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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06화


군림천하 (1006)

제406장 호인 괴인(好人人)

순풍을 탄 배는 다음 날 무사히 낙남에 도착했다.

낙남의 나루터에서 다시 말들을 내려 사두마차에 연결하느라 바쁜 와중에 먼저 배에서 내려 잠시 상단을 다녀온 경장호가 진산월을 찾아왔다.

“불편한 곳은 없으셨습니까?”

“덕분에 편하게 왔소. 이 신세는 잊지 않겠소.”

“별말씀을. 어차피 낙남은 수시로 왕래하는 곳이라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경장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제 거래처 중에 대풍당(大豐堂)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의 수장이 진 장문인을 뵙기를 청해 왔습니다.”

경장호에게 배를 빌려 탄 입장에서 무작정 거절할 수는 없기에 진산월은 우선 자세한 사정을 알고자 했다.

“대풍당이란 어떤 곳이오?”

“섬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곡물을 거래하는 양곡상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입니다. 저도 십 년 넘게 거래를 해 오고 있는데, 좀처럼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이번에는 제게 사정을 하더군요.”

양곡상이 종남파의 장문인을 만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개 상인이라고 무시하기에는 경장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대풍당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오?”

경장호는 진산월이 당장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지 조금 전보다는 밝아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왕립성(城)이란 자인데, 나이는 저와 비슷합니다. 이십 년 전쯤부터 작은 목선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수단이 좋아서 금세 이 일대에서 제법 알려진 양곡상으로 성장하더니 지금은 규모만 따지면 섬서성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불과 이십 년 만에 섬서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상이 되었다면 상인으로는 대단히 특출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장호가 그의 청을 선뜻 뿌리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그자의 성격은 어떻소?”

“상당히 치밀하고 꼼꼼합니다. 시류(時流)에 민감하고 형세 판단이 빨라서 좀처럼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런 자라면 안면을 익혀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진산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를 만나도록 하겠소.”

경장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진 장문인.”

“내가 가야 하오?”

“아닙니다. 진 장문인께서 승낙하신다면 그가 직접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를 불러오겠습니다.”

아무리 왕립성이 섬서성의 이름난 거상이라고 해도 일파의 존주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다. 다시 나간 경장호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각쯤 경과한 후였다. 

경장호의 뒤에는 키가 크고 몸이 상당히 마른 화복의 중년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화복 중년인은 눈매가 날카로웠고, 입술이 얄팍해서 성격이 깐깐해 보였다.

진산월이 머무르고 있는 선실로 들어온 화복의 중년인은 진산월을 향해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대풍당의 주인인 왕립성이라 하네.”

다소 무례해 보이는 그 인사에, 옆에 있던 경장호가 안색이 굳어졌으나, 진산월은 특별히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거상이라 불릴 정도의 부유한 상인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지는 손가전장의 손 노태야를 상대하면서 충분히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토록 거만하고 자신 외의 사람을 우습게 보는 대풍당의 주인이 왜 굳이 선실로 직접 찾아오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진산월을 만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진산월이 짤막하게 인사하자 왕립성은 슬쩍 경장호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경장호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선실 밖을 나갔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십시오.”

경장호가 사라지자, 왕립성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진산월의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런 다음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의 전신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의 무례함에 화를 낼 틈도 없이 왕립성이 먼저 불쑥 입을 열었다.

“만남에 응해 주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지. 원래는 정식으로 종남파에 사람을 보내 초대를 하거나 찾아가려 했는데, 마침 종남파의 장문인이 경가의 배를 타고 이 근처를 지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만남을 청하게 되었네.”

하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존대를 하는 것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말투에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거상이라고 해도 일개 상인이 한 문파의 존주를 아랫사람 대하듯 할 수는 없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한 가지 상황일 때뿐이다.

“본파에 적(籍)을 둔 적이 있었소?”

진산월의 물음에 왕립성의 두 눈에 매서운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는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젊은 나이에 비해 상황 판단이 빠르고 두뇌가 비상해서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나는 예전에 종남파의 이십 대 제자였네.” 

이십 대라면 진산월의 사부인 임장홍과 같은 배분이었다.

진산월에게는 사숙뻘이니 그가 진산월에게 이런 말투를 쓰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이미 문파를 등진 과거의 제자가 현재의 장문인을 대하는 태도로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다.

섬서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상이 과거 종남파에 적을 둔 정식 제자였다는 것은 확실히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그에 대한 말투를 조금 바꾸었다.

“어느 분을 사사(師事)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까?”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왕립성의 눈빛이 처음으로 살짝 흔들렸다.

“낙일검 해조림. 나는 해조림 사부의 유일한 제자였네.”

해조림이란 말에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분의 제자는….”

왕립성은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한 듯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내 본명은 왕도일(王道逸)일세. 왕립성은 속세로 나오면서 새롭게 지은 이름일 뿐이네.”

왕도일.

이 이름은 진산월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낙일검 해조림은 과거 종남삼검의 수좌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하나 기산취악 당시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칠지신검 좌군풍에게 허무하게 패한 후 문파를 떠나 방황하다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나중에 낙일방이 절벽 아래의 동굴에서 그를 발견하고 그의 무공을 얻을 때까지 이십 년간 종남파의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해조림의 제자는 왕도일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도 기산취악 이후 해조림의 실종과 비슷한 시기에 모습을 감추어 많은 사람들이 그들 두 스승과 제자가 필시 어딘가에 은거한 채 맹렬하게 무공을 수련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해조림은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아 종남산의 깊숙한 곳을 뒤지고 다니다가 절벽에 떨어져 운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고, 그의 제자인 왕도일은 이름을 바꾼 채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제의 전혀 다른 행적은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왕도일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종남삼검의 첫째인 해조림의 유일한 제자로 상당한 무재(武)를 지녔으나 사부와 함께 실종되어 종남파를 떠난 인물로만 알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립성, 아니 왕도일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십일 대 장문인 진산월이 왕사숙을 뵙니다.”

왕도일도 조금 전보다는 한결 격식을 갖추어 답례를 했다.

“왕도일일세. 장문인을 보게 되어 반갑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낯선 외인이 아니라 같은 문파에 몸을 담은 둥문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탄탄하며 질긴 끈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만 같았다.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이 정중하게 청하자 왕도일의 차갑고 일견 강퍅해 보이는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숨겨서 무얼 하겠나? 사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무림에 뜻을 잃고 종남파를 떠날 결심을 했었네.”

종남파의 최고 고수인 종남삼검의 우두머리를 사부로 두었던 왕도일이 무림에 흥미를 잃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도일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벌써 이십오 년이 흘렀군. 아직도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네. 아니, 단 하루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옳겠군.”

종남파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 기산취악!

공교롭게도 왕도일은 당시 소림사로 향하는 행렬에 따라가지 않았다. 마침 부친의 생신이 멀지 않아서 종남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림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 것은 기산취악을 당하고 오일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이 잔뜩 끼어 금시라도 한바탕 폭우가 내릴 듯 일기가 거칠었다. 종남파의 분위기도 덩달아 뒤숭숭했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공기가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소식이 들려왔다.

-소림사에서 벌어진 형산파와의 대결에서 종남파가 참패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종남파가 더 이상 구대문파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형산파로 그 자리를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소를 터뜨리거나 화를 내었다. 심지어 껄껄 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이후 하나씩 추가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급변했고, 종남파의 분위기는 끝 모를 어두움에 잠겨 버렸다.

왕도일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각오를 했다.

‘형산파의 위세는 지금의 종남파가 감당하기 힘들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종남삼검 세 분 중 한 분도 오결검객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 진정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본 파는 어찌 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림사에서 돌아오는 일행들을 맞으러 종남산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후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종남파 고수들을 볼 수 있었다.

장문인인 하원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토록 찬란하게 빛났던 종남삼검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군 채 비통함에 젖어 절망하는 실패자들만이 한가득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사부인 해조림을 직접 만난 왕도일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종남삼검의 수좌로서 섬서성 일대에서 누구도 무시 못 할 위세를 보였던 사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단지 분노와 복수에 사로잡힌 늙은 검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본 파를 다시 구대문파로 복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 말만을 중얼거리는 사부의 모습은 왕도일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생경한 것이었다.

종남삼검의 둘째인 질풍검 전풍개가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종남파를 떠난 것은 며칠 후였다. 그리고 종남삼검의 막내인 풍뢰검 관소양마저 제자인 백동일과 함께 종남파를 나가는 순간, 왕도일은 종남파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랑을 꾸린 해조림이 함께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아가자며 찾아왔을 때, 왕도일은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삼배를 올렸다.

해조림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한참이나 그를 보고 있다가 묵묵히 그의 절을 받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들 사제는 그렇게 각자의 길을 떠난 것이다.

왕도일이 가산을 정리한 돈을 긁어모아 배 한 척을 사서 상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의 일이었다. 종남파의 제자 왕도일이 아닌 왕립성이라는 낯선 이름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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