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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16화


1716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1)

“누구냐!”

“웬 놈들이냐!”

안마당에 낯선 놈들이 나타나니 화들짝 놀란 무당의 검수들이 검을 뽑아 겨누었다. 그러고는 백천과 허공을 보호하듯 가로막으며 두꺼운 진을 펼쳤다.

‘언제 나타난 거지?’

무당 검수들의 등골을 타고 차디찬 식은땀이 흘렀다.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경황이 없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지척에 저토록 많은 인원이 접근할 동안 눈치도 채지 못하다니.

‘보통 놈들이 아니다.’

상대의 실력이 웬만큼 대단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애초에 굳이 그런 계산을 할 필요도 없다. 마당을 점거한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운 기운만으로도 무위를 짐작할 만했다.

“누구냐고…….”

피가 말라붙어 변색한 것처럼 검붉은 붕대로 전신을 휘감은 사내는 잔뜩 경계하는 무당 제자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모양이로군. 확실히 중원 놈들은 생각하는 게 재미있어.”

나직한 웃음소리가 적막 속에 퍼져 나갔다.

기분 나쁜 데 그치지 않고 불길하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소름 끼치는 복색에, 살기가 밴 끈적한 말투, 흘리는 기운까지 모두 기묘하게 신경을 긁으며 무당의 제자들을 불쾌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불쾌감은 백천의 곁을 지키고 선 오검이 느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조걸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저자의 기운 탓에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절대적인 강자다. 정확히는 몰라도, 확실히 태양궁주에게 그리 뒤지는 이는 아닐 것이다.

‘혈궁…….’

백천에게 들었다. 혈궁이 소림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큰 충돌 없이 물러났다고.

사패련과 한 패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혈궁이 하필이면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망할…….’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이라 했던가?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고는 해도, 저들이 좋은 뜻으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여전히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백천을 바라본 조걸이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위험해.’

지금의 백천은 불이 붙은 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작디작은 충격만으로도 바로 목숨이 끊어질 수 있다.

이는 결국, 교전이 벌어진다면 백천의 목숨은 그 순간 끝을 고할 거란 뜻이다. 게다가 맞서야 할 오검, 당군악, 무진, 심지어는 진현까지 모조리 백천 한 사람에게 기운을 부으며 묶여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지?’

조걸은 기운을 쏟으면서도 혼란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 손을 떼는 순간 백천은 죽는다. 하지만 손을 떼지 않으면 나머지 인원만으로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의 목숨이 더 중요한가? 누구를 살려야 하는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백천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 다른 이들 역시 갈피를 못 잡은 듯했다. 두 눈이 크게 흔들리는 모양이 그랬다.

‘언제 끝나지, 이 망할 치료는?’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은 허공이 이 치료를 잠시 멈추는 것뿐이지만, 이미 무아(無我)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 허공에게 이 말을 전달하기란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백척간두, 물러날 곳 없는 사지에 갇힌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안타까운 일이야.”

혈궁주 역시 상황을 완벽히 아는 모양이었다. 붕대로 덮인 그의 입가가 묘하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붉은 안광이 도는 그의 눈이 침상 위의 백천에게로 향했다.

“이전에는…… 꽤 기세등등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그 순간 조걸은 보았다. 혈궁주가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손에 점차 힘을 주는 것을.

긴장이라는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이 실이 끊어지는 순간 저들은 백천과 모두를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제발 뭐라도……. 누구라도 제발!’

그러나 조걸의 간절한 마음이 무색하게도, 혈궁주의 두 눈에서 끝내 붉은 안광이 솟구쳤다.

“우선 소림에서 진 빚부터 갚아 보실까.”

혈궁주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이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조걸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 주인 놈은.”

누군가가 입을 떼며 앞으로 나섰다.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놀란 조걸이 앞으로 나선 이를 멍하니 보았다.

‘사숙?’

백상이 저 혈궁주를 홀로 마주하며 나선 것이다. 잠시 마른침을 삼킨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주인 놈은 퇴각 명령을 내린 것 같은데, 뭐 하느라 여기에 여태 남아 있는 거지? 혹시 멍청하게 명을 듣지 못한 것 아닌가?”

뻔한 격장지계다. 심지어 목소리의 떨림조차 숨기지 못했으니 그저 발버둥처럼만 보였다. 백상은 그만큼이나 필사적이었다.

“주인?”

하지만 의외로 혈궁주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정말 그 표현이 거슬린 것인지, 아니면 독 안에 쥐를 몰아넣은 고양이의 여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주인이라……. 재미있군. 누가 감히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하물며 중원의 사파 놈 따위가?”

혈궁주의 두 눈에서 새빨간 안광이 살벌하게 쏟아졌다.

그 눈빛엔 무위와는 별개로 마주하는 사람을 절로 움츠러들게 하는 기세가 있었다. 사기(邪氣)라기보다는 사기(死氣)에 가까운 기운.

하지만 백상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 앞에서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는 순간 백천이 죽는다. 그걸 아는 백상에게 물러날 곳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인이 아니라는 건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한 분뿐이시지.”

“놈들의 명대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놈들이 할 말은 아닌 듯한데.”

“명이라……. 한심한 놈이로군. 조금 전에 제 입으로 퇴각의 명이 내려졌다며 주절대 놓고는, 앞뒤도 안 맞는 말을.”

혈궁주의 눈에 스쳤던 짧은 흥미가 빠르게 식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백상이 말했다.

“거래를 하자.”

“음?”

혈궁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몰아넣기 위한 몸짓이 아니었다. 그는 백상의 말에 진정으로 당황했다.

“……지금 거래라고 했나?”

“그래, 거래. 이곳의 말에 서툴다 해도 그 정도야 이해하겠지.”

“너희와 내가?”

“그래.”

혈궁주가 백상을 묘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마치 독 오른 독사가 전신을 훑는 듯한 감각에 백상은 온몸이 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말을 짜냈다.

“너희가 사파의 주구가 아니라면, 장일소가 너희의 주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우리와도 거래가 가능하겠지. 원하는 것을 말해라. 이곳에서 순순히 물러나 주는 대가로 원하는 것을 주겠다.”

혈궁주가 손가락을 살짝 까딱였다. 동시에 백상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백상에게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적어도 흥미는 느낄 거야.’

소림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백천에게 들었다. 이자는 자신의 세가 불리해졌다 느낀 순간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전적이 있다. 그 말인즉, 지금껏 화산이 상대해 온 이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이자가 원하는 건 이득. 그것도 자신들의 피해나 손해가 없는 완전한 이득이다. 그걸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정말 저들의 명과 관련 없이 이곳까지 찾아들었다면, 사패련은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겠지. 그렇다면 받을 것만 받고 빠져도 손해는 아닐 텐데?”

혈궁주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반응을 보인 쪽은 오히려 무당과 화산이었다.

“도장! 지금 제정신으로……!”

“조용히!”

백상이 등 뒤에서 소리치는 이를 노려보았다. 그 살기등등한 얼굴에 무당의 검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백상은 날카롭게 일갈했다.

“그 입 다물고 계십시오. 잠시만!”

그러더니 심호흡을 하고 다시 혈궁주를 응시했다.

“거래……. 거래라…….”

잠시 읊조려 보던 혈궁주가 쿡쿡 웃었다.

“그래. 확실히 나쁘지 않지. 우리야 이득만 보면 그만이니까.”

백상이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히 물었다.

“뭘 원하지?”

“재물. 그리고 영약. 아, 줄 수 있다면 질 좋은 무기도 좋겠군.”

“얼마든지 줄 수…….”

“그리고 거기에 사소한 것 하나만 추가하지.”

백상의 얼굴이 슬며시 굳었다. ‘사소한 것’을 말할 때 혈궁주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스쳐서다.

“뭔가?”

혈궁주가 턱짓으로 백상의 뒤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거기 누워 있는 놈의 목.”

“……뭐?”

“이왕이면 고통스레 잘려 나간 수급이면 더 좋겠군. 진 빚은 갚아야 해서 말이야.”

백상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굳어졌다.

“그건…….”

“아아, 이건 절대 뺄 수 없는 조건이야. 때로는 재물 따위보다 중요한 게 있기 마련이니.”

혈궁주의 두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제야 백상은 직감했다. 방금 그가 필사적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혈궁주에게는 쥐를 몰아넣은 고양이의 유희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 그럼 셋 셀 동안 놈의 목을 잘라 내게 가져와라. 그럼 나머지는 살려 주지.”

“자, 잠깐……!”

혈궁주가 기이할 만큼 길고 바짝 마른 세 손가락을 펼쳤다.

“셋.”

쫙 펼쳐졌던 손가락 중 하나가 느리게 접혔다.

백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뒤에 잔뜩 선 무당과 화산의 검수들도 일제히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둘.”

그러나 백천을 둘러싼 이들의 눈빛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하나.”

마지막 남은 손가락이 단호하게 접히고, 소름 끼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협상은 결렬이다.”

쾅!

그 순간, 혈궁주가 전신에서 붉은 혈기를 뿜어내며 백상을 향해 쇄도했다.

백상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막아야 한다. 이 자리에서 목숨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의 손이 백천에게 닿는 것만은 막아 내야 한다!

하지만 그의 검이 채 절반도 뽑히기 전에, 붕대로 감긴 혈궁주의 조(爪)가 백상의 목 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다가올 죽음을 직감하며 백상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바로 앞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쏟아진 압력에 백상은 뒤로 멀찍이 튕겨 나가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엇……?”

뭐지?

반사적으로 더듬어 보니 그의 목은 분명 여전히 몸에 멀쩡히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백상이 울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있던 곳에서 삼 장은 더 물러나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춤대는 혈궁주의 모습이.

“이, 이…….”

손을 내리자 처참하게 일그러진 혈궁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나직이 퍼졌다.

“어딜 더러운 손을 대려고 해. 말라비틀어진 게.”

“아……!”

백상, 그리고 다른 이들이 모두 움찔하며 전율했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환상이 아니다.

탁.

백상의 앞에 한 사람이 내려섰다.

“처…….”

낯익은 무복 차림의 익숙한 등을 보는 순간 백상과 다른 화산 제자들이 동시에 외쳤다.

“청명아!”

“이래 봬도 내 소중한 사숙이거든.”

목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몸을 푼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혈궁주를 노려보았다.

“자, 그럼 다시 거래해 보지. 이번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청명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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