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18화
1718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3)
검 끝에 어린 푸르고 투명하며 맑은 기운을 보는 순간, 붕대로 덮인 혈궁주의 이마에 진득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선기(仙氣)?’
무학을 익힌 이라면 모를 수 없는, 도가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채우고 있는 탁기를 완전히 정제하고 뽑아낸,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기운.
그렇기에 만사(萬邪)를 정화하고, 만마(萬魔)를 굴복시키는 기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설마…… 선기를 다룬다고?’
선기가 그리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운이라면, 세상에 사공(邪功)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물론 눈앞의 저자에게 선기가 존재한단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애초에 도가 무학을 익히는 이라면 크든 작든 조금씩은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선기이므로.
하지만 검 끝에 맺힐 만큼 유형화시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선기를 제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이들을 두고 세상은 신선이라 부르지 않던가.
그러나 신선은 죽어야 신선이다. 하면 살아 있는 신선은 대체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욱신! 욱신!
혈궁주는 꿰뚫린 제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끄…….”
선기가 파고든 상처가 마치 타들어 가는 듯했다. 단순히 피륙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다. 어깨를 타고 흐르던 그의 기운들이 낱낱이 해체당하고 흩어지는 느낌에 가깝다. 나아가 존재 자체가 부정되며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에겐 충분히 경악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청명이 검을 늘어뜨린 채 그를 일별하더니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이. 잘난 위세는 다 어디 갔지?”
땅을 짚었던 혈궁주의 손이 순간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뒤늦게야 그 추태를 깨달은 그가 바싹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일 그의 낯빛이 평범한 이들과 같고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터지도록 시뻘겋게 변해 버렸을 것이다.
“화산에…… 이런 대단한 고인(高人)이 있을 줄은 몰랐군. 선기라니…….”
혈궁주가 필사적으로 침착을 가장하며 말을 뱉었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청명의 눈빛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경멸의 빛이 노골적으로 쏟아졌다.
“벌레 새끼가 잘도 지껄여 대는군.”
“…….”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네가 하찮은 거다. 아니, 정확히는…….”
비웃음이 청명의 입꼬리에 스쳤다.
“너희의 그 잘난 교. 아니, 궁(宮)이 하찮은 거지.”
으드득.
혈궁주가 이를 갈아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교를 모독한 저자를 당장에라도 찢어발겨 버리고 싶다. 목을 조르고 방자한 혀를 뽑아 교의 제단에 바치고 싶다.
우웅.
하지만 청명의 검 끝에 어린 선기를 보는 순간 혈궁주의 모든 욕망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저것에 온전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더 이상의 전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파앗.
혈궁주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청명의 앞이 아니라, 그에게서 한참 멀어진 뒤쪽이었다.
한 손으로 어깨를 움켜쥔 혈궁주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군.”
청명이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도망가겠다는 말을 꽤 고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 네 윗대들에게는 없던 능력인데.”
혈궁주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부터 저 어린놈이 선대를 언급하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교는 원한을 잊지…….”
혈궁주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움찔했다. 그의 전신으로 가공할 살기가 쏘아졌기 때문이다.
청명의 두 눈에서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끔찍한 증오가 솟구치고 있었다.
“마구 지껄여 대지 마라. 악취 때문에 참아 주기 힘드니까.”
“…….”
“이게 끝이 아니라고?”
청명의 검 끝이 카각카각 소름 끼치게 땅을 긁었다.
“그건 너 같은 게 지껄일 말이 아니야. 내가 너희에게 해 줄 말이지. 똑똑히 들어 둬라.”
서늘한 눈빛이 혈궁주를 꿰뚫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 난 너희 같은 놈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 만큼 너그럽지 못하니까. 다만 기다려라. 언제고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날 테니. 네놈들이 어디로 숨건 세상 끝까지 쫓아가 단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목을 쳐 주지.”
“…….”
“다시는 그 꼴같잖은 사공을 익힌다고 설쳐 대지 못하도록.”
혈궁주의 입술 새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위뿐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욱신!
그가 반사적으로 뚫린 제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진득한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저 경고가 그저 경고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물러난다.”
혈궁주의 말에, 뒤를 지키던 궁도들이 영혼 없는 목각 인형처럼 일제히 몸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청명과 그 뒤의 화산을 노려보던 혈궁주마저도 이내 몸을 돌린다.
청명은 말없이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한참을 중압감에 눌려 있던 백상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혈궁도들이 무당의 산문을 거의 빠져나간 뒤였다.
“처, 청명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식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상황만 놓고 보자면 청명이 놈이 승기를 잡은 와중에 저놈들을 그냥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놈들을 그냥 보내 주는 거냐? 저놈들은…….”
그때, 청명이 몸을 획 돌리더니 백상의 곁을 지나 빠르게 검수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청명아?”
청명이 그렇게 쏜살같이 도달한 곳은 허공이 백천을 치료하고 있는 침상 앞이었다.
이내 백상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혈궁의 침입 탓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백천을 치료하고 있는 허공의 전신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크기도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아!’
그제야 백상은 깨달았다. 만일 청명이 그대로 놈들과 교전을 벌였다면, 결국 허공은 백천을 치료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건, 아니면 갑작스레 등장한 혈궁의 사기에 허공이 동요했기 때문이건 간에.
청명이 백천의 머리맡에 서자 필사적으로 기운을 불어넣고 있던 모두가 황급히 그를 응시했다. 청명은 그런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백천의 상태를 살폈다.
“잘도…….”
작게 흘러나온 말은 끝맺음하지 못하고 흐려졌다. 그렇게 흩어져 버린 말끝에 숱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신호하면 기운을 거둬요.”
청명의 말에, 백천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다해 막고 있던 모두가 두 눈을 치떴다.
지금 기운을 거둔다면 백천의 몸속을 채우고 있던 기운은 모조리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백천의 생명을 붙잡아 둘 작은 기력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이 말에는 따를 수 없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손으로 백천의 목숨을 끊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눈빛으로 모두를 응시했다. 그 누구도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상황. 의외로 가장 먼저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조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아무리 말을 꺼낸 게 청명이라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하지만 청명의 신호는 그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떨어졌다.
“지금!”
파앗!
신호가 입술 밖으로 뛰쳐나온 순간, 조걸의 손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백천에게 닿았던 손들이 동시에 거둬졌다.
“으!”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조걸과 윤종은 바짝 긴장한 채로 백천과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청명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구 새어 나오는 기운을 막지도 않고, 백천의 몸을 보호해 주지도 않았다.
“엇!”
화아아아악!
모두가 지금껏 가두었던 기운이 백천의 몸에서 빠져나와 사방으로 뻗쳤다. 조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이러다……!”
“조용!”
청명은 단호하게 조걸의 고성을 눌러 버리고는 백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가둬 두는 게 능사는 아냐. 넘치는 건 흘려 내야 해.”
“……뭐?”
모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이라고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었겠는가. 지금은 물이 흘러넘치는 작은 충격에도 그릇이 깨어져 나갈 상황이니 문제였던 거다.
백천의 몸은 이 충격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아, 안…….”
다급해진 윤종이 저도 모르게 다시 백천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그런데 그 순간, 청명의 손에서 실로 맑은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청정의 극에 달한 기운.
모두가 순간적으로 현재 상황마저 잊은 채 넋을 놓을 정도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청명의 두 눈에 더없이 심유한 눈빛이 떠올랐다.
“사숙이라면 버틴다.”
그가 아는 백천이라면, 고작 이런 충격으로 죽지 않는다. 백천은 그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이니까.
우우우우웅!
이윽고 청명의 선기가 백천의 명치로 파고들었다.
“아!”
그 순간 모두는 보았다.
호수에 파문이 번지듯, 청아한 청명의 기운이 백천의 전신으로 번져 가는 모습을.
허공의 유도에 저항하며 마지막까지 성난 황소처럼 날뛰던 기운은 청명의 선기와 맞닿기 무섭게 순한 양처럼 수그러들었다.
‘이건……?’
당군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선기가 기운을 굴복시킨 게 아니다. 흡수하거나 뒤섞어 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잦아들게 한 것이다. 마치 선기로 만들어 낸 호수가 모든 것을 깊디깊은 아래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광경이다. 극양과 극음. 그 두 가지 기운이 백천의 몸속에서 충돌 없이 공존한다. 해와 달이 한 하늘에 뜨고, 밤과 낮이 한세상에서 맞닿는다.
‘선(仙).’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별천지.
세상이 선계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공존할 수 없는 것이 공존하는 세상을 의미함이 아닐까?
그렇게 청명이 가라앉힌 기운을 허공이 흘린 기운이 천천히 감싸며 휘돌았다. 무당의 정수에 이끌려 백천이라는 그릇 안에서 느리게 돌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웅.
동시에 백천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바싹 타 버렸던 팔이 천천히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한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나, 적어도 ‘팔’이라는 형태를 이루어 갔다.
“아…….”
당군악은 넋을 놓은 채 탄성을 흘렸다.
우우우우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의 몸을 휘감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털썩.
“도장!”
허공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많은 사람이 황급히 달려가 부축했다. 동시에 청명 역시 백천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처, 청명아. 사숙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뜬 청명은 백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정도로는 안 죽어.”
차분한 두 눈엔 확고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화산의 장문대리라면 말이야.”
“아아…….”
백상과 몇몇 화산 제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태산처럼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