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4화 유혹의 검은 장미 4 : 흡혈귀
흡혈귀
홍녀는 주변에 백귀의 영으로 강력한 결계를 쳤다. 이제 막 죽 은 남자에게서 단서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남자의 영이 그를 죽 게 만든 어떤 힘으로부터 협박을 받지 않도록 강력한 결계를 먼 저 만들어야 했다.
‘놈이 짐작대로 흡혈마라면, 저 남자의 남은 육신도 흡혈마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미리 차단을 해야 한다.’
홍녀는 결계를 쳐서 어떤 영도 침투하지 못하도록 만든 뒤 영 사를 행할 작정이었다. 상대가 흡혈마라면, 흡혈마에게 당한 사 람의 육신마저도 자칫하면 흡혈귀로 변하게 된다.
‘백귀의 우두머리, 적적귀, 진을 펴라! 수뢰귀, 불기운을 막아 라! 화뢰귀, 물기운을 막아라!’
홍녀는 차례차례 백귀들을 배치하여 팔괘진과 비슷한 진을 쳤다. 누런 기운이 용솟음쳐 올랐다.
‘이만하면 됐겠지.’
그제야 홍녀는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남자에게 손을 뻗쳤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뒤에서는 누런 기운이 소용 돌이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핏빛 기운도 번져 가고 있었다.
현암은 차를 급정거시켰다. 오페라 하우스 앞이었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든 붉은 기운들은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린 후였다.
“준후야, 뭐가 보이니?”
현암이 외쳤다.
“음…… 어라? 백귀의 진, 바로 그 무녀예요!”
“우리보다 한발 앞섰군!”
현암이 분하다는 듯이 외쳤다.
“다툴 것 있나? 같이 힘을 합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나?”
박신부는 태연했다.
“아녜요. 백귀의 힘이 미쳐 날뛰고 있어요! 아줌마가 위험해 요! 백귀가, 백귀들이 통제력을 잃고 있는 걸로 봐서………… 으악, 백귀들이 서로 싸우고 있어요!”
준후의 비명과 같은 소리에 현암은 재빨리 준후의 앞에 놓인 부적들 중에서 안명부(眼明符)*를 집어 들고 차에서 몸을 날려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뛰어들었다. 박 신부가 기다리라고 외쳤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현암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넋을 잠시 잃었다. 주인의 통제력을 잃은 오만가지 귀신들이 그 안에서 맹목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귀신들의 싸움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을 테지만, 안명부를 가진 현암의 눈에는 똑똑 히 보였다. 현암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 같은 광경에 치 를 떨며 안명부를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소머리를 한 귀신 하나가 갈퀴 같은 손톱으로 난쟁이 비슷한 형상의 귀신을 조각조각으로 찢었고, 난쟁이 귀신의 대가리는 몸에서 떨어져 날아올라 소머리 귀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 머리가 사방에서 획 휙 날아다니고 있었고, 주둥이 같은 것이 불쑥불쑥 날아올라 머 리들을 물어 채 가기도 했다. 거대한 괴물이 다른 놈들을 밟아 찌부러뜨리고, 낫 같은 이상한 물체를 든 놈 하나는 고래고래 고 함을 지르며 사방에 칼질을 하고 다녔다. 귀신의 너덜너덜한 살 점이 사방에 퉁겨지고, 고약한 형형색색의 액체들이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 이건 지옥보다 심하군!
속이 뒤틀려져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는 현암의 시선에 엎드려 있는, 아니 쓰러져 있는 홍녀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길게 뻗어 뭔가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계속 찾아다녔던 검 은 장미였다. 그 장미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은 이파리를 나부 끼며, 꽃송이를 입처럼 벌려 날름거리면서 홍녀의 목덜미를 향 해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밝혀 영을 볼 수 있게 하는 부적.
‘시간이 없다!’
“타앗!”
현암은 일갈하며 월향을 뽑아 들었다. 홍녀가 쓰러져 있는 곳 으로 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암은 백귀들이 아수라처럼 날 뛰고 있는 가운데를 통과해야 했다. 월향이 길게 울었다.
“빨리! 현암 군을 도와야 해!”
박 신부는 준후를 재촉하여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준후는 귀를 틀어막고 계속 고개를 흔들며 버텼다. 영력 이 뛰어난 준후는 안에서 터져 나오는 귀신들의 지독한 비명 소 리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아악! 지독해! 귀신들이 서로 죽이고 있어요! 저걸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 비명 소리들…………. 아아!”
“준후야! 준후야!!”
박신부는 준후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저 안에 현암 군이 있단 말이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위험해!”
“아아, 저 비명 소리! 귀가 귀가!”
“너밖에 할 수 없어! 저 미쳐 날뛰는 백귀를 잠재우고 진정시 킬 수 있는 사람은! 주문을 기억해 내!”
준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귀라면 말이 백(百)이지 실은 수없는 영들의 집합체였다. 이건 전쟁이었다. 어린아이가 전쟁 의 쇼크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준후는 지독한 참상에 몸을 떨 고 있었다.
“백귀를 저대로 가엾게 죽게 내버려 둘 셈이니? 그 무녀도, 현 암군도 죽게 될지 모른단 말이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준후는 축 늘어지고 말았다. 박 신부는 침중한 얼굴로 준후를 땅에 내려놓고는 성수와 십자가를 꺼냈 다. 그리고 홀로 성큼 들어섰다.
그림자 하나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박 신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쓰러져 있던 수위, 아니 수위의 빈 껍질이었다. 두 눈의 검은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비죽이 튀어나온 양 송곳니에 입을 헤벌리고서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박 신부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제기랄………….. 아멘!’
박 신부는 멈추어 서서 흐느적흐느적 다가오는 수위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꺄아아악!
월향이 울며 무작정 달려들어 또 한 귀신의 목을 날려 버렸다. 월향의 귀기에 쏘인 귀신의 머리와 몸뚱이는 공중에서 풍선이 터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앞을 막는 귀신들의 무리가 너무나 많 았다. 갖은 수를 써 보았으나 현암은 귀신의 진을 돌파하지 못했 다. 기껏 반 정도 다가선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 이제 현암은 오 히려 귀신들에게 포위된 꼴이 되어 버렸다.
검은 장미는 날름거리며 홍녀의 어깨까지 뻗어 가고 있었다. 목을 길게 늘이는 뱀처럼.
“안 돼!”
현암은 악을 썼다. 단전에서 알지 못할 힘이 터져 나와 분출되 는 듯했다. 현암은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어허헝!”
현암의 입에서 노호가 터져 나왔다. 전날, 산에서 만난 이인에 게서 파사검법과 함께 배운 사자후, 놀랍게도 항마 무공 중 최고 경지의 음공)이 발휘된 것이었다. 그러나 현암의 기공 조예 는 음공을 함부로 발휘할 만한 경지에 오르지는 않았다. 기혈이 들끓고 머리에 별이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현암은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월향을 놓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백귀들은 이제………….’
흐뭇한 기분으로 눈을 뜬 현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확실 히 사자후의 기색에 놀랐는지 백귀들 중 몇몇 허약한 영들은 어 디론가 꺼져 버렸다. 그러나 대다수 놈들은 자기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현암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으, 섣불리 큰 수를 써서 되레 벌집을 건드린 꼴이 되었구나!’
현암은 월향을 든 손을 치켜 올리려 했으나 기를 있는 대로 쏟 아부은 후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흡혈마의 부하가 되어 버린 수위의 육신을 지켜보 았다. 흡혈귀도 박 신부의 손에서 번쩍이는 십자가의 위력을 아 는 듯, 흉하게 붉은 눈알을 일그러뜨리고 신음을 토해 내며 오른 손으로 왼쪽 손목을 주물렀다.
‘더러운 영이여, 너의 것이 아닌 육신에서 벗어나라!’
박 신부가 여유 있게 성수를 꺼내려는 순간, 안에서 “안 돼” 하고 외치는 현암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차, 현암군이!’
박신부가 방심한 기회를 틈타, 흡혈귀는 자기의 팔을 뜯어 박 신부에게로 던졌다. 박 신부는 얼굴에 둔탁한 충격을 받고 눈앞 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코에 비릿한 내음이 나고 세상이 횡
도는 느낌이었다. 박 신부는 흡혈귀의 손에 얼굴을 움켜잡힌 채 와당탕 땅에 박혔다.
이어서 “어허헝” 하는 현암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사자후 때문에 백귀들의 싸움 소리가 가라앉자 준후의 정신이 맑아졌다.
“음? 신부님!”
간신히 고개를 드는 준후의 눈에 박 신부의 쓰러진 모습이 들 어왔다. 흡혈귀의 왼팔이 박 신부의 얼굴을 거의 땅에 틀어박힐 정도로 누르고 있었다. 흡혈귀는 이죽거리며 박 신부에게로 다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