겁니다. 그리하여 집어삼키려 하겠지요. 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이들보다는 급히 지원하러 온 이들을 짓밟는 게 훨씬 수월할 테니 말입니다.”

무작정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장일소가 정말로 천우맹을 노리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천우맹이 움직이는 순간 장일소가 반드시 그 틈을 노릴 거라는 사실이다.

급한 마음에 지원을 서둘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그 순간 새삼 깨달았다.

“하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적의 노림수, 그러니까 천우맹이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선 이해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당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은가?

무당을 구하러 가면 천우맹이 위험해지고, 천우맹의 안전을 도모하자니 무당이 짓밟히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 그건 무슨 말이오?”

임소병의 뜬금없는 말에 제갈자인이 귀를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걱정할 수밖에 없을 말을 있는 대로 늘어놓더니, 이젠 또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무당도 바보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무당은 본래 더없이 영민한 문파지요.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 않을 겁니다.”

“아…….”

“사패련이 진격하고 있단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뒤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려 들 것입니다. 우리는 급하지 않게 그들과 합류하면 됩니다.”

“으음. 무당이 소림으로 갈 거라고 보시는 거요?”

“뭐, 그것까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소림을 얼마나 가깝게 여기는지까지는 제가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아니, 제 예상보다 그들이 소림을 더욱 가까이 여긴다 해도, 지금 소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숭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할 가능성도 분명 있겠지요.”

임소병이 입가를 가린 부채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무당이 시간을 벌어 줄 거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당의 행동에 발을 맞추면 됩니다.”

“과연…….”

제갈자인과 함께 당군악과 모용위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당이라면…… 허도진인의 냉정함이라면 경거망동하려 들지는 않겠지.”

“그럴 것입니다.”

당군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최악의 상황까지 내몰리나 싶었는데, 다행히 상황이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리되면 사패련이 노리기 어려울 만한 안전한 우회로를 통해 하남에 진입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봉문을 푼 무당과 천우맹이 연합을 맺을 수도 있을 테니까.

‘천만다행…….’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당군악이 순간 흠칫했다.

‘잠깐. 애초에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됐더라?’

당군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한 사람의 표정을 좇고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을 가장 냉정하게 관조하고 있던, 청명의 표정을.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총사.”

“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청명이 당군악에게로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당군악은 보았다.

화산검협 청명의 두 눈에 일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말이다.

표정이랄 게 없는 그 얼굴을 본 순간, 당군악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청명이 느리게 입을 뗐다.

“무당이 물러난다…….”

“총사?”

“그렇게 될까요?”

“그야, 당연히 물러나지 않겠는가? 허도진인은 그리 어리석은 이가 아닐세. 냉정하기로 따지자면 구파의 모든 장문인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이일세.”

“…….”

“물론 허도진인이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그 영향력이 사라진 건 아닐 걸세.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현 무당의 임시 장문을 맡은 허산자 역시 총명한 이라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세상에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은 없어요.”

“…….”

“그리고 완전히 이성적인 문파는 더더욱 없죠.”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한 번씩 잊어버리더라고요? 매번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대체…….”

“문파는 장문인의 뜻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요.”

“……뭐?”

당군악의 눈이 뒤흔들렸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서였다.

“장강참변에서 명예를 잃고 나락에 떨어진 건 허도진인뿐만이 아니에요. 아니, 차라리 허도진인은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은 제 뜻과는 관계없이 비겁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무당의 검수들이에요.”

“…….”

“그 의미를 허도진인이 이해할지…….”

말끝을 흐린 청명이 시선을 동쪽으로 흘려보냈다. 허도진인과 무당이 있을 그곳, 무한으로.

* * *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허산자는 제 앞에 선 이들을 망연히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당혹감과 노여움, 공포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남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너, 너희……. 이, 이놈들!”

허산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못해도 이백은 넘을 검수가 하나같이 새파란 한기를 뿜으며 그의 앞에 도열해 있었다. 무당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이들은 나서라는 한마디에 모여든 것이다.

체면치레를 위해 몇 사람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그와 허도진인의 뜻이 잘못 전달되었을 리는 없다.

그 말인즉,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적을 피해 달아난다는 장문인의 명을 거역했단 의미다.

“허, 허공, 네 이놈! 대체 무슨 생각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뭐, 뭐라?”

“무당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이들은 나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공!”

“감히 말씀드리건대, 장문인.”

송문고검을 쥔 허공의 두 눈에는 새파란 한기가 어려 있었다.

“이 무당산에…… 무당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못할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

“다가올 적을 두려워해 달아날 이는 더더욱 없고, 무엇보다…….”

으득.

허공의 이가 아랫입술로 파고들었다.

“적에게 머리를 조아려 살아남은 굴욕을 두 번씩이나 자처할 이는 더더욱 없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제자들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허산자의 얼굴에 암담한 기색이 어렸다.

“허공…….”

“적이 장일소이건, 만인방이건, 사패련이건! 백이건, 천이건, 일만이건!”

허공에게서 새어 나온 서늘한 기운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저는 싸울 것입니다. 목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봉문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하여 무당이 결코 비겁자가 아님을 증명할 것입니다.”

처억!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열한 무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제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이 검례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아…….”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장문인. 아니 사형…….’

일이 단단히, 절망적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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