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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66화


군림천하 (966)

제393장 검섬요시(劍閃耀時)

감종간은 지금까지 정원의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선 채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싸움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효심이 점창파의 최고절학을 펼치고도 신검무적의 검을 꺾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주저앉을 때도, 장공으로는 능히 강호제일로 꼽을 만하다는 위지립이 전력을 다해 자신의 성명절기를 사용했음에도 똑같이 일장(掌)으로 맞선 신검무적에게 패해 허무하게 쓰러질 때도 그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무심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녀호접표를 헛되이 날린 섭소심이 절호의 기회를 붙잡고 진산월을 수세에 몰아넣은 채 일방적인 공세를 가할 때도 그는 여전히 자세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섭소심이 흔들리는 틈을 노려 진기를 회복한 진산월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분명 양발을 번갈아 가며 앞으로 내딛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척도 없었다. 마치 허공에 둥둥 뜬 허깨비가 이동하는 듯한 괴이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움직임 때문인지 아무도 그가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산월의 용영검에 섭소심의 명옥수가 깨어지고 손바닥이 뚫린 그녀가 피를 뿌리며 날아갈 때, 비로소 감종간의 몸은 장내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검광 하나를 발출한 것이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튀어나온 검광 한 가닥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 검광이 노출된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해서 얼핏 보기에는 햇살이 눈앞을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꽃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걸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감종간이 출수를 하기 직전까지도 그의 접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감종간의 움직임은 은밀했으며, 눈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신묘한 것이었다.

감종간의 걸음은 마도에서 오랫동안 전설로만 회자되던 허무(虛無步)라는 절학인데, 상대에게 접근할 때까지 완벽하게 기척을 숨길 수 있어서 살수(殺手)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무공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에 상대에게 다가가 날리는 살인적인 검광!

그 무시무시한 살인검을 진산월이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공가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늘 감종간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무언가가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반사적으로 용영검을 이마에 갖다 대었던 것이다.

땅!

고막을 후벼 파는 듯한 날카로운 음향이 터지며 진산월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참으려 했지만, 입에 고여 있던 핏물이 뿜어 나오며 앞가슴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진산월은 억지로 버티지 않고 오히려 뒤로 세 걸음 더 물러났다.

그가 물러선 걸음마다 핏물이 고인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단지 세 걸음이었으나, 물러나던 몸을 멈춰 세운 순간 진산월은 세차게 용영검을 휘둘렀다.

팟!

용영검 특유의 우윳빛 검광이 찬연히 피어올랐다.

재차 진산월을 향해 접근하려던 감종간의 몸이 갑작스레 멈춰졌다.

쭈아악!

우윳빛 검광이 거대한 검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자신이 다가서려던 공간을 갈가리 찢어놓는 광경을 보고 감종간은 탄성을 토해 냈다. “정말 무서운 검기로구나.”

자칫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가 그 공간에 들어섰다면 아무리 감종간이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산월의 방금 일검은 공간 자체를 완전히 파훼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뛰어난 신법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검이 휘두르는 공간 안에 있다면 절대로 몸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공간참(空間斬) 수법은 검법에 대한 높은 경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결합해야만 펼칠 수 있는 최상승의 무공이었다.

진산월 또한 공간참을 쉽게 펼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워낙 몸 상태가 좋지 못해 더 이상 감종간의 접근을 허용했다가는 그의 검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무리하게 진력을 끌어모아 다급하게 시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고, 입가로 흘러나오는 핏물도 더욱 진해졌다.

그럼에도 감종간은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용영검을 펼친 자세 그대로 서 있는 진산월의 몸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담담히 자신을 주시하는 그의 눈빛은 무심한 가운데 범접하기 어려운 기도를 담고 있어 감종간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텐데, 아직도 기상이 살아 있구나.’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고하(下) 이전에 한 인간이 쌓아 온 기질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결연한 각오가 합쳐져 천하의 쾌의당주 조차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감종간은 문득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강호의 삶이 재미있다니까. 이렇게 종종 예상을 깨는 일이 일어나곤 하니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공을 올려보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흥에 겨워하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종간은 그런 그를 향해 계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은 입도 열기 힘들 테니 굳이 대답할 필요 없소. 그냥 나 혼자 흥이 나서 지껄이는 것이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는 진산월의 창백한 얼굴을 주시하며 특유의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무언지 모를 묵직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당신에 대한 많은 말을 들었소. 다른 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에 조(趙) 노태야(老)가 하는 말을 듣고는 당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소.”

“…….”

“아, 조 노태야가 누군지는 짐작할 수 있을 거요. 백 년 넘게 살아 계시면서도 점점 더 정정해지는 그분 말이오. 예전에는 태야(太爺)라고 불러 드렸는데, 연세가 연세이니만큼 아무래도 더 높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런 호칭으로 부르고 있소.”

감종간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분이 그러더구려. 석동과 백 년을 싸운 끝에 이제 한숨 돌리나 했더니 야율척이 나타나고, 이제 야율척만 무너뜨리면 된다고 생각했더니 당신이 나타났다고 말이오. 누가 마지막까지 남은 걸림돌이 될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싸움이 될 거라며 웃으시더군.”

감종간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떠오르며 음성에 조금씩 기이한 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아시오? 난 그분 밑에서 이십 년을 넘게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아랫사람 이상의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소. 그런데 이제 강호에 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 대의 젊은이가 그분에게 적수로 인정받게 된 거요. 겨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말이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정말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진산월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그것은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이었다.

“직접 만나고 보니 그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구려.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감종간은 다시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흥분의 기색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반면에 무언지 모를 차가운 냉기 같은 것이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그것은 초연함 같기도 하고, 얼음장 같은 냉정함 같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찐득하고 무거운 살기 같기도 했다.

“그때 그분이 초식 하나를 알려 주었소. 지금까지 반쪽짜리 초식은 받은 적이 있었지만, 온전한 하나의 완성된 초식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소. 나는 나중에야 그 초식이 천룡궤에 담겨 있던 무공임을 알게 되었지.”

“우습지 않소? 그걸 얻기 위해서 수십 년간 그토록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그토록 많은 피를 뿌렸는데, 이토록 수월하게 얻게 되다니 말이오. 막상 그 무공을 손에 쥐고 나니 허탈한 생각이 들어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감종간의 음성은 조금씩 나직해져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공을 꽁꽁 숨겨 놓은 채 겨우 반 초짜리만을 보여 주던 사람이 갑자기 온전한 일 초를 내놓은 건, 이제는 그 정도만으로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가까워진 줄 알았던 길이 더욱 멀어진 셈이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이제 비로소 천하의 누구와도 상대해 볼 수단이 생긴 셈이오.”

이어 그의 시선이 진산월의 미간을 슬쩍 향했다.

탈혼검은 날카롭기는 하지만, 그동안 너무 많은 정보가 노출되었소. 그래서 조금 전처럼 특정 부위를 방비하기만 해도 막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게 ᅥ지. 그동안 잘 써먹기는 했지만, 확실히 당신 수준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 무공이로군.”

감종간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기형의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쇠꼬챙이를 연상케 하듯 끝이 뾰쪽하고 예리했는데, 얼핏 보기에도 골이 송연해질 만큼 섬뜩한 형태의 장검이었다.

감종간은 느릿느릿 그 기형검으로 진산월을 겨누었다.

“천룡궤 속의 그 무공은 오직 빠르기만으로 승부를 보는 초식이오. 아주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어서 익히기가 그리 어렵지 않더군. 그분은 그걸 대라섬요(大羅閃耀)라고 불렀는데,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오.”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무형의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 쥐어진 기형의 장검에서도 조금씩 검광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쇠꼬챙이 같은 기형검에 검광이 어른거리는 광경은 보는 이의 심혼(魂)을 앗아버릴 듯한 괴이한 마력을 담고 있었다.

“솔직히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지금 당신의 몸 상태로는 결코 이 검초를 받아 낼 수 없소. 그래서 아쉽냐고 하면 그건 아니오. 나는 실용적인 사람이라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오늘 같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 나름대로 상당한 공을 들였던 거요.”

넋두리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감종간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분의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군. 아니면 또 다른 걸림돌이 생겨나는 순간이던지………….”

그의 말끝은 점차로 흐려져서 종내에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아졌다.

감종간은 다시 한 번 더 진산월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의 안색과 호흡,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완벽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군. 당신은 정말 대단한 검객이오.”

그의 손에 들린 기형검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검광이 점차로 강렬해지더니 종내에는 마치 석양을 연상케 하는 눈이 멀 듯한 섬광이 어른거렸다.

“잘 보시오. 이것이 바로 대라섬요요!”

말이 끝나는 순간, 감종간의 기형검 끝에 맺혀 있던 검광이 폭발하듯 앞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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