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21화 – 아라크노이드 6 : 거미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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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2권 21화 – 아라크노이드 6 : 거미의 목적


거미의 목적

경찰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음 날 사건은 바로 수습이 되는 듯했다. 도끼에서 검출된 혈흔 등으로 볼 때 범인은 미셸임이 분명했고, 그는 정신병자를 위한 특별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 신부와 승희는 증인 겸 범인 체포자 겸 목격자의 명목으로 경찰 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준후는 다행히 별다른 쇼크는 받지 않았는지 다시 쾌활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며칠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 답답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희는 그런 준후가 안쓰러워서 계속 준후와 놀아 주었다.

현암은 혜영과 함께 자신이 들고 온 노트북 컴퓨터로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혜영은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 참을 헤매었지만 현암과 연희가 잘 타이르고 그 노트북 컴퓨터 를 보여 주자 다시 프로그래머의 ‘끼’를 발휘했다. 한번 불이 붙 자 그녀는 침식도 잊고 그 컴퓨터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루틴들을 분석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녁때가 되어서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현암이 지친 몸을 이끌고 소파에 누워 있을 때 방 안에서 혜영이 소리치는 것이 들 렸다.

“찾았다! 이제 알았어요!”

혜영의 목소리를 듣고 현암과 준후와 연희는 혜영에게로 달려 갔다. 방 안은 사방이 디스켓이며 종이들로 잔뜩 어지럽혀져 있 어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혜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만면에 싱글벙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혜영 씨!”

“드디어 알아냈어요. 이 노트북 안은 바이러스의 소스 코드와 그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에디터 루틴, 그리고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감지하는 모니터링 루틴 등으로 이루어져 있 어요. 이것만 있으면 그 바이러스가 어디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살펴볼 수 있어요. 그러나 단 하나, 컴퓨터들끼리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 간의 교신을 할 수 있을 때만 모니터링이 돼요. 그래서 어느 쪽으로 퍼졌는지 파악하려면 상 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일단, 제가 그것을 바탕으로 거미 바이러스인지 뭔지를 잡는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죠. 그래 서 그 백신 프로그램을 네트워크에 띄우면……………”

“좋아요. 그건 혜영 씨 맘대로 하세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바이러스들이 어디 어디로 퍼져 나갔느냐는 사실입니다. 그 걸 알면 그쪽으로 퍼진 바이러스 루틴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냈 던 원한령의 메시지를 전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러 면 그 원한령이 무엇을 노리고 있었는지 밝혀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혜영이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화국 컴퓨터에 접속하여ᅳ혜영도 해킹 전문가였다 전화번호로 여러 주소의 코드를 알아내 줄줄 출력하는 동안에도 자신이 알아낸 거미 바 이러스의 특징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 거미의 설치, 그리고 유충거미들의 분리와 성장 등등.

그러는 사이에 지친 얼굴의 승희가 박 신부보다 먼저 돌아왔다.

“에이, 빌어먹을. 경찰서는 어느 나라든 갈 곳이 못 돼. 사람을 이렇게 들볶으니, 원.”

여기저기 바이러스가 퍼진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든 현암이 막 들어온 승희를 보고 말했다.

“승희야, 같이 나가자.”

승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나가? 난 몹시 피곤한데.”

“나가야 해. 바이러스들이 퍼져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충 알아 냈어. 그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는 원한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 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승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제기랄! 난 잠도 마음대로 못 자나. 그만 좀 괴롭혀. 그만좀.”

승희가 중얼거리는 것도 듣지 않고 현암은 혜영만 남겨 놓은 채승희를 준후, 연희와 같이 데리고 집을 나섰다. 혜영은 나가 는 일행에게 인사조차 없었다. 아마도 그 백신 프로그램인가 뭔 가를 만드느라 또다시 프로그래머의 ‘끼’를 훨훨 불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고생을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약간의 성과는 있었다. 주소지에 씌어 있었던 곳들 중 이미 몇 군데에서는 그 거미 바이러스 침투를 알아내고 피해를 입은 뒤 아예 하드 디 스크를 포맷해 버린 후여서 거기에 깃든 메시지는 자세히 알아 낼 수 없었으며, 또 몇 군데에서는 아예 컴퓨터가 있는 곳에 외 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거미 구경도 할 수 없었지만, 나머지 몇 군데에서는 컴퓨터에 떠올라 있는 거미 그림과 함께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와 함께 퍼져 나가는 그 원한의 분화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들은 저번보다 더 단편적이어서 ‘과거’라든가 ‘참을 수’라든가 ‘침투’와 같은 몇몇 단어만이 들릴 뿐 저번같이 ‘파괴의 일념과 같은 문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연희가 이것은 그 바이러스가 좀 더 분산되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결과 아니 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현암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승희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남자의 얼굴을 조금씩 알아낼 수 는 있었지만 극히 일부분을 조각 맞추기처럼 볼 수 있을 뿐이었 고, 그것을 한데 모으기는 힘들었다. 더욱이 승희가 알아낸 것은 남자의 얼굴 중에서도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처음에 본 눈과 창 백한 입술, 코의 일부분과 이마의 한쪽, 그리고 귀와 한쪽 뺨 정 도였다. 그것이 출력된 주소 리스트를 따라 돌아다닌 노력의 전 부였다. 그것만으로는 별 소득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남자의 얼굴과 약간의 메시지를 알아낸 것은 나름의 수확이었

다. 알아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놈이 비록 곧 죽겠지만…… 용서・・・・・・ 남을 것이다.・・・・・ 이지 경에⋯⋯⋯⋯ 내가・・・ 그 사실・・・・・・ 영원히・・・・・・ 프로그램・・・・・・ 파 괴를 위한 일념으로…………. 저주……. 빠뜨린………….

승희가 토막토막 적었던 것을 정리해서 보여 준 메시지들을 보고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수가 없군. 처음에 알아냈던 두 개의 긴 메시지 말고 이번에 알아낸 것들은 단어 하나씩밖에 안 되잖아. 더군다나 순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놈의 생각 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지.”

그러자 준후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말했다.

“승희 누나, 얼굴의 어느 부분이 보였다고 했지요?”

“음, 글쎄다. 이것저것 나타나긴 했지만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얼굴 전체는 생각하기 어려워.”

“승희 누나, 그림 잘 그려요?”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승희 누나 아버지는 화가셨잖아요. 아버지를 닮았으면 그림 을 잘 그릴 수 있을 거고, 조금씩 생각나는 부분을 그려 얼굴을 만든다면 얼굴의 윤곽이 확실해질 것 같은데.”

준후의 말은 몽타주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모두 좋은 생 각이라며 동의했다. 승희가 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몽타주는 잘 못그리는데. 그렇지만 한번 해 볼까나.”

승희가 근처 문구점에서 노트와 펜을 사 들고 왔다. 일행이 카 페에 자리 잡고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승희는 계속 종이에 그림 을 끄적거렸다. 주변이 어두컴컴해질 때가 되어서야 승희는 간 신히 그림 하나를 만들어 냈고, 그때까지 어슬렁거리면서 카페 안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혹은 졸고 있던 일행들은 승희가 그림 을 완성했다고 하자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누가 네 그림 실력 보자는 거니?”

“와!”

승희는 실력이 별로라고 했지만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 특이한 점은 별로 없었지만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듯한 인상을 주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암이 물었다.

“이 인상이 확실한 것 같아?”

승희가 슬며시 회심에 찬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강 비슷하긴 한 것 같아. 나 원래 그림 실력 없다고 말했잖아.”

“아니, 그림 실력 문제가 아니고 이 그림을 바탕으로 그 영에 대한것을 추적해 낼 수 있느냐는 거지.”

현암이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 대꾸가 없자 승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한번 해보긴 해야 할 텐데. 별로 자신은………….”

그러자 준후가 끼어들었다.

“일단 남자의 신원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일이 쉬워지는 것 아 녜요. 이 그림을 가지고 사람을 찾아보는 방법은 없을까요?” 

“여긴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준후야.”

준후는 다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요.”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단서가 되지? 얼굴 하나를 알아냈다고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야. 더구나 이건 사진도 아니고 그림이잖아.” 

“아니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준후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승희 누나의 투시는 그림만으론 어려울지 모르죠. 더군다나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원한령이 되어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소혼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 그림만 보고 소혼을 할 수 있겠어? 내가 그림을 그리긴 제대로 그린 걸까? 호호호..”

현암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준후가 말했다.

“그림만 가지고는 좀 힘들겠지요. 하지만 혜영 누나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바이러스에 어느 정도 원한령의 기운이 남아 있잖아요. 그것과 이 그림을 합하면 소혼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현암이 준후의 말에 못을 박았다.

“그렇다고 소혼술을 자꾸 써서야 되나. 그런 일은 부작용이 생겨서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현암이 고개를 젓는데도 준후는 계속 매달리며 졸라댔다. “배운 것을 이런 때 써먹지 않으면 언제 써먹어요. 영을 잡아 내기 위해선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형! 다른 방법 있어 요? 이 그림 한 장하고, 어떤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저 메시지 만 가지고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준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준 후가 소혼술을 시키면 영의 정체를 알아내기가 훨씬 쉬울 테니 까. 그러나 현암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현암의 얼굴이 어두워 지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닫았다. 일행은 우울한 기분으로 걸음 을 옮겼다.

현암이 일행과 함께 혜영의 집에 도착해 보니 박 신부가 와 있었다. 박 신부가 종이 몇 장을 현암과 승희와 연희에게 나눠 주 었다.

“거기서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몹시 피곤하군. 그들 말로는 그 학생은 최근까지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승희가 말했다.

“누가요? 미셸이요? 우릴 공격한 미치광이가 정상이라니? 어………… 갑자기 미친건가?”

“음, 경찰 쪽에서는 그 행동을 정신적인 장애로 판단하는 모양 이야 어렵게 그들을 설득해서 그 사람의 증상에 대해 정신과 의 사가 기술한 것을 복사해 왔지. 이걸 연희 양이 좀 읽어 주었으 면 좋겠는데.”

연희는 박 신부가 가지고 온 자료를 읽어 주었다. 거기에는 동 기는 알 수 없지만 미셸이 거미에 대한 콤플렉스로 심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스스로 거미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나머 지는 모두 어려운 학술 용어로 씌어 있어서 읽어 봐야 알 수도 없었고.

박 신부가 말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그 미셸이란 남자가 거미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거 나, 아니면 그 거미 바이러스를 많이 접해서 미쳐 버렸는지도 모 르겠군.”

“그렇다면 말이죠.”

승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미셸이란 남자를 한번 투시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오히려 더 확실해질지 모르는데.”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준후가 답답하다는 듯 중간에 끼어들었다.

“제가 소혼을 해 보면 일이 빨라진다니까요.”

“그건 안 된다. 준후야!”

박신부가 준후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런 술수를 자꾸 써서 네 명을 갉아먹게 할 순 없어. 가랑비 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더냐? 승희야, 그럼 네가 그 미셸이란 남 자에 대해 투시를 해 보겠니?”

준후는 자기 의견이 묵살당하자 불만스런 듯이 말을 했다. 

“그렇다면 승희 누나가 미셸이라는 남자를 투시할 때 저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면 소혼은 하지 않더라도 그 영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떠돌아다니는지 읽어 낼 수 있 으니까요. 그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명이 깎이지도 않으니까요.”

박신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현암도 생각을 하다가 그 정도는 괜찮을 듯싶었는지 연희에게 받은 세크메트의 눈을 준후와 승희에게 건네주었다. 승희는 곧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미셸이란 남 자에 대해 투시하기 시작했다.

무척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거미 그림, 옛날에 창밖에서 보 았던 거미줄의 모양,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내용이 아무런 이유도, 연관성도 없이 머릿속에 정신없이 스쳐 지나갔다. 미셸 의 마음속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복잡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이라 갖가지 생각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간신히 참으면서 계속 투시를 하다 보니 한 장면이 눈에 띄었 다. 바로 자기가 그렸던 그림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의 형상이었 다. 남자는 몹시 화를 내는 듯한 얼굴로 잠시 나타났다가 아득하 게 멀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승희는 미셸에게 들리지 않을 테지만 안달을 부렸다.

‘아니야. 저 남자에 대한 것을 더 생각하라니까. 아이고! 저런 한 번 더 봤으면……..’

승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미셸의 마음속을 추적했다. 세 크메트의 눈을 통해 준후의 느낌이 나직하게 전달되어 왔다. 

누나, 바로 저 남자 같네요. 누나가 그렸던 그림하고 매우 비슷해요. 

잠시 후 미셸의 마음속에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미셸은 그 남자를 꿈에서 본 모양이다. 영이 미셸의 꿈속으로 들 어가 아라크노이드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한 듯했다. 둘은 프로그램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희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남자가 미셸을 정신적으로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준후의 낮은 탄성이 들렸다.

“아! 저거……………. 저 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현암이 급하게 말을 되받았다.

“그게 뭐지?”

“잠깐만요. 지금 제가 추적해 볼게요. 미셸의 마음속을 투시 하는 것은 이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남자의 메시지가 느껴져요. 아이고! 잊기 전에 어서………….”

이번에는 준후가 땀을 뻘뻘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준후는 박 신부가 얼른 집어 준 종이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글자를 써 내 려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박신부가 탄성을 올렸다.

“맞아! 틀림없어! 바로 이 메시지야. 바이러스에 깃든 그 원한 령의 단편적인 생각인 것 같아.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면서 원한령 이 저 바이러스를 미셸에게 만들게 했고, 지금 준후가 그 기억을 잡아낸 것 같군. 준후야, 계속…….”

준후는 잠시 펜을 놓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를 이렇게 만・・・・・・・・・・・・ 아니, 이 지경에 빠뜨린 놈에게.”

준후는 말을 하려다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준후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 았다. 한참이나 준후가 애를 써서 긴 문장을 만들었다. 현암이 소리 내어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나를 이 지경에 빠뜨린 놈에게, 놈의 완전한 파괴를 위한 일념으로 나는 최후의 저주를 퍼붓는다. 놈을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 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나는 프로그램 속에 영원히 살아남 을 것이다. 놈보다 훨씬 오래・・・・・・ > 이게 전부냐, 준후야?” 

준후가 힘들었는지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말했다.

“이게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헛고생한 건 아닌지……………” “아니야, 분명히 중요한 내용이 있어.”

박신부가 미간을 찌푸리고 준후가 쓴 글을 몇 번 읽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여긴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했고, 놈을 죽게 하는 것은 암이라 고 메시지에 되어 있지 않니? 또 놈보다는 자신이 프로그램 속에 남아 더 오래 사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원한령 이 노리는 상대는 암 환자인 것 같구나.”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암 환자요? 참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 글로 봐서는 얼마 안 있어도 죽을 사람인 것 같은데,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자기 손 으로 죽이려 하다니…………….”

“사람에겐 누구나 다 그런 심리가 있지. 자기 손으로 직접 끝 장을 내지 않으면 시원하지 않은 마음 말이야.”

땀을 닦던 승희가 말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별로 소용이 없겠는데요? 암 환자와 바이러 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죠? 신부님 말씀대로라 면 그 원한령은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암 환자를 해치려는 것 같 은데…………. 컴퓨터 바이러스로 사람을 어떻게 해친다는 거야? 바 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가 움직여서 사람 머리를 친다면 몰라 도. 호호호”

“앗! 잠깐만!”

현암이 놀란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만! 바이러스가 들어간다고 해서 컴퓨터가 움직일 수야 없지. 직접적으로 바이러스가 암 환자를 죽일 수는 없어도 간접적으로 치료를 못 받게 할 수는 있지.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모든 데이터를 지운다면 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치료를 컴퓨터가 하나? 의사가 하지.” 

“아니야. 요즘은 병원에서도 모든 기록을 컴퓨터로 정리해. 만 약 그 암 환자의 투병 과정, 투약 과정이 적힌 자료들을 전부 컴퓨터에 기록해 두었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치료 과정들 이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 기록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암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연희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럼, 프로그램의 원한령은 바로 이걸 노리고…………. 그렇게 되면 그 병원의 모든 암 환자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일행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현암의 추리대로라면 그 원 한령은 분명 자신이 복수할 수 있는 아무 영이나 물리력을 쓸 수는 없으니까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러면 그에 따라 아무 죄 없이 피해를 입을 다른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은…………. 준후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우선 그 사람이 노리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승희가 짜증 내듯이 말했다.

“도대체 암 환자가 한두 명이라야 말이지. 치료하는 병원도 한두 곳이 아닐 테고. 도대체 이 넓은 프랑스 땅에서 어떻게 그 사 람을 찾아내냐는 말이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신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가만, 가만 좀 더 생각해 보자.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 니. 현암군이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이야.”

현암은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입을 꼭 다물고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시선을 한곳으로 집 중하고 있었다. 현암은 머리를 급박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모두 그런 현암의 모습만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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