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67화
군림천하 (967)
감종간의 검에서 검광이 나올 때까지도 진산월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어찌 보면 그대로 굳어져 버린 석상 같기도 했으나, 몸만 움직이지 않았을 뿐 진산월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감종간의 말대로 지금 진산월의 몸 상태는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용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효심의 후예사일과 위지립의 건곤십팔장, 그리고 섭소심의 명옥수를 연거푸 상대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 명의 절정고수들이 펼친 차륜전을 상대로 싸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제대로 진기를 다스릴 여유도 없어서 격돌의 여파를 안정시키기도 전에 계속 진력을 끌어 올리느라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특히 위지립의 건곤십팔장에 태인장으로 맞선 것이 가장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태인장의 가공할 위력 덕분에 위지립을 격패시킬 수 있었으나, 그 자신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 상태에서 억지로 진력을 끌어 올려 섭소심을 상대해야 했으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내상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격돌로 손에 입은 상처도 적지 않았다. 용영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은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섭소심의 명옥수를 파괴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적들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 빠른 시간 내에 결판을 내기 위해 무리를 거듭한 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의 몸 상태에서 대라삼검의 초식을 익힌 감종간을 상대한다는 것은 확실히 무모한 일이었다.
더구나 감종간의 말대로라면 그가 이번에 얻은 대라섬요는 쾌검의 최정수로, 쾌검은 진산월이 가장 약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감종간의 제자인 풍도를 상대할 때도 적지 않은 어려움 끝에 심기를 이용한 수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탈혼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각각 인후혈과 심장,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탈혼검은 그 무서운 위력만큼이나 약점도 분명한 무공이었다. 상대가 탈혼검을 펼친다는 걸 알고만 있다면 막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진산월은 천수나타 당각과의 대결 이후로는 더 이상 탈혼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는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도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감종간의 색탈혼을 정확하게 막아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대라섬요였다.
반쪽짜리 대라궁해의 위력을 생생히 알고 있는 진산월로서는 대라삼검의 또 다른 초식인 대라섬요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룡궤가 조익현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으나, 조익현이 그 안의 무공을 감종간에게 전해 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사실로 미루어 진산월은 아마 조익현이 대라삼검의 세 초식을 모두 입수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조익현은 어떤 식으로든 모용봉에게서 대라삼검의 남은 한 초식을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모용봉이 비록 당대의 기재라고는 하나 조익현의 압박에서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진산월은 입맛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 역사상 최고의 고수였던 태을검선 매종도의 비학이 종남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 사이를 떠돌다가 결국 한 사람의 손에 모두 넘어가 버린 것이다.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문파의 비전절학이 남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더구나 그 무공이 엉뚱한 자의 손에 들어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니 진산월로서는 그저 황망하면서도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대라섬요의 핵심은 ‘쾌(快)’였다. ‘변(變)’으로 지칭할 수 있는 대라궁해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초식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대라삼검의 남은 초식인 대라장천은 ‘패(覇)’를 추구하는 무공일 가능성이 높았다.
‘쾌’는 오랫동안 진산월을 고민스럽게 한 화두였다.
종남산의 이름 모를 고동에서 검정중원을 완성한 후에도 진산월은 늘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쾌검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강호에서 마주친 절정고수들과의 싸움에서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쾌검의 고수들을 상해할 때마다 진산월은 여러모로 어려움을 느꼈고, 자신의 무공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성과는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쾌검에 대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만한 기회를 좀처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기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닥쳐왔다.
검을 들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몸 상태∙∙∙∙∙∙. 거듭된 격전으로 바닥을 드러낸 내공…….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오른손・・・・・・ 그리고 무림 사상 최고의 고수가 창안해 낸 어쩌면 역사상 최고일지도 모를 쾌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도 가파르고, 가야 할 길은 아득했지만 진산월은 문득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감종간의 말대로였다.
이게 강호의 삶이다. 이런 예상치 않은 일 때문에 강호인의 삶은 한층 더 다채로워지는 것이다.
그 다채로운 삶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일 수만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흡족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검이 진정으로 빛나는 순간을 내가 정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검을 든 무림인이 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후회 따위는 없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종남파의 최고 비전을 눈앞에서 마주하면서도 꺼리거나 두려운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동안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를 보여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처음 사부에게 끌려온 종남파에서 손에 쥐어진 검의 날카로움에 놀란 그 순간부터 강호의 뭇 고수들을 연파하며 자신의 실력을 조금씩 끌어 올려 나가고, 검정중원을 지나 그 너머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검을 닦는 그 모든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일검이었다.
그 순간의 용영검은 너무도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빛이 꺼진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적막감마저 감도는 기이한 정적만이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뚝뚝!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희미한 음향이 들려왔다.
용영검은 빛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검을 굳게 쥐고 있는 진산월의 몸도 검을 따라 허물어지듯 쓰러져 버렸다.
진산월의 몸은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에 조금씩 붉게 물들어갔다.
감종간은 처음의 표정과 전혀 다름없는 얼굴로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뚝뚝뚝!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방울방울 아래로 떨어지고 있건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수중의 기형검을 앞으로 내뻗은 자세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한 사람은 쓰러져 있고, 한 사람은 서 있는 묘한 광경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느릿느릿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섭소심이었다. 섭소심은 피범벅이 된 왼손을 겨드랑이에 끌어안고 있었는데, 손바닥이 뚫리고 명옥수가 파괴된 충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상태였다.
전신의 기맥이 군데군데 끊어지고 온몸이 커다란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고통스러웠으나, 그녀는 억지로 눌러 참으며 한 걸음씩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양패구상인가?”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검을 내민 자세로 서 있는 감종간에게로 향했다.
감종간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했고, 표정 또한 처음과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이미 그의 숨이 끊어져 차가운 시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감종간의 이마에는 작은 실낱같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가 보는 와중에 그 혈선을 따라 한 방울씩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마의 혈선이 조금씩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을 토해 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던 쾌의당주도 결국 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구나.”
감종간의 이마에 있는 혈선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탈혼검의 색탈혼 같지 않은가?”
그녀의 입가에 문득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호홋. 자기가 그토록 자랑하던 탈혼검의 색탈혼과 같은 방식으로 죽게 된다는 걸 그가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지는구나.”
이어 그녀는 진산월이 쓰러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산월은 여전히 용영검을 쥔 채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그의 죽음을 확인해야 했지만, 그녀는 선뜻 손을 쓰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만큼 그녀의 뇌리에 신검무적은 공포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하나 결국 마음을 굳히고 진산월의 몸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스읏!
담장 너머에서 한 인영이 훌훌 날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담장에서 이곳까지는 거의 이십여 장이나 되었는데도 그 인영은 단숨에 그 거리를 뛰어넘어 날아온 것이다.
그 기경할 신법에 섭소심이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뽑아 들었다.
팟!
뽑힌 순간 장신구가 발출되어 날아갔다. 그 솜씨는 그야말로 절세적이었다.
하나 그 사람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한 움직임으로 너무도 수월하게 그 장신구를 피해 버렸다.
다급해진 섭소심이 또 다른 장신구를 뽑아 들었으나, 그녀가 채 장신구를 발출하기도 전에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파앗!
순간 그녀는 전신이 빙굴(氷窟)에 빠진 듯한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그녀의 뇌리에 이러한 극음의 한기를 동반한 무공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은 현음…….?
그녀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허리가 잘린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놀랍게도 잘린 그녀의 몸통에서는 한 줌의 핏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소수마후를 일검에 베어 버린 그 인영은 냉랭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효심과 위지립의 시신을 일별한 그 사람의 시선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감종간에게로 향했다.
감종간을 본 그 사람의 두 눈에 서릿발 같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주위가 갑자기 엄동설한이 된 듯한 냉기에 휩싸여 버렸다.
그 사람은 감종간을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놈을 내 손으로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이렇게 편하게 죽다니…………. 이놈이 이곳에 온 걸 너무 늦게 안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그녀는 기형검을 내뻗은 채 굳어 있는 감종간의 자세를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살펴보고는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그 망할 자가 천룡궤의 무공을 알려 준 모양이구나. 대라삼검을 모두 얻으면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수하를 부려 내 아들을 살해하다니…….”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던 그 사람은 이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산월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휙!
손을 가볍게 흔들자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던 진산월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 사람에게로 날아왔다.
그 사람은 진산월의 몸에 묻어 있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손목을 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질긴 아이로군. 이런 상태에서도 최후의 진기 한 가닥이 심맥을 보호하고 있다니, 이것도 종남파의 무공일까?”
그 사람은 의식이 없는 중에도 여전히 용영검을 굳게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는 혀를 찼다.
“정말 대단한 집념이로구나.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아이뿐일 거라는 예상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으니.”
그 사람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이곳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금 강호를 떨쳐 울리던 일세의 고수들이었다. 그중에는 구대문파의 최고 고수도 있고, 무림맹의 맹주도 있으며, 강호제일 살수 집단의 우두머리도 있었다.
하나 그들의 명성이야 어찌 되었건 이제 그들은 모두 차디찬 시신이 되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하가 온통 술렁이고 강호무림 전체가 크게 경동하고 말게 분명했다.
“후우. 결국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 사람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진산월의 몸을 안아 들고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