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2화 – 왈라키아의 밤 2 : 루마니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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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3권 2화 – 왈라키아의 밤 2 : 루마니아로


루마니아로

퇴마사 일행은 호텔 방에 앉아 허탈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 다. 과거 그들과 한차례 싸운 바 있었던 유체 이탈 전문가 케인 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불가리아를 답사했지만, 대수롭지 않 은 관광지만을 구경했을 뿐 시간만 낭비했다. 조사하다 보면 뭔 가 나올 것 같았는데 케인과 블랙서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아 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 다른 일들에 시달리느라 예정보다 불 가리아에 늦게 도착해서 그사이 흔적이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블랙서클 구성원들이 이미 케인의 흔적을 은폐해서였는 지, 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위조된 것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 으나, 기록상으로는 케인은 황당하게도 초등학교의 교사로 독신 남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실종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뭔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지 난번 영국에서도 기사들의 유령 출몰을 막은 뒤, 과거 한국에서 난동을 부렸던 호웅간에 관한 것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 나 이미 죽은 호웅간의 막연한 신원만 파악되었을 뿐, 블랙서클 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잡히지 않았었다. 그들은 죽으면 이상한 검은 기류에 휘말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시체조차 찾을 수 없 으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후 독일에서도 코제트를 추적하 는 데 실패했고, 프랑스와 불가리아에서까지 허탕을 치자 퇴마 사들도 의기소침해졌다.

헛되이 며칠을 보내고 있던 차에 호텔로 날아든 낯익은 이름 의 전보 한 장은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어 주었다. 

“백호 씨가 보낸 거예요. 백호 씨가.”

연희가 전보용지를 받아들고서 소리 내어 읽었다. 백호는 그 들의 안부를 묻고는 속히 루마니아로 가서 이반 교수란 사람을 만나보라고 전했다. 연희가 전보를 읽어 주는 도중에 현암이 끼어들었다.

“이반 교수가 누굴까요? 그 사람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글쎄, 그런 설명은 없어요. 다만 윌리엄스 신부님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만 씌어 있군요. 날짜는 내일이네요.”

“아이고 참 여유도 많이 주고 가라고 하네. 비행기 표가 없으면 어쩌려구.”

승희가 투덜거리자 현암이 말했다.

“흠. 윌리엄스 신부님이라! 그런데 이반 교수란 사람을 어떻게 만나라는 거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적혀 있어?”

뒤에서 박 신부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이반 교수란 사람, 내가 조금 알지.”

가만히 눈만 말똥거리고 있던 준후가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래요? 신부님이 아는 분이세요?”

“잘 아는 것은 아니고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 전공이 특이하거든. 어느 대학의 교수라던데.”

“어떤 전공인데요?”

“흡혈귀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지.”

“흡혈귀학이요?”

눈이 휘둥그레진 연희가 박 신부에게 되물었다.

“그런 것이 있어요? 흡혈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알았는데.”

예전에 흡혈마와 치열한 싸움을 한 적이 있던 준후와 현암은 눈짓을 교환했고 박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런 것까지야 내가 알 수 있나. 그 사람이 다니고 있는 대학 이름도 잊어버렸고. 어쩌면 정말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명함에만 흡혈귀학 교수라고 씌어 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 나 흡혈귀학에 대해서만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아.”

준후가 눈을 크게 떴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구요? 그걸 연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데요?”

“몇 명 안 되겠지?”

박 신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암은 이반 교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우리를 왜…………”

전보는 꽤 길어서 현암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백호는 그 에 대한 설명도 언급하고 있었다. 이반 교수는 윌리엄스 신부와 프로젝트를 같이한 사이인 듯했다. 그의 추천으로 퇴마사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 같은데, 직접 연락이 안 되자 어떻게 하다가 백 호에게 연락이 닿은 모양이었다. 현암이 다시 물었다.

“직접 연락을 하지 않고 이렇게 우회적으로 연락을 하다니. 혹 시 윌리엄스 신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글쎄. 그러고 보니…………..”

“뭐죠?”

“내가 얼마 전 윌리엄스 신부님께 안부 전화를 걸었는데, 해외 여행을 갔다고 해서 통화가 안 된 적이 있었지. 루마니아로 오라 고 하다니, 윌리엄스 신부님도 루마니아로 간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요. 그럼 우리도 루마니아로 가야 하나요?”

“어차피 여기에선 별 소득이 없었고,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군.

부탁도 있고 하니 어서 정리하고 루마니아로 가 보기로 함세.”

“에이, 관광도 다 못했는데.”

승희가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박 신부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승희의 입이 쑥 들어갔다.

“루마니아라…………..”

현암과 준후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우리가 저번에 싸워 봤던 흡혈마에 대해서도 잠시 윌리엄스 신부님에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잖아요. 혹시 이반 교수님이 윌리엄스 신부님을 언급하고 우리를 급히 오라고 하는 것은 흡혈 귀가 나타났거나, 아니면 흡혈귀와 싸우기 위해 우리의 힘을 필 요로 한다고 판단해도 좋지 않을까요? 이반 교수라는 사람도 윌 리엄스 신부님에게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르고요.”

“글쎄, 그럴 것도 같구나. 준후야.”

박신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윌리엄스 신부님이 걱정되는구나. 아마 그런 일에 휘말린 것 이 아니라면 이반 교수가 얼굴도 모르는 우리에게 황급히 보자는 연락을 할리도 없을 테고. 어떻든 이 기회에 흡혈귀에 대한 자료 들을 정리해 봐야겠어. 루마니아라면 드라큘라의 고향이잖아.” 

“드라큘라요?”

연희가 꺼림칙한 눈빛으로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렇지. 드라큘라. 드라큘라는 소설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실존 인물이란 설도 있어. 어쨌든 흡혈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드라큘라에 대한 것도 언급이 될 테니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찾아보고 나서 루마니아로 가는 것이 좋겠군. 연희 양, 나 와 같이 도서관 좀 가주겠나?”

“예, 그러죠. 또 책이군요. 후후후.”

연희는 별로 싫은 기색은 아니었지만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 거리며 박 신부를 따라나섰다. 별달리 할 일이 없는 현암과 준후 는 서로 쳐다보다가 현암은 자리에 누워서 코를 골기 시작했고, 준후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영어라곤 한마 디도 하지 못하는 그들이고 보면 승희가 할 일은 뻔했다. 승희는 항공사의 전화번호를 뒤적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승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도 신기하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특별히 뭐가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자신 은 분명 일행과 함께 루마니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들었고 비행기는 텅 비어 있는데 어디서 누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지 궁 금했다.

목소리의 내용은 일행이 하루 전에 책에서 보았던 드라큘라 에 대한 내용이었다. 드라큘라 백작은 인간인 동시에 요괴로서 밤만 되면 수많은 박쥐 떼와 뱀, 그리고 늑대들을 이끌고 인간의 생피를 찾아다니는 흡혈귀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건 어제 읽은 소설 『드라큘라』에 나온 이야기인데. 아! 왜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승희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 눌렸네. 아, 짜증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가위 눌림이라 해도 너무 생생해서 꿈 같지가 않아 더욱 그랬다.

마녀의 피가 흐르는 아틸라 대왕의 혈통을 드라큘라 백작도 이어받 았다. 마자르족, 아바르족, 그리고 불가르족 같은 많은 민족들의 침입을 단숨에 격퇴하고 특히 우리 왈라키아 국의 원수인 투르크 대군을 무찌 른 자가 누구였던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명장 드라큘라가 아니었던가. 이 드라큘라의 혈연이야말로 명석한 두뇌와 지략을 겸비한 불멸의 영광 을 자랑하는 가문이다!

‘꿈도 참 희한하군. 빨리 깨어나야 하는데…………….’

승희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서 겨우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몸 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옆에서 연희가 걱정스러운 듯 이 쳐다보고 있었다. 승희는 눈을 돌려서 자신의 통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일행을 둘러보았다. 준후는 멀미를 하다가 지쳤 는지 잠들어 있었고, 현암은 박 신부와 함께 드라큘라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며 어제 박 신부와 연희가 정리한 노트를 들춰 보는 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가위에 눌렸을 때 들린 목소리는 현암의 목소리인 것도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까지 을씨년스러운 이야기를 해서 사람을 가위 에 눌리도록 하다니..’

승희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자신을 비롯한 퇴마사 일행이 언 제 맞닥뜨릴지 모르는 일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박 신부와 현암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승희도 알게 모르게 기분도 풀리고 잠도 좀 깨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 기 시작했다.

“드라큘라 공은 블러드 4세로 15세기에 루마니아에 있었던 작 은 나라인 왈라키아 국의 군주였던 모양이군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악마 드라큘라거나, 또는 악마의 자식 드라큘라로 불렸다는군요. 아. 여기 좀 보세요.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15세기 독일에서 출간된 출판물에서 인용된 글인데 꼬챙이 인간 드라큘라에 대한 이야기네요. 산 사람의 등을 꼬챙이로 찔러서 죽인 다음 손발을 잘라서 머리털을 뽑고………… 음, 거기다가 전신 을 토막 내고 머리를 솥에 삶고, 시체의 살덩이를 햄으로 만들어 서 어미에게 먹이고, 도끼로 절단한 포로의 시체를 동료 병사에 게 먹이면서 이를 즐기고. 또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식사를 즐기는….”

“윽!”

승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목소리 좀 낮춰 현암군! 나 잠 좀 자게 자꾸 가위 눌린단 말야.”

“도착하기까지 몇 분이나 걸린다고 잠을 자니? 소리 낮출 테니 이야기하는 데 방해하지 말지?”

“아니, 목소리보다 내용이 그렇잖아.”

“이건 역사적 기록일 뿐인데 왜 그래?”

그러고 보니 어제 이야기할 때 드라큘라란 사람이 실존 인물 이라는 게 근래 밝혀졌다고 했다. 드라큘라의 생가가 처음 발견 된 것이 74년이었으니 얼마 되지 않았다. 어제 이야기를 할 때에 귀담아듣지 않았던 승희가 현암에게 물었다.

“음. 그럼 그 사람이 정말 흡혈귀였단 말이야?”

“아, 그건 아닌 것 같아. 어디 보자. 음…………. 저런저런! 진짜 흡혈귀란 증거는 없지만 그런 악행을 많이 저질렀던 것은 사실 인 것 같군.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고작해야 우리가 구 한 책은 흥미 위주로 간략하게 서술해 놓은 것에 불과하니까.” 승희는 가위에 눌리고 나서부터 꿈속과 현실에서 동시에 드라 큘라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번 일은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이반 교수라는 흡혈귀학 교 수가 정말로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영화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드라큘라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여태까지 못 볼 것을 많이 보아 왔고, 믿어지지 않는 상대들 과 많이 싸워도 봤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으슬한 느낌과 함께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로비로 나온 일행 앞에 ‘박신부 찾 는다’라는 아주 서툰-썼다기보다는 그리다시피 한-한글로 씌어 있는 종이가 공항의 구석에 붙어 있었다. 준후가 박 신부에 게 물었다.

“신부님, 저기서 누가 찾는 것 아닌가요? 이반 교수란 분이 신 부님을 찾기 위해 써 붙인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구나.”

일행은 종이가 붙어 있는 기둥 근처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 갔다. 가까이 다가가는 연희의 걸음이 슬슬 느려지더니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이가 붙어 있는 기둥 근처 에 서 있는 사람은 바싹 바르고 혈색이 무척 창백했고, 반백의 머리에 양쪽 볼이 움푹 꺼진 오십 대의 남자로, 그야말로 영화 속에나 나오는 흡혈귀와 닮은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연희가 슬며 시 승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우리는 흡혈귀 잡으러 온 거잖아? 근데 저 사람이 흡혈귀 아 닐까? 후후후.”

승희는 킥킥 웃으며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박 신부가 남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영어로 물었다.

“혹시 이반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박 신부님?”

“네, 맞습니다.”

이반 교수는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을 샅 샅이 훑어보았다. 싸늘한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연희는 눈을 질 끈 감고 몸을 오싹 떨었고, 준후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연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여기 같이 오신 분들은 모두 일행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와 같이 온 사람들이죠.”

“이 꼬마도요?”

“물론이죠.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랍니다.”

“음!”

공항 로비를 나서며 이반 교수는 웅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박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이반 교수의 말투는 듣기가 영 개운치 않 았고,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퇴마사 일행을 믿지 못하고 있다 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졌다.

“제가 여러분을 수소문해서 한국에 전보까지 쳤던 것은 윌리 엄스 신부님 때문입니다. 윌리엄스 신부님에게서 당신들 이야기 를 들은 적이 있죠. 신부님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신부님은 당신들을 몹시 믿고 있던 모양입니다. 사고를 당하는 순간까지 당신들을 찾으라고 저에게 간곡히 부탁했으니까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반 교수의 입에서 윌리엄 스 신부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자 모두 몸을 움찔했다. “윌리엄스 신부님이 무슨 일을 당하신 거지요? 사고요? 무사 하신가요?”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신부님은 흡혈귀에게 잡혀갔으니까요.”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난데없이 윌리엄스 신부가 흡혈귀에게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반 교수는 여전히 무 표정하고 냉랭한 흡혈귀 같은 얼굴로 일행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이반 교수는 랜드로버와 같은 커다란 지프를 준비해 왔다. 제 법 큰 차였는데도 여섯 사람이 올라타자 자리가 비좁아서 현암 은 짐칸에 쭈그리고 앉았다. 제일 덩치가 큰 박 신부는 맨 앞자 리에 앉았고 현암이 연희와 승희에게 뒷자리를 양보하고 짐칸으 로 갔다. 준후는 승희의 옆에 끼어 앉았다. 자리도 불편했고 이 반 교수의 운전 솜씨 또한 거칠어서 현암은 몇 번이나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으나, 이반 교수가 들려주는 그간의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연희는 이반 교수의 말을 통역해서 옆에 있는 준후에게 알려 주었고, 현암도 워낙 영어가 짧은 터라 이반 교수의 그 냉랭한 음성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연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이반 교수는 감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윌리엄스 신부의 실종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행은 숙연한 얼굴이 되어 윌리엄스 신부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반 교수는 일 행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윌리엄스 신부가 이곳에 온 것은 흡혈귀에 대한 조사가 주된 목적이었겠지만, 코제트라는 알 수 없는 여자의 뒤를 추적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코제트요? 그럼, 블랙서클의 코제트가 아닐까요?”

박 신부가 되물었다. 그러나 이반 교수는 블랙서클이나 코제 트에 대해서는 윌리엄스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었던 듯 표 정변화가 없었다. 박 신부는 코제트와 블랙서클에 대해서 간략 하게 이반 교수에게 말해 준 뒤, 걱정 섞인 한숨과 함께 이반 교 수에게 제안했다.

“바로 드라큘라 성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이반 교수님, 여장 을 푸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윌리엄스 신부님이 정말로 흡혈귀들에게 잡혀간 것이라면 위험할 테니, 드라큘라 성으로 직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반 교수가 힐끗 박 신부를 쳐다보더니 투박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지금 드라큘라 성으로 가는 중이라오.”

뒷자리에서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설쳐 안색이 좋지 못한 승 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쩝 하고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박 신 부는 뒤를 돌아보려다가 말고 이반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드라큘라 성은 관광지 아닙니까? 사람들도 많이 드나 드는 곳일 텐데 정말 그리로 윌리엄스 신부님이 잡혀간 것이라 면, 경찰에 연락하는 건 어떨까요? 수색하면 곧 발견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이반 교수가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일을 아무도 믿어 주질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경찰이건 어디건. 그래서 저 혼자 수색할 수밖에 없었죠. 도무지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곳은 낮에는 멀쩡한 관광지이자 옛 성일 뿐이죠. 그러나 사람들이 다 나가고 없는 밤만 되면….. 흠!”


운전하면서 이반 교수는 드라큘라 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 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물론 퇴마사들은 약간이나마 조사를 해 두어서 알고 있었지만-드라큘라 공이 흡혈귀 였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루마니아에서는 왈라키아 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구해 낸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라 고 한다. 그러나 드라큘라 공이 왈라키아 국을 단합시키기 위해 서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잔혹한 짓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보야르(귀족 집단)의 음모로 아버지와 형을 잃은 채 자객들의 추적을 받으며 이십오 세의 나이로 왕좌에 등극한 드라큘라 공 은. 왈라키아 국내의 보야르와 지주 등 오백 명을 가족 동반으 로 초청하였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하 기 위해 오백 명의 귀족을 모조리 끔찍하게 참살했다. 어린아이 를 여덟 조각으로 찢고는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했으며, 귀 부인을 병사에게 윤간시킨 다음 전신을 갈가리 찢고 시체 덩어 리를 큰 솥에 삶아서 남편에게 먹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지주와 지주의 가족들은 한 사람씩 산 채로 등에 막대기를 찔려서 땅에 세운 다음, 전신을 토막토막 잘라 버렸다는 게 이반 교수가 일행 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골자였다.

이야기를 듣던 준후가 몸서리를 쳤다.

“으으, 너무 잔혹해요. 이건 뭐 흡혈귀 이상인데요!”

연희가 준후의 말을 전하자 이반 교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해 주었다.

“드라큘라 공은 어려서부터 투르크의 지하 감옥에 인질로 잡혀 유폐되었다가 겨우 살아나게 되었고, 간신히 탈출해서 자기 고국으로 돌아오자 자기 아버지와 형이 귀족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보게 되었지. 그때부터 계속 투르크의 자객들과 귀족 계급 의 자객들, 그리고 드라큘라가의 적대 세력의 자객들에 의해 항 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왔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그럴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건 물론이지. 1460년 여름에만 해도 삼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네. 그리고 그때 정식 부인 외에 두 명의 첩을 가장 처참한 방법 으로 살해했다는 거야. 한 사람은 다른 남자와 밀통을 했다는 이 유로, 한 여자는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말일세.”

“아, 세상에! 같이 지내던 여자까지 죽이다니!”

승희가 끔찍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반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엄격한 법을 적용한 결과, 소국인 왈라키아는 그의 지도 아래 똘똘 뭉쳐서 투르크의 대군을 맞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 드라큘라 공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루마니아 지 방은 터키의 영토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네.”

말없이 듣고 있던 현암이 그런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드라큘라의 영이 진짜 개입되어 있고 흡혈귀 족속을 세상에 불러내서 음모를 꾸민 것이 코제트라면, 이번에는 만만하게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코제트는 공간 이 동술을 비롯해 많은 술수를 익혀서 상대하기 어려웠잖아요. 지난번 독일에서는 저와 준후, 둘이 상대했는데도 유유히 도망쳐 버렸구요. 거기에 수많은 흡혈귀들까지 가세한다면………. 이번 엔 우리가 그들의 근거지로 가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박신부가 안경 너머로 눈을 찡그렸다.

“어쩌면 뭐지?”

“윌리엄스 신부를 납치하고 이반 교수님을 풀어 준 것은 우리를 유인하려는 어떤 술책이 아닌가 해서요.”

“유인하려는 술책이라고? 그리고 이반 교수님을 풀어 주었다니 무슨 소린가?”

“음. 제 생각에는.”

현암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다. 

“실례되는 말씀일지 모르겠지만, 이반 교수님의 영적인 능력 은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도 그들은 윌리엄스 신부 님만을 잡아가고 이반 교수님은 쫓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요. 그건 윌리엄스 신부님을 잡아간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루마니아의 경찰들이 그 말을 믿 지도 않을 거고요. 그러나 이반 교수님은 당사자니까 어떤 식으 로든 노력을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반드시 우리가 찾아올 걸로 판단했겠지요.”

“우리를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거지?”

“여태까지 블랙서클이 어떤 조직인지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 긴 했지만, 어쨌든 곳곳에서 블랙서클의 음모를 깨뜨린 건 우리 아닙니까? 특히 코제트가 개입된 일을 우리가 많이 처리했죠. 코 제트는 그것에 대해 원한이 많은 것이 분명해요. 여태까지는 코 제트가 벌인 일에 우리가 끼어들어 추격하는 입장이었지만, 이 번만은 이야기가 다르죠. 드라큘라 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 지도 내부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곳이라 하던데, 그런 곳으로 우리가 간다면 지형적인 면에서 상당히 불리해요. 더군다나 그 쪽은 윌리엄스 신부님까지 인질로 잡고 있질 않습니까?”

“음!”

박 신부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반 교수는 현암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힐끗힐끗 눈치만 살피고 있 었으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침울해졌다고 느꼈는지 이후론 입 을 열지 않았다.

어느덧 일행이 탄 지프는 드라큘라 성 부근에 있는 황량한 벌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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