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74화
군림천하 (974)
고표는 골패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며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제길. 끗발 정말 안 붙는군. 벌써 며칠째 이 모양이라니.”
옆에 있던 고취(高鷲)가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엊그제 좀 땄을 때 대충 일어서자니까. 둘째 형은 너무 고집이 세서 문제야.”
“이제는 패가 좀 풀리나 싶었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푼돈이나 벌자고 여기 온 거냐?”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있던 돈을 몽땅 털어놓고도 모자라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조리 팔아 버렸으니 이제 어떡할 거야?”
고표는 잠시 고취를 쏘아보더니 돌연 히죽 웃었다. 거칠고 사납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어쩌긴. 장성 너머나 돌아다니며 빈 주머니를 채워야지.”
고취도 따라 웃었다. 살기를 머금으면서도 무언가 흥겨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쪽으로 안 돌아다닌 지도 제법 되었지? 조금 있으면 월동 준비한다고 창고에 꽉꽉 채워 놓고 있을 텐데, 다시 수금할 시기가 되었네.”
“이번에는 제대로 몸도 좀 풀도록 하자. 여기 바로 위층 기루가 그렇게 끝내준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었는데, 도박장에서 모두 털려 그냥 돌아가게 생겼으니 아쉬운 대로 초원의 계집들이나 맛봐야겠다.”
“큰형도 반대하지 않겠지?”
“저기 오니까 직접 물어봐라.”
고표의 말에 고취가 뒤를 돌아보자 마침 다른 탁자에서 주사위 노름에 빠져 있던 고경(高鯨)이 험상궂은 얼굴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성난 표정만 봐도 고취는 고경이 별로 성과가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경은 고취 옆에 앉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도박장은 왜 이따위냐? 어째 판이 조금만 커지면 한 번을 안 걸려? 혹시 노천(老)을 쓰는 거 아냐?”
노천이란 사기 도박꾼을 말하는 것으로, 도박장에서는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복당이 생긴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서안에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나름대로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노천을 쓰거나 돈을 속이지 않고 거래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도박꾼들이 사방에서 몰려든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 형제만 이런 꼴이냐?”
고경이 계속 불만을 터뜨리자, 고취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형님도 도박장에 오래 버틸수록 남은 건 빈 주머니뿐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이삼일 정도 놀다 일어났어야 했는데, 벌써 칠 일이나 머물렀으니 아무리 좋은 운이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지요.”
고경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 편이냐? 지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거야?”
“그럴 리 있습니까? 아무튼 저는 이제 슬슬 일어나 우리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할 일?”
고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초원에 다녀온 지도 벌써 상당한 기간이 지났으니, 이제 초원의 풀 냄새를 다시 맡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고경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쉬긴 했군.”
고경은 아직도 골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고표의 어깨를 툭 쳤다.
“갈 여비는 남겨 둬라.”
“그렇잖아도 끗발이 영 안 붙어서 그만두려고 했소.
고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고취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만복당은 어린애도 들락거릴 수 있나 보군. 세상에 이런 도박장도 다 있었네.”
무심코 고취가 가리킨 곳을 돌아본 고표와 고경이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들뿐 아니라 만복당에서 도박을 하고 있던 손님들 중 상당수가 희한한 일을 본다는 듯 그쪽을 쳐다보며 웃거나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십 대 후반의 남녀들과 함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박장 한가운데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키득거림과 웅성거림이 계속되었으나, 그들은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계속 만복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꼬마야, 여기가 뭐 하는 곳인 줄 알고 온 거냐?”
“만복당이라고 하니까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데인 줄 알았겠지. 아니면 돈이 술술 들어오는 곳인 줄 알았던지.”
“둘 다 맞는 소리 아니냐? 재미있는 놀이도 하고 돈도 벌 수 있고, 크크크.”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거푸 터져 나왔다.
“크하하. 옳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찾아왔구나.’
“벌써부터 이런 곳을 들락거리다니, 장차 크게 될 놈이로다.”
그래도 선뜻 그들의 앞을 가로막거나 수작을 부리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마도 세 사람 모두 인물됨이 준수한 데다 하나같이 병장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어린 소년이 자기 키만 한 장검을 양손에 안다시피 하고서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걷고 있는 모습은 왠지 범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소년의 누나인 듯한 소녀가 지나가는 점원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이내 고씨 형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
고취와 다른 두 형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그들 세 사람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서문연상이 달덩이 같은 얼굴에 묘한 눈빛을 한 채로 세 형제를 한 사람씩 차례로 훑어보더니 이내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정말 별호에 어울리는 면상들이로구나. 생긴 것만 봐도..”
그녀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나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고취 등 세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제 겨우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생면부지의 소녀가 자신들에게 불쑥 다가오더니 대뜸 용모를 비하하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 중 그래도 가장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고취가 그녀의 전신을 빠르게 한 차례 훑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무어라고 했소, 젊은 소저?”
장검이 상당한 명검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평소와는 달리 그래도 부드럽게 나온 것은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의 재질이 무척이나 좋은 데다, 그녀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고색창연한
서문연상은 턱을 살짝 치켜든 도도한 자세로 오히려 되물었다.
“누가 고표예요?”
그녀의 안하무인 같은 태도에 세 형제의 안색이 달라지며 눈에서 흉광이 흘러나왔다.
고취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성격이 불같은 고표가 앞으로 나왔다.
“내가 고표 어르신이다. 너는 뭐 하는 년인데, 나를 찾는 거냐?”
고표의 욕설에도 서문연상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노아삼수 중의 고표가 바로 당신이로군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자 순간적으로 고표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내게 물어볼게 있다고?”
“그래요.”
“묻고 싶은 게 뭐기에 도박장까지 나를 찾아온 거냐? 아니, 내가 이곳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서문연상은 여전히 방긋 웃고 있는데, 주위의 공기는 점차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중요한 거냐?”
“당신이 내 물음에 순순히 답해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하지요.”
“뭐라고?”
“순순히 답해 준다면 나를 욕한 벌은 따귀 한 대로 그칠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문연상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차갑기 그지없는 냉소로 변해 버렸다.
“이빨이 모조리 뽑히고 혀가 잘려져 본 아가씨에게 함부로 입을 놀린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
한창나이의 어리고 이쁜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험하고 살벌한 내용이 아닌가?
고표는 물론이고 듣고 있던 고취와 고경 또한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고표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 미친년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고취가 재빨리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의 무쇠 같은 주먹이 가녀린 그녀의 배꽃 같은 얼굴로 날아들고 말았을 것이다.
고취는 발작하려는 고표를 진정시키며 날카로운 논으로 서문연상을 응시했다.
“소저가 물어보려는 게 뭐요? 뭔지 알아야 대답을 하든 이빨을 뽑든 할 거 아니오?”
서문연상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도 짐승 중 하나는 쓸 만하군요.”
그녀가 넌지시 그들의 별호를 빗대어 놀렸으나 고취는 눈을 살짝 찌푸리기만 했을 뿐, 침착함을 유지했다.
“단순히 우리를 놀리려고 온 거요? 아니면.
“며칠 전에 이곳에서 물건 하나를 팔았죠?”
뜻밖의 물음에 고취는 움찔하다가 이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고객의 신분을 지켜 준다는 만복당의 큰소리도 거짓이었구나.”
“강도질해서 훔쳐 온 도난품은 해당되지 않는 걸 몰랐나 보군요.”
고취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지며 말투 또한 거칠게 변하기 시작했다.
“흐흐, 도난품이라. 어떤 물건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하나둘 판 게 아니라서 말이지.”
서문연상은 점차로 변해 가는 그의 말을 듣고도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청실과 홍실로 이루어진 옥 노리개 말이에요. 만지고 있으면 따뜻해져서 손발이 찬 여인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죠.’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세 사람의 안색이 모두 차갑게 굳어졌다.
고취는 그녀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여인의 노리개 따위를 돈 주고 거래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유소응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청홍옥완이 들려 있었다.
유소응은 그 옥완을 그들 앞에 내보이며 그들 세 사람을 차례로 살피고 있었다. 무심한 듯 표정이 별로 없는 얼굴에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는 그 모습은 전혀 어린 나이의 소년답지 않았다.
서문연상은 계속 표정이 굳어 있는 그들을 향해 여전히 생글거리며 물었다.
“돈 주고 구입한 적은 없다고 하니 누군가에게서 빼앗거나 훔친 거로군요. 이걸 어디서 입수했어요?”
고취는 고표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거 같으냐? 그리고 그 노리개를 우리가 어디에서 구했건,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때 유소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직하면서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이건 돌아가신 내 부모님의 유품이에요. 오 년 전에 정람기(正) 근처의 다륜(多倫) 일대에서 열두 개의 가옥을 부수고 서른일곱 명을 살해하고 도망친 흉적들의 손에 변을 당하셨지요. 그때 없어졌던 물건을 당신들이 가지고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