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59화
1659화. 나는 그런 멍청한 놈들을 좋아하지. (4)
“휴식!”
“후욱! 후욱!”
휴식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리던 맹도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그들 저마다의 눈빛엔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보다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윤종에게 말했다.
“엥? 다들 생각보다 쌩쌩한데요? 멈추자마자 모조리 주저앉을 줄 알았는데.”
“다들 화산 같지는 않으니까.”
“……그거 화산 욕하는 말 아닙니까?”
“사실이 그렇지, 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지나. 사방에 보는 눈이 있으니 쉽사리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도 있겠고.”
“흐음.”
조걸이 볼을 긁적였다.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보니 화산이 채신머리없는 문파는 맞았다. 여기 화산 놈들이 모여 있었다면 다른 문파 사람들이 지켜보건 말건 앓는 소리를 쏟으며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 사패련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을 거고.”
“개방에서 정탐해 줬잖아요.”
“그걸 곧이곧대로 믿겠냐?”
“……홍 아저씨가 들으면 땅 긁으시겠네.”
“그런 걸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란다.”
“그것도 맞지.”
홍대광이 들었다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개방 방주 자리를 물려받은 게 죄지.
“그런데 벌써 쉽니까?”
“……다들 화산 같지는 않으니까.”
같은 대답이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였다. 조걸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온한 체하고 있지만, 호흡이 힘들어 보이는 자들이 꽤 많이 보인다.
‘벌써?’
조걸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맞을 거다. 기분 탓이 아니라.”
윤종은 다 듣기도 전에 긍정했다. 조걸이 눈을 끔뻑였다.
‘확실히…….’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이 정도론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인즉, 이곳에 뒤섞인 명문정파의 제자들보다 화산의 제자들이 체력적으로는 월등하다는 뜻이다.
어쩐지 새삼 안 믿기고……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무인에게 있어 체력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어쨌건 화산이라는 문파가 다른 명문정파보다 확연히 앞서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언제 이렇게…….’
조걸은 그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나, 어쨌든 오늘내일하던 화산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감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걸이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마저 들어 중얼거렸다.
“그냥 지금만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요?”
“아미타불. 그렇지 않습니다, 시주.”
그때 마침 곁으로 다가온 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계속 같이 붙어 있으니 잘 모르겠지만, 화산파분들의 체력은 비정상적이고 상식을 넘어서는 면이 있습니다. 그건 그냥 무학을 익힌다고 해서 길러지는 게 아니지요. 아마도 그…….”
“모질고 길었던 학대의 결과라는 건가요?”
“……말하자면…… 예.”
조걸은 조금 허탈해졌다.
그러니까 청명이 놈이 사람을 지옥귀같이 굴려 댄 대가로 화산 제자들은 천하 어디에 견주어도 우월하다고 내세울 수 있을 만한 체력을 손에 넣었단 말이다.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싱숭생숭하네요.”
“뭐가 말이냐?”
“그…….”
윤종의 시선을 받은 조걸이 머리를 작게 긁적였다.
“어쨌거나 화산이 뭐라도 다른 문파에 앞서는 부분이 생겼다는 건 기뻐할 일인데…….”
“그런데?”
“……아닙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조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윤종이 피식 웃었다.
지금부터 같이 싸울 사람들은 솔직히 조금 더 듬직했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체력이 달리는 이들을 이끌고 싸운다는 건 부담이 크니까 말이다.
“체력이 무인의 전부는 아니다.”
“예. 저도 압니다.”
“그리고…….”
윤종이 슬쩍 고개를 들고는 뜻 모를 소릴 중얼거렸다.
“화산이라고 해서 다 체력이 좋은 건 아니겠지.”
“예?”
“……심지어 한없이 멍청하기도 하고.”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우거진 수풀 쪽으로.
턱 끝에 맺혀 있던 땀이 툭툭 떨어졌다.
“……후.”
백천은 나직이 숨을 고르며 폭포처럼 쏟아지는 땀을 소매로 닦아 냈다.
‘빌어먹을.’
진기를 통해 땀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아니, 솔직히 이제는 그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묵묵히 땀을 닦던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쉬려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니 어느새 기척 없이 곁에 다가온 유이설이 서 있었다.
“받아요.”
백천은 말없이 그녀가 내민 것을 보았다. 새하얀 무명천이었다. 그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력이 들어요. 옷을 말리는 데도.”
잠시 침묵하던 백천은 유이설이 내민 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흰 얼굴을 적신 땀을 훔쳤다.
그런 그를 무심히 응시하던 유이설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버거워 보여.”
“…….”
“두 배는 빨랐을 거예요. 화산만 움직였으면.”
백천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땀을 다 닦은 천을 유이설에게 돌려주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이내 제 소매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유이설에게 말했다.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무슨 방법?”
“내가 낙오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사매?”
유이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백천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녀는 안다. 백천은 낙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화산파끼리만 나선 길이었다고 해도. 폐가 찢기는 한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끝까지 달렸을 것이다.
백천은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유이설이 물었다.
“왜?”
“…….”
“적당한 핑계를 대서 빠지면 돼요. 사형이 서는 곳은 화산의 선두가 아니니까, 굳이 무리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적당한 핑계?”
“없으면 만들어 줄게요. 지금.”
백천의 시선이 살짝 내려갔다. 유이설이 허리에 찬 매화검을 쥐고 있었다. 백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부상이라도 입게 해 주려고?”
“…….”
“괜찮다, 사매.”
“…….”
“이 정도로 우는소리 할 일 없으니까,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돼.”
유이설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고개를 살짝 들고 백천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나는, 화산의 선두가 아니에요.”
“…….”
“그러니 없어요. 위기에 처했을 때 사형을 지켜 줄 사람 같은 건.”
백천은 씁쓸한 얼굴로 침묵했다. 평소 그토록 말수가 없고 말주변도 없는 유이설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다 떠나서 그런 건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전해져 온다.
유이설이 닦달하듯 물었다.
“그래도?”
백천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
“어째서? 지켜야 할…….”
“사매. 사매는 화산만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던가?”
유이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백천의 시선이 그녀를 넘어 조금 먼 하늘로 향했다.
“나는 조금……. 그래, 사매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말이지.”
잠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백천이 빙긋 미소 지었다. 아까와 달리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한심하게 살아오진 않은 것 같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매도 있고.”
“한심해. 이미 충분히.”
“그런가?”
백천은 웃으며 유이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쳐 본대로 향했다.
“늦을 것 같으니 먼저 가 보마.”
“사형.”
“그렇게 걱정되면 사매가 나를 도와주면 되겠네.”
백천은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나는 말이야. 늘 내가 뛰어난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이끌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 누구보다 우월하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유이설이 백천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확실히 과거의 백천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최근까지도 백천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세상이 넓음을 깨달았고, 자기 자신보다 우선하는 것이 생겼을 뿐.
“그럴 때 내가 사제들에게, 사질들에게 뭐라 했는지 기억해?”
“……아니요.”
백천이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뒤에 내가 있으니까 겁먹지 말고 싸워라.”
“…….”
“한 사람 한 사람은 모자랄 수 있지만, 화산은 약하지 않다. 모자란 부분은 서로 채워 줄 수 있고,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화산의 선봉에 설 수 있다.”
유이설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천이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런 말을 했던 내가 몸 조금 약해졌다고 엉덩이를 뺄 수는 없지. 그럼 나는 정말 입만 산 놈이 되어 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그래서, 음…….”
백천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이야기 마무리가 잘 안 되는데, 어쨌든 그런 거다. 사매, 나는 싸우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강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는 사람이 강한 거지.”
“…….”
“이렇게 말해서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너무 걱정 마.”
백천이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가려 하는데, 유이설의 목소리가 작게 귀를 잡아끌었다.
“……어요.”
“응?”
“입만 살았어요, 지금도.”
백천은 돌아보지 않았다.
본대로 합류하기 위해 걸어가는 그를 빤히 보던 유이설이 제 검을 움켜잡았다.
* * *
“정말 이럴 셈이냐!”
허산자의 입에서 목이 찢어지는 듯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앞에 있는 제자들은 그의 분노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이 미련하고 멍청한 놈들이……!”
허산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쓸었다.
소수라면 힘으로라도 제압해 보겠건만 그것도 아니다. 눈앞에서 고집을 피우는 제자들의 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솔직히 힘으로 제압한다 한들 이곳에서 잠깐이지, 소림까지 그 먼 길을 무슨 수로 끌고 간단 말인가?
“무당이다! 무당의 역사를 너희의 손으로 끊을 생각이냐, 정녕!”
허도진인은 소용없을 거라고 했지만, 허산자는 그리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 이들마저 여기서 허망하게 죽도록 둘 순 없지 않은가.
“허공! 이노오오옴!”
간절하고 애끓는 마음이 커질수록 허산자의 분노는 제자들의 중심으로 보이는 허공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 문파의 장로라는 놈이 어찌 이토록 미련하게 군단 말이냐!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
“…….”
“맞습니까?”
허산자가 채 대꾸하기도 전에 허공이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는 군자가 아닙니다, 장문인. 우리는 무인입니다.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지만, 꺾인 무인의 의지는 십 년의 곱절이 흘러도 다시 세울 수 없는 법입니다.”
“이, 이놈이…….”
“현명한 자가 되느니 의기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게 저희가 무당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게 의기더냐, 그……!”
허산자가 분기탱천하여 노호성을 터뜨리려는 찰나였다.
“장문인! 장, 장문이이이이인!”
몇몇 무당 제자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너무도 다급한 그 모습에, 허산자는 다음에 들려올 말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패련입니다!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허산자의 두 눈에 바위 같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젠 달아나기는 늦은 것 같습니다.”
그 순간, 허공이 몸을 돌려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허공과 똑같은 눈으로 서 있었다.
“죽음이 두려운 자는 물러나라.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정적이 흘렀다.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의기란 이어지는 것이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가슴에서 피어나기도 한다.
무당은 강호를 이끌어 온 도가의 중추. 제자들은 낡은 도경과 바랜 규율 속에서도 자신들이 든 검의 무게를 이해해 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는 따라나서라.”
허공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 우리는 저들의 뇌리에 무당이라는 두 글자를 영원히 새길 것이다.”
모두가 말없이 뽑은 검이 중천에 뜬 해를 받아 빛났다. 처음 무당이라는 두 글자가 세상에 생겨날 때의 의기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