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77화
1677화. 그냥 믿는 것뿐이야. (1)
윤종은 알게 되었다. 정말로 커다란 당혹감에 휩쓸리면 말뿐만 아니라, 생각마저 잃게 된다는 걸 말이다.
‘어째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것만 같다.
왜 여기에 장일소가 있는가? 왜?
그 의문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붉은 장포의 사내가 그의 세상을 모조리 잠식해 버린 것만 같다.
“어…….”
그리고 상황이 이런 건 윤종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걸도, 혜연도, 남궁도위는 물론이고 심지어 백천마저도 할 말을 잃고 장일소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
흡사 다른 세상을 사는 듯 여유롭게 앉아 있는 장일소의 존재가 이 많은 이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 삭막한 세상 속에 움직이는 사람은 오직 하나.
저벅.
청명이 내딛는 발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굳어 버린 정신을 깨우는 소리이기도 했다.
청명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얼음물처럼 윤종의 뇌리를 두드렸다.
“좋은 술이라……. 여유가 넘치시는군.”
그러고 나니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그들보다 앞에 나서서 장일소를 마주하고 있는 청명의 등이.
뚜둑.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굳어졌던 윤종의 근육이 일시에 풀어졌다. 멈추었던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릴 막아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나?’
아니. 아니다.
그렇다기에는 장일소가 이끌고 온 이들의 수가 많지 않다. 아무리 패군 장일소라고는 하나, 저 정도 수로 천우맹을 막겠다는 건 만용을 넘어 자살행위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는 지금 왜 이곳에 저토록 여유롭게 앉아 있는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때, 윤종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장일소가 술을 채운 잔을 손톱 끝으로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이래 봬도 내가 예의는 아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톡.
그가 가볍게 술잔을 밀자 다탁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간 잔이 반대편으로 가 멈추었다. 그곳에 앉을 사람을 위해 준비된 잔이라는 것처럼.
“천하의 화산검협을 대접하는데, 귀한 술 정도는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니?”
장일소가 환한 미소를 품은 채, 청명을 응시했다. 그러자 청명도 삐딱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런 장일소를 마주 보았다.
“영 대접할 줄을 모르는군. 고작 술 따위로 나를 대접하겠다고?”
“흐음, 여전히 욕심이 많은 아이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려무나. 그래서 준비한 선물도 있단다.”
“……선물?”
“가져와.”
청명의 두 눈에 의문과 경계가 스쳤다. 뒤쪽의 사패련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물러섰다. 그 틈으로 한 사람이 무언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사람?’
그건 처참한 몰골로 반쯤 의식을 잃은 사람이었다.
“……저게 뭔…….”
“어?”
그 순간, 천우맹도 중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허, 허도?”
“뭐?”
놀라서 두 눈을 부릅뜬 모두가 끌려 나오는 이를 자세히 살폈다. 마치 근육을 끊어 놓듯 팔다리에 칼이 박힌 노인.
그는 정말로 허도진인이었다.
“이, 이런 미친!”
과거와는 달리 완전한 백발에 얼굴까지 피에 흠뻑 젖어 잠시 모두를 혼란케 했지만, 틀림없었다.
지금 홍견에게 끌려 나오는 저이는 분명 무당의 전 장문인 허도진인이다.
콰당!
홍견이 허도진인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저 개 같은 놈이!”
조걸이 울분에 차 앞으로 달려들려 하자, 윤종이 이를 악물고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지만 사형!”
“진정해!”
“이…….”
조걸은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허도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나, 어쨌든 그는 무당의 장문인이었던 인물이다. 한낱 사파 놈들에게 저런 치욕을 당해도 될 만한 이가 아니다.
그런 조걸을 보며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이런, 이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좋은 선물이잖니? 감동할 줄 알았는데.”
“아가리 닥쳐, 이 새끼야!”
“그리 화낼 것 없단다. 적당한 본보기잖니.”
장일소가 흘끗 허도진인을 일별했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무심한 눈길이었다.
“제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으레 간절함만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리라 믿지. 하지만 아니야. 원하는 걸 이루는 방법은 바라는 게 아니라 거머쥐는 거란다.”
장일소의 시선이 반송장 같은 허도진인을 떠나 청명에게로 고정되었다.
“너는…… 잘 알 것 같은데?”
수많은 이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허도진인과 그 뒤에서 술잔을 매만지는 장일소를 침묵 속에 바라보았다.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정적 속 대치를 깨트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조걸의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공격합시다.”
“……뭐?”
“저 새끼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 얼굴을 들이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안 옵니다! 지금이 저 새끼의 목을 딸 적기라고요!”
“…….”
“죽이면 됩니다! 저 새끼 하나만 죽이면 다 끝나는 거 아닙니까!”
윤종의 눈이 뒤흔들렸다.
맞는 말이다.
장일소는 그리 많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서 있다. 물론 만인방의 홍견과 그가 따로 키워 낸 정예들이겠지만, 이쪽에는 천우맹의 거의 모든 전력이 있지 않은가.
“기회를 놓치기 전에 지금 당장…….”
“그럼 무당은요?”
“……예?”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걸이 획 시선을 돌렸다. 남궁도위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끌면, 무당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 지금 무당 같…….”
말을 하려던 조걸이 그만 흠칫했다.
무당 같은 건 알게 뭐냐고? 이건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면 안 된다. 사람의 목숨은 절대 그런 식으로 취급받을 수 없다.
조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장일소를 놓치면 더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무당은 지금 우릴 기다리고 있을……!”
“그만.”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백천의 짧은 목소리가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차가운 얼굴로 장일소를 응시하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런 게 아니다.”
“예?”
“……그런 단순한 일이 아냐.”
그는 모두의 시선 속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장일소.’
잡을 수 있을까? 장일소가 정정당당히 그들과 싸워 준다면 당연히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장일소가 전력을 다해 달아나려 한다면?
‘……쉽지 않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 해도 더 높은 실력을 지닌 소수를 잡기란 어렵다는 건, 이미 화산이 몇 번이고……. 그래, 몇 번이고 증명했다.
그 입장이 지금 뒤바뀐 것이다.
시도는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공한다면 정말 말 그대로 다시없을 쾌거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럼 모든 것을 잃는다. 천우맹은 무당을 구해 낼 기회를 놓치고, 무당은 멸문할 것이며, 심지어 장일소마저 놓치게 된다.
그건 지금까지 천우맹이 겪어 왔던 패배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책이다.
맹 역시 결국은 사람이 모여 만든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을 겪고도 맹도들이 지도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느슨한 결속이 과연 그 후로도 유지될 수 있을까?
이 순간 더 뼈아픈 사실은, 지금 맹이 편제를 개편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겨우 머릿수나 맞추어 채워 놓은 게 전부인 이 오합지졸 같은 당을 이끌고 장일소를 추적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머릿속으로 바삐 계산을 해 보던 백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이젠 그의 눈에도 보였다. 이 황당무계해 보이는 포석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이 당황스러운 수가 얼마나 지독한 독니를 품고 있는지 말이다.
백천의 시선이 여유롭게 잔을 채우는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그래, 무엇보다 저놈이 문제다.
‘제정신이 아니야.’
아무리 완벽한 계산 속에 두는 수라 해도, 어찌 이 많은 적 앞에 저리 태연하게 자신을 미끼로 던질 수 있을까? 어찌 저리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 목에 스스로 칼을 들이밀어 되레 적을 질리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저런 놈과 싸워 왔던 건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다. 붉은빛이 점점 더 커져 그의 시야를 모조리 뒤덮어 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그때.
“흔하지만 진리 같은 걸 담은 말들이 있지.”
청명의 태연하고도 담담한 목소리가 백천의 정신을 깨웠다.
“도박을 좋아하는 놈은 반드시 패가망신한다는 말이라든가.”
“하하. 그렇지. 맞는 말이구나!”
파안대소를 터뜨린 장일소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청명을 바라보았다.
“다만…… 그 말을 네가 하는 건 조금 우스꽝스럽네. 그렇지 않니?”
청명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 말만은 폐부를 찔린 기분이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는 뒤를 향해 말했다.
“사숙.”
“……응.”
“이해했지?”
많은 게 생략되어 있었지만, 백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지금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말이다.
“가.”
“뭐?”
하지만 이 말만큼은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발목 잡혀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어. 그건 저놈의 의도대로 놀아나 주는 거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놈이 원하는 건 나야.”
“…….”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주면 그만이지.”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청명이 무심하게 장일소를 향해 걸어갔다.
“처, 청명!”
놀라서 청명을 잡으려던 백천은 이내 손을 거두고 이를 악물었다.
‘도박을 좋아하는 놈은 패가망신한다.’
이제 백천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은 장일소에게 건넨 말이 아니다. 바로 백천에게 한 말이었다.
지금 장일소를 잡겠다고 모든 걸 쏟아붓는 일은 말 그대로 결과가 확실치 않은 도박. 맹의 운명을 그런 도박에 맡겨서는 안 된다.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눈앞에 놓인 미끼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대단한 미끼라 해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장일소와 그 무리를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저들이 맹의 등 뒤로 따라붙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천우맹이 둘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는 무엇인가?
저들이 자신을 미끼로 내건 것처럼, 맹에서도 저들이 움직일 수 없는 미끼를 앞에 던져 주고 몸을 빼는 것이다.
바로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미끼를.
그가 숱한 갈등 속에 겨우 내린 결론이었다. 누군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또 대다수는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 결론을 청명과 백천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도달해 버린 것이다.
“……윤종아!”
“아니.”
백천이 윤종에게 제 당과 함께 이곳에 남으라고 명하려는데, 청명이 그 말허리를 끊었다.
“나 혼자면 돼.”
“이 새끼야! 그게 말이나 돼?”
백천이 발끈하여 외쳤지만, 청명은 아무런 부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
과거였다면 청명은 어떻게든 백천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짧은 몇 마디만 던질 뿐이다.
그래. 이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백천이 이해하리라 믿는다는 듯이.
우득.
백천이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도 청명은 태연하게 장일소에게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느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
하지만 백천의 눈엔 보였다. 그 태연한 걸음에 장일소의 뒤에 도열한 홍견이 움찔하며 각각 살기를 드러내는 모습을 말이다.
천우맹이 장일소에게 압박과 공포를 느꼈듯이, 저들 역시 청명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청명은 쓰러져 있는 허도를 지나쳐 장일소의 건너편에 섰다. 그리고 그곳에 준비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작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장일소와 청명이 마주 앉은 이 광경은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광경이었다.
청명이 다탁 위에 놓인 제 술잔을 쥐었다. 술을 들이켜는 움직임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탁.
빈 술잔을 다탁에 내려놓고 감상을 짧게 이야기했다.
“좋은 술이군. 네놈 따위에게는 아까울 만큼.”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로군. 많이 준비했으니 얼마든지 마시렴.”
정파와 사파.
강북과 강남.
아니, 어쩌면 그런 경계를 넘어선 숙적.
그 두 사람이 태연하게 술잔을 나누고 있다. 실로 비현실적인 광경에 천우맹도들은 물론이고 사패련도들마저 반쯤 넋을 놓았다.
다만 매섭게 그 광경을 응시하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가자.”
“사, 사숙?”
“장문대리! 그게 무슨?”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잊지 마라.”
백천의 시선은 어느새 그 기이한 광경을 떠나 불타고 있는 무당산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무당을 구한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