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2
아실은 방한복을 벗었다.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스스로 지은 옷이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살인적인 추위에서 그녀를 지켜 주 었던 옷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옷을 벗는 아실의 동작에 조심성 이라고는 없었다. 민첩하게 방한복을 벗은 아실은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빙글 돌렸다.
그리고 집어던졌다.
모피를 덧대었기에 꽤 묵직했지만 방한복은 거센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물론 아실이 계곡 위에 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도 했다. 소매를 펄럭이며 나는 옷의 모습은 마치 상체만 가진 사람이 날아가는 듯한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실에게 그 것은 그저 필요 없어진 쓰레기 처치일 뿐이다. 그녀는 날아가는 옷에 아무 관심 없이 남동쪽 먼 곳에 자리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북쪽 끝. 높이 삼사백 미터 정도의 헐벗은 구릉들이 가득하다. 그 구릉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도시의 모습 은, 비록 대지에 생긴 버짐처럼 볼품없었지만 여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지막 힘을 끌어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아 실은 카날티의 모습을 보며 묻어 두었던 고민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구릉 때문에 어느 곳을 보든 1킬로미터 이상 보기 힘들었지만 아실은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카날티에서 남쪽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시구 리아트 산맥 동사면으로 가려면 남동쪽에 있는 디팝을 향해야 한 다. 반대로 시구리아트 산맥 서사면을 따라가려면 남쪽의 파리조 로 향해야 한다. 그 길은 발케네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이며 이후 나나본까지 똑바로 내려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에 있 는 아이톤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제국의 남부로 내려가려는 여 행자에게는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규리하를 목적으로 삼은 사람 이라면 적당한 방향이다.
아이톤에 대해 고려해 보던 아실은 결국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 방향이 아니라 목적지임을 깨달았다. 세 가지 방향을 동시 에 고려하는 것은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 기 때문이다. 하텐그라쥬로 간다면 디팝 쪽을 향하는 것이 좋다. 그 방향으로 걸어간다면 키준 산맥과 에시올 산맥을 넘어 푼텐 사막에 도달할 때까지 대하河)나 큰 호수, 바다 등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하텐그라쥬가 아닌 황제에게 간다면 규리하로 가야 하고, 그렇다면 아이톤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하텐그라쥬와 황제 중 하나를 결정하기 어렵다면 가운데 방향인 파리조로 가야겠지 만 그 방향으로 가면 나나본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아실은 나 나본에 있는 어떤 수교위와 근시일 내에 다시 마찰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황제와 하텐그라쥬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결정하기 까다로운 문제였다. 헛수고하는 셈 치고 가기엔 하텐 그라쥬는 너무 멀다. 지멘이 쉼 없이 달려도 두 달은 걸릴 테고, 그렇게 쉼 없이 달렸다간 당연히 아실이 먼저 죽을 것이다. 아실 은 모든 상황이 쾌조일 때 대략 반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 다. 왕복하면 일 년. 긴 시간이다. 하지만 당장 규리하로 찾아간 다 해서 뚜렷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전의 시도에서 그들 은 하늘누리 침입에 성공했지만 치천제의 모습은 보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실은 능선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쥐 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멘은 고민하고 있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이 직접 설명해 준 것은 아니지만 지멘은 소녀가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거의 짐작했다. 지멘 또한 요청받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의 고민에 개입하지 않는 레콘이었고 그 다른 사람이 아실일 경우 개입은 불가능하다. 죽일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지멘은 그 생각에 약간 껄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뭔가 잘못 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는 자신이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멘은 자신이 아실을 죽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철의 대화 가 시작되었으니 아실이 공격할 때까지 지멘은 공격할 수 없다. 아실이 공격한 후에야 지멘은 공격할 수 있다. 그런 조건성, 한 시성에 대한 관념이 지멘을 묘한 착각에 빠져 들게 한 것이다. 말과 공격은 다르다. 아실이 공격한 후에 지멘은 공격할 권리를 얻지만, 그때도 말을 할 권리는 찾아오지 않는다. 아실이 죽을테니까.
도깨비가 아닌 아실은 죽은 다음에는 말을 할 수 없다.
지멘은 영원히 아실에게 말할 수 없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멘을 놀라게 했다. 그는 낯선 것을 보는 기분으로 자신이 영원히 말을 걸 수 없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언제나 그 의 곁에 있으며 그의 숙명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 는 것이 엄청난 손실인가? 지멘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실이 일어섰다.
그녀는 지멘을 향해 걸어왔다. 지멘은 그녀의 얼굴에 담긴 결 단보다 고뇌의 흔적을 먼저 읽었다. 그것이 지멘을 동요하게 했 다. 그는 기다렸다. 아실은 뭐라 말할 듯 지멘을 올려다보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멘은 수염볏을 무의식적으로 비틀 었다. 아실이 겨우 말했다.
“결정했어요. 파리조 방향으로 가요.”
디팝도 아니고 아이톤도 아닌 파리조. 지멘은 아실이 고민을 잠시 유예시켜 두기로 했음을 알았다. 아실은 변명했다.
“그때는 납병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우리는 암살공에게 알아 볼 것이 있어요. 기억나죠? 유료 나루터에서 말이죠. 왜 우리의 입국을 그렇게 결사적으로 막았는지 궁금해요. 그 사람 요즘 요 새를 짓고 있다지요. 뭄토도 그 요새에 가서 잡일을 할 계획이었 대요. 그 요새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걸 좀 봐야겠어요.”
합리적인 설명이었지만 지멘은 아실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느 낌을 쉬 지우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 던 지멘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아실 을 집어 배낭에 넣었다. 자리를 잡은 아실이 말했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왼쪽에 두고, 남쪽으로.”
쓸데없는 말이었다. 아니.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진로를 결정했다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까? 지멘은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따라 달렸다.
몇 시간 뒤 그들은 꽤 큰 농장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했다. 아 실과 지멘에게 돼지를 판 농장주는 자신이 1년에 한 번 올까 말 까 한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돼지를 도축하고 요리까지 해 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아실은 돼지 세 마리에 해당하는 대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아실과 지멘은 배가 충분히 부르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먹었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떠났다. 그 덕분에 이후 사흘 동안 농장주와 그의 가족들은 남아 있는 돼지고기와 뼈 등을 상대로 여러 가지 조리법을 시험해 보면서 꽤 즐거운 시 간을 보냈다. 나흘째 되던 날, 돼지고기, 판매 대금, 둘째 아들 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그러니까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불 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더 이상 즐거워할 수 없었지만. 그러 나 그것은 나흘 뒤의 일이다.
지멘과 아실이 농장을 떠난 것은 달이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농장주는 스카리 요새라는 이름을 낯설어했지만 다행히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중 한 명이 그 소재를 대충 알고 있었 다. 아실이 항상 큰 농장을 선호하는 것은 식량이 넉넉하여 판매 할 여력이 있다는 이유 외에 젊고 혈기 왕성한 사용인들이 모아 놓은 정보들이 많다는 이유도 있다. 물론 그런 정보들에게는 해 괴한 변형이 가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잘 새겨들어야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단순한 지리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별다른 변형이 가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발케네에서만 통용되는 고유 지명들 몇 가지를 정리한 후 아실은 자신이 스카리 요새의 위치를 파악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벽이 되었을 때 그녀는 꽤 낭패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14시간 동안 500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온 끝에 그 들이 맞이한 지형은 아름다웠다. 까마득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뒤섞여 새들에게 주의력을 요구하는 지형 위로 울창한 가문비나 무 숲이 덮여 있었다. 굳이 광적인 자연 찬미가가 아닌 여행자라 도 이 땅의 웅혼한 기상에 깊은 인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일 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멘은 아실이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실은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500킬로미터의 관성이 그녀의 몸 안에 서 아직도 요동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 황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맞닥뜨렸고, 그래서 동행자 에게 뭔가를 설명할 여유나 기력이 없었다. 적당히 앉을 만한 자 리를 찾은 아실은 그대로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 싸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지멘은 무력감을 느꼈다.
육체적으로도 피로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무력감을 조 장하는 데 육체적 피로감은 종범의 위치에 있는 듯했다. 주범은 정신적인 것이었다. 지멘은 아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어떤 박탈 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6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무턱대고 주저앉은 아실과 달리 지멘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 보았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가문비나무는 그의 거대한 체구를 감추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빛깔은 하얀 빛 깔의 경우보다 몸을 감추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숲에 익숙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그의 모습이나 발자국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멘은 앉지 않기로 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거대한 몸 을 기댄 지멘은 하전한 눈길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아실에게서 달라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 멘 속의 무엇인가가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멘은 그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아실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군사 이론이 발케네에서만 퇴보한 것이 아니라면 이건 말도 안 돼요.”
아실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군사 이론가들은 험지에 방어력을 집 중시키는 이론에 대해 오래전에 사망 선고를 내렸어요. 험지의 방어 기지는 공격 측을 괴롭힐 수 있지만 방어력도 고립시키니까 요. 방어에만 치중하겠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전쟁 은 그렇지 않아요. 방어를 하면서 필요할 땐 공격에도 나설 수 있어야 하죠. 그러니까…………… 어르신, 딱정벌레, 뱀단지 등 굉장히 빠른 명령 전달 수단이 사용된 제2차 대확장 전쟁 때부터 전쟁 이론가들은 방어와 공격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되었어요. 군 사력은 그 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험악한 지형에 위치한 방어 기지는 그중 반밖에 수행할 수 없지요. 그래 서 난공불락의 요새나 철옹성 같은 것은 구닥다리 신화가 됐어 요. 유격 활동을 하려는 것이 아닌 바에야 현대의 요새는 좋은 거점 기지 역할만 해 주면 돼요.”
지멘은 조금 감동했다. 아실의 설명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설 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극심한 피로 때문에 말도 하기 싫을 텐데 그녀는 말을 걸 수 없는 지멘의 처지를 고려한 것처럼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실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락토 빌파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땅에 요새 를 짓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죠. 둘 중 하나예요. 우리가 길을 잘 못 들었거나 발케네 공이 짓고 있는 것이 요새가 아니거나.”
지멘은 수염볏을 조금 비틀었다. 아실은 크게 하품을 하고 일어났다.
“우선 눈 좀 붙인 다음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보지요.”
아실은 팔을 들어 올렸다. 지멘은 그녀를 집어 들고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지형을 찾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