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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98화


“착각?”

탁.

비워진 술잔이 다탁 위에 놓인다.

벌써 몇 순배가 돌았던가? 빈 술병이 하나둘 늘어 가고 있지만 두 사람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서늘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요하지만, 그럼에도 평화롭다 비난하고 폄훼할 순 없다.

칼과 칼을 맞댄 채 목숨을 걸고 치르는 전투는 아니나,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기류는 그 이상으로 서슬 퍼렜다.

“착각이라고 했나?”

“그래.”

장일소의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흐응, 글쎄. 뭐가 착각이지? 딱히 틀린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거야.”

청명이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잘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비슷하지만 다른 영역이지. 너는 나를 잘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는 없어. 아마 영원히.”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흐음. 그거참 슬픈 말이로군.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던 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뭘 착각했다는 거지?”

“저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내가 하려는 것들이 저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청명은 말해 놓고도 웃기다는 듯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

“……아니라는 건가?”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그게 바로 너니까.”

장일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불쾌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게 있어 세상은 완전하지 못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불완전한 무언가겠지.”

청명의 시선은 장일소가 아닌 하늘에 닿아 있었다. 뿌연 연기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별들을 응시했다.

“그러니 믿을 수 없겠지. 너에 비하면 모자라고 한심한 인간들을, 어느 하나조차도 말이야.”

장일소의 새빨간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이윽고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이런, 이런. 이해할 수 없다더니 잘도 이해하고 있네?”

장일소가 천천히 기다란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앞에 앉은 청명을 굽어보았다. 동시에 다탁 위에 놓인 술병을 잡아 들었다.

“거꾸로 묻지. 그럼 네 눈에는 이들이 그리도 믿음직스러운가?”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허도진인이 쓰러져 있는 방향이었다.

“보렴.”

힘겹게 숨을 이어 가고 있는 허도진인 바로 앞에 선 장일소는 경멸과 조소가 뒤섞인 눈으로 허도를 바라본다. 아니, 청명을 바라본다.

“이게 현실이란다.”

“…….”

“이자도 스스로 그렇게 믿었겠지. 나아졌다고, 과거와는 다르다고, 지금의 자신이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믿었을 거야.”

청명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사명감이든, 협의든…… 그 근거가 무엇이든 말이지. 하지만…….”

장일소가 느릿하게 술병을 기울였다.

졸졸졸.

흘러나온 술이 허도진인의 머리로 쏟아졌다. 피로 범벅이 된 그의 머리가 투명한 술에 젖어 들었다.

장일소를 노려보는 청명의 눈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장일소는 보란 듯 웃음을 흘렸다.

“그 결과가 이 꼴이잖니?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지. 이게 그 대단한 믿음의 결과야.”

졸졸졸.

“그러니 추모할 수밖에. 살아 있으되 죽은 이…….”

채앵!

그 순간, 장일소가 쥐고 있던 술병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채 다 쏟아지지 못한 술이 장일소의 소매와 바지를 적셨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곁을 지키던 홍견들이 발끈했다.

“감히……!”

“쯧.”

하지만 혀 차는 소리 하나만으로 그들을 침묵시킨 장일소는 젖은 제 옷을 조용히 바라보다 주둥이만 남아 버린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마치 어린애 장난감처럼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이걸로 되겠어? 정말 자르고 싶은 건 내 목일 텐데?”

분칠 된 얼굴에 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을 믿는다는 헛소리나 지껄이며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차라리…….”

장일소의 긴 손톱이 제 목을 천천히 가로로 그었다.

“직접 해 보는 건 어떨까?”

청명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 역시 그게 더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렇잖니?”

그는 장일소의 새하얀 목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갈라 낼 수 있다. 장일소의 말대로.

이곳에 수많은 적이 있다 해도, 가능하다.

갖은 위험을 무릅쓴다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다면 어쩌면 장일소의 목에 그의 검이 닿을 찰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검을 잡는 대신 잔을 잡았다.

“술이 비었군.”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던 장일소가 언제 귀기를 흘렸냐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먹히네.”

그러더니 터덜터덜 다시 청명의 반대편에 가 앉았다. 턱을 괴고 청명을 빤히 보던 그가 물었다.

“그럼 어떻지?”

“뭐가?”

“네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가? 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완벽하니?”

질문을 하면서도 조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조롱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하지만 청명은 표정이 바뀌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음?”

“내게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하고, 그 부조리한 세상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미덥지 못하며, 심지어 한심해.”

장일소가 이건 예상을 못 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청명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깨달은 것뿐이야.”

“무엇을?”

“좀 더 완전하다 믿었던 나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걸.”

“…….”

“지키고자 한 것을 지키지 못했고, 쓰러뜨리고자 한 것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마지막 하나까지 걸어 이루려던 목표는 상처만 남긴 채 무너졌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장일소의 두 눈에 불쾌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느끼는 당혹감과는 다른, 무언가 속부터 치미는 짙은 불쾌감이.

“그래서 저들을 통해 이루려는 것 아닌가?”

“틀렸어, 멍청아.”

청명이 뿌득 이를 갈았다. 장일소를 보는 눈에 분노와 적의가 스쳤다.

“저들은 나의 도구가 아니야. 내 꿈을 이뤄 줄 무언가도 아니다. 저들은, 그저 저들일 뿐이야.”

“…….”

“내가 아는 건, 그저 더 낫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룰 수 없던 목표를 저들은 이룰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장일소가 무언가 입을 떼려 했지만, 청명이 칼같이 끊어 내며 일갈했다.

“그걸 모른다는 게 네 한계야. 너 같은 놈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마저 내던져 버리지. 노력과 투쟁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해.”

장일소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내가 넘을 수 없는 걸 맞닥뜨린다 해도 절망하지 않아. 때론 좌절하고, 또 고통스럽겠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믿으니까. 내 힘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것도 결국엔 넘을 방법이 있다는 걸.”

장일소의 얼굴에서 표정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렇게 잠시간 고요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이 다시 부드럽게 휘었다.

“그게 저들이라…….”

한숨을 크게 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농담도 그 정도로 엉망이면 예의로라도 웃어 주기 힘들잖니. 응?”

청명이 눈을 감았다.

그가 이제부터 할 말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에게 이 뜻을 전했던 사람의 것이다. 누구보다 위대했고, 누구보다 강인했던 사람.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만이 나아갈 수 있다.”

“…….”

“내 사형이 했던 말이다.”

그 순간, 장일소의 낯빛이 뭔가 기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혐오와 당혹감이 뒤섞인, 실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묘하게 청명을 응시하던 장일소가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꽤…… 한심한 작자인 모양이야. 그런 실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걸 보니.”

청명이 피식 웃었다.

동경을 보는 것 같다.

서로 같다는,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의 어떤 말도 장일소에게는 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자의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그의 말을 닿지 않을 것이다.

마주 보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동경 속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이자에게 그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가 물었었지. 저들이 내 믿음을 져버린다면 어떻게 할지.”

“그랬단다.”

“대답해 주지. 아니, 약속하지.”

잠잠하던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비틀리듯 올라갔다. 천하의 장일소조차 순간 숨을 멈출 만큼, 섬뜩하게.

파아아아앗!

순간 청명의 검집에서 섬전처럼 검이 뽑혀 나왔다. 내내 긴장한 채 주인을 지키던 홍견들이 이렇다 할 반응조차 못 할 만큼 가공할 속도였다.

카아아아아앙!

검날은 장일소의 얼굴 바로 앞에서, 활짝 펴진 그의 손과 맞닿았다.

그그그극!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과 손, 그 둘을 사이에 두고 장일소와 시선을 가까이 마주한 청명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너는…… 여기서 죽는다.”

“하……. 하하핫! 하하하핫!”

커다란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부릅뜬 장일소의 두 눈이 광기 어린 빛을 흘리고 있었다.

* * *

피에 젖은 절벽 위로 난데없이 설화가 내리기 시작했다.

흰 눈이 고아하게 휘날리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운치(韻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 광경이다.

그러나 그 가녀리게 보이던 눈의 정체가 사실은 흩뿌려진 검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운치 넘치는 정경은 더없이 공포스러운 살육의 현장으로 뒤바뀌게 된다.

서걱! 서걱!

“크윽!”

태양궁도들의 몸을 흰 눈 같은 검기가 가차 없이 베고 뚫었다.

“빌어먹을!”

난데없이 나타난 적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니, 태양궁도 하나가 노호성을 내지르며 열양기공을 한층 거세게 끌어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운을 돋워 육신을 보호한다고 해도, 하늘에서 뿌려지는 듯한 검기를 모조리 막아 내기란 어려웠다.

“저, 저 검은…….”

“몸부터 추스르십시오.”

놀라 중얼거리던 남궁도위는 제 어깨를 잡아 오는 강한 힘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절벽을 콱 움켜잡으며 몸을 더욱 단단히 고정했다.

운기는 불가능하더라도 숨을 고를 시간 정도는 주어졌다. 그리고 지금의 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의문을 다 숨길 순 없었다.

“매화…….”

“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검이라서.”

남궁도위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이송백이 고소를 머금었다.

‘설화십이식.’

종남에게는 더없이 아픈 검이다.

한때는 종남의 미래를 열어 줄 것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더없는 수치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검.

그러나 사정을 모두 알게 된 이들이 그 검을 외면하고 숨기기 바빴던 데 반해, 진금룡은 아니었다. 그 검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싸늘히 냉소했다.

– 외면한다고 없어지더냐? 그럼 편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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