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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30화


군림천하 (930)

제378장 거성실광(巨星光)

콰아아아!

주변의 공기가 동시에 터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경기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금시라도 갈의 청년의 몸을 짓이겨 버릴 듯하던 무시무시한 손바닥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송악중이 날린 청옥섭선 또한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강렬한 충돌의 여파 때문인지 청의 노인도 잠시 몸을 멈칫거리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손을 흔들었다.

우우웅!

가벼운 동작이었음에도 예의 괴이한 장영이 구름처럼 일어나더니 다시 하나로 합쳐져 갈의 청년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기세는 조금 전보다 오히려 더욱 강맹해진 것 같았다.

송악중이 중간에 끼어들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공격을 이어 나가는 그 모습은 반드시 이번 기회에 갈의 청년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갈의 청년도 그런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가뜩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아예 핼쑥하게 변했다.

송악중 또한 표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늦게 끼어드는 바람에 백발 중년인이 쓰러지는 걸 막지 못한 데다 청의 노인이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갈의 청년을 향해 집요하게 살수를 계속 쓰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짝 분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상황은 오히려 그가 개입하기 전보다 더 좋지 않아졌다.

조금 전에 갈의 청년은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를 하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본다는 심정으로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청의 노인의 한 수에 맞서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송악중이 끼어드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어져 버렸다. 그런데 청의 노인은 송악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노려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잠시 막막했던 것이다.

잔뜩 끌어 올렸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 무엇보다 문제였다. 그가 조금 전에 시전하려던 한 수는 그로서도 최상의 몸 상태에서 집중력을 최고로 끌어 올려야만 간신히 펼칠 수 있는 고난도의 무공이었다.

쉬아악!

또다시 손바닥 모양의 장영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허공을 가르며 갈의 청년의 코앞으로 짓쳐 들었다.

갈의 청년은 조금 전처럼 대항하려 했으나, 마음만 급할 뿐이어서 피해야 할지 막아야 할지 결정짓지 못하고 오히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 버렸다.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그는 황급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포의 손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기울여도 승산이 희박한 상태에서 제대로 집중도 못하고 허둥댔으니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콰쾅!

벽력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갈의 청년의 검이 박살 나고 그의 신형은 피 분수를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드는 가운데, 청의 노인이 내뻗었던 손을 거두며 무심한 음성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이것으로 동방 아우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자는 고준이란 놈만 남은 셈이군.”

이제 보니 그는 나름의 이유 때문에 갈의 청년을 끈질기게 노린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이 모두 청의 노인의 손에 쓰러지자, 송악중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청의 노인을 보며 살짝 미소 짓는 것이었다.

“역시 광풍서생의 명성은 명불허전입니다. 고희가 가까워지는 연세일 텐데도 젊은 시절의 성정 그대로이신 듯하니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어찌 보면 경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조롱 같기도 한 말에 청의 노인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청의 노인은 광풍서생이란 별호로 한때 대강남북을 뒤흔들어 놓았던 절세의 고수였다. 일단 손을 쓰면 추호의 사정도 보지 않고 상대를 폭풍처럼 몰아치기 때문에 전성기에는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

나이를 먹어 신목령주의 휘하에 들어간 후로는 신목령의 오천왕 중 일인으로 활동했는데, 오늘 모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풍서생 양척기는 같은 오천왕 중 경천신수 동방욱과 특히 사이가 좋았기에 그의 죽음에 누구보다 분노했다. 그래서 갈의 청년이 경천신수가 죽은 현장이 있었던 자임을 알고는 집요하게 그를 쓰러뜨리려 했던 것이다.

제일 처음 쓰러진 백발 중년인은 쾌의당의 사방신 중 북방신, 빙제 냉우림이었다. 오랫동안 북해 제일의 고수로 군림해 온 그가 이름도 모르는 야산의 한쪽 귀퉁이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 눕게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갈의 청년 또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쾌의당주의 둘째 제자인 동휘(董輝)라는 자로, 마도 제일의 살인 수법인 탈혼검 중 한 초식을 익히고 있었다.

양척기는 싸우는 내내 그의 탈혼검을 경계했으나, 도중에 그가 탈혼검을 능숙하게 시전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 후로는 마음 놓고 공세를 취했던 것이다.

동휘는 양척기 같은 절세 고수와 싸운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다급한 상황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에 쾌의당 당주의 제자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너무 탈혼검에 의지해 일격필살만을 노린 경험 미숙이 패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척기는 자신의 사제가 죽었음에도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송악중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에 대한 소문은 몇 번이나 들었다. 쾌의당주가 그렇게 자랑한다던데, 어디 소문만큼 그렇게 대단한지 한번 보자.”

송악중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 솜씨를 볼 기회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요. 그런데 종남파와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군요?”

“종남파?”

“종남파의 고수가 신목령의 제자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위험 속으로 뛰어들다니, 제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종남파와 특이한 인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양척기의 시선이 하늘색 유삼의 청년을 팔에 안은 채 한쪽에 서 있는 전흠을 슬쩍 향했다.

하늘색 유삼 청년은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제일 막내인 한시몽이었다. 재질이 뛰어나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존장(尊長)을 따르고 모시는 품성으로, 양척기가 평소 가장 아끼는 청년이었다.

한시몽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걸 확인한 양척기의 얼굴에 한 줄기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무튼 이번에는 톡톡히 신세를 졌군.”

원래 신목령과 종남파는 직접적인 은원 관계가 없었지만, 신목령의 사자들과 진산월 사이에 적지 않은 원한이 쌓이게 되었다. 십이사자 중 상당수가 진산월의 손에 목숨이 끊어졌거니와 심지어 오천왕에 속했던 혈수존자 오욕백과 독존자 갈황 또한 그로 인해 명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들 대부분은 신목령을 배반했거나 행적이 의문스러운 자들이었으나, 어쨌든 아끼는 제자들이 몇 사람이나 진산월에게 살해당했으니 신목령의 고수들이 종남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의 사제인 전흠이 난데없이 나타나 사경에 처한 한시몽을 구했으니 양척기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흠은 특별히 할 말도 없어서 살짝 고개만 숙였다.

사실 신목령에 대한 감정은 그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나 일전에 동방욱의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은연중에 신목령의 고수들에 대한 동정심 비슷한 것이 생긴 데다 진산월의 전음을 받았기에 주저하지 않고 한시몽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것이었다. 물론 그 저변에는 그동안 종남파와 크고 작은 충돌을 계속 일으켜 왔던 쾌의당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송악중은 전흠이 별다른 대꾸도 없이 가만있는 것을 보고, 그가 당장은 자신에게 덤비거나 이번 일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전흠에게서 신경을 끄고 양척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인연이 부디 좋은 결과를 맺길 바라겠습니다. 또 누가 압니까, 우리 사이의 악연도 그런 좋은 인연으로 변할지 말입니다.”

하지만 양척기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우리 사이에는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는 그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양척기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섬뜩하고 깊은 울림이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나 송악중은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아직 강호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감당 못할 피의 무게라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양척기가 무서운 눈으로 송악중을 쏘아보더니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쾌의당주가 버릇을 잘못 들였군.”

송악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더 짙게 웃었다.

“사부님이 저를 각별하게 키우긴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피의 무게를 느껴 볼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양척기의 얼굴근육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 말은, 조만간 우리 중 한쪽이 완전히 정리될 거라는 뜻이냐?”

송악중은 갑자기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잠시 귀를 기울여 보시지요. 그러면 제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겁니다.”

양척기는 무심결에 그의 말대로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바람 소리, 물소리, 바람결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자연 속에 있으니 들리는 일상의 소리들이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양척기의 안색이 갑자기 일변했다. 반드시 들려야 할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송악중은 이제 대놓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두 분의 대전이 마침내 마무리된 모양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그리고 어느 쪽이 정리되는 대상일지…….”

양척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순간적으로 송악중의 말에 대꾸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대신에 온갖 불길한 예측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검주(主)가 쾌의당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계곡 깊숙한 곳으로 간 지 일각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싸움이나 격투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설마 그들의 싸움이 저놈 말대로 벌써 끝났단 말인가?’

검주란 신목령주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신목령주의 신물이 바로 한목신검이고, 그 검으로 펼치는 신목령주의 검술은 그야말로 인세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래서 신목령의 고수들은 신목령주를 검주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신목령주의 절대적인 검술에 대한 인정이자, 그를 흠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순수한 숭배의 표시였다.

양척기는 검주의 무공이나 실력을 잘 알기에 그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품고 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마음 한구석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쾌의당주는 지금까지 강호에 등장한 고수들 중 최악의 살성이다. 그의 탈혼검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다다라 마음먹은 대로 변주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검주의 검으로 과연 그 악마 같은 탈혼검을 깰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 양척기는 솔직히 완벽하게 자신할 수 없었다.

탈혼검은 단순히 마도 제일의 살인 수법이라고만 한정하기 어려운, 그 이상의 가공할 무공이었다.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단번에 승부를 뒤바꿔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탈혼검의 무서운 점이었다.

쾌의당주가 선뜻 검주 앞에 나타났다는 점도 양척기의 불안함을 배가시키는 요인이었다.

지금까지 꼬리를 감춘 용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쾌의당주가 스스로 검주 앞에 나타나 일대일의 결전을 유도한 것은 나름대로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냉혹할 정도로 집요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보아 그러한 판단은 결코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과연 쾌의당주는 신목령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확고한 자신이 있는 것일까?

양척기는 마음속의 불안함을 떨쳐내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전면을 주시했다.

송악중은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있다면・・・・・・ 그와 송악중 사이의 거리인가?

원래 그와 송악중 사이의 거리는 사오 장 정도였다. 그런데 그 거리가 어느새 이 장은 가까워져 삼장 남짓에 불과했다. 그 정도 거리면 양척기 수준의 고수들에게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척기의 두 눈에 살벌한 안광이 이글거렸다.

“쥐새끼처럼 기척도 없이 접근하는 솜씨가 제법이군. 그런 것도 쾌의당주에게 배웠더냐?”

‘아깝군. 일 장만 더 접근했으면 확실한 탈혼검의 영역이었는데.

송악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슨 의심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저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목령의 오천왕 중 누가 제일 고수냐는 물음에 경천신수 동방욱을 꼽았다. 한데 의외로 상당수의 고수들은 동방욱보다 양척기를 위로 보았다.

절정 고수들과의 싸움 경험이 거의 없는 동방욱에 비해 양척기는 오랫동안 다양한 방면의 고수들과 무수한 싸움을 겪어 온 백전노장이었기 때문이다. 무공 실력은 동방욱이 더 높을지 몰라도 풍부한 대적 경험과 거칠고 집요하면서도 치밀한 구석이 있는 양척기의 성정이 강호에서는 더욱 고수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송악중은 양척기와 정면으로 싸워 이긴다는 확신이 없기에 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에 기회를 엿보려 했으나, 역시 양척기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노강호답게 그의 의도를 금세 꿰뚫어 보았다.

송악중은 지금이라도 탈혼검을 펼칠까 생각도 해 봤으나, 이미 경계심을 잔뜩 높인 양척기의 표정을 보고는 그 마음을 접었다. 탈혼검은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펼치기 어려웠고, 자주 쓸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그가 쾌의당주에게 탈혼검을 배울 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탈혼검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탈혼검이 제대로 펼치기 까다로운 무공이기 때문이었지만, 탈혼검의 비밀을 외부에 노출할 위험을 최대한 방지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단 탈혼검만이 아니라 무서운 위력을 지닌 비전의 절기일수록 그 사용 방식이나 위력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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