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2화
군림천하 (932)
제379장 절단경맥(切斷經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마도의 제일인자인 신목령주를 살해한 자가 쾌의당주라는 말을 들었어도 진산월은 별로 놀라거나 격동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 벌어질 일이 벌어졌을 뿐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목령과 쾌의당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는 관계였어도 서로를 범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쾌의당에서 신목령의 인물들을 향해 살수를 거듭 쓰더니 마침내는 신목령의 주인마저 쾌의당주의 손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진산월은 그 안에 무척이나 중대하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쾌의당은 신목령을 말살하려 한 것일까? 그리고 꼬리를 감춘 신룡처럼 강호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쾌의당주가 직접 나서 신목령주를 살해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강호 무림의 전설적인 고수로 군림해 왔던 신목령주마저 차가운 시신이 되어 산중에 버려지게 한 쾌의당주의 무공이란 대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일까?
숱한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진산월에게 가장 강하게 떠오른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강호에 널리 알려진 쾌의당주의 무공은 최고의 살인 수법이라는 탈혼검이다. 그렇다면 신목령주는 쾌의당주의 탈혼검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뜻일 것이다.
탈혼검이 아무리 무서운 무공이라고 해도 마도의 제일인이 당해 내지 못할 만큼 가공스러운 것일까? 신목령주 정도의 절세 고수가 상대가 탈혼검을 쓰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막지 못했을 만큼?
진산월은 자신이 직접 탈혼검을 상대해 봤기에, 그것이 강호의 소문대로 무서우리만치 살인적인 수법이기는 해도 절정의 고수가 사전에 알고 방비만 철저히 한다면 충분히 막거나 피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목령주가 탈혼검에 쓰러졌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금 신목령주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가슴을 훤히 드러낸 상태였던 시신은 그사이 한시몽이 매무시를 수습해 주었는지 단정하게 닫혀 있었다.
한시몽은 신목령주의 시신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치 못해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의 준수한 청년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두 뺨을 흠뻑 눈물로 적시고 있는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이 신목령주의 가슴 부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양척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나?”
“고인의 시신을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양척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검주의 사인은 내가 확인했네. 탈혼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더군.”
진산월은 전혀 흔들림 없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이상해서 그럽니다.”
“이상하다니? 무슨 말인가?”
“저로서는 납득이 안 되어서, 천하의 신목령주가 탈혼검에 쓰러졌다는 것이 말입니다.”
양척기는 물론이고 한쪽에서 울고 있던 한시몽의 시선까지 진산월에게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지금 검주가 쾌의당주 따위에게 쓰러졌다고 비웃는 것인가?”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쾌의당주라면 저도 승패를 예단하기 힘든 인물이지요. 고인과 쾌의당주, 두 사람 중 누가 이겼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싸움이었다는 건 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탈혼검은 저도 상대해 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만큼 무섭고 살인적인 무공이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수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인 수준의 고수라면 상대가 탈혼검을 펼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방비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듣고 있던 한시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양척기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한 후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말은, 아무리 쾌의당주의 탈혼검이 무서운 수법이라고 해도 검주께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수법에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되지 않았나?”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 거지요.”
양척기는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 생각을 모르겠군. 검주의 몸에 난 상흔은 확실히 탈혼검의 흔적일세.”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양 대협께선 이전에 탈혼검의 흔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양척기가 그 말에 주춤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나는 아직 탈혼검에 죽은 자의 시신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네. 검주의 몸에 있는 상흔은 소문으로 들었던 탈혼검의 흔적과 몹시 흡사해 보였을 뿐이지. 자네는 본 적 있는가?”
“저는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양척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은 분명히 해두는 게 좋겠지. 알았네. 자네가 확인해 주게.”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신목령주의 시신 곁에 앉아 신중한 동작으로 가슴팍 부근 옷깃을 열었다.
가슴 한 치 위에 나 있는 선명한 혈흔은 일전에 보았던 탈혼검의 교탈혼이 남긴 것과 똑같아 보였다.
진산월은 혈흔을 한차례 만져 보고, 이내 다른 부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양척기와 한시몽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진산월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로서는 진산월의 의중을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천하의 신검무적이 아무 의미 없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묵묵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할 뿐이었다.
한동안 신목령주의 시신을 살펴보던 진산월이 도로 시신의 옷깃을 잘 여며 주고 몸을 일으켰다.
“어떤가, 달리 알아낸 점이라도 있나?”
“고인의 가슴에 나 있는 상흔은 확실히 탈혼검의 교탈혼으로 인한 것이 맞는 듯합니다. 제가 보았던 흔적과 동일하군요.’
“그럼 역시…….”
양척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약간은 당연하고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산월의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사인은 아닙니다.”
양척기의 시선이 다시 진산월에게 꽂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고인은 교탈혼에 당하기 전에 이미 다른 수법에 의해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교탈혼의 흔적은 그 후에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양척기는 누구보다도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네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고인의 직접적인 사인은 경맥(脈)의 치명적인 손상입니다. 살펴보니 전신의 경맥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가닥가닥 끊어져 있더군요.’
양척기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신목령주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단전 부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진력을 흘려 넣었다.
살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신목령주의 전신 경맥은 잘게 끊어져 있어 그가 흘려 넣은 진력이 메마른 모래 위에 뿌려진 물처럼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이럴 수가…….”
양척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신목령주의 경맥이 끊겨 있는 것이 놀랍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런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책하는 것이었다.
진맥을 해 봤다면…… 아니, 진산월처럼 손으로 시신을 만져 보기만 했어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으리라.
하지만 양척기는 신목령주의 가슴에 나 있는 탈혼검의 흔적을 본 즉시 지레짐작으로 탈혼검에 당했을 것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이다.
양척기의 눈자위가 저도 모르게 실룩거렸다. 양척기는 냉정하다고 알려진 세간의 평판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에 불같은 성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이를 초월한 지기였던 동방욱의 죽음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그가 오랜 세월 믿고 따르던 신목령주까지 비명에 쓰러진 것을 보자, 내색은 안 했어도 억제하기 힘든 분노와 울분으로 평정심이 크게 뒤흔들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또 자신이 성급한 판단으로 신목령주의 정확한 사인마저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기에 버럭 노호라도 내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진산월과 눈이 마주쳤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는 그 눈을 보자 양척기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내가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그렇게 마음속의 격동을 가라앉히려 숨 고르기를 잠시, 들끓었던 마음이 가라앉고 냉정을 되찾으니 이번 일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쾌의당주는 일부러 탈혼검의 흔적을 남겨, 자신이 어떤 수법으로 검주를 살해했는지를 숨기려 한 것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수법이 무엇이든, 그가 검주를 살해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 분명한 사실이네. 그런데 왜 굳이 그리 번거로운 짓을 한 것인지 짐작 가는 바라도 있나?”
“양 대협께서 방금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겠지요.”
“내가 말한 이유?”
“어떤 수법으로 고인을 살해했는지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양척기는 잠시 더 생각해 보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그가 사용한 수법이 무엇인지도 짐작이 되는가?”
“양 대협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양척기의 얼굴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네. 검주의 전신에 있는 크고 작은 경맥들이 모두 끊겼더군. 사람의 몸을 그리 만드는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네. 정말 너무도 무서운 무공일세.”
말을 잇는 양척기의 표정은 점차로 무거워져서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원래 경맥이란 무림인들에게는 다른 어떤 부위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경맥이 흔들리기만 해도 무공을 펼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자칫 경맥이 손상되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져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인체에 있는 수많은 경맥들 중 하나가 끊어진다면, 운이 좋아도 불구의 몸이 되기 십상이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경맥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목령주는 한두 개도 아니고 전신의 모든 경맥들이 가닥가닥 끊어진 상태였다.
신목령주의 무공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처음에 양척기가 그의 시신을 보고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신목령주의 죽음 자체에 놀라고 당황했던 탓도 있지만, 설마 천하의 신목령주가 전신의 경맥이 끊어져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척기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진산월은 신목령주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사인을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 점에 대해 양척기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공할 무공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뛰어난 심계와 무슨 일이 있어도 흐트러질 것 같지 않은 평정심, 무엇보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는 능력까지 고루 갖춘 인물은 무림 강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신검무적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의 검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놀랍고!’
양척기는 짧지 않은 세월 강호를 종횡하면서 수많은 무인들과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만나 보았지만, 지금 담담한 안색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이만큼 뛰어난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그의 판단과 의견을 좀 더 듣고 싶었다.
“검주는 천하에서 제일 정심한 음공을 익히고 있었네. 그래서 경맥을 보호하는 데에는 강호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단언할 수 있지. 내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런 검주의 음공을 뚫고 그분의 전신 경맥을 모두 끊어 버릴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 혹시 자네는 떠오르는 무공이 있는가?”
원래 음공은 경맥을 보호하는 부분에서만큼은 다른 어떤 내공 심법보다도 탁월했다. 신목령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음공 대가였으니, 양척기가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양 대협이 과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도 당장은 떠오르는 무공이 없군요.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경맥을 끊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직접 맥을 잡아 강력한 진기를 보내거나 경맥이 지나는 부위에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지요.’
양척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검주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을 것 같지는 않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척기는 진산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도 이제는 머리가 굳어 예전처럼 복잡한 말을 단숨에 알아듣거나 말에 숨겨진 의미를 꿰뚫어 보지 못하네. 그러니 가급적이면 쉽게 말해 주지 않겠나?”
“일부러 양 대협의 머리를 어지럽히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저는 가능성이 없는 것부터 하나씩 제거해 가다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소거법을 사용한단 말이로군. 확실히 일리가 있는 방법일세.”
양척기가 납득한 듯하자 진산월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건, 검이나 병장기로 경맥을 타격하는 경우입니다.”
“검경불혈진맥 같은 수법 말인가? 하지만 그건……..
“특정 부위의 경맥을 끊을 수는 있어도 광범위한 부위에 충격을 줄 수는 없지요.’
“잘 아는군. 그럼 다음은?”
“적당한 거리에서 강력한 음한기공의 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양강기공은 아니고 음공만 거론하는 이유는 뭔가?”
“양강기공으로는 경맥을 쪼그라들게 하거나 태워 버릴 수는 있어도 가닥가닥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음기와 양기, 각각의 특성을 감안하면 음기의 공력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도 소거해야겠군. 검주의 현음진기는 음한기공의 최고봉이라 천하의 어떤 음공으로도 검주의 터럭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을 걸세.”
“그럼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군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