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57화
군림천하 (957)
일단 금옥기의 손에서 염왕검법이 펼쳐지기 시작하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세가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어 버렸다.
신지림의 전신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고,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엷은 핏기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주변을 휘감은 채 압박해 들어오는 염왕투기의 위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나 신지림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두 손과 두 발을 거의 동시에 질풍처럼 휘두르며 맞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였음에도 그가 일단 손과 발을 움직이자, 장내가 온통 수영(手影)과 각풍(脚風)에 휩싸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우웅!
뇌성이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눈부신 검광과 세찬 경력이 사방을 폭풍노도처럼 휩쓸어 버렸다. 그 충돌의 여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산해루 전체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고,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장식물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두 사람은 쉴 사이 없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구도 뒤로 물러서거나 충돌을 회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연히 두 사람의 몸에 하나둘씩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지림의 양쪽 소맷자락이 갈가리 찢기며 두 팔에 핏자국이 보이더니 다음에는 금옥기의 앞가슴 옷자락이 뜯기며 맨 가슴이 훤하게 드러나 버렸다.
드러난 그의 가슴에는 마치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지림의 육투예중 하나인 탈명조의 흔적이었다. 비록 그 손가락은 금옥기의 피부를 살짝 훑고 지나가는 데 그쳤지만, 조금만 더 손가락이 깊게 뚫고 들어왔다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한동안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신지림의 몸에는 크고 작은 검흔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금옥기의 흑의도 여기저기가 찢긴 채 선명한 핏자국과 상처들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상처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늘 이런 식으로 흉폭하면서도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십여 년 전의 마지막 싸움에서는 서로의 상처가 너무 깊어지는 바람에 결국 승부를 더 이어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두 사람은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듯 거침없는 살초(招)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살벌하고 무시무시했던지 지켜보는 중인들은 숨이 막힌 듯 입도 벙긋 못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박투를 주무기로 한 신지림과 상대의 숨통만을 노리는 살검의 소유자인 금옥기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격돌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들 정도의 명성을 지닌 고수들이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한 채, 마치 저잣거리의 낭인들처럼 이토록 처절하게 싸우리라는 것은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낙일방은 두 사람의 손동작 하나 발동작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혈투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신지림은 금옥기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검광 속을 교묘하게 뚫고 그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금옥기의 아래턱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오른 팔꿈치 아래 자연스러운 듯 늘어져 있어 얼핏 보기에는 오른손의 공격을 보조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 동작 속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변화가 숨겨져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신지림의 오른손은 절반쯤 꺾인 채 손등이 아래로 향해 있고 손가락은 뭉쳐져 금옥기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노리고 날아들고 있는데, 그것은 일찍이 낙일방도 적화승과의 대결에서 잠깐 겪었던 표응투의 수법이었다.
단지 그 속도와 날아드는 각도의 예리함이 적화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위력적이어서 전혀 다른 무공을 보는 것 같았다.
금옥기의 반응은 지극히 정석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표응투의 직접적인 공세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예리한 검광 두 가닥을 신지림의 미간과 목덜미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때 신지림은 막 금옥기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기에 뒤로 물러서거나 옆으로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검을 피하기 위해서는 금옥기처럼 머리를 움직이거나 주저앉아야 하는데, 미간과 목덜미를 각기 노리고 날아드는 검광의 교묘한 상하 움직임 때문에 어느 쪽으로 피하든 검광의 범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지림은 내뻗었던 표응투의 수법을 탈명조로 바꾸어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검광과 마주쳐 갔다. 그와 함께 그의 허리는 유연하게 뒤로 움직여 아래로 한 자쯤 몸을 낮춘 모양새가 되었다.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던 검광은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신지림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 반백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땅!
신지림의 탈명조와 금옥기가 날린 검광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주위의 공기를 갈가리 찢어 놓을 듯한 격렬한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격돌의 충격으로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신지림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에 숨겨져 있던 왼손이 폭발하듯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곧게 뻗어 있는 왼손 손가락은 예리하기 그지없는 창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공격은 유심히 보고 있던 낙일방조차도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을 만큼 완벽하게 숨겨져 있던 치명적인 실수였다.
금옥기가 자신의 턱밑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신지림의 손가락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손가락은 그의 아래턱에 지척까지 접근한 후였다. 금옥기는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파앗!
덕분에 기적적으로 턱이 꿰뚫리는 참변은 피할 수 있었지만, 턱에서 이마까지 신지림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가며 기다란 혈흔(血痕)이 생겨났다. 게다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몸을 비틀었기에 앞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금옥기의 얼굴 반쪽을 가를 듯 스치고 지나갔던 신지림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접히며 팔꿈치가 무서운 기세로 금옥기의 앞가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금옥기의 비틀려졌던 신형이 회오리처럼 세차게 옆으로 회전하며 한 줄기 검광이 원형을 그리며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신지림은 이대로 계속 공격을 이어 나가면 금옥기의 가슴을 팔꿈치로 박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와 동시에 금옥기의 검광이 자신의 허리를 양단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만큼 회전하며 휘둘러지는 금옥기의 검광은 무섭도록 빠르고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금옥기의 검법을 낱낱이 분석해 왔던 신지림조차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살인적인 검초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초식이야말로 금옥기가 오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창안해 낸 염왕검법의 새로운 절초,
염왕휘번(閻王揮幡)이었던 것이다.
염왕휘번의 기세와 위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어서 신지림은 설사 자신이 공격을 거두고 물러난다 해도 그 검초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래, 어차피 이번에는 결판을 내야만 한다.’
신지림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금옥기의 앞가슴을 향해 더욱 맹렬한 기세로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수비는 아예 도외시한 채 오직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격 일변도로 나가는 그 모습은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금옥기 또한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검을 휘두르는 손길에 한 치의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격은 서로 상대방에게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누가 보기에도 금옥기의 검이 신지림의 허리를 갈라 버리고, 신지림의 팔꿈치가 금옥기의 가슴을 박살 내 버릴 것만 같았다.
“아앗?”
장내의 여기저기에서 놀란 경호성이 거푸 흘러나왔다. 정해는 눈앞에서 벌어질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연상되었는지 아예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콰쾅!
“크윽!”
“음.”
폭음과 답답한 비명, 나직한 신음성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장내를 주시했다.
금옥기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연신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연거푸 흘러내리고 있어 금시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신지림의 사정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신지림은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 이장 떨어진 곳에서 비틀거리고 서 있었는데,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배 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둘 중 누구도 물러서거나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금옥기는 어느새 숙였던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수중의 검을 들어 중단세를 취했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엷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검을 든 채 무심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신지림 또한 배를 잡고 있던 오른손과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그의 아랫배가 갈라지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으나, 그는 자신의 몸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지 금옥기를 뚫어지게 응시한 채 쳐든 양손에 공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우우웅!
마치 벌떼 나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양손 사이에 가공할 경력이 모여들었다.
누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이제 건곤일척의 단 한 번의 격돌로 이번 승부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순간, 두 사람의 몸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금옥기의 검은 마치 내던져지듯 무서운 기세로 신지림을 향해 날아갔다. 금옥기가 최후의 절초로 생각하는 염왕격정(閻王撃鼎)이란 초식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염왕이 솥을 내던지듯 자신의 모든 공력과 기예를 한 점에 모아 일격에 상대의 숨통을 끊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가공할 절초였다.
신지림은 양쪽 어깨를 흔들며 마귀보를 극성으로 발휘하여 금옥기의 우측으로 파고들며 양손을 끌어모았다가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마치 합장하듯 모여진 두 손의 손끝에서 말로 형용키 어려운 괴이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금옥기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이야말로 신지림이 금옥기와의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 준비한 마인참(魔引斬)이란 무공이었다.
절정에 달한 마귀보로 검마의 지척에 접근함과 동시에 손끝에서 가공할 경력을 발출하여 상대를 격살시키는 수법으로, 이름 그대로 검마를 끌어들여 참하고야 말겠다는 일념하에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마공이었다.
두 절대고수가 본인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오직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결과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조금 전과 같은 폭음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만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토록 무서운 검광을 뿌리던 금옥기의 검은 빛을 잃고 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금옥기는 그 검에 몸을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었으나, 그의 신형은 끝없이 흔들거려 금시라도 그 자리에 허물어질 것 같았다.
청수했던 그의 낯빛은 한 점의 혈색도 없이 시체처럼 창백했으며, 전신에서 계속 경련을 일으켜 보기에 처참할 정도였다.
“우웩!”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토해 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에 뿌려진 선혈 사이로 잘린 내장 조각이 섞여 있어 그가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를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반면에 신지림은 양손을 앞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금옥기와는 달리 그의 몸은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 자리에 꼼짝도 않은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신지림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야릇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경악 같기도 했고,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같기도 했으며, 의혹과 분노 그리고 허탈함을 넘어선 허무에 찬 표정 같기도 했다.
한동안 못 박힌 듯 미동도 않고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신지림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미끄러지듯 스르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의 목덜미에 희미한 혈선이 그어지더니 점차로 혈선이 짙어지며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혈선이 쩌억 벌어지며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중인들이 놀라서 보니 어느 사이엔가 신지림의 목덜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삽시간에 그의 몸을 흠뻑 적셨다.
신지림은 눈도 감지 않은 채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실로 일세의 거마답지 않은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다.
낙일방은 피에 잠겨 있는 신지림의 시신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후우.”
그의 옆에서 말없이 장내의 격전을 보고 있던 노해광이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좋은 구경을 해 놓고 웬 한숨이냐?”
낙일방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진지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저는 그동안 제 실력이라면 소마와 그래도 괜찮은 승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두 사람 모두 지금의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표정을 굳힌 채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는 낙일방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자책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절대로 자만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도 하마터면 일을 크게 그르칠 뻔했습니다. 검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늘 저는 제 자신은 물론이고 본 파에도 크나큰 누를 끼쳤을 겁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노해광이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너는 그 점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낙일방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노해광은 엄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결과적으로 소마는 쓰러졌고, 우리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고 좌절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지 않겠느냐?”
낙일방은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으나, 억지로 어깨를 펴고 씁쓸하게 웃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직 우리에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요. 어찌 보면 이제 겨우 제대로 된 걸음을 내디뎠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리기보다는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한다. 그게 진정으로 본 파를 위하는 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낙일방은 노해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문득 소마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건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노해광은 그 말에는 특별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검마의 등장이 단순한 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낙일방은 때마침 검마가 나타나 소마를 상대한 것이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 또한 노해광의 심모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낙일방이 소마를 상대하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낙일방 자신은 물론이고 노해광 또한 승리에 대한 확신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낙일방 말고 소마를 맡을 마땅한 인물도 찾을 수 없는 게 당면한 현실이었다.
소마 같은 박투술의 최고수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성락중은 맨손 무공의 고수들과 싸워 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나마 권법이 장기인 낙일방이 성락중보다는 좀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노해광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수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가 떠올린 수가 바로 검마 금옥기였다.
금옥기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신지림의 최고 숙적이었다. 금옥기의 제자들인 금조명과 매상이 서안에 출몰한 것으로 보아 금옥기 본인 또한 서안 일대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금조명과 매상이 신지림의 제자들과 연거푸 격돌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본격적인 싸움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금옥기가 신지림과의 싸움을 결심했다면 신지림의 행적을 알게 된 그는 과연 어떤 움직임을 취할 것인가?
노해광이 구문백절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은 신지림을 유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소문을 듣고 금옥기가 신지림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노림수를 담고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금옥기는 신지림을 찾아왔고, 처절한 혈투 끝에 결국 신지림을 쓰러뜨린 것이다.
이것으로 노해광은 가장 커다란 우환을 제거하게 되었고, 종남파 또한 그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노해광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게워내고 있는 금옥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언제든 장문사제가 돌아오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