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72화
1772화.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7)
십여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맹은 혼란에 휩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밤에 복귀하지 않은 이들이 그 십여 명 외에도 더 있다는 사실까지 전해졌다. 혼란은 공포로 바뀌어 갔다.
복귀하지 않은 이들의 행적은 곧 드러났다. 간밤에 목숨을 잃은 초병의 수가 서른에 달한다는 것도 함께.
이젠 ‘혼란’이나 ‘공포’라는 말로는 맹의 상황을 다 표현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용위경이 언성을 높였다.
“서른입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자그마치 서른을 잃었단 말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진정하십시오, 모용가주님.”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모용위경의 수염이 노기에 파르르 떨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간밤에 희생된 이들 중에는 모용세가의 사람도 있었으므로.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용가주를 진정시키고 나선 이는 개방의 전대 방주, 풍영신개였다.
“중요한 건 그들이 초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적을 경계해야 할 이들이 호각조차 불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이는 쉬이 넘길 일이 아닙니다.”
“……상대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풍영신개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 패군이 직접 나섰다고 해도 그만한 이들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여럿이었다면…….”
모용위경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수가 많다고 해도 그만큼 속도가 빨라지진 않는다. 호각 한번 불지 못하고 당한 일은 납득할 수 없었다.
“으음.”
여기저기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황을 비교적 냉정하게 보는 이가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종리곡이었다.
“관건은 거리겠군요.”
당군악이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거리라 하셨습니까?”
종리곡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뻔한 말이지만, 누구도 호각을 불지 못했다는 말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당했다는 소립니다.”
“……그렇겠지요.”
“상대가 당가주님처럼 비도의 고수가 아닌 이상, 이만한 이들을 한 번에 베어 내기 위해서는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으음.”
맹소가 나직이 탄식했다.
경계하라고 보낸 이들이 적이 지척에 접근하도록 알아채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말도 안 되지만…… 그게 아니면 확실히 설명할 방법이 없겠군.”
맹소의 중얼거림에, 다들 침묵으로 동조했다.
결국 간밤에 일어난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는 적이 어떻게 초병의 인근까지 접근했는가를 논해야 한다.
“적의 무위에 대해선 접어 둡시다. 경계를 위해 나선 이들의 면면을 보아, 상대가 누구든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알아채지 못하고 접근을 허용할 만큼 약하지 않았습니다.”
당군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혹시 모를 침입에 방비하기 위해 번을 서는 이들을 신경 써 선별하라고 당부했던 이가 바로 당군악이므로.
“그럼 대체 무슨 수를 썼다는 겁니까?”
“극도의 은영술이라면…….”
“말도 안 됩니다. 은영술을 전문적으로 익혔다면 접근이야 가능할지 모르지만, 무학의 특성상 십여 명을 동시에 베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이라면 이미 천하제일살(天下第一殺)이라는 칭호를 얻고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을 겁니다.”
제갈자인이 냉정하게 가능성을 차단했다.
“하면, 섭혼은 어떻습니까?”
“그 또한 말이 안 됩니다. 사술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홀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계를 서는 이들을 삽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홀리는 방법 따위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으음. 확실히…….”
의견을 나눌수록 가슴속이 갑갑해져 왔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적이 대체 어떤 방법으로 번을 서던 이들을 참살했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리던 당군악이 문득 멈칫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녹림왕?”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느리게 부채질하던 임소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제 의견을 물으신 겁니까?”
“그렇다네.”
“흠. 흐음음.”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딱히 제 의견이 그리 중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무슨 의미인가?”
“설명해 드려도 이해하실지가 좀.”
당군악의 표정이 슬그머니 굳어졌다.
임소병이 능글맞게 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농을 나누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잖은가.
그때, 임소병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애초에 논의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음?”
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당군악이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임소병을 응시했다.
하지만 임소병은 당군악 대신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확실히 가능성이야 여러 가지 있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은영술에 뛰어날 수도 있고…… 섭혼의 대가가 모두를 홀려 버린 걸지도 모르지요.”
“…….”
“아, 어쩌면 당 가주님을 뛰어넘는 암기의 고수가 멀리서 일수에 모두의 숨통을 끊어 버렸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개방주를 뛰어넘는 신법의 고수가 바람처럼 날아들어 저들의 목을 슥삭 베어 버린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녹림왕.”
임소병의 목소리에 스민 희미한 웃음기를 조롱으로 받아들인 종리곡이 차갑게 말했다.
“지금 그 발언을 우리에 대한 능멸로 여겨도 되겠소?”
서늘한 종리곡의 눈빛이 임소병을 꿰뚫을 듯했다. 종리곡은 애초에 사파 출신인 임소병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와중에 조롱까지 받으니 참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던 것이다.
평범한 이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도 남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임소병은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능멸이라니요. 설마 제가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진심으로.”
임소병이 능글맞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종리곡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한심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따로 있으니, 굳이 그런 부분까지 붙들고 조롱할 필요는 없지요.”
“……뭐라 했소, 지금?”
순간, 임소병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말 그대로입니다. 섭혼의 대가, 은영의 귀재, 암기술의 고수, 신법의 달인. 그중 누구라 해도 천하를 한 번쯤 뒤흔들고도 남을 능력을 갖춘 이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당연한 말 아닌가?”
“당연?”
임소병의 눈매가 크게 휘어졌다.
“확실히 사파가 정파보다 나은 점도 있군요. 종남이 사파였다면, 그런 안일함으로는 절대 수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텐데.”
“네 이…….”
종리곡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 남궁도위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
“나는 아둔해서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재미있는 광경을 중간에 끊었다는 듯, 임소병이 못마땅한 눈길로 남궁도위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남궁세가도 큰일이라니까.”
“설명부터.”
“설명이 왜 필요하지? 네가 장일소라면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이에게 무슨 지시를 내릴 건데?”
“……무슨 말이냐, 그게?”
“그런 이에게 고작 번 서는 초병들 목이나 썰고 다니라고 할 텐가? 적당히 겁이나 좀 주려고?”
그 물음에, 남궁도위를 포함한 모두가 무언가 깨달은 듯 흠칫했다.
확실히 임소병의 말대로다. 이만한 일을 벌일 만한 이의 능력과 결과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어려운 것과 대단한 것은 다른 개념이다. 번을 서는 이들을 소리도 소문도 없이 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대단한 일이라 볼 수는 없다. 냉정히 따지면 서른 명에 불과하니까.
“겨우 이해하신 모양이네.”
임소병이 혀를 차다가 손목을 한차례 움직였다. 허공에서 넓게 펼쳐진 부채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중요한 건, 그 작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죠.”
“그 말은…… 다른 노림수가 있단 말인데, 놈들이 무엇을 노린단 말인가?”
“그건 나도 모르죠.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까.”
당군악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임소병을 탓할 일이 아니다. 생각을 여기까지 넓혀 준 것만으로도 그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그럼에도 당군악이 얼굴을 굳힌 까닭은, 적들의 진짜 노림수를 빨리 알아채지 못한다면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천막 안은 어느새 침묵에 잠겼다.
“그럼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누군가 힘없이 던진 말에 당군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의도도 방법도 모르는 적에게 대응하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 무당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진을 친 천우맹으로서는 가능한 대처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한곳에 모일 수라도 있다면…….’
하지만 그게 어렵다는 건 누구보다도 당군악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우선은 번을 서는 이들의 수를 늘립시다.”
“고작 그걸로…….”
뭔가 말하려던 종리곡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나설 상황이 아니거니와, 그라고 해서 딱히 별다른 대처법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다행인 점은, 저들도 양민들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는 겁니다.”
“…….”
“만일 여기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대처하려 든다면, 그 공격이 재개될 겁니다.”
“으음.”
“아직은 피해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으니, 우선은 지켜봅시다. 다만 이 이상 피해를 늘려서는 안 됩니다.”
배석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면면에 숨길 수 없는 불안과 불만이 떠올라 있었다.
당군악이 몰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구나.’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었다. 그의 능력과 인망만으로는 이 많은 이들을 이끌기 어려움을.
‘우선은……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게 내 역할이다.’
적들이 무엇을 노리든 간에, 결코 쉬이 내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 * *
“형님.”
“…….”
“……형님.”
“입 다물고 경계해라.”
“……예.”
당규(當揆)가 조금 기죽은 얼굴로 다시 앞을 응시했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건 딱히 경계할 것도 없는 넓은 초지였다. 당가인들의 안력이라면 백 장 밖에서 움직이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마저도 놓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탁 트인 초지를 내내 감시하라니. 어떤 의미로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형님.”
“이놈이…….”
다시 언성이 높아지려는 찰나, 당규가 재빨리 입을 열어 선수를 쳤다.
“어제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무슨 소리냐?”
그 질문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지, 그게 아니면 화를 내던 이조차도 내심 이 지루한 경계에 지쳐 있었던 건지, 호통 대신 대답이 돌아왔다. 당규가 조금 신이 나서 물었다.
“형님도 듣지 않았습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그러니 경계를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할 것 아니냐?”
“어제 섰던 놈들이라고 경계를 허투루 했겠습니까? 당장 사파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혹시…… 정말로 혹시나 말입니다.”
“응?”
“경계에 실패한 게 아니라, 경계할 일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적이면 경계를 하겠지만, 적이 아니면 경계할 일이 없잖습니까? 예를 들면…….”
“너 설마 지금 내부를 의심하는 거냐?”
“내부라니요? 지금 맹에 어중이떠중이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놈들이 언제부터 전부 내부인이었습니까?”
“…….”
“사실 저는 예전부터 의심했습니다.”
“누굴?”
“제갈세가와 모용세가 말입니다. 정체도 모르는 놈들에게 가로막혀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아직 그놈들이 누군지 우린 구경도 못 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만해라.”
“아니, 제 말은…….”
그 순간이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뒤쪽에서 불쑥 들려온 말소리에 흠칫 놀란 이들이 황급히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들의 두 눈엔 안도감과 난처한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당군악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가주님.”
당가인들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경계를 빈틈없이 하란 명령을 하달한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의 가주였다. 성심껏 명에 따라도 모자랄 가솔들이 되레 당군악의 명을 어긴 꼴이 되었으니,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지척까지 다가온 당군악이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이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상황은?”
“……이상 없습니다.”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온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죄송합…….”
연신 사과하던 당규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뭐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위화감이 그를 휘감았다.
“중요한 건, 너희가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이지.”
“가주…….”
고개를 슬며시 든 당규의 표정이 일변했다.
“너……! 가주님이 아니…….”
파아아앗!
허공에 피어난 섬뜩한 선이 그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당군악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진짜 당군악이라면 결코 짓지 않을 사특한 미소였다.
“그러니 경계를 철저히 했어야지. 쯧쯧.”
털썩.
털썩.
목이 베인 이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마지막 순간 눈앞의 이가 당군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긴 했으나, 이것이 이들에게 위로가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쓰러진 이들을 벌레 보듯 일별한 당군악, 아니 그의 생김새를 모방한 천면수사의 얼굴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긴 밤이 되겠군.”
그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너른 공터에 식어 가는 두 구의 시신만이 남아 옅은 피비린내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