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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78화


1778화. 그럼 어디 확인해 보지. (3)

“…….”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송원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마치 전해 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날 진송원이 느꼈을 비참함, 비통함,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던 인간의 한이.

그렇기에 백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뒤집어쓴 복면으로도 그 초췌함을 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낡아 버린 한 사람을.

“그 뒤는…….”

진송원이 다시 담담히 입을 뗐을 때, 백천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처음이었다. 그리 적의가 어려 있지 않은 말이 이토록 폐부에 박혀 오는 듯한 기분은.

“예상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겠지.”

“…….”

“개는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는 법이니까.”

아니, 적의는커녕 자조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실망도 허무도 없었다.

어쩌면 백천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한때 진송원이라 불렸던 이의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이미 예전에 텅 비어 버린.

백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막아선 것입니까.”

“…….”

“개를 자처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로 이미 다짐해 버렸기 때문에?”

진송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백천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 다시 질문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제갈세가와 모용세가 앞을 가로막은 것입니까? 장일소가 지시했다는 이유로? 그 대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 정말 모르셨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점차 격해졌지만, 진송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백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끝낼 수도 있었던 전쟁입니다. 그랬다면…….”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백천도…… 여전히 당당한 화산의 제자로 남아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지 모른다. 날개가 꺾여 버린 지금의 처지와는 다르게.

그 모든 가능성을 이들이 망쳐 놓았다.

“대체 왜!”

백천의 언성이 높아졌다. 분노로 숨도 살짝 가빠졌다.

그의 호흡이 느리게 가라앉았을 즈음에야 진송원이 입을 열었다.

“하나 묻지. 한 사람과 백 사람 중 어느 쪽을 구할 텐가?”

뜬금없는 물음에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답해 보게.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구하는 게 옳은가?”

백천은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벙긋거리기만 하다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고 말았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진송원이 쿡쿡 웃었다.

“올곧군. 올곧아. 부러울 정도로.”

“…….”

“내가 대답할 차례인가? 그래, 알고 있었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그게 얼마나 많은 죽음을 초래할 것인지. 차라리 몰랐다면 좋겠지만, 분명 알고 있었다네.”

그들은 소림을 돕기 위해 온 지원군을 막아섰다. 사파를 물리칠 영웅들을 방해했다. 어쩌면 세상의 운명을 크게 바꿀 수 있었을 한 수를, 법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안배했던 그 한 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때 그들은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날은 법정에게 기회였던 동시에, 어쩌면 그들에게도 기회였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또다시 복종하기를 택했다.

“왜일까? 글쎄……. 사람은 생각하지만, 개는 따르기 때문이겠지. 아니, 어쩌면 한낱 미물조차도 제 새끼는 어여삐 여기기 때문이겠지.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나?”

“……수천의 목숨입니다.”

“그래, 그랬지. 그랬었지.”

진송원이 나직이 웃었다. 조금 전에는 엿보이지 않았던 허무가 표정에 묻어났다.

“장일소는 참으로 철두철미하더군. 아이들은 여전히 운남에 갇혀 있네. 우리의 손이 닿지 않을 거리지.”

“…….”

“우리가 만일 저들의 명을 거역하는 순간, 그 아이들은 모두 죽게 될 걸세. 아니, 그냥 죽지도 못할 거라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겪고 죽게 되겠지. 그저 내 눈에 띄어 점창에 몸을 담았었단 이유만으로 말일세.”

진송원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서 소림과 함께 죽어 간 이들은 적어도 제 의지로 싸우러 갔던 이들이니 형편이 낫지 않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럼?”

진송원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핏발이 불거져 있었다. 이는 단순한 분노가 아닌 울분과도 같았다.

“외면이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운이 없으니 받아들이라며 혀라도 차라는 건가? 아직 뼈도 채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 갈기갈기 찢겨 죽어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고개라도 내저어야 했나?”

“…….”

“내가 어찌 했어야 하나?”

“장문인.”

“대답해 보게.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는지. 무엇을 했다면 자네가 지금 나를 탓하지 않았겠나?”

백천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답을 알고 있음에도,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과연 백천이 저 입장에 놓였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백천이 진송원의 입장이었다면, 인질로 잡힌 이들이 유이설이라면, 윤종이라면, 조걸이라면, 당소소라면…… 몇 번이고 목숨을 바쳐 지켜도 아깝지 않을 화산의 사형제들이라면.

그들이 마수에 걸려들었다면, 백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사패련을 공격할 수 있을까? 그들의 처참한 죽음을 결정 지을 용기가 생길까?

‘나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오검에게는 말이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천이 자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사형제들이 사패련의 영광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라면?

스스로 검을 들지도 않은 아이들이 대상이라면, 그때도 정말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고사리 같은 손에 백천과 청명이 수없이 논해 왔던 무인으로서의 책임을 쥐여 주는 게 맞을까?

“수천의 목숨과 수십의 목숨. 같지 않겠지. 같을 수가 없지. 그딴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어차피 이제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을.”

과연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백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일그러져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세상은 올곧고 단순했다. 옳고 그름이 절대적으로 나뉜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기란 힘겨울지언정 고통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경계가 허물어졌다.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는 세상이 늪처럼 그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고뇌에 빠진 백천의 얼굴을 보며 진송원이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군.”

“…….”

“가증스럽게도 말이야.”

툭 던져진 그의 말에서 진득한 감정의 찌꺼기가 느껴졌다.

백천이 진송원을 쏘아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대들이 점창이 아닌 당가를 선택했을 때부터 점창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익히 짐작했을 텐데?”

백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진송원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허탈한 그 웃음소리는 황량한 천막 안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이보게.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나? 사실은 다 알고 있었잖은가.”

“저는…….”

“점창과 운남의 수많은 이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점창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인 어린아이들까지 저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거란 사실을 자네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뭘 그리 새삼 안타까운 척하나?”

백천의 손끝이 떨렸다.

“왜?”

진송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복면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똑똑히 보였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뒤틀림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먼 타지에서 이미 사라졌어야 할 이들이 기어코 나타나 묻어 둔 것을 들춰내니 불쾌하기라도 한가?”

“무슨 말을…….”

“아닌가?”

진송원의 웃음이 끊길 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지? 가관이로군. 동경이라도 있으면 지금 자네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을 정도라네.”

“…….”

“걱정하지 말게. 원망하려는 건 아니니까. 내 아무리 이젠 사람 취급받지 못할 종자라고 해도, 일면식도 없던 화산과 천우맹에 책임을 돌릴 만큼 후안무치하지는 않네. 그저…….”

진송원의 시선이 백천을 꿰뚫는다.

“뻔히 알던 사실에 새삼 고뇌하는 듯한 자네의 얼굴을 보자니, 내 안에 아직 역겨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만한 인간성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로군. 아니, 사람은 원래 그런 걸지도 모르지.”

진송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천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를 제지하지도 못했고, 무언가를 묻지도 못했다.

어차피 대답은 없을 테니까.

진송원이라 불렸던 이는 이미 예전에 죽었다. 여기에 있는 건 이미 죽은 진송원의 원념일 뿐이다. 죽어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럼에도 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기는 했다. 백천의 목소리가 돌아서던 진송원을 잡아 세웠다.

“왜…… 저를 도운 겁니까?”

“…….”

“그렇게 원망스럽다면 어째서?”

진송원은 대답 없이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그의 입에서 바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글쎄……. 어쩌면 자네와 우리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여겨서였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저 변덕일지도 모르고.”

“…….”

“하지만 또 어쩌면…….”

진송원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나가 버린 후, 백천은 천막에 홀로 남겨졌다. 말을 듣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벅. 저벅.

백천이 진송원을 뒤쫓듯 터덜터덜 움직여 천막 문을 걷어 젖혔다. 질식할 듯 답답하고 컴컴했던 천막을 벗어나기 무섭게 따가운 햇볕이 눈을 파고들었다. 여전히 하늘은 맑고, 태양은 눈 부셨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것처럼 이곳저곳에 주저앉은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천막에 들어오기 전, 백천은 저들을 어떻게 보았던가. 그리고 지금 보는 시선은 또 어떤가.

많은 게 달라졌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그저…….’

진송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은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 어쩌면 그저 누구 하나만큼은 알아주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진송원은 백천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머물라고 하지 않았고, 떠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한 뒤 떠나갔을 뿐이다.

그러니 나머지는 순전히 백천의 의지에 달렸다.

한참 천막 밖을 내다보던 백천이 느릿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래 버린 다른 이들처럼, 그 자리에 서서히 침전해 들어갔다.

* * *

“……달뢰라마인가?”

잠시 의문으로 일렁였던 청명의 눈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과거, 북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쳤던 홍안의 소년.

청명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무언가가 달랐던 게 기억이 났다. 그랬던 소년이 이젠 과거의 조각을 간직한 채 푸릇한 청년이 되어 청명의 앞에 서 있다.

‘삼아승지겁이라 했었나?’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모습으로 했던 말이 여전히 청명의 기억 속에 화인처럼 남아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를 찾아온 건가?”

달뢰라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시주.”

“……어째서?”

“당신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게 당신과 제 사이에 놓인 운명이니. 하지만…… 지금의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무슨…….”

달뢰라마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없이 깊은 눈빛이 금방이라도 청명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러니 우선은, 당신의 후회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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