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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8화


군림천하 (928)

그때 누군가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성 사숙은 아직 본신의 실력을 반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다가온 인물은 낙일방이었다. 노해광은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낙중이 스스로 나선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니 나는 그를 믿을 뿐이지.”

원래 노해광은 성락중과 낙일방을 모두 준비시키고 상황에 따라 대처해 줄 것을 당부해 두었다. 다만 배분으로 보아 이런 일은 원래 아랫사람인 낙일방이 먼저 나서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상대가 원당임을 알게 된 성락중이 낙일방 대신 등장한 것이다.

노해광은 그것이 사부인 전풍개와 친분이 있던 각명선사와의 인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성락중의 성격에 단순히 과거의 인연만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으리라.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저 중의 움직임이 상당히 기이하군요. 거칠고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면서 상대를 조금씩 압박하고 있네요. 저것도 아미파의 무공인가요?”

낙일방의 물음에 노해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불문의 무공치고는 너무 난잡해 보이지 않느냐?”

“하지만 또, 단순히 사도(邪道)라고 하기에는 나름 정묘하면서도 현오한 면이 있군요. 제가 나섰다면 상당히 난처할 뻔했습니다.”

낙일방은 얼마 전 적화승의 근접 박투에 무척이나 고전한 기억이 있기에 끝없이 상대를 향해 돌진하면서도 먼저 상대의 투로를 차지해 공격해 들어오는 원당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노해광도 직접 그 싸움을 목격했으니 그의 심정이 짐작되었다.

“네가 상대했어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노해광은 사실 낙일방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강호의 젊은 층에서 최고의 고수로 평가받는다는데, 그가 기억하기로는 그저 권법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힌 조용한 성격의 잘생긴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소문이 점점 더 커져서 강호의 숱한 고수들을 연파했다고 하더니 종내에는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 형산파의 최고 어른이자 무림구봉 중 일인인 용선생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 결과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용선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최고 절학인 월광지를 펼치고도 피를 토하게 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지난 삼십 년간 용선생을 그 정도까지 몰아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패하고도 오히려 낙일방의 명성은 더욱 커져서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당금 강호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닌 데다 수십 년간 적수를 만나지 못할 만큼 무적의 고수로 군림해 온 용선생과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한 젊은이가 거의 대등한 경지로 싸웠으니 강호인들이 경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그를

강호제일권사(江湖第一拳士)라고 부른다는 말에 노해광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흐뭇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소문삼살의 첫째인 적화승과 낙일방의 대결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고, 노해광은 그동안 들려온 강호의 소문이 와전된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되었다.

소문삼살은 우내사마의 제일인자인 소마 신지림의 제자들로, 모든 강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그런 소문삼살의 첫째를 정면으로 상대하여 격살했으니 노해광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와룡사에서의 일에 성락중과 낙일방을 대동하게 되자 설사 최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낙일방이 한없이 믿음직하고 이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노해광은 원당과 성락중 사이의 치열한 격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낙일방을 한동안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슬쩍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저들의 싸움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낙일방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장내를 주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강력한 수법은 숨긴 채 서로의 허점을 노리는 식으로 싸우고 있군요.”

“그 말은?”

“저들은 지금 탐색전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노해광은 어린 사질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의 눈에는 금시라도 둘 중 한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벌하고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저게 탐색전에 불과하다고?’

낙일방이 그의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 정도 고수들의 싸움은 순식간에 승패가 가려지는 경우가 많지요. 승부가 판가름 나기 직전의 한 수, 한 수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을 테고요. 그래서 그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도 몇 번 경험해 봤지만, 승부가 가려지기 직전에는 주위의 공기가 달리 느껴질 정도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기운 같은 것이 감돌지요.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고 모공이 열리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저들은 아직 그런 상태에 접어들지는 않은 걸로 보이는군요.”

노해광은 새삼 낙일방과 자신의 경지 차이가 예상보다 더욱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호행을 떠나기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동안의 경험이 이 녀석을 부쩍 성장시킨 모양이군. 나도 같이 갔어야 했나?’

그렇게 대견한 사질에 대한 뿌듯함과 무언지 모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입맛이 씁쓸해졌다.

하나 종남파를 떠나지 않고 서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는 소중한 이들을 지켜 내고 종남파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많은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사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다. 일방과 낙중 또한 그러했을 것이고.’

노해광은 마음속에 떠올랐던 일말의 아쉬운 감정을 털어 버리고 다시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언제쯤 저들의 승패가 가려질 것 같으냐?”

“성 사숙께서 신중하셨던 건 아무래도 저 중의 기이한 움직임을 분석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지금쯤은 그에 대한 분석이 어느 정도 끝났을 테고요.”

“원당은?”

“저 중도 겉으로는 태평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사숙의 검을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었을 겁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숙의 검을 잠깐이나마 겪어 보았으니 아마도 마음속으로 준비가 되었겠지요.”

노해광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승부의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말이냐?”

낙일방은 여전히 격전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부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졌으니 아마 조만간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겁니다.”

노해광도 눈을 부릅뜨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사람의 격전에 집중했다.

낙일방의 말대로 장내의 분위기는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성락중의 빈구석만 교묘하게 노리고 들어가는 원당의 움직임도 그대로이고, 그에 맞서 가급적 이동을 자제한 채 현란한 검법으로 상대하는 성락중의 모습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위의 공기는 금시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긴장되었고, 무언가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먼저 승부를 건 것은 원당이었다.

원당이 펼친 움직임은 그가 직접 창안한 혈령수혼(血靈捜魂)이라는 무공으로, 엄밀히 말하면 아미파의 비전 중에서도 비전인

혜영수종(慧捜踪)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혜영수종은 상대의 호흡과 병기의 운용 방식, 보법과 눈빛, 심지어 심리까지 파악하여 상대가 움직일 장소를 미리 점하는 신술(神術)의 일종이었는데, 원당이 살성을 각성한 후 칩거하면서 많은 고수들과의 격전을 바탕으로 나름의 심득을 보충하여 아주 독특하면서도 기괴한 무공을 완성해 낸 것이다.

원당은 혈령수혼으로 상대의 심신을 지치게 한 후 단숨에 승부를 가르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고, 지금도 성락중의 이마가 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면서 기회가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 하나가 성락중의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원당은 몸을 살짝 숙였다가 허리를 튕기며 성락중의 아래턱 왼쪽으로 솟구치듯 신형을 날렸다. 그 방향이 오른손잡이에게는 필연적으로 생기는 사각(死角)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이엔가 원당의 양손에는 불그스름한 강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미파의 절학인 파옥수에 그 자신의 체내에 솟구치는 살기를 가득 담아 변형시킨 혈옥수(血玉)였다. 이 혈옥수를 완성한 후 원당은 아직까지 자신의 핏빛 혈수에 격중되고 살아남은 자를 보지 못했다.

막 혈옥수로 성락중의 아랫배를 가격하려던 원당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물질이 눈에 들어가면 눈을 깜박이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이게 되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성락중의 눈은 분명 땀방울이 들어갔음에도 전혀 깜박거리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정광을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으나 그 상태에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기에 오히려 사력을 다해 더욱 빠르게 혈옥수를 내질렀다.

그 순간 무언가 차갑고 섬뜩한 것이 그의 옆구리를 먼저 파고들었다. 그리고 원당이 회심의 한 수로 자신했던 혈옥수는 상대의 옷자락만 뚫고 빈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파앗!

튀어 오른 핏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나 원당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오른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검에 베인 옆구리로 파고든 차갑고 서늘한 검기가 그의 심맥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검경불혈진맥!’

원당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찔린 상처는 크지 않았으나, 검에 담긴 경기가 그의 경맥을 제압하여 지금의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성락중이 담담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방심하신 덕분에 간신히 득수(得手)할 수 있었소.’

“너…… 어떻게……?”

“오랫동안 수련을 쌓아 온 결과일 뿐이오.”

원당이 비록 강호에서 희대의 살인마로 불리고 있지만, 본령은 명문 정파인 아미파인 데다 수십 년간 고련을 거친 절정 고수였다.

그래서 그도 성락중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 것이 사실은 정말 대단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적인 신체 반응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지는 단순히 수련만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필시 상상도 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시간을 적지 않게 보냈으리라.

원당 또한 아미파에서 파문당한 후 나름대로 이를 갈며 무공을 닦아 왔으나, 지금 성락중의 모습을 보자 자신이 보낸 세월이 왠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어떤 각오로 무공을 익혀 온 거냐?”

“본 파의 제자라면 누구나 비슷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오.”

“그게 종남파가 지금의 성세를 유지하는 비결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냥 당연한 일이었을 뿐. 문파의 제자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일 것이오.”

원당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성락중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쏘아보다가 냉소를 흘렸다.

“흐흐,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수련해 온 줄 알고 거드름만 잔뜩 피우는 아미파의 땡중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로군.’

혼자 키득거리며 웃던 원당이 다시 성락중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충분히 내 몸을 두 토막 낼 수 있음에도 피육의 상처만 입히고 제압한 것은 무슨 의도냐? 설마, 한 푼도 되지 않는 과거의 인연 때문이라고 할 셈이냐?”

그의 물음에 답하는 성락중의 음성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특별한 의도는 없소. 다만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순리? 네가 생각하는 순리란 무엇이냐?”

“자연스러움, 자연과 같은 흐름일 것이오. 대사께서 순리를 따르셨다면 우리의 싸움도 조금은 양상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하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미파의 무공은 장중한 가운데 경쾌함이 담겨 있는 것이 묘리라고 들었소. 대사는 기기묘묘한 장점만을 취하고 싶었나 본데, 원래 그러한 기(奇)는 무거운 중(重)을 바탕으로 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 법. 대사의 무공은 기발함은 있을지언정 묵직함이 부족하더이다.”

원당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내 무공이 너무 기변(奇)에 치우쳤다고?”

“그렇소. 변칙적인 방법으로 쉽게 승리하려 했던 것이, 대사가 제대로 실력도 발휘해 보지 못하고 내게 제압당한 이유라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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