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41화
군림천하 (941)
배송은 위고릉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자꾸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시오. 나는 원래 간이 작아서 이런 일을 당하면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 든단 말이오.”
“그것도 철면호와 다른 점이군. 철면호는 온몸이 간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도통 겁을 모르는 자라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소.”
위고릉은 천천히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하선루를 쳐다보았다.
“저 일층 안쪽 깊숙한 곳에 철면호가 있단 말이지?”
배송은 재빨리 그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철면호의 집무실이 그곳에 있는 건 맞소. 그건 내가 장담하오.”
위고릉은 더 이상 그의 말장난에 어울려 주지 않고 강패에게 슬쩍 눈짓했다.
철면호가 그곳에 있든 없든 배송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 따라서 더는 그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하나 강패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배송이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철면호가 저곳에 없다면 한 군데 더 찾아볼 만한 곳이 있긴 한데……”
막 배송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던 강패는 물론이고 그에게 관심을 끊고 하선루로 몸을 날리려던 위고릉 또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배송을 돌아보았다.
배송은 이미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최대한 머리를 굴려 보니 철면호가 세 주루 외에도 간혹 들르는 장소가 한 군데 더 있다는 게 기억나더란 말이오.”
아마 그로서는 필사적으로 궁리를 거듭한 결과일 것이다.
하나 그를 응시하는 위고릉의 눈빛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건가? 이제 와서 또 다른 장소가 있다고?”
“내가 그럴 리 있겠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간이 콩알만 해서 남을 놀리고 말고 할 담력도 없고, 그런 수작을 꾸밀 만한 머리도 없소.”
“타고난 배짱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배송은 멋쩍게 웃었다.
“배짱만큼이나 겁도 많아서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소.”
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위고릉은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로군.’
자신이 살기를 흘릴 때마다 찔끔찔끔 놀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의 모습이 여상치 않게 보였던 것이다.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럼 철면호가 저곳에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군.”
위고릉은 하선루를 향해 성큼 걸어 나갔다. 배송은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뒤에서 강패가 그의 등을 떠밀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떼었다. 이리저리 등불이 내걸린 하선루의 실내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아름다웠고, 공간이 잘 나뉘어 있어 아늑함을 느끼게 했다.
하나 세 사람은 주위의 경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일층 안쪽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고릉은 방에서 삼 장쯤 떨어진 곳에서 몸을 멈춘 채 배송을 돌아보았다.
“여기도 없군.”
그는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예감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놀라움이나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대신 배송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방에 철면호가 없다는 것은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방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종업원들이 계속 들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저곳이 철면호가 집무를 보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위고릉의 매서운 질문에 배송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철면호의 집무실이었소. 아마 내가 오지 않은 동안에 방의 쓰임새가 바뀐 모양이오.”
“그럼 철면호는 이 층에 있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이 층은 탁 트인 공간이라 집무실로 삼을 만한 장소가 없을 거요.”
위고릉은 배송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직접 이 층으로 올라갔다.
한데 정말 배송의 말대로 이 층은 뻥 뚫린 하나의 공간이었다. 십여 개의 크고 작은 탁자들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을 뿐, 누군가가 일을 보거나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전혀 없었다.
그제야 위고릉은 배송을 돌아보았다.
“이제 말해 보게. 철면호가 있을 만한 마지막 장소가 어디인가?”
그는 특별히 ‘마지막’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배송에게 더 이상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배송도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결 신중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방보당이라고 아시오?”
“방보당? 뭐 하는 곳인가?”
“전장(場)이오. 철면호가 거래하는 유일한 전장이지.”
위고릉의 눈이 번쩍 빛났다.
“철면호가 거래하는 전장이라고?”
“그렇소. 철면호가 소유한 모든 사업장의 자금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거요. 철면호는 한 달에 최소한 한 번 이상은 그곳으로 가서 장부를 확인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이 그날인 것 같소.”
위고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수긍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곳이라면 철면호가 있을 만하군.”
“이번에는 틀림없을 거요.”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배송이 헛기침을 했다.
“흠.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구려. 아무튼 그곳이 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장소요. 더 이상은 철면호가 있을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구려.”
위고릉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만 해도 ‘마지막’이란 단어에 흠칫하는 기색이던 배송이 지금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럼 방보당으로 가도록 하게. 자네의 마지막 안내를 받아 보지.”
위고릉이 일부러 ‘마지막’이란 말을 다시 꺼냈으나 배송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린 후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다. 위고릉은 강패와 시선을 마주쳤다.
강패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배송의 뒤로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이제 강패는 배송이 방보당으로 그들을 데려간 후 바로 그를 향해 살수를 쓸 것이다. 방보당의 위치만 알게 되면 그 후에 배송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위고릉은 더는 배송과 말을 나눌 의향이 없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왠지 그의 화술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 왔기 때문에 단순한 눈짓만으로도 강패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가슴속에 살심을 가득 담은 채 배송을 지척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강패는 워낙 권격술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라 저 정도 거리라면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강패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다. 설사 배송이 한 수를 숨기고 있다 해도 절대로 강패의 손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위고릉은 왠지 찝찝했던 배송에 대한 의혹을 접어 두고 한결 느긋해진 걸음으로 두 사람을 뒤따랐다.
배송이 위고릉과 강패를 데려간 곳은 서안의 후미진 뒷골목이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다 보면 이곳이 어디이고 자기가 어디서 들어왔는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더구나 지금은 제법 어두워져서 골목 안이 더욱 음침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위고릉은 배송과 어떤 말도 나눌 생각이 없었지만 배송이 일각 넘게 그들을 데리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골목을 누비고 다니자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이곳이 방보당으로 가는 길이 맞나?”
배송이 자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길이 방보당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오. 서안 토박이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위고릉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런 후진 뒷골목에 서안 제일의 실력자가 거래하는 전장이 있다는 말인가?”
“이 일대는 용사혈이라 불리는 곳인데, 골목이 좀 복잡하고 지저분하긴 해도 비밀을 유지하기 좋아서 의외로 적지 않은 전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소.”
배송의 말을 듣고 보니 나름의 일리는 있었다.
전장이라고 모두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대로를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장의 목적이나 성격에 따라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철면호가 아무리 서안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자신의 금전 거래를 남들이 아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인물일수록 더욱더 은밀하고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을 선호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좁은 골목은 철면호를 보호하는 최고의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역시 철면호란 말이군.’
위고릉은 마음속에 떠올랐던 일말의 의구심을 지우며 배송에게 계속 가라는 의미의 턱짓을 했다.
서안의 용사혈은 정말 미로를 연상케 하는 골목이어서 갈림길이 계속 나타나고 구절양장 같은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위고릉은 처음에는 몇 번이나 길을 외우려다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고 배송의 뒤만 묵묵히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골목의 양쪽 담벼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정말 암습하기 최적의 장소로군. 도처에 몸을 숨기거나 눈을 피할 곳이 있으니 흑도의 무리들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공간이겠구나’
그러다 문득, 철면호에게도 따르는 흑도의 무리가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원래 위고릉은 흥안령과 대막 일대에서 주로 활동해 왔기에 중원의 정세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다. 특히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서안에서 누가 유명한지도 잘 몰랐었다.
대형을 따라오면서 비로소 서안 일대의 유명인들과 문파에 대한 정보를 듣긴 했지만, 아직도 흑도 세력에 대한 지식은 얕은 편이었다.
그가 철면호에 대해 아는 바는 철면호가 종남파의 고수이자 그 유명한 신검무적의 사숙이기도 하다는 것과 서안을 막후에서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라는 정도였다.
철면호가 거느린 세력들 중 서안의 흑도를 장악한 문파가 있다는 부분도 극히 최근에야 알게 된 정보로, 심지어 그 문파의 이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위고릉이 미심쩍은 구석이 있음에도 계속 배송을 데리고 다닌 것도 그만큼 서안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철면호의 행방을 쫓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지 않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배송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배송이 없었다면 서안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은 산해루에서 철면호의 행방을 찾지 못한 순간부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걸 전혀 거리끼지 않은 그가 배송을 지금까지 살려 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 이제 그 이유도 점차로 사라지고 있었다.
용사혈의 골목이 아무리 넓다 해도 반 시진 가까이 걸어온 이상 그 끝이 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들의 시야에 방보당이 들어오는 순간, 강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송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것이다.
위고릉은 자신의 미래도 모른 채 휘적거리며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나가는 배송의 뒷등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때 갑자기 배송이 걸음을 멈추었다.
호시탐탐 배송을 격살하기 위해 그의 뒤에 바짝 붙은 채 걷고 있던 강패는 부지불식간에 그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로 한발 물러나야 했다. 바로 그 순간, 기척도 없이 양쪽의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콰아아!
세찬 먼지와 부서진 벽돌 가루가 자욱하게 사방을 뒤덮는 가운데, 강패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 있던 배송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