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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61화


군림천하 (961)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세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면면을 본 진산월은 내심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화려한 궁장을 입은 미부인과 준수한 용모의 백의 중년인 그리고 건장한 체구의 흑포 복면인이었다. 세 사람의 기풍은 서로 판이했으나 하나같이 신태비범한 모습이었고, 전신에서 고고한 기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진산월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효심이었다. 궁장의 미부인은 쾌의당의 화중용왕인 소수마후 섭소심이었고, 백의 중년인은 무림맹에서 무단을 맡고 있는 점창파의 최고 고수 십방랑자

그리고 복면의 중노인은 이미 몇 차례나 부딪힌 적이 있던 운중용왕이었다.

그들 개개인은 당금 강호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정고수들일 뿐 아니라 모두 쾌의당의 용왕들이었다.

실력의 소유자였다. 섭소심은 천수관음 옥부용과 함께 여중제일고수를 말할 때 항상 거론되는 여인으로, 진산월조차도 그녀의 암기술에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가공할

사효심 또한 점창파 사상 제일의 고수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검객 중 한 사람이었고, 쾌의당 칠대용왕 중 첫 번째라는 인중용왕의 신분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섭소심과 사효심을 지나쳐 흑포에 복면을 한 운중용왕에게로 향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지 않소, 위지 맹주?”

운중용왕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다가 주저하지 않고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과연 무림맹의 맹주인 일장개천지 위지립이었다.

무림구봉중의 하나이며 오랫동안 강호무림에서 장법의 최고 고수로 군림해 온 위지립이 바로 운중용왕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의 맹주가 쾌의당의 일개 용왕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강호가 송두리째 뒤흔들릴 게 분명했다.

위지립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데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 위지립이 오늘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진산월을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나름의 각오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솔직히 위지립과는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방식이나 행사 자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중용왕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위지립은 음험하면서도 치밀한 심기를 지니고 있어 무척이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때에도 진산월은 그의 일하는

이북해에게서 운중용왕의 진실한 정체가 강호 무림을 앞에서 이끄는 무림맹의 맹주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 후로는 그에 대한 혐오감마저 생겨서 그와는 말 한마디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향해 입을 연 것은 그에게 꼭 물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정문에게 손을 쓴 건 당신이오?”

진산월의 돌연한 질문에 위지립의 얼굴에 살짝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위지립은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진산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위지립 또한 몇 번이나 잔신월을 상대해 보았기에 그를 쉽게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헛.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정문은 쾌의당주를 쫓다가 실종당했소. 그의 수하인 추동생은 가장 마지막으로 이정문을 본 것이 이 근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이 끊어졌지.”

위지립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추동생이라면 파운수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이 공자의 최측근이 아닌가? 그가 비명에 사라지다니 안타까운 일이로군.

다분히 조롱 섞인 말이었으나, 진산월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몇 가지 점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소. 첫째는 그에게 아주 적절한 기력이 남아 있었다는 거요. 딱 나에게 말 한마디를 간신히 전할 수 있을 만큼 말이오.”

“그건 그가 운이 좋은 것이겠지. 아니면 자네가 운이 좋았던지.”

위지립의 대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둘째로 그가 말을 타고 나에게 왔다는 거요. 말은 달릴 때 소리를 감출 수 없어서 은밀히 추적을 하기에는 그리 어울리는 수단이 아니오. 반대로 쫓길 때에도 마찬가지지. 그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도 말을 타고 낙양의 대로를 질주해 올 수 있었던 건 흉수의 방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오.”

“세 번째도 있나?”

“쾌의당주는 자신이 이정문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는 의미의 말을 했소. 그가 굳이 나를 속일 이유가 없을 테니, 결국 이정문을 공격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게 내 생각이오.’

위지립은 진산월의 지적에도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게 바로 나란 말인가?”

“그래서 물어보는 거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처음으로 위지립의 얼굴에 있는 미소가 사라졌다.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말이로군. 하지만 나는 관대한 사람이니 참도록 하겠네.”

“그래서 대답은?”

위지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지금 자네가 신경 써야 할 건 자신의 안위가 아니겠는가?”

“내 안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소.”

위지립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왜 그런가?”

진산월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위지립의 귀에는 다른 어떤 함성보다 큰 울림처럼 들렸다.

“당신들 정도로는 내 안위를 위태롭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오.”

위지립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섭소심과 사효심의 안색이 모두 굳어졌다.

사효심은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지만, 섭소심은 은은한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더니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안 본 사이에 광오해졌구나! 이번에도 누군가가 너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싶구나!”

과거 진산월은 쾌의당의 도중용왕인 금도무적 양천해와 대결 도중 그녀의 암습을 받고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때마침 몰래 그 대결을 훔쳐보고 있던 당대 개방의 방주인 만리무영개 나자행이 그를 구하지 않았다면 당금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신검무적의 신화도 그때 끝나 버렸을지 몰랐다.

섭소심은 그때의 일을 거론하며 진산월을 비웃은 것이다.

항상 차분하고 여유를 잃지 않던 그녀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지금 긴장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비록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녀호접표를 이용하여 진산월을 제압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진산월이 양천해를 상대하느라 온 신경과 관심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녀는 양천해와 싸우는 진산월의 무공에 커다란 경각심을 느꼈고, 결국 은밀히 암습을 하는 것이 그를 쓰러뜨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운중용왕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강호에 펴진 그녀의 명성을 떠올리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것은 그만큼 당시 그녀가 직접 목격한 진산월의 무공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독설에도 진산월은 오히려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부인이 내려 주신 한 수의 가르침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오늘 그 가르침에 보답할 기회가 온다면 결코 놓치지 않을 테니 모쪼록 부인께서는 기대하셔도 좋소.”

언성을 높이지도 않은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섭소심의 얼굴색은 조금 전보다 더 좋지 못했다.

그녀는 무어라고 대꾸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했다. 무심한 듯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진산월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다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신 사효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진산월의 몸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극도로 정제된 무형검기였다.

“이런 자리에서 진 장문인을 보게 되어 유감이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길을 걷다 보면 어차피 만나게 되었을 거요.”

진산월은 사효심이 쾌의당에 몸을 두고 있는 한 언제고 그들이 서로 검을 맞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사효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단지 그전에 한 번쯤은 술잔이라도 나눌 기회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오.”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그런 기회를 충분히 나누었으니, 사 대협도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사효심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술 대신 검을 나눌 기회가 생긴 듯하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도록 하겠소.

사효심이 다시 한 걸음 내딛자, 진산월도 그를 향해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에게서 미약하게 발출되던 무형검기가 점차로 강력해져서 진산월 또한 제대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희대의 검객이 서로 마주 보고 있자, 장내의 분위기가 급격히 차가워지며 팽팽한 긴장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 사이의 공간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경기가 서로 충돌하여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니만큼 그 소용돌이치는 공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 눈에는 이미 살벌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싸움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섭소심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어느새 풍성하게 틀어 올려진 자신의 뒷머리를 습관적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에 꽂혀 있는 화려한 문양의 장신구들이 인상적이었다.

반면에 위지립은 오히려 뒤로 약간 물러나서, 얼핏 보기에는 두 사람의 대결을 조용히 감상하겠다는 모습 같기도 했다.

섭소심이 그를 힐끗 돌아보고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당신은 여기까지 와서도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지립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당대 무림 최고의 검객들의 싸움을 볼 기회가 어디 흔하겠소? 그러니 우선은 단단히 눈요기부터 할 생각이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는 건 알고 있겠지요?”

“이를 말이오?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다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소. 기회가 온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니 부인은 너무 걱정 마시오.”

섭소심은 무어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위지립이 기회에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는 그녀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감종간이 다소 방만한 자세로 선 채 흥미로운 눈으로 장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그 모습에 섭소심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으나, 그녀는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종간이 저런 상태에서도 언제든 돌변하여 가공할 탈혼검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은 이토록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그들이 너무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얄미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 좀처럼 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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