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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46화


군림천하 (946)

“귀한 전언을 해 주어 고맙소. 다른 용무는 없소?”

진산월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물었는데, 의외로 추동생은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추동생은 몇 차례나 표정이 변하다가 이윽고 마음을 굳힌 듯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진 장문인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추동생은 한차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한결 신중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 이 공자께서 하시는 일은 외부에 내막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정말 중차대한 것입니다. 이 공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에 성숙해의 전력이 투입된 것은 아닙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뚜렷한 증거도 없고 단순히 잠깐 스치듯 보았던 희미한 기억력과 심증만으로 일을 진행하기에 아직은 외부로 발설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진산월은 추동생이 말하는 그 누군가가 자신을 지칭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추동생은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낙양까지 추적하면서 점차로 이 공자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을 계속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저는 이 공자가 지금 너무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산월이 아는 이정문은 결코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무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몇 번이나 앞뒤를 신중하게 판단한 후에야 일을 벌이곤 했다.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정문을 오랫동안 따르던 수하의 입에서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니, 진산월은 사태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소?”

진산월의 질문에 추동생은 즉시 대답했다.

“원래 사람을 쫓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쫓고 있다는 사실을 대상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공자는 추적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느라 너무 급작스럽고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공자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사람은 아니지 않소?”

“이 공자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상대가 남긴 흔적이 너무나 미세해서 자칫 놓쳐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뒤를 돌아보거나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진산월은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이정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의 이정문은 예전에 만났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나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무언가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진산월은 이정문이 초조하거나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자신이 쫓는 인물이 누구인지 굳이 숨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문은 혹시나 추적에 실패할 것을 염려하여 그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곧 그자의 정체가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만에 하나 그자의 정체가 알려진 후 이정문이 추적에 실패하게 되면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여파가 몰아닥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닐까? 진산월은 추동생을 향해 물었다.

“추 대협은 내가 이 공자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거요?”

추동생이 고개를 내저었다.

있는 곳을 밝혀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은 이 공자로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상대에게 들키든 말든 추적을 계속해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가

“그럼 나에게 부탁하려는 게 뭐요?”

추동생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진산월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 공자가 생사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진 장문인께서 나서 주십시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추 대협은 이 공자가 그를 추적하다 들켜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리라고 보는 거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거요?”

“그자가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추동생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잡힌 사나운 맹수가 어찌 반응하겠습니까?” “이 공자의 의심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이 공자는 지금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 중 하나의 꼬리를 잡게 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꼬리를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를 잡은 자에게 덤벼들겠지.”

“하지만 이 공자는 절대 그 맹수를 당해 낼 수 없을 겁니다. 이 공자만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나는 당해 낼 수 있다는 말이오?”

추동생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을 응시한 채 열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 그를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진 장문인뿐입니다.”

진산월은 다시 한 번 이정문이 쫓고 있는 자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추동생은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인 성숙해의 이십팔숙에 속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주위에서 진산월 외에는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당금 강호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정문은 그를 추적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토록 무리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사실을 외부로 선뜻 공개하지 못하는 것일까?

의혹은 많았으나, 진산월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추동생에게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추동생이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진산월은 차분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부탁을 수락하겠소. 이 공자가 위험에 처할 상황이 되면 언제든 나에게 연락하시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에 누군가가 진산월이 머무르는 객실의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진산월은 추동생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옷을 걸쳐 입고 거실로 나왔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눈앞의 인물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휘적휘적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로군. 이리 와 앉게, 난 아직 귀신이 되기에는 이르니 말일세.”

진산월은 그의 말대로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 사람은 그런 진산월의 모습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군. 내가 알고 있던 자네와는 많이 다른데, 그사이에 성격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진산월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오른팔은 어깨부터 잘려 나가 텅 빈 소매만 펄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겨우 억눌린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자네 그 팔……”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빈 소맷자락을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잘렸어. 그나마 깨끗하게 잘려서 덧나거나 하지 않고 잘 아물었네.”

진산월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어찌 된 일인가?”

“누군가가 내 칼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더라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팔이 무슨 소용 있느냐며 댕강 잘라 버리지 뭔가?”

“누군가, 그자가?”

그 사람은 싱겁게 웃었다.

“그건 왜 묻나? 복수라도 해 주려고?”

“아서게. 내 팔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일세. 자네가 나서서 복수해 주고 말고 할 일이 아니란 말일세.”

진산월은 말없이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다른 데는 괜찮은지 궁금한가? 보게, 멀쩡해. 팔이 이런데 그나마 볼만한 얼굴마저 망가졌으면 정말 인생이 암담했겠만, 다행히 그런 신세는 면했네.” 

말과는 달리 진산월은 그의 웃는 얼굴 한쪽에 어려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네.”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했지만 내가 스스로 불러온 결과일세.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탁자에서 다기를 챙겨 왔다.

삼매진화로 차관의 물을 데운 후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마시게.”

그 사람은 진산월을 쳐다보며 물었다.

“술은 없나?”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는 없네. 술이 마시고 싶은가?”

“모처럼 친구를 만났는데, 술 한잔 안 하면 왠지 서운해서 말이지.”

“잠깐 기다리게.”

진산월은 그를 앉혀 둔 후 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술병 하나와 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은 그걸 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재주도 좋군. 이 시간에 그걸 어디에서 구한 건가?”

“건너편의 주루가 다행히 아직 열려 있더군. 그곳에서 구했네.”

“만화루 말이로군. 좋은 곳이지.”

진산월은 술잔을 그의 앞에 놓고 술을 따랐다. 자기 앞의 술잔에 따른 후 술잔을 들었다.

“오랜만의 재회를 기념하며.”

그 사람 또한 왼팔로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래, 재회를 기념하며.”

두 사람은 각기 술잔을 비웠다.

“크! 모처럼 마시니 정말 좋군. 술이 좋은 건지, 같이 마시는 사람이 좋은 건지 모르지만 오늘 술맛은 최고일세.”

“자네 같은 주당이 ‘모처럼’이라 하면 얼마 동안이나 마시지 않았다는 건지 짐작도 못 하겠군.’

“잘린 어깨가 아물 때까지는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끊은 지가 벌써 열흘 가까이 되네.”

그 말에 진산월은 문득 그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의 얼굴은 아직 핏기가 완전히 돌지 않아 창백해 보였다.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핏기가 별로 없는 핼쑥한 얼굴과 적막감이 감도는 쓸쓸한 눈빛이 유달리 잘 어울려 보였다.

팔이 잘린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으니 상처가 다 아물었을 리도 없었다.

진산월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떤가?”

그 사람은 오히려 되물었다.

“어떤 기분일 거 같나?”

진산월은 그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히죽 웃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자네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군. 자네를 골리려는 건 아니네. 그냥 별생각이 없었지. 특별히 기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저 멍했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 그게, 찰나지간에 잘려서 처음에는 통증도 느끼지 못했어.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생각 하나가 떠오르더군.”

“…….”

“아, 내가 팔 병신이 되었구나! 하고 말이야. 그래도 팔 하나가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 덕분에 이렇게 자네와 오붓하게 술 한잔 나눌 수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은 말을 하면서 활짝 웃었으나, 진산월은 따라 웃지 않았다.

“너무 그런 표정을 하지 말게. 모처럼 만난 친구의 그런 표정은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일세.”

친구!

그렇다, 그들은 친구였다.

진산월이 스스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인물, 그 사람은 손검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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