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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25화


1725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5)

불어온 바람이 옷자락을 스친다. 청명은 눈을 감은 채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차갑다.

화산만큼은 아니라 해도, 이곳 무당의 산바람 역시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어쩌면 이 한기는 본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야 할 곳에 기어이 터를 일구며 사는 이들에 대한 산의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갈구한다면 결국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게 될 거라는…….

공기의 흐름이 살짝 이지러진다는 느낌을 받은 청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한 사람이 어느새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고?”

“새삼스럽네.”

그녀의 짧은 말에, 청명은 흘끗 옆을 곁눈질했다. 푸른 기와와 파란 하늘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전각 지붕 위. 확실히 언젠가부터 청명은 이곳에 잘 오르지 않았다.

왜였을까?

굳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 것 같지만, 청명은 굳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지금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인정해 버려야 하니까.

대신 청명은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유이설은 대답 없이 처마 아래로 보이는 무당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지만, 청명은 구태여 재촉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할 말이 많았어.”

“…….”

“그런데…….”

그녀가 지붕 위에 누운 청명을 일별했다.

“할 수 없을 것 같네.”

청명의 눈썹이 짧게 꿈틀했다. 무언가 기분이 나쁘기라도 한 듯.

“그래서 왜 왔…….”

“정말 방법이 없어?”

유이설이 청명의 말허리를 잘랐다.

청명은 입을 닫았다. 먹먹한 무언가가 목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백천 사형.”

“…….”

“너도 방법이 없는 거야?”

두 사람의 눈이 잠깐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그러나 먼저 고개를 돌려 버린 건 청명 쪽이었다.

“나라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유이설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변화 없는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손끝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먼 하늘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청명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던 유이설이 말했다.

“너답지 않네.”

“…….”

“맞는 말이야. 다만.”

유이설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렸다.

“예전의 너라면, 방법은 만들면 그만이라고 했을 거야.”

“…….”

“그리고 믿었겠지,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사락.

몸을 돌리는 유이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청명의 귓가에 닿았다. 꺼슬꺼슬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방법을 찾을 거야. 아직 너처럼 어른은 되지 못했으니까.”

곧 유이설의 기척이 사라진다.

삽시간에 느껴지는 부재가 허무를 넘어 씁쓸하게까지 느껴졌다. 청명이 짧은 한숨을 토했다.

“사형.”

창공에 청문의 얼굴이 보인다. 안쓰러운 듯 그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문이.

“쉽지 않네요, 정말…….”

* * *

사라락.

우뚝 솟은 산봉우리로도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너른 소매에 비해 안에 든 팔이 너무도 앙상해서일까. 유독 소매가 심하게 펄럭였다.

‘차갑네.’

백천이 조소를 머금었다.

몸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이 정도도 버티기조차 쉽지 않다. 과거였다면 시원하다 느꼈을 바람이 지금은 북해의 칼바람보다 더욱 서늘하고 시리다.

그럼에도 지금의 백천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저 아래, 타인의 시선이 닿는 따뜻한 곳보다는 춥고 힘겹더라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좋다.

문득 그의 생각이 청명에게 미쳤다.

아마 그래서 청명이 녀석이 예전에 틈만 나면 전각 지붕에 올랐던 모양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럼 머릿속에 혼란하게 들어찬 생각을 행여나 들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녀석도…….’

그때의 놈도 지금 백천과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백천이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다르겠지. 다를 수밖에 없겠지. 그때의 청명이 어떤 고민을 품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에게는 남은 미래가 있었으니까. 지금의 백천처럼 암담한 밑바닥에 처박혀 있지는 않았으니까.

발아래로 까마득한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불에 까맣게 타 버려 이젠 흉물스러웠다.

물론 영원히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고 해도, 다시금 굳세게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날 테지. 산은 더디게나마 끝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갈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그럴 수 없다. 그는 저기 보이는 무너진 절벽과도 같다. 한번 무너진 이상 다시 돌릴 방법이 없는, 으스러진 암석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생각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백천의 뇌리에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 * *

“……무슨 소리야?”

백천이 물었을 때 진금룡은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이 더없이 선명했다.

“……방법이 있다고?”

“그래.”

백천은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몸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

진금룡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똑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윽고 백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개소리하지 마. 화산도, 당가도 불가능하다고 한 일이야. 그런데 종남이 어떻게? 날 놀리려거든……!”

“정신 차려라.”

백천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금룡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화산이나 당가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문파였더냐?”

“…….”

“그들이 할 수 없다고 해서 종남도 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거냐? 종남이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대단한 문파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부인할 수 없었다. 백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확인하고 싶다면 다시 말해 주마.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종남은 할 수 있다. 종남의 총력을 동원한다면 네 몸쯤은 얼마든지 고쳐 줄 수 있다.”

창백하게 말라붙어 있던 백천의 입술이 쩌적 갈라지며 피가 비쳤다. 타는 듯한 갈증이 온몸을 휩쌌다. 그 갈증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육신을 으스러뜨릴 것 같던 고통도, 이런 비참한 꼴로 진금룡을 마주했다는 굴욕감도 애초에 없었던 듯 느껴지지 않았다.

“고칠…… 수 있다고……?”

진금룡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완전히는 무리일지도 모르지.”

“…….”

“네가 가장 완벽했던 때로 단번에 돌이키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의원이 아닌 나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네가 다시 무학을 익힐 수 있게끔 만드는 건 가능할 것이다.”

진금룡이 앙상해진 백천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 가벼운 붓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애처로운 팔을.

시선조차도 버거운 것처럼 백천의 손끝이 순간 움찔했다.

“그 손으로 다시 검을 잡고…… 다시 무학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

“…….”

“네가 화산의 제자이길 포기하고, 종남의 문하가 된다면 말이다.”

진금룡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하지만 백천조차 알 수 있었다. 차가움을 가장한 저 목소리에 간절한 진심이 담겨 있음을.

“이건 네가 화산을 버리는 게 아니다. 네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너는…….”

“……져.”

“뭐?”

그 순간, 백천의 이가 아랫입술을 꾹 파고들었다.

“개소리 다 했으면 꺼져.”

“…….”

“나는 화산의 장문대리다. 이런 꼴이 되었더라도 그건 바뀌지 않아.”

내내 냉정해 보이던 진금룡의 얼굴이 마침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진동……!”

고함을 지를 듯 확 달아올랐던 그가 가까스로 말끝을 억누르며 참았다. 붉어졌던 얼굴도 도로 희게 돌아왔다.

고성 대신 긴 한숨을 뱉은 그가 다가와 백천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놔. 뭘 하려는…….”

“가만히 있어라. 저항도 못 하는 놈이!”

진금룡은 쓰러진 백천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상에 기댈 수 있도록 조심스레 그 몸을 앉혀 준 후 미련 없이 일어섰다.

헐떡이며 바라봐 오는 백천을 서늘하게 일별한 진금룡이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내가 성급했다.”

“…….”

“하지만 모두 빈말이 아닌 진심이다. 너만 결심한다면 장문인께서도 크게 환영하실 것이다.”

“나는……!”

“닥치고 더 들어라!”

진금룡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화산에 대한 너의 진심을 가벼이 여겨서 이리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종남 역시 네게 진심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회복이 완전할지 장담할 수도 없는 네게 문파의 귀보를 주저 없이 내어줄 만큼!”

“…….”

“선택은 너의 몫이다. 네가 돌아온다면, 뒷일은 모두 나와 종남이 감당하겠다.”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진금룡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방을 나서고는, 느리지만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닫힌 문 너머에서 진금룡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동룡아.”

“…….”

“나는 네 형이다. 그리고 종남은 네 가족이다.”

백천이 앙상한 손을 저도 모르게 주먹 쥐었다.

“그걸 잊지 마라.”

발소리와 함께 진금룡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진금룡이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던 백천이 시선을 떨구었다.

제대로 쥘 수 없어서 그 가치를 잃고 만 붓이 아직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백천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하핫…….”

씁쓸하고 힘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 * *

지난밤의 대화를 떠올리며, 백천은 바람 때문에 시린 눈을 반개했다.

황량하게 타 버린 산, 그 너머로 펼쳐진 들판은 여전히 광활하고 푸르렀다. 변해 버린 모습을 한탄하는 게 초라해질 정도로.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화산의 장문대리다.”

그럴 때마다 백천은 몇 번이고 이 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백천의 자부심이고, 백천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곧 사라질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 자리는 곧 윤종이나 백상이 이어받을 것이고……. 어쩌면 청명이 전면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백천은 조금씩 물러나게 될 것이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섭섭하다고 여긴 적은 없다. 이는 백천의 바람이기도 하고, 또 당연히 그리 흘러야 할 일이니까.

그저 씁쓸할 뿐이다.

상처는 언젠가 새 살로 덮이고, 감정 역시 언젠가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지금 백천을 바라보는 이들의 서글픔도 언젠가는 빛이 바랠 것이다. 그는 그저 이리 존재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잃은 빛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 더욱 찬란히 쏟아질 것이다. 윤종, 조걸, 유이설, 당소소, 혜연, 그리고…….

백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찬란함을, 이제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한다는 게 씁쓸할 뿐이다.

사실은 그에게도 있었을 테니까. 그들과 함께 빛나는 미래가. 어쩌면 그들보다 더욱 찬란했을지도 모르는 미래가.

스스로 놓지 않았느냐고?

맞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오히려 미련이 덜했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욱더 미련이 남는 것이다.

백천은 이내 나직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알고 있다. 그가 몸을 고치기 위해 종남으로 가겠다고 하면 그의 사형제들은 오히려 기뻐해 줄 것이다. 소속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고 외려 그의 등을 떠밀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백천은 또한 알고 있다. 그 선택이 언젠가는…… 그들과 백천의 길을 갈라놓을 거라는 사실을. 설령 길이 갈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두 번 다시 그들과 한 형제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아니, 무엇을 바라는가.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앙상한 팔과 하늘을 번갈아 보던 그때였다. 뒤에서 돌연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방해할 생각은 아니네만…….”

살짝 놀라 돌아보니, 이제는 낯설다고 하기 어려운 이가 서 있었다.

“여긴 내 자리라네.”

“아…….”

당황하여 작게 탄성만 흘리는 백천을 보며, 허공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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