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1007화


군림천하 (1007)

왕도일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진산월은 그들 사제의 기구함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산취악 당시의 종남파 제자들 중 굴곡진 사연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해조림과 왕도일 사제 또한 너무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었다. 해조림은 결국 아무도 찾지 못하는 절벽 아래의 외딴 동굴에서 생을 마감했고, 왕도일은 상계에 뛰어든 지 이십 년이 넘은 지금도 종남파를 잊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발로 장문인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해조림 사숙조에 대해선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왕도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지 못하네. 처음에는 장사에 몰두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듣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찾으려 해도 전혀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더군.”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해조림에 대해 입을 열었다.

왕도일은 단 한마디도 대꾸하거나 묻지 않은 채 묵묵히 진산월의 말을 듣기만 했다.

진산월의 사제인 낙일방이 초가보의 공격에 당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가 해조림의 구원을 받았으며,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다가 결국은 격체전력으로 내공을 전수받고 그의 최후를 지켜보았다는 말에 지그시 두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이십 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부터 사부인 해조림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진산월의 이야기가 끝나자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왕도일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부는 감정이 풍부하고 마음이 여린 분이셨네.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검무를 추면서 노래를 부르곤 하셨지. 종남파의 재건을 꿈꾸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종남삼검의 다른 두 분과는 결이 조금 다른 분이었네. 아마 그래서였을 거네.”

왕도일의 표정은 철탑을 매달은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쫓겨나는 충격을 여린 마음의 그분은 감당할 수 없었을 걸세. 그래서 실전되었던 문파의 비급을 찾는다는 핑계로 세상 밖으로 몸을 숨긴 거야. 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왕도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장문인의 말을 들어보니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실전된 비급을 찾아 헤매다 결국 소선의 유진을 찾아내신 거로군.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강호의 깊숙한 곳에 은거한 채 살고 계신 줄로만 알았지. 언젠가는 만나게 될 순간을 기대하면서도 그런 날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네. 그런데 그게 모두 헛된 망상에 불과했군.”

그 말을 끝으로 왕도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 또한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한동안 선실 안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사색에 잠긴 공간이 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왕도일은 한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장문인에게 만남을 청한 건 사부의 행적을 알기 위함도 있지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였네.”

“그게 무엇입니까?”

왕도일은 모처럼 진산월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왕도일은 그런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종남파로 귀문(門)하고자 하네. 내 청을 수락해 주겠나?”

진산월은 묵묵히 왕도일의 차갑게 빛나는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상계의 싸움도 무림의 세계 못지않게 거칠고 험악했을 것이다. 그런 상계에서 이십 년을 버티며 배 한 척으로 시작해 일가를 이루어 낸 사람이 평범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는 진산월의 정심한 시선을 마주하고도 왕도일은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왕도일의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눈 속에 뜨거운 열망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진산월의 착각이었을까?

진산월은 마치 눈싸움을 하듯 그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진중한 물음을 던졌다.

“본 파의 제자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왕도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후회하지 않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걸 후회해 본 적은 없네.”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본파의 령()과 법도를 지키실 겁니까?”

“충실히 지킬 것이네.”

“본 파의 무공을 외인에게 전하거나 누출한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명, 내 딸아이에게만 태을신공을 전수했네. 호신(護身)의 의미였네.”

진산월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종남파 이십일 대 장문인으로 명하겠다. 이십 대 제자 왕도일의 본 파 귀문을 허(許)하노라.”

왕도일은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이십 대 제자 왕도일이 장문인의 명을 받듭니다.”

정식으로 인사가 끝난 후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따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왕옥지(王玉芝)일세.”

“따님을 본 파의 이십일 대 제자로 인정하겠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고맙네. 그 아이도 기뻐할 걸세.”

“저는 지금 본 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본 파로 가시겠습니까?”

진산월이 장문인의 신분으로 그의 복귀를 허락한 것은 엄밀히 말해서 약식에 불과했다. 종남파 본산으로 직접 가서 조사전을 참배하고 조사들에게 귀문했다는 사실을 고(告)해야만 비로소 정식으로 귀문이 완료되는 것이다.

왕도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네. 장문인과의 만남부터 미리 계획했던 일이 아닌지라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적지 않네. 우선은 딸아이를 먼저 보내고, 나는 급한 일을 정리한 후 본산으로 가도록 하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진산월이 선뜻 승낙을 하자 그제서야 굳어 있던 왕도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양곡은 소금과 함께 상계의 가장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재료였다. 따라서 양곡상 사이의 암투는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치열하고 살벌한 것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섬서성의 손꼽히는 상단으로 성장하기까지 왕도일이 헤쳐 온 파랑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거친 세상을 살아온 왕도일도 종남파로의 복귀를 허락받는 장문인과의 만남은 긴장되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장문인의 허락을 얻고 딸까지 종남파 제자로 인정받게 되니 왕도일은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왕도일이 돌아간 후, 진산월은 임영옥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조용히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던 임영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왕 사숙에 대해서는 아버님께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어요.”

진산월은 선사에게서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기에 흥미가 일어 물었다.

“그래? 나한테는 특별한 말씀이 없으셨는데. 선사께선 그를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궁금하군.”

“아마 사형이 본 파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왕 사숙과 해 사숙조께서 본 파를 떠난 후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두 분에 대해 잊고 계셨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간혹 그분들 말씀을 하곤 하셨어요.”

“무어라고 하셨는데?”

“해 사숙조는 무림인답지 않게 흥도 많고 정도 많은 분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주위에서 그분을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도 하셨어요.”

“왕 사숙은?”

임영옥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 사숙은 계산이 철저하고 상당히 냉정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고, 남의 실수에도 관대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셨지요.”

“두 사제가 전혀 다른 성격이었군.”

“아마 그 때문에 왕 사숙이 본 파를 떠난 후 쉽게 잊혔을 거예요. 아버님도 두세 번 말씀을 하신 외에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으셨으니 말이에요.”

임영옥은 눈을 빛내며 진산월에게 되물었다.

“사형이 본 왕 사숙은 어떤 분이세요?”

임영옥은 진산월의 사람 보는 눈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진산월이 어떻게 왕도일을 평가했을지 무척 궁금했다.

진산월은 자신이 보았던 왕도일을 뇌리에서 떠올려 보고는 이내 짧고 분명한 음성을 내뱉었다.

“일단 호인(好人)은 아니야.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에 언제든 냉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러고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더군. 사소한 행동이나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허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주의자야. 그가 왜 이십 년 만에 섬서성에서 내로라하는 거상이 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

“서 가주님에 비하면 어떤가요?”

임영옥은 얼마 전에 종남파의 속문이 된 서가보의 가주인 서해원과 왕도일을 비교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종남파와 멀어졌다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종남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니 임영옥으로서는 종남파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종남파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던 것이다.

진산월은 거리낌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서 가주는 호인이지. 본질적으로 명문의 주인다운 의협심과 도리, 그리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야. 그는 본 파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임영옥은 살짝 웃었다.

“듣기만 해도 믿음직하군요.”

이어 그녀는 조금 전에 진산월이 했던 왕도일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그에 비해 왕 사숙은 호인이 아니라고 했죠. 계산적이고 냉혹한 사람이라고.”

“그래. 그래서 본 파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지.”

뜻밖의 말에 임영옥은 살짝 눈을 치켜뜨고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형이 그분을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군요.”

“호인이 아니라고 악인인 것은 아니야. 오히려 지금의 본 파에는 그처럼 냉정하고 때로는 냉혹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더욱 필요해.”

임영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사형은 괜찮겠어요?”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이 한 항렬 위의 사숙뻘인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사람의 성격이 냉정하고 계산적이라면 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임영옥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에 대한 진산월의 대답은 어느 때보다도 명쾌했다.

“그 정도의 인물은 포용할 줄 알아야 우리가 목표로 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임영옥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이럴 때의 진산월이 얼마나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종남산으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왕 사숙의 딸이 도착하면 바로 길을 떠나자고.”

임영옥의 창백한 얼굴에 기대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본산으로 가는군요.’

낙남에서 서안까지는 넓게 뻗은 관도로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종남산으로 가는 길은 이틀거리에 불과했다. 마침내 집으로 가는 길이 코앞으로 닥쳐온 것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