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69화


군림천하 (969)

금의환향(錦衣還鄕)

손풍은 지금 자신에게 이 단어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반쯤은 버린 자식 취급당하며 주루의 후미진 골방이나 전전하던 자신이 이제는 대종남파의 떳떳한 제자가 되어 본 파가 강호를 제패하는 데 일조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어찌 득의양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결코 내가 자화자찬하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내가 바로 형산파를 꺾은 기산취악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이란 말이다.’

손풍은 금시라도 대소를 터뜨릴 듯한 기분이 되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그야말로 구름 위를 걷는 듯하여 어깨춤이 절로 났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동중산은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조용히 미소 짓고만 있었다. 서안은 물론이고 종남파의 커다란 위협이었던 소마 신지림이 죽은 후, 은연중에 종남파 고수들에게 내려졌던 외출 금지령이 풀어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풍 등 몇몇 젊은 제자들이 종남산을 내려와 서안으로 향한 것이다.

손풍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제일 먼저 종남파를 뛰쳐나왔고, 만에 하나 그가 사고 칠 것을 막으려고 동중산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나온 것이다.

손풍이 말로는 아버지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떠들어 댔지만, 그가 고분고분 손가장만 들렸다 돌아오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 대사형인 동중산이 그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풍은 동중산을 하인처럼 거느리고 위풍당당한 얼굴로 서안의 거리를 활개 치며 누비고 다녔다.

“음. 모처럼 맡는 공기도 신선하군. 극락이 따로 있으랴? 내가 있는 곳이 바로 극락이거늘.”

손풍은 되지도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으나, 그래도 걷는 방향은 손가전장을 향하고 있었다.

동중산이 이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노태야를 먼저 뵈러 가는 걸 보니 사제도 이제 조금씩 제 정신을 찾아가는 것 같구나.’

하나 동중산의 흐뭇함은 얼마 되지 않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흥에 겨운 몸짓으로 휘적거리며 걷던 손풍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딘가로 달려갔던 것이다.

“앗?”

그가 달려가는 곳은 서안의 대로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 입구였는데, 몇 사람이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은 채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풍은 단숨에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고개를 번갈아 가며 들어 올렸다.

하나같이 퉁퉁 부은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드러나자 손풍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누군가가 거칠게 자신들의 얼굴을 쳐들자, 손을 내저으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상대가 손풍인 것을 알고는 눈을 부릅떴다.

“어? 너는…….”

“소・・・・・・ 손가야!”

손풍은 그들 중 한 사람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마달!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어떤 놈한테 두들겨 맞고 길거리에 퍼져 있는 거냐?”

이어 손풍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번갈아 살펴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남곤(坤), 갈도(葛都)! 이 바보 같은 녀석들! 대체 얼마나 맞았기에 이런 꼴이 된 거냐? 누구야? 어떤 놈에게 맞은 거냐?”

그들은 모두 손풍이 서안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파락호 생활을 할 때 함께 어울렸던 인물들이었다. 그렇다고 죽고 못 살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손풍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온갖 사고를 치는 바람에 결국 손노태야에게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말에 눈물을 머금고 등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손풍이 종남파로 들어온 후로는 그들을 보기는커녕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어서 손풍도 그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기세등등하게 서안의 거리를 걷고 있다가 길 한쪽에서 형편없는 몰골을 한 채 쭈그려 앉아 있는 그들을 보니 손풍은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한때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안의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놈들이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런 꼴로 주저앉아 있단 말인가?

손풍은 그들을 한 번 더 훑어보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다시 소리 질렀다.

“종화는 왜 안 보이는 거냐? 종화는 어디다 팽개쳐두고 왜 너희들만 여기서 궁상을 떨고 있는 거냐?”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풍은 그중 유달리 비쩍 마른 사람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달! 네가 말해봐라, 종화는 어디 있는 거냐?”

마달은 키는 훌쩍하니 컸으나 몸이 앙상할 정도로 말라서 손풍이 흔드는 대로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서 손풍의 손에서 절로 힘이 빠져 버렸다.

손풍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며 한풀 꺾인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날 친구로 생각했다면 말해라, 종화는 어떻게 되었느냐?”

마달은 움찔거리며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웅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종화는・・・・・・ 끌려갔어.”

“끌려가다니? 어디로?”

“화검문(花劍門).”

화검문은 서안의 동쪽 거리에 있는 기루를 운영하는 흑도 무리들이었다.

손풍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화검문? 그 기녀들 등이나 처먹고 사는 놈들이 종화는 왜 끌고 갔단 말이냐?”

“화검문의 육걸(杰)이 그 전부터 종화에게 자기들이 운영하는 소골루(消骨樓)에서 창을 하라고 요구했는데, 종화는 계속 거절했거든. 노래는 자기가 부르고 싶을 때 불러야 한다며 질색을 하더라구. 그랬더니 얼마 전에 육걸이 패거리를 끌고 와서 종화를 강제로 데려갔어.”

종화는 예전부터 노래를 잘했다. 더구나 목소리가 미성이어서, 눈을 감고 있으면 절세의 미인이 부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솜씨가 좋아서 손풍과 친구들은 곧잘 병풍 뒤에 그를 숨긴 채 노래를 듣곤 했다.

손풍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육걸, 그 개자식이 종화를 호시탐탐 노리더니 결국 일을 벌였구나. 너희는 그걸 보고도 가만있었단 말이냐?”

마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손풍은 마달과 남곤, 갈도의 부어터진 얼굴과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는 옷자락을 살펴보고는 더 이상 그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종화가 끌려가는 걸 막으려다 육걸 일당에게 호되게 당한 게 분명했다.

한낮 기루를 배경으로 설치는 흑도 무리들에게 두들겨 맞고 친구까지 빼앗긴 채로 저잣거리 한쪽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들의 모습에 손풍은 화가 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하나 생각해 보면 아마 종남파에 들어오기 전이었다면 손풍도 비슷한 꼴을 당했을 게 뻔했다.

손풍은 순간적이나마 이런 친구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친구들은 그대로인데 왠지 자신만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변한 것인지, 내 처지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잠시 몸을 굳혔던 손풍은 정색을 하고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자!”

마달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려고?”

“어디긴? 소골루로 가서 종화 녀석을 구해 와야지.”

“하지만 거긴 화검문 놈들이 잔뜩 있을 텐데……”

마달이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머뭇거렸으나, 손풍의 몸은 이미 저만큼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마달과 친구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소골루는 저질스러운 이름답지 않게 외관만큼은 제법 깔끔하고 단정한 기루였다. 앞 건물에서는 술과 음식을 팔고, 뒤쪽으로 기방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규모도 적지 않아 보였다.

지금은 한낮이라 주루는 시끌벅적했지만, 기방 쪽은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쾅!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주루와 기방 사이의 쪽문이 박살 나 버렸다.

난데없는 폭음에 놀라 기방의 여기저기에서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육걸, 이 개자식 어딨어?”

누군가가 벽력같은 고함을 토해 내며 부서진 문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손풍이었다. 손풍은 불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사납게 둘러보며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불문곡직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뭐, 뭐야?”

“누구야, 당신?”

엉겁결에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이내 손풍의 주먹에 맞고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어이쿠!”

“이놈이 사람 잡네. 화검문은 뭐 하는 거야? 이놈을 막지 않고?”

순식간에 네댓 명의 장한들이 나뒹굴었다. 때마침 소란에 놀라 화검문의 졸개 몇 명이 달려 나오다 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를 내질렀다.

“습격이다!”

“쳐들어온 놈은 한 명뿐이다. 그러니 ・・・・・・ 쾌!”

달려오던 자들은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나가떨어졌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시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는지, 손풍의 주먹은 제법 날카롭고 매서워서 누구도 그의 손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손풍은 자신의 주먹에 사방으로 나뒹구는 장한들을 보면서도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분노로 눈이 뒤집히기도 했지만, 상대의 몸놀림이나 솜씨가 형편없었던 것이다.

‘겨우 이런 놈들 때문에・・・・・・

십여 명이 더 쓰러지자, 누구도 쉽게 덤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화복을 입은 커다란 덩치의 장한이 몇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웬 놈이냐?”

손풍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 그 화복인이 화검문의 문주인 육걸임을 알아보았다. 예전 파락호 시절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몇 번 보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육걸, 네놈이 내 친구를 끌고 갔다고?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육걸은 주위에 나뒹굴고 있는 부하들을 보고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 네가 누구기에 네 친구를 이곳에서 찾는단 말이냐?”

그때 육걸의 뒤에 있던 장한이 손풍을 알아보았는지 다급하게 그에게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육걸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노태야의 망나니 아들이라고? 손노태야를 믿고 지금 이런 행패를 부렸단 말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종남파의…

“종남파가 뭐?”

육걸이 부하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손풍이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바로 대종남파의 제자인 손풍 어르신이다!”

육걸은 손풍의 동작이 무척이나 빠른 것을 보고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옆으로 피하려 했다. 하나 손풍의 몸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육걸은 다급하게 자신의 절초인 파산권(破山拳)으로 대항하려 했으나, 정면으로 다가서던 손풍이 갑작스럽게 옆으로 비스듬하게 움직이며 육걸의 옆구리를 오른손으로 가격했다.

그 신묘한 동작에 육걸은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쾅!

“커억!”

손풍의 주먹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육걸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왼쪽 갈비뼈가 몇 개 부러져서 육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허리춤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손풍은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다시 명치를 세차게 가격했다.

퍽!

“허어어…….”

육걸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입으로 시뻘건 선혈을 꾸역꾸역 토해 냈다.

손풍은 바들거리는 그의 몸을 잡아 끌어올리며 사나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셋 셀 동안 종화를 데려와라. 하나.”

육걸은 그제야 손풍이 종화를 찾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았으나 맞은 부위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조, 종화는 뒤편 별실에..”

그가 무어라고 하든 손풍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숫자를 헤아렸다.

“둘.”

육걸은 여전히 멱살이 잡힌 채로 자신의 뒤에 있는 장한에게 고갯짓을 했다.

“조, 종화를 데려와………….”

“셋!”

하나 이미 손풍의 입에서는 마지막 숫자가 흘러나왔다. 육걸이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손풍의 오른 주먹은 이미 그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쾅!

비명도 없었다. 육걸은 턱이 박살 난 채로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손풍은 조금 전에 육걸에게 말을 했던 장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너다. 셋 셀 동안 종화를 데려오지 않으면…….”

손풍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그 사람은 부지런히 뒤편으로 달려갔다.

“데려오겠습니다. 잠시만…….”

그제야 손풍은 쳐들었던 주먹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때 마달과 친구들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부서진 대문과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장한들을 놀란 눈으로 둘러보다가 얼굴 반쪽이 박살 난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육걸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육걸이 이렇게 가다니. 앞으로 죽만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구나.”

손풍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녀들이나 등 처먹는 놈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는 슬쩍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솜씨가 어땠소, 동사형?”

기루의 그늘진 구석에서 동중산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지금까지 그곳에서 손풍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은 솜씨였네. 특히 육걸을 상대할 때의 삼환투일은 제법 깔끔하게 들어가더군.”

손풍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장괘장권구식은 이미 모든 투로를 익힌 지 오래요. 육걸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내 손을 당할 수는 없었을 거요.”

“그동안 불철주야 수련한 효과가 나타나는군. 하지만 이런 하류잡배들에게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무공이니 쉽게 사용하지 말게.”

 손풍은 무슨 말이냐는 듯 짐짓 눈을 크게 떴다.

“힘들게 배운 무공을 이럴 때 써 보지 않으면 언제 쓴단 말이오?”

동중산은 더 무어라고 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짓고만 있었다.

때마침 후원으로 달아났던 장한이 한 사람을 끌고 왔다.

희멀건 얼굴에 비리비리한 인상의 그 사람을 보자 손풍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종가야. 아직 멀쩡히 살아 있구나!”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손풍을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풍! 네가 이곳에는 어쩐 일이냐?”

손풍은 짐짓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 형님이 네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구해 주러 온 것이지. 이제 이 형님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종화는 그제야 사정을 짐작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고맙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대접 잘 받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손풍이 그 말에 슬쩍 종화의 안색을 살펴보니,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상처 하나 없는 얼굴에 혈색도 좋아서 잘 먹고 잘 지낸 티가 역력했다.

“마달에게 듣기론 육걸이 널 강제로 끌고 갔다는데?”

“그러긴 했지. 그런데 의외로 육 문주의 대접이 괜찮았어. 하루에 한 시진씩 병풍 뒤에서 노래 몇 곡만 부르면 별다른 간섭 없이 기루에서 마음껏 놀게 해 주더라고.”

뜻밖의 말에 손풍은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종화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기서 너무 잘 지내다 보니 깜박했어. 그렇잖아도 며칠 내로 너희를 부르려고 했지.”

손풍은 뺀질뺀질한 종화의 얼굴에 분노의 주먹이라도 내갈기고 싶었으나, 이내 그의 어깨를 덥석 움켜잡았다.

“아무튼 무사했으면 됐다. 이제 가 보자.”

종화는 손풍의 손에 어깨를 잡힌 순간 꼼짝달싹도 할 수 없어서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를 박살 내 놓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긴? 우리 집에 가서 회포를 풀어야지.”

종화를 비롯한 친구들이 모두 안색이 변했다.

“손가장에 간단 말이냐?”

“당연하지. 아버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으니, 너희도 함께 가자.”

“우리는 안 가면 안 될까? 손노태야께서 우리를 보면 무척 싫어하실 텐데.”

종화의 말에 마달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아마 몽둥이찜질이라도 해서 내쫓으려 하실걸.”

남곤이 아픈 기억이 떠올랐는지 진저리를 쳤다.

“난 그분이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 싫어. 마치 내가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된 거 같아서 말이야.”

갈도가 뒤지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친구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놈이라는 말까지 들었어. 그때 깨달았지. 어쩔 때는 욕먹는 거보다 차라리 맞는 게 낫다고 말이지.”

마달이 재빨리 갈도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럼 내가 손노태야 대신 때려 줄까? 맞는 건 몰라도 때리는 건 자신 있는데.’

다른 세 친구가 그를 노려보았다.

“넌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고 싶냐?”

“아니, 난 그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거 같아서………….”

마달이 쩔쩔매고 있을 때, 손풍이 그들을 둘러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되었건 우리 모두 떳떳하게 들어가자. 아무리 아버지라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거야.”

마달이 재빨리 다른 세 사람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께 가자. 맞아도 함께 맞고, 욕먹어도 함께 먹고. 그러면 덜 아플 거야. 아마도.”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