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64화
군림천하 (964)
막 나비가 그 사람의 머리에 앉으려는 순간, 비틀거리고 있던 백의인의 손에 들린 장검이 한 차례 움직였다.
팟!
예리한 검광 한 가닥이 나비를 가르고 지나갔다. 아니,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나비는 유유히 검광을 피해 백의인의 목덜미 쪽으로 더욱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백의인은 물론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사효심과 살 떨리는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줄곧 섭소심의 암습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도 양천해와의 대결 직후에 그녀의 암습을 받아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참혹한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사효심과의 격돌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녀의 암습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쉽게 격퇴시킬 줄 알았던 섭소심의 선녀호접표가 의외로 상당히 까다로운 병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나비 모양의 장신구처럼 보이는 선녀호접표는 주위의 공기가 조금만 변해도 그 미세한 기운을 피해 움직이는 기물(物) 중의 기물이었다.
진산월의 검이 선녀호접표를 격중시키지 못했던 것도 검이 접근하는 순간 선녀호표가 검에 서린 기운을 피해 옆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손을 떠난 암기가 어떻게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으나, 이것이야말로 선녀호접표를 섭소심의 열 가지 살인 무기 중에서 최고로 꼽히게 만든 가장 큰 요소였다.
일단 발출된 선녀호접표는 아무리 작은 파동이라도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타고 흐르는 성질이 있어서 격추시키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섭소심이 선녀호접표에 담아낸 특이한 기운 때문에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일정 시간동안은 그녀의 손끝으로 조종이 가능했다.
기척도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이 무형의 암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한 줌의 고혼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그녀의 별호에 ‘마(魔)’라는 단어가 붙은 것도 일단 손을 쓰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마는 그 가공할 위력에 강호인들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일단 옆으로 움직여 목덜미로 날아오는 선녀호표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선녀호접표의 날개가 펄럭이는가 싶더니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 움직임은 아무리 봐도 진짜 살아 있는 나비와 다름이 없었다.
천하의 진산월도 이때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암기의 운용은 가히 강호일절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빠른 초식인 추운축전으로 선녀호접표를 떨어뜨리려 했다. 하나 검이 채 반도 뻗어 나오기도 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허공을 유영하는 선녀호표의 움직임에 발출되었던 검을 거두고 말았다. 검이나 도 같은 병장기로는 선녀호접표를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아무리 빠르고 절묘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병장기가 공기를 가르면서 발생하는 파동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선녀호표는 그 파동을 피해 이동하기 때문에 검이나 도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거두어들이며 자신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선녀호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검으로 안 된다면 손은 어떨까?
진산월이 그런 생각으로 선녀호표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의 뒤쪽에서 괴이한 경력을 지닌 장력이 날아들었다.
콰르르르!
그 장력은 은밀하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어서 장력이 미처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뼛골이 시릴 듯 싸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산월의 신경이 온통 선녀호접표에 쏠려 있는 사이에 소리도 없이 다가온 위지립이 암습을 가해 온 것이다. 그의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으나, 그만큼 진산월에게는 예측하기 어려운 위협이 되었다.
그때 진산월은 막 용영검을 검집에 넣고 있는 중이어서 다시 검을 뽑기가 수월치 않았다.
더구나 장력이 등 뒤에서 날아들고 있는지라 무작정 피할 수도 없었다. 장력의 여파가 어디까지 이르고 있을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끼어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를 노리고 있던 위지립의 기다림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왼손을 세차게 내뻗었다.
꽈릉!
강력한 기운을 동반한 대천장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뻗어 나갔다. 워낙 촉박한 와중이라 운용 방법이 복잡해서 다소 시간이 걸리는 태인장보다는 빠르게 펼칠 수 있고 손에 익은 대천장을 사용한 것이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산월은 적지 않은 충격을 느끼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가슴을 철퇴로 맞은 듯한 통증과 전신의 혈관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에 절로 입가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머리 위를 유영하던 선녀호표가 빠르게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을 억누르며 용영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자 선녀호접표가 용영검을 피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선녀호접표를 조종하고 있던 섭소심이 뾰쪽한 음성을 토해 냈다.
“이런 약아빠진!”
조금 전 진산월이 휘두른 일검에는 아무런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나 검이 휘둘러지는 그 여파로 선녀호접표는 저절로 검을 피해 진산월에게서 멀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선녀호접표의 특징을 역이용한 절묘한 동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격돌의 여파로 제대로 공력을 끌어 올릴 수 없음에도 일부러 발검을 하여 선녀호접표의 공세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멈칫거렸던 위지립이 다시 몸을 수습하고 강력한 공격을 해 온 것이다.
위지립이 운중용왕의 신분으로 활동할 때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혈필을 주무기로 사용하곤 했었다. 하나 그의 진짜 실력은 장법에 있었다.
일장개천지라는 별호답게 그가 일단 손바닥을 휘두르자, 천지를 개벽시킬 듯한 엄청난 위력의 장력이 구름처럼 일어나 진산월의 전신으로 휘몰아쳐 갔다.
콰아아아!
위지립이 처음 진산월을 암습할 때는 최대한 소리나 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암혼장(暗魂掌)을 사용했다. 암혼장은 발출할 때 거의 소리가 나지 않고 일정한 거리까지는 아무 흔적도 나지 않아 비밀리에 상대를 격살하기에는 최적의 수법이었으나, 장력 자체의 위력은 살짝 아쉬운 편이었다.
원래 위지립의 성명절기는 건곤십팔장(乾坤十八掌)으로,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두 가지 장공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절학이었다.
처음에 건곤십팔장을 제대로 펼쳤다면 진산월은 더욱 험한 상태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랬다면 진산월이 그의 암습을 좀 더 일찍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위지립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위지립은 건곤십팔장 중의 삼대절초들인 건곤선전(乾坤旋轉)과 건곤압산(乾坤壓山), 건곤파황(乾坤破荒)을 연거푸 펼쳐 가공할 기세로 진산월의 전신을 무섭게 압박해 들어갔다.
무시무시한 회오리를 일으키는 건곤선전과 엄청난 기세로 상대를 짓누르는 건곤압산 그리고 막강한 위력으로 목표물을 산산이 파괴해 버리는 건곤파황은 지금처럼 함께 펼칠 때 그 위력이 배가 되는 초식들이었다.
위지립이 대뜸 삼대절초를 한꺼번에 퍼붓는 것은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진산월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고 단숨에 승패를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진산월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위지립의 공세는 무시무시했다.
문제는 아직도 허공을 비행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선녀호접표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칫 위지립의 공격에 너무 신경을 쏟았다가는 언제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선녀호접표에 당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신경을 분산한 채 상대하기에는 위지립의 공격이 너무나도 위력적이었다.
아직 사효심과 격돌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두 절대고수의 합공을 당하게 되니 진산월도 순간적으로 막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쾌의당주가 언제 이들에게 가세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암담한 절망감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공가장에 들어올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설마 네 명이나 되는 절세고수들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으나, 무서운 살수들이 도사린 용담호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오늘 이곳에서 쾌의당과의 질긴 악연을 모두 마무리 짓겠다.’
진산월은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왼손을 신중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용영검을 쥔 오른손에 옥잠지를, 왼손에 천단신공의 폭심결을 운용하여 끌어 올라오는 기운을 태인장의 구결에 따라 왼손으로 뿜어낸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정교한 운용이 필수적인 동작이었고, 능숙하게 시전하기 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절정에 달한 내공이 필요했다.
꽈르르릉!
진산월의 손을 따라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며 형용하기 어려운 가공할 기운이 퍼져 나갔다.
건곤십팔장의 삼대절초를 펼치며 맹렬하게 달려들던 위지립의 얼굴색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나, 이미 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로서는 그저 체내의 공력을 바닥까지 끌어모아 내뻗은 장력에 최대한 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했는지, 멀리서 선녀호접표를 조종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섭소심의 얼굴에도 긴박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 한 번의 격돌에 모든 것이 걸려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선녀호접표를 움직이면서도 지금껏 가만히 있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소맷자락이 걷히며 드러난 그녀의 왼손은 유달리 하얀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옥(玉)을 깎아 놓은 듯한 그녀의 왼손은 아름다움을 넘어 섬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소수마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한 절세무적의 명옥수(冥玉手)임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명옥수는 소수마공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수공으로, 과거 그녀는 이 무공으로 산서의 패자였던 산서철혈문의 고수 스물네 명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격살한 적이 있었다.
강호제일지자로 불리는 해수 모인풍은 일찍이 그녀에 대해 ‘소수마후의 암기는 비록 놀라우나,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그녀의 수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소수마공을 끌어 올려 명옥수를 가다듬고 있을 때, 위지립의 건곤십팔장과 진산월의 태인장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콰아아아아…**.
너무도 가공할 충돌에 주위의 바닥이 온통 뒤집히고 공가장의 담벼락이 터져 나갔다. 세찬 경기의 소용돌이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선녀호접표 또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공기의 흐름을 파고들기에는 충돌의 여파가 너무나 강력했던 것이다.
그 순간 섭소심의 교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방으로 비산하는 경기의 파편과 흙먼지 속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통과하며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유난히 새하얗게 빛나는 그 손이 지나가는 공간의 경기와 잔해들이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 손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는 진산월의 앞가슴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