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9화 – 아라크노이드 4 : 거미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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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2권 19화 – 아라크노이드 4 : 거미의 공격


거미의 공격

한참이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서 사설 비비가 있는 집의 주 소를 알아내자 일행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그 집을 찾아갔 다. 혜영은 박 신부, 승희와 함께 뒤차에 탔는데, 혜영은 차 안에 서승희에게 간략하게 사건과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 고는 낯빛이 질렸다. 승희가 친절한 혜영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뭣해서 아예 까놓고 말한 것이다. 얼떨떨한 듯 한동안 창밖만을 바라보던 혜영은 그 와중에도 노트북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고립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퇴마사가 무엇인지 아직도 납득이 안 되는지 자기가 본 거미보다는 귀신이나 영들 을 상대로 싸운다는 이들에게서 더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승희가 피식 웃으면서 혜영에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은 없어요. 저희를 도와주셔야 해요. 혜영 언니가 이 프로그램에서 자세한 것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러니 좀 도 와주세요. 예?”

그러나 혜영은 귀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후로 얼굴이 하 얗게 질린 채 자신의 컴퓨터만 두들겼다. 승희가 말을 덧붙였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일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요. 어떤 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 바이러 스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원한을 풀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아무 튼 사정을 알아봐야죠.”

혜영이 나직이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 운전하던 박 신부도 한숨을 쉬었다. 앞차에는 현암과 준후가 연희와 함께 타고 있었 다. 준후가 말했다.

“레오라는 사람의 주소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암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승희의 말에 의하면 여태까지 들은 영의 메시지는 두 가지라 고 했어. ‘놈이 곧 죽겠지만’과 ‘파괴를 위한……………. 만약 우리 생 각대로 바이러스에 깃든 영이 원한령이라면 말이야. 그 영은 지 금 무언가를 파괴해서, 곧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 를 하려는 것 같아. 어때?”

“그럴 수 있겠군요.”

현암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면이 있어. 파괴를 통해서 복수를 한 다니. 그것도 바이러스를 통해 복수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 르겠어. 바이러스로 파괴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터잖아. 그런데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터를 파괴한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순 없는 것 아냐? 물론 그 사람 컴퓨터를 망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보러 가는 것 아니에요?” “하긴 그래.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BBS가 어떻게 해서 그런 바이러스에 정복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 지금 이 순 간에도 바이러스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 나저나 신부님 차는 왜 이리 느리지?”

현암이 모는 차는 어느덧 레오라는 사람의 독신자 아파트 부 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가 아파트 부근에 도착하자 지도책 을 한참이나 뒤적거리던 연희는 여기가 레오의 아파트가 틀림 없을거라고 단정했고, 잠시 후 뒤차에서 내린 혜영도 제대로 찾 아왔음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박 신부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 했다.

“어떻게 하지? 누가 올라가 봐야겠어.”

현암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가겠습니다. 통역이 필요하니 연희 씨가 같이 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나도 같이 올라가겠네.”

박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준후는 외국인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나서지 않았고, 승희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혜영이 두려운 듯 같이 있어 달라고 옷소매를 잡아당기 는 바람에 올라가지 못했다.

“아니, 뭐가 무섭다는 거예요.”

“저 꼬마하고만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어쩌라는 거예요. 무서워요!”

“저 꼬마라구요? 저 꼬마가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 아이고!” 

설명하려던 승희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내저으며 이야기를 맺 었다.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연희는 우체통의 주소를 확인했다. 레오라는 사설 비비의 운영자가 사는 곳은 육층이었다. 떠날 때 승희는 혹시나 해서 연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건넸다. 나머지 한쪽은 준후가 가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도 없는 고물 아파트라서 일행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고, 그사 이에 나머지 세 명은 차에서 기다렸다. 혜영이 무서움을 잊으려 는 듯 한참 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알아냈어요. 프로그램 이름은 ‘아라크노이드’인 것 같 군요. 하드 디스크의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완전히 지우고 남은 공간을 온통 채워 버리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리고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소스 코드를 몇 달은 봐야 알 수 있을 ….”

혜영이 말하는 중에 준후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엎드려요!”

승희가 반사적으로 혜영의 몸을 덮쳐누르고 준후도 고개를 푹 숙였다. 옆 창문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유리를 와장창 깨고는 반 대편의 창문을 깨부수고 나갔다. 소방용 손도끼였다. 혜영은 몸 이 눌린 상태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질러 댔고, 준후는 재빨리 차의 문을 열고 몸을 굴렸다.

준후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눈이 흐려져 있는 미셸이었 다. 그의 손에는 또 하나의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아래층에서 일장 활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현암과 박 신부는 연희와 함께 레오의 집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613호.

불어를 할 줄 아는 연희가 문을 두드리고 벨을 몇 번이나 눌렀 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요. 안쪽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던데…………….”

집 안에서 밖을 내다보도록 만들어진 작은 렌즈 구멍으로 하 얀 형광등 빛이 약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벨 소리에도 아 무런 대답이 없자 기분이 묘해졌다. 외출중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꺼림칙한 기분 때문에 박 신부가 문 앞으로 나서서 안쪽 을 향해 살짝 투시를 했다. 준후나 승희의 투시력에 비하면 박 신부의 능력은 훨씬 미약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투시는 가능했 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서 신경을 집중한 다음에야 박 신부는 입 을 열었다.

“이거 이상하긴 하군. 안에 누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는데, 어쩌면…….”

박신부가 눈을 감더니 말을 덧붙였다.

“안에 있는 건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죽어요? 그게 무슨말이죠? BBS 운영자가 왜?”

“모르겠네. 하여간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어. 방을 잘못 찾은 것 같지도 않고・・・・・・ . 무슨 일인지 모르니 관리실에 가서 키를 빌려 와야겠네. 말이 안 통하니 연희 양도 같이 가세. 우리가 가 서 키를 빌려 올 테니까 현암 군 자네는 여기서 지키고 있게나.” 

“예, 그러죠.”

올라오면서 본 층계참에 붙어 있는 벽보에 의하면 관리실은 맨 위층에 위치해 있었다. 연희와 박 신부는 열쇠를 구하기 위해 관리실이 있는 맨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고, 현암은 아파트의 복 도문 앞에서 어정거리며 기다렸다. 그러나 성질 급한 현암으로 선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처음 일 분 정도는 가만히 있었으나, 이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문 너머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문 너머에 누가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서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 급해졌다. 문을 부술까 하다가 간신히 충동을 억누른 현암은 문 에 귀를 바짝 대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온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원래 현암의 혈도는 자유로이 운행되지 않아 귀 까지 퍼지지 않기 때문에 초인적까지는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 보다는 훨씬 잘 들리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현암이 귀를 기울 여서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하는데 안에서는 아무 소리 가 없었고, 오히려 난데없이 바깥쪽에서 낯익은 여자의 비명 소 리가 현암의 귀에 가냘프게 들려왔다.

‘아, 이건 승희의 비명 소린데. 바깥에서 무슨 일이………..?’

현암은 깜짝 놀라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보니 아파트 앞뜰에 면한 창문이 하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로 가야 아래가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준후의 멱살을 잡고 위로 치켜 올리는 것을 보고 승희 는 비명을 질렀다. 악령들과 많이 싸워 온 준후는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남자 또한 분명 무슨 악령이 씌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재 빨리 달려들어 부적을 던졌으나, 부적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채 남자의 몸에 맞고 떨어져 내렸다. 영과는 관계없는 행동 이었다. 남자는 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전광석화처럼 준후의 멱살을 잡고 무서운 힘으로 위로 치켜 올렸다. 멱살을 잡힌 준후 가 몸을 버둥거렸으나 사람에게는 주술을 쓰지 않는 것을 철칙 으로 하는지라 다른 수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노랫가 락을 흥얼거리면서 태연하게 허리춤에 찔러 두었던 밧줄을 꺼 냈다. 혜영은 의외의 광경에 충격을 받고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승희는 비명을 지른 다음 앞뒤 가릴 것 없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준후를 잡고 있는 남자의 오른팔에 매 달렸다.

“놔! 내려 놔 놓으라고!”

“Mère araignée Sans appetit

(식욕도 없는 엄마 거미가

Sémpressa de manger son mari

(제 남편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남자의 입에선 흥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불어로 하는 소리인지라 승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이 사 람이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남자는 왼손으로 캑캑거 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준후의 목에 밧줄을 감으려 했다. 승희는 남자의 오른팔을 잡고 흔들어 댔지만 그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기운이 무척 세어진다는 말이 사실 인 듯했다.

“안돼! 어서 놔! 놓으란 말이야!”

“Ce aui restaint du mari

(남편은 껍질만 남아)

Regarda Sa femme sans voir

(제 부인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급해진 승희는 남자의 팔에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기지를 발휘해 몸을 날려서 다리를 걸었다. 옛날에 누군가에게서 서양 인들은 상체의 힘이 좋은 대신 하체가 약해서 다리를 걸면 거의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말을 주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맞 는지 남자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남자가 넘어지는 바람에 목 에 밧줄이 감긴 준후도 덩달아 넘어졌다. 재빨리 승희가 밧줄을 잡는 통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준후는 이미 강한 힘으로 목을 잡 혀 있었다. 준후는 반쯤 의식을 잃었고 승희도 남자가 밧줄을 당 기자 중심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 승희는 쓰러지면서 재빨리 남 자와 자신 사이에 여분으로 있던 밧줄을 뒤로 쭉 끌어당겼다. 남 자의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서 승희와 준후 사이는 어느 정도 밧줄이 헐렁해졌지만, 이내 남자가 힘을 주어 밧줄을 당기는 바 람에 다시 팽팽해졌다. 남자는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승희와 준후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야릇한 미소를 띠우며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Le Ventre de mère araignée agit

(엄마 거미의 배가 움찔하더니)

Et donna naissance à plusieurs petits (새끼 여러 마리를 낳았다)

Les petits dévorèrent alors leur mère

(그때 새끼들이 제 엄마를 잡아먹고).”

그러더니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발로 버티고 줄을 잡아당겼 다. 엄청난 힘이었다. 승희는 자신이 손을 놓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준후의 목이 졸릴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 텼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 버텨도 몸이 조금씩 앞으로 끌려 갔다. 이를 악물고 몸에 더 힘을 주자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벗겨졌는지 몹시 쓰라렸다. 하필 주 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혜영은 아직도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도와줘요!”

승희가 악을 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혜영은 얼빠진

얼굴로 덜덜 떨면서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거미 거미래, 거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도와줘요! 급해요. 어서!”

“엄마 거미가 아빠 거미를 잡아먹고………….”

혜영 또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도움을 기대하기커녕 쇼 크 상태라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같았다. 놀란데다가 남자가 흥얼거리는 가락이 너무도 음산해서 승희도 기절하고 싶을 판이었다.

승희는 이를 악물면서 다시 한번 도움을 청하는 비명을 질렀다. 손에서 밧줄이 점점 미끄러져 나가며 손바닥을 벗겨 내는 듯 했다. 더 이상 힘을 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 남자의 힘은 놀라 웠다. 손에서 밧줄이 많이 빠져나가서 이제는 승희의 뒤편으로 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준후의 목에 걸린 줄과 승희의 손에 잡고 있던 사이의 줄이 더욱 팽팽해졌다.

“더 버텨야 해. 버텨야 해. 왜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도 나와보 지 않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 거야. 이런 제기랄…………… “

“Voyant ceci, les restes de leur père

(이것을 보던 아빠 거미 껍질은)

En rires éclatèrent

(껄껄껄 웃어댔다).

Le mangeur de toutes manières

(먹는 자는 어쨌거나)

Se fera mangé à son heure

(다음 차례엔 먹히는 것).”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있는 남자가 조금 더 큰 소리로 흥얼 거리며 갑자기 손에 힘을 증가시키자, 승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 목이 매여 있던 준후가 무의식중에 헉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승희는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없이 소리를 질러 대며 땅에 엎드린 채로 줄을 잡고 버텼다. 남자가 양손으로 줄을 잡고 힘껏 당기자 승희는 몸째로 끌려서 남 자의 손이 닿을 듯한 곳까지 이르렀다. 그 순간, 위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승희야!”

현암이었다. 승희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뒤쪽으 로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한 손으 로 줄을 잡고 한 손으로 뭔가를 뽑아 들었다. 승희는 현암을 쳐다 보고 있는 중이라 남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현암이 육층에서 내려다보니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남자가 한 손으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들고 있는 것이 네온사인 불빛에 번쩍하고 반사됐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였다.

‘이런 급하다!’

현암은 계단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빨리 계단을 내려가도 남 자가 도끼로 내려치는 시간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었고 승희 의 머리는 두 토막 나기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월향을 날릴 수도 없었다. 이곳의 창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현암이 양팔로 몸을 끌어 올려야만 겨우 밖을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 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앞뒤 생각 없이 팔에 힘을 주 어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시간적으로는 몇 초 안 될지 모르지만 허공을 날아서 떨어지는 동안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일단 왼손이 자유롭게 되자 월향검을 내뻗었다. 승희를 구해 주라는 의도로 월향검을 뿌리고 나자 땅바닥이 벼락처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로 땅을 짚어 볼까?’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은 현암으로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 지만, 육층이라고 하면 높이가 이십 미터 이상 된다. 아무리 잘 단련된 현암이라 할지라도 공력으로 보호되지도 않는 다리로 땅 을 밟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생각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 다. 현암은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몸의 중심을 바꿔서 머리가 아 래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땅바닥 이 덮쳐들듯 눈앞에 크게 다가온 순간, 현암은 공력으로 가득 찬 오른손을 내밀면서 엉겁결에 이제껏 한 번도 써 보지 않았던 태극기공 ‘나’ 자결을 운용했다.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꺄아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면서 은빛 물체가 번뜩하고 날아오자 승희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암이 육 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곤두박질치는 것이 보이자, 승희는 정 신이 아득해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써늘하게 날아 온 월향은 승희의 머리 위를 넘어서 남자에게 덮쳐들었고, 월향 의 궤적을 좇던 승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줄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고, 자신의 머 리를 향해 떨어지는 도끼의 목이 싹둑 잘려서 옆으로 떨어지는 것이 슬로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승희는 다급한 나머지 재빨 리 뒤로 몸을 젖혔다. 그 틈을 놓칠세라 남자가 잡고 있던 줄을 당기자, 준후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더니 조금씩 끌려갔다. 승희 는 욕을 하며 다시 밧줄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놔! 이 우라질 놈! 죽일 놈! 망할 놈!”

승희의 욕설이 남자의 귀에 들어갈 까닭이 없었다. 남자는 오히려 더 크게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Rira bien p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인걸)

Rira bien p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인걸.”

그러는 중에 제비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온 월향검이 남자와 승희 사이를 휙 하고 지나가면서 밧줄을 싹둑 잘라 버렸다. 승희 와 남자는 둘 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넘어지 면서도 남자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함없이 음산한 목소리로 이상 한 노래를 계속 불렀다.

쾅 하면서 둔중한 소리가 들리자 현암은 골이 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력을 오른손에 집중시켜 땅바닥을 내리친 덕에 몸 이 직접 땅에 부딪히지 않고 공력으로 보호되는 오른팔이 큰 타 격을 흡수해 주었지만, 팔을 통해서 전해진 충격은 수련을 많이 쌓은 현암일지라도 아찔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월향검을 날려 놓았다고 해도 특정한 이유 없이 사람을 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저 남자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준 후가 쓰러져 있고 승희도 고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서 그 쪽으로 서둘러 가 보아야 했다.

현암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보니까 아 파트 화단에 오른팔이 어깨까지 깊숙이 박혀 있어서 쉽사리 손 이 빠지지 않았다.

‘윽! 산 넘어 산이라더니.’

현암은 공력을 운용하여 팔을 단번에 빼려 했지만 공력은 오 른팔에만 돌 뿐이었으니, 묻혀 있는 오른팔에 공력을 돌린다 해 서 어깨까지 깊숙이 들어간 팔이 빠질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금씩 오른손에 힘을 돌리면서 힘없는 왼팔과 다리의 힘으로 몸을 들어 올려 팔을 빼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잘 안 빠지네. 승희야, 조금만 참아.’

현암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치면서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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