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54화


군림천하 (954)

노해광은 산해루의 삼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었다.

소마 일행을 상대할 계책을 세우고 그 대비를 하느라 한동안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고 다녔기에 노해광으로서는 모처럼 집무실에 들어온 셈이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방 안의 공기도 달라진 것 같고 분위기마저 새롭게 느껴졌다.

노해광은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민감하면 빨리 늙는다는데, 내가 나이를 먹은 건가?”

그는 요새 부쩍 자신이 나이를 먹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해는 특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의 노해광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해광은 집무실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더니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 듯 중앙의 화려한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 의자는 다소 평범하고 무난한 실내와는 어울리지 않게 크고 화려해서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노해광은 이 의자를 무척 아껴서 산해루에 있을 때는 집무실 주위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의자에 앉은 노해광은 예의 철면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기다림이란 정말 지루하고 힘들군.’

정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힘든 거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정해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노해광은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안 오면 어쩌나 의심이 드는 거냐?”

정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몇 번이나 검토하여 결정한 계획이지만, 사숙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의 계획이란 언제든 어긋날 수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

“다른 때라면 계획이 어긋나더라도 고치거나 바꿀 기회가 있지만, 이번 일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어쩌긴요.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답답해서 넋두리 좀 해 봤습니다.”

“싱거운 녀석. 우리 계획은 완벽하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니 그렇게 세상 고민을 다 떠안은 놈처럼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우거지상이라뇨. 그래도 제가 복스러운 상이라고 하던데요?”

“누가 말이냐?”

정해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누구긴요, 제 아내지요.”

노해광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긴장을 풀고 싶은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두 사람은 팽팽한 긴장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대형, 온 것 같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지일환이었다.

평소 노해광의 집무실을 이런 식으로 급하게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해광이 그 점에 대해 지적할 법도 했으나 지금은 그도 마음이 급했는지 즉시 물었다.

“왔으면 온 거지, 온 것 같다는 게 무슨 말이냐?”

지일환은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용모파기로 보아 비슷하긴 한데, 본인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노해광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비슷한 용모란 말이지?”

“예, 그림으로 그려진 얼굴 특징도 유사하고, 무엇보다 체형과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닮았습니다.’

얼굴은 숨길 수 있지만 체형과 걸음걸이 같은 건 쉽게 숨기거나 따라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이 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하고 있다고?”

“예. 너무 태연히 안으로 들어와서 식사를 하기에, 그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흠. 소문으로 듣던 성격과는 다르군. 불문곡직하고 내 방으로 쳐들어올 줄 알았거늘.”

옆에서 듣고 있던 정해가 신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만큼 이번에는 그자도 나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노해광은 정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소마라도 제자들과 수하들이 모두 죽은 이상 얼마쯤의 경각심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자가 언제쯤 식사를 마칠 것 같으냐?”

“제가 조금 전에 올라올 때 절반 정도 먹은 상태였습니다.”

“그럼 머지않았군.”

“준비할까요?”

지일환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묻자,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층부터 조금씩 손님들을 빼내도록 해라. 대부분이 산해루의 오랜 단골들일 텐데, 이곳에서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뻔한데도 그냥 내버려둘수는 없지.”

“그자가 바로 알아차리지 않겠습니까?”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지금이라고 그자가 모르겠느냐? 어차피 손님들이 더 들어오든 다 빠져나가든 그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마라. 그자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

“예, 조심하겠습니다.”

지일환은 몇 차례나 안색이 바뀌다가 머리를 조아리고는 방을 벗어났다.

노해광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나직이 혀를 찼다.

“저놈은 다른 건 다 좋은데, 겁이 너무 많은 게 흠이다. 명색이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이란 놈이 조금만 위험이 감지되어도 달달 떨고 있으니. 도둑놈 출신이라 그런가?”

정해는 왠지 남 얘기를 듣는 것 같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겁 많은 걸로 따지자면 그도 지일환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정해는 비록 겁을 집어먹을지언정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주저하거나 망설인 적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어려운 일은 회피해 버리는 지일환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노해광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음의 준비는 다 했느냐?”

정해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숙. 저는 이미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노해광은 믿음직하다는 얼굴로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럼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러 가 보도록 하자.”

하규는 정말 화가 났다.

그는 비록 성격이 좀 급하고 남을 비꼬는 짓을 좋아했으나, 그래도 본성은 침착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하규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침착하고 냉정한 그로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의 산해루는 정말 손님들이 많아서 점원들 모두 오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더구나 산해루에서 가장 손님들이 몰리는 저녁 장사 시간이 머지않았기에 주방의 요리사들은 물론이고 점원들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바짝 긴장한 채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시간에 뺀질이 노일이 벌써 일각 가까이 꽁꽁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이건 정말 하해(河海)와 같은 심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일개 점원이 주루가 가장 바쁠 시기에 농땡이를 부리고 있다니.

더구나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하규의 오랜 맞수이자 경쟁자인 노일이니 하규로서는 진정으로 솟구치는 노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 망할 놈이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오늘이 어떤 날인 줄 알고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설마 남들의 시선을 피해 퍼질러 잘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라도 찾았단 말인가?”

노일이 오늘 벌어질 일이 두려워 꽁무니를 뺐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노일은 노 대형을 위해서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대쪽 목까지 같이 내밀 놈이었다.

그건 하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미치도록 바쁘고, 일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뿐이었다.

한때 ‘서안의 미친개’라 불리며 흑도의 무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추혼광견(追魂狂犬) 하규는 노일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연신 후문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하규의 눈에 막 주루로 들어서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새카만 흑의를 입고 키가 훤칠한 중노인이었다.

나이는 오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자세가 꼿꼿하고 태도에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어서 하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멋진 노인네로군. 나이를 먹더라도 저렇게 먹어야 하는데.’

하규는 절로 노인을 향해 몸이 움직여졌다.

흑의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구석의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막 자리에 앉자 점원 하나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얼 드시겠습니까?”

“간편두각(豆角)과 청초채심(淸炒心) 그리고 술은 금존청 한 병만 가져다주게.”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담담하면서도 차분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점원, 하규는 노인의 단출한 주문에 실망하는 대신 마음 한구석으로 찬사를 보냈다.

노인답지 않은 체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지.’ ‘적절한 식단과 풍부한 야채 섭취는 노년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식단이라 할 수 있지.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고 이런 건강식을 먹으니 저렇게

것들이었다. 간편두각은 콩 껍질을 볶은 요리이고, 청초채심은 청경채를 데친 요리였다. 간단한 만큼 만들기 쉬웠지만, 제대로 맛을 내기는 은근히 까다로운

하규가 주문을 받고 멀어지자 흑의 노인은 담담한 눈으로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서안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곳답게 산해루의 일 층은 벌써 상당한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흑의 노인은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평온한 곳이로군.”

주위는 소란스러웠지만 그는 그런 소란에서 벗어나 혼자 고요함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요리를 가지고 온 하규는 미동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이 이상한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노인이 자신을 쳐다보자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주방장이 모처럼 주문이 들어온 요리들이라고 제법 신경을 쓰더군요. 맛있게 드십시오.”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산해루에 와서 일부러 그런 평범한 야채 요리를 주문한 사람들이 별로 없을 법도 했다.

“고마운 일이군. 주방장에게 잘 먹겠다고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하규가 인사를 하고 떠나자 흑의 노인은 느긋한 자세로 젓가락을 들고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