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04화
군림천하 (1004)
선상(船上)에 올라서자 푸른 강물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벌판과 울창하게 핀 갈대숲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임영옥은 경장호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그 산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심유(深幽)한 눈으로 금보산을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진산월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강 저편에서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그녀의 몸에 두른 담요가 너무 얇지 않을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녀는 몸을 떨거나 추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나마 얇은 입술을 아슬아슬하게 감돌던 희미한 온기가 조금 더 사라졌을 뿐이었다.
금보산이 조금씩 멀어지며 강상에 부는 바람도 조금 더 세차졌다.
“사매, 이제 들어가는 게 좋겠어. 강바람이 제법 매섭군.”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그의 손끝 아래 느껴지는 그녀의 피부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느다란 떨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노을이 지는 저녁까지 강바람을 맞는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임영옥도 그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산월이 부축하려 했으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힘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선실로 들어서기 직전에 그녀는 다시 낙수와 금보산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 눈길과 표정이 너무나 처연해서 진산월은 그녀를 재촉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선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녀가 침상에 눕자 진산월은 그녀의 맥문을 확인하고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래 있었나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추궁과혈을 하고 칠음진기를 연공하면 다시 좋아질 거야.”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몸속에서 솟구치는 한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차가운 강바람을 상당한 시간 동안 맞았기에 심맥까지 한기가 침범해 들어갈 정도였다.
그녀 또한 자신의 몸이 몸속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진산월을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사형의 여자 몸 주무르는 솜씨가 점점 더 좋아지더군요. 나중에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어요.”
“당연한 말을 하는군. 그거 말고도 사랑받을 만한 재주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요리도 잘하고, 거짓말도 잘하고…….”
진산월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리는 물론 잘하지만, 거짓말은 통 못하는걸?”
임영옥은 뼛골이 시릴 듯한 한기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다시 배시시 미소 지었다.
“바로 그런 표정을 지으며 태연히 거짓말을 하지요. 정말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요.” 진산월은 일부러 손을 올려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원. 사매야말로 예전과 똑같아. 너무 똑같아서 가끔은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그런 동작도 예전 그대로네요. 호호!”
그녀는 참지 못하고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산월은 그 틈에 재빨리 그녀의 경맥을 주무르며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추궁과혈은 진기를 상대의 몸에 주입해 경맥과 혈도를 반강제로 뚫기에 받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
진산월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진기를 운용하고 손길을 부드럽게 해도 그녀는 적지 않은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진산월이 추궁과혈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찌푸리거나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몸을 열심히 주무르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추궁과혈이 모두 끝나자 진산월은 이불을 덮어 주고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잘 참았어. 이제 칠음진기를 운공해 봐.”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조금 전 선실 밖을 나갔다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약간이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추궁과혈을 마치고 칠음진기를 운영하면 그나마 몸속의 한기가 어느 정도 억제되어 통증이 덜해졌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조여홍에게서서 칠음진기의 완벽한 구결을 받아 온 것이 신의 한 수인 셈이었다.
칠음진기는 음기를 다스리는 효과만큼은 천하에서 가장 탁월한 신공이었다. 그런 칠음진기로도 그녀의 몸속에서 솟구치는 한음지기를 완벽히 제어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한기를 최대한 다스려 그녀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칠음진기의 수련을 마친 그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산월은 선실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이미 석양이 드리워져서 붉게 물든 노을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선상에서 푸른 강물 위로 보이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운치가 넘치는 일이었으나, 진산월에게는 그런 광경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칠음진기로도 그녀의 몸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선상 한편에 우뚝 선 채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을에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깊은 우울과 고뇌에 휩싸여 흐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두 사람이 선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전흠과 서인걸이었다.
그들은 선상 한편에 서 있는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엇? 장문 사형. 이곳에 계셨군요.”
전흠이 약간은 난처하고 약간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진산월은 한눈에 그들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언뜻 보아도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강호에서의 명성도 별로 차이 나지 않아서 서로에 대한 호승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전흠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격이 온순해 보이는 서인걸 또한 비슷한 또래에게 뒤질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은근히 경쟁심을 품고 있다가 무언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이곳에 나온 걸 보니 단순히 바람을 쐬기 위한 건 아닌 모양이구나.”
넌지시 짚어 보는 진산월의 말에 전흠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서 소협이 본 파에서도 익힌 사람이 없다는 낙전칠검의 변형 검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솜씨라도 볼까 하고 나왔습니다.”
서인걸은 아직 정식으로 종남파에 입문식을 거치지 않았기에 소협이라는 호칭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전흠이 단순히 서인걸의 무공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상에 올라올 때만 해도 전신에 팽팽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얼굴에 투기가 가득했던 것으로 보아 한바탕 단단히 손을 겨룰 작정이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그들이 서로 몸을 푸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흠의 성격에 팔자에도 없는 마부의 노릇을 하느라 하루 종일 마부석에 앉아 있었으니 좀이 쑤셨을 게 뻔하고, 서인걸 또한 아직은 어색한 동행에 적지 않게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잘됐군. 나도 마침 낙전칠검이 어떤 무공인지 궁금하던 참이다. 너의 성라검법이라면 제법 좋은 상대가 되겠구나.”
꾸지람을 할 줄 알았던 진산월이 오히려 자신들의 싸움을 부추기자 전흠은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다구나. 저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에게 본 파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줄 기회로구나.’
전흠은 사실 미모가 뛰어난 천봉궁의 선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야릇한 장면들을 기대했으나, 두 사람은 마차 안에 들어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무슨 촌구석의 나부랭이로 보는 것 같아서 심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새롭게 일행에 합류한 서인걸을 보니 배알이 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의 속문이 늘어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하필이면 비슷한 나이의 젊은 남자가 일행이 되는 건 결코 반가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젊은 남자의 외모가 준수하고 겉으로 보아도 비범한 인상이었으니 전흠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누산산의 반응을 보니 그녀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강호에서 제법 명성을 쌓은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비라도 걸어서 본때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의외로 서인걸은 그의 가벼운 도발에 쉽게 호응해서 먼저 한 수 겨루자고 요구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귀가 번쩍 뜨인 전흠이 신나게 선상으로 올라왔는데 하필이면 사저를 돌보느라 통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진산월이 올라와 있어서 내심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그들의 싸움을 반기고 있는 모양새였다.
전흠은 기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 서 소협과 비무를 해도 괜찮습니까?”
“어차피 한동안 함께 여행을 할 사이이니 이 기회에 서로의 실력을 알아 두면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요. 말뿐인 실력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어야지요.”
전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서인걸을 향해 달려들 듯하자 진산월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초수는 삼십 초로 제한하고, 내공은 끌어올리지 않고 검법으로만 상대한다. 만에 하나 다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를 승자로 하겠다.”
전흠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다친 사람이 승자라니요?”
“그렇게 이기고 싶으면 네가 다치면 될 게 아니냐? 아니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이냐?”
“아니오. 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이기겠습니다.”
전흠은 당당하게 말하며 먼저 선상의 중앙에 가서 우뚝 섰다.
“오늘 서 소헙에게 종남파의 검법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호승심이라면 서인걸도 전흠에 못지않았다.
성격적으로 유순하고 건실하기로 이름난 서인걸이었으나, 그도 천상 무림인인지라 무공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고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본가의 전광십사검의 원류인 낙전칠검은 종남파에서도 최고의 무공 중 하나였다. 전광십사검을 완벽하게 익힌 내가 다른 검법을 익힌 자에게 패할 리 없다.’
서인걸은 이번 기회에 종남파에 자신의 면모를 제대로 선보일 생각에 다부진 각오를 다지며 진산월에게 포권을 했다.
“본 가의 검법을 충실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부족한 솜씨라고 탓하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시기 바랍니다.”
하게.”
“전 사제의 성정이 비록 거칠지만 본성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일세. 그의 성라검법은 일정 경지에 올라가 있으니, 마음껏 솜씨를 발휘해 보도록.”
듣기에 따라서는 전흠의 무공이 훨씬 뛰어나니 다칠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재주를 부려 보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나 서인걸은 진산월의 표정에 추호도 그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빛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본 가가 그동안 바친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단단히 각오가 서린 음성을 토해 내고는 서인걸은 곧장 전흠의 앞에 가서 우뚝 섰다.
두 젊은 고수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포권을 했다.
“종남의 전흠이오.”
“서가보의 서인걸이오.”
두 사람은 인사가 멋쩍은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고는 이내 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노을 지는 선상에 검광이 번득였다.
서로 간단하게 예전(禮典) 초식을 교환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휘두르며 격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