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5화
군림천하 (995)
백모란은 자신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진산월을 다소 기이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다시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네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나로서는 오히려 이야기하기가 한결 편해졌구나. 사실 늘 내 정확한 신분을 공개하지 못하는 게 나에게도 불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여러 상황이나 여건들이 그걸 막았겠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백모란의 얼굴에 얼핏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백모란은 백 년 동안 같은 모습, 같은 얼굴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져 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전성기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또 다른 신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천봉궁을 세운 후 그녀는 한동안 천봉궁주의 신분으로 활동했으나, 세월이 흐르자, 결국 궁주의 지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그의 딸 신분으로 행세해야 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그녀로서는 그리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젊은 여인 행세를 하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늙지 않는 외모와 조익현을 상대할 인물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단봉공주라는 새로운 신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 그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정체가 단봉공주이건 백모란이건 지금의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에게 한 가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께서 본 파의 무공 몇 가지를 익히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그 자세한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도 공주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백모란도 그 점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공주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리는 게 더 어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백모란은 진산월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미 백 년 전에 얻은 무공에 대해 종남파의 장문인이 뒤늦게 사정을 물어 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익혀 와서 온전히 자신의 무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식의 지적에는 약간의 당혹감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하나 종남파 장문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태껏 남에게 추궁받는 입장이 되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잠시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진산월을 바라보았을 때, 진산월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은 채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정심한 태도와 바다처럼 깊고 바위보다 단단한 정력(定)에 그녀는 새삼 눈앞의 젊은이가 절대로 쉽게 상대해서는 안 될 인물임을 절감했다.
“내가 익힌 무공 중 종남파에서 연원(淵源)한 것은 모두 두 가지로군. 칠음진기와 염화옥수가 바로 그것이다.”
진산월은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둘 중 칠음진기는 조익현과 약혼을 했을 때 그가 선물로 준 것이다. 내가 태음신맥을 타고났음을 알고 나에게 꼭 맞는 무공이라며 한 가지 구결을 알려주었지. 나는 그것이 종남파의 무공인 줄도 모르고 단순한 약혼 선물로 생각하고 기쁘게 받았다.”
칠음진기가 백모란에게 넘어간 연유는 조여홍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염화옥수 마저 그녀가 익히고 있을 줄은 진산월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내가 칠음진기를 너무 쉽게 익히자 조익현은 칠음진기에 어울리는 무공도 필요할 거라며 새로운 구결 하나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바로 염화옥수다.”
칠음진기와 염화옥수는 모두 비선 조심향이 선대의 절학을 참고하여 직접 만든 것으로, 태음신맥을 지녀야만 절정에 오를 수 있는 비학들이었다. 하나 그 위력은 과거 종남오선 시절에도 가히 독보적인 것이어서 당시에는 누구도 비선 조심향을 여인의 몸이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칠음진기와 염화옥수, 무염보, 난화지의 사대절학(四大絶學)으로 비선 조심향은 지금까지도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여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매종도의 비학 못지않게 비선의 절학도 종남파 사람들이 애타게 찾던 무공들이었다. 비선 이후 종남파에 제대로 된 여고수가 등장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고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조심향의 사대절학 중 두 가지가 단순한 약혼 선물로 종남파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여인의 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여인은 그 무공이 종남파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진산월이 지적하지 않았다면 백모란은 자신이 익힌 그 두 개의 무공이 종남파의 것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그 무공들을 익히면서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듯 내게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중에 조익현에게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망록(備忘錄)이 있으며, 그 비망록에 그 두 개의 무공 말고도 몇 개가 더 적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진산월은 그 비망록에 대해 조여홍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비망록은 필시 비선 조심향이 쓴 것일 것이다. 비망록의 제일 마지막에 적혀 있다며 조여홍이 알려 준 구결은 지금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은가?
백모란은 진산월의 표정을 슬쩍 살피고는 조금은 차가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그 비망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필시 조여홍, 그 냉혈마녀가 지껄인 것이겠지.”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조여홍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모란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냉정하고 싸늘한 기운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녀가 나에 대해 무어라고 했느냐?”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모란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식으로 그녀를 감쌀 필요는 없다. 나도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남자를 홀리는 여인이니 무조건 조심하라고 했겠지.”
진산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모란도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차가운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그녀의 말을 믿느냐?”
단순히 쳐다보고 있기만 하는 데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진산월은 나직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집요할 정도로 진산월의 두 눈을 응시하며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눈치가 비상하고 남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으니,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도 있지.”
“그녀가 저를 속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백모란은 입속으로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 너를 봐도 알 수 있지. 무조건 그녀의 말을 믿고 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진산월은 씁쓸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백모란의 말마따나 자신이 은연중에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그녀를 만나면서도 단 한 번도 지금처럼 그녀를 경계해 본 적이 없기에 자신이 생각해도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모란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 조여홍의 말에 의지하여 그녀에게 엉뚱한 선입감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조차도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백모란의 의중에 넘어가는 와중에 느껴지는 감정일까?
백모란의 의중이 무엇이든 그녀의 말이 진산월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분명했다.
백모란은 봉황처럼 한없이 영롱하면서도 매혹적인 눈으로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 말이든 그녀의 말이든 한쪽의 말에만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도록 해라. 너는 똑똑한 사람이니 신중하게 판단해서 행동한다면 남을 잘못 봐서 낭패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여홍이 무어라고 했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조익현이 내가 반드시 척살해야 할 필생의 적이라는 것이다.”
진산월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백모란의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그녀가 그 얘기도 한 모양이구나. 백가장의 참변에 대해서도 들었느냐?”
진산월은 자신의 단순한 반응에도 그녀가 자신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파악을 하자 공연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습니다.”
“조익현은 치밀한 성격이어서 흔적 같은 걸 쉽게 남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백가장이 참변을 당하는 와중에 가솔 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 나는 지금도 그가 살아남은 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조익현의 또 다른 농간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진산월은 전혀 예상 못했던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백모란의 눈빛은 심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문이 혈겁을 당하고, 식솔 하나가 살아서 유일한 후손인 나에게 진실을 알려 준다는 그런 상황이 왠지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느냐?”
진산월은 그녀가 너무 과장된 해석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상대가 조익현이라면 그런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다. 특히 조익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백모란의 생각이라면 무조건 아니라고 부인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조익현이 석동과 싸운 후 심한 부상을 입었을 때 그를 찾아갔지. 직접 그에게 물어보고 진정한 내막을 알고 싶었던 거야.”
일견 무모한 행동 같았으나,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백모란의 행동 방식이었다.
“그때 나는 칠음진기가 거의 구성에 달해 있었고, 염화옥수 또한 십성을 넘보고 있어서 조익현이 어느 정도 몸을 회복했다 할지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직접 물었지.”
“그가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백모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미소를 보자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염화옥수를 발출했고, 그는 놀라운 동작으로 내 공격을 맞받아치며 허공을 날아갔지.”
말을 하는 백모란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진산월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추적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슴에 염화옥수 일장을 선명하게 새기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잠시 망설였으나 그를 해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지.”
“……”
“나중에야 나는 그를 해치우려면 그때 염화옥수가 아닌 다른 무공을 사용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조익현은 이미 비선의 무공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라서 내가 염화옥수를 펼친 순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훤히 꿰뚫어 보았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