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3화 – 왈라키아의 밤 3 : 고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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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3권 3화 – 왈라키아의 밤 3 : 고성의 비밀


고성의 비밀

차는 드라큘라 성의 바깥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도달했다. 준 후가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했다.

“이상하네요. 여긴 관광지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윌리엄스 신부님이 납치되었단 말이에요?”

준후가 제일 먼저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까 이서 본 드라큘라 성은 멀리서 본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과 달리 깨끗이 잘 손질된 관광지 같아 보였다. 여기저기 을씨년스 러운 면을 강조하기 위해 손질을 한 흔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퇴마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런 느낌 을 주었다.

성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입장 요금을 받는 사람과 가이드 사진까지 이리저리 분주하게 발걸음을 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본 승희도 어이가 없는 듯, 한 숨을 쉬며 이반 교수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윌리엄스 신부님이 정말 이곳으로 잡혀 왔단 말이에요? 전혀 믿어지지가 않아요. 혹시 다른 곳이 아닐지………….”

이반 교수가 싸늘한 눈매로 쳐다보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나도 여러 군데 수색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사 람을 데리고 갈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관광지이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흡혈귀 들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저기 잘 보세 요. 보이지요? 성안으로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반 교수의 말대로 성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었고 앞에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팻말을 본 연희가 말했다. 

“내부 수리중이라고 하는데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이 성이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내걸고 나서 출입이 통제 된 이후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실종되었어요. 그것도 죽은 자들만 수십 명이………….”

“그게 무슨 소리죠?”

현암이 긴장한 목소리로 이반 교수에게 물었다. 연희가 현암 의 말을 옮겨 대신 질문을 하자 이반 교수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뒤를 보며 말했다.

“목에 난 이빨자국, 악성 빈혈, 매장한 뒤 시체들은 어디로 갔 는지 온데간데없어졌어요. 전형적인 흡혈귀 증후군입니다. 흡혈 귀에게 물리면 흡혈귀가 되는 법이죠. 제가 이전부터 조사한 바 에 의하면 그런 사건이 이십여 회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의 중심지가 이 드라큘라 성이라고 믿 는 이유는 뭐죠?”

현암이 조목조목 질문을 하자 이반 교수는 조금 귀찮았는지 일 그러진 표정을 짓더니 품 안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냈다. 드라큘 라 성의 일대를 소상하게 나타낸, 오만분의 일로 축소한 상세한 지도였다. 거기에는 붉은 동그라미들이 수십 개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동그라미들에는 조그마한 메모가 깨알같이 씌어 있었다. 이반 교수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동그라미들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일어난, 흡혈귀와 관련 된 사건들의 현장을 표시한 것입니다. 보세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가 없는가.”

지도의 크기는 사방 육십 센티미터쯤 되었는데, 이십여 개의 동그라미들은 하나의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쪽이 움푹 꺼진 찌그러진 원형이라고나 할까? 이반 교수는 말을 이었다.

“자, 이 사건들이 일어난 전체적 범위를 도형으로 나타내면 이 렇게 조금 찌그러진 원이 될 것입니다. 이 찌그러진 곳을 잘 보세 요. 등고선이 빽빽하게 있지요? 이 부분은 산악지. 그러니까 보통 의 평지보다 걷기 힘든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현암은 이반 교수의 생각을 곧 알 수 있었다. 이반 교수는 흡 혈귀들이 밤에 일어나 사람의 피를 뺀 다음 자신의 잠자리로 돌 아오기까지의 시간이 해가 졌다가 해가 뜨는 사이의 시간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들이 걸어서만 다닌다고 가정 한다면 행동반경은 그다지 큰 범위로 확산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원의 중심점은 흡혈귀, 또는 흡혈귀들이 모여 있는 곳이 분명했고 그곳에 바로 이 드라큘라 성이 위치해 있었다.

현암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이반 교수도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눈가에 주름이 몇 개 더 생기더니 잠시 동안 찡그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일행은 그것을 이반 교수가 웃는 얼굴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드라큘라 성이 내부 수리중이란 팻말을 붙인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흡혈귀들이 직접 그렇게 팻말을 써 붙 일 리는 없겠고…………. 아니면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누가 흡혈귀들을 조종하여 이 성을 남모르게 장악하고 있는 것 은 아닐까요?”

박신부가 생각했던 바를 밝히자 이반 교수가 그 말에 동의라 도 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성은 관광지로서 지역의 관리들이 운영하고 있지요. 그러 나 이곳에 ‘내부 수리중’이라는 간판을 붙이게 된 것은 다른 의 미에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사고가 빈발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고라면 어떤..?”

“관광객들이 자꾸 실종됐으니까요. 공식적인 보도는 되지 않 았습니다만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이 성에는 밝혀지지 않은 비밀 구역이나 통로가 분명히 있을 거 예요. 실종된 사람들은 그런 구역으로 잘못 들어갔거나, 아니면 그런 곳에 은신하고 있던 흡혈귀의 부하들에게 잡혀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생긴다면 왜 미봉책으로 덮어 두 려고 하는 거죠?”

“원래 관광객들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나 집계를 낸다는 것 이 불가능합니다. 거취를 등록해 놓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이니까요. 공식적으로 이 성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보다 는 은폐하려는 의도로 성의 출입을 통제한다고 봐도 무방하겠 죠. 형식적인 수색이 몇 번 있었습니다만, 성내의 밝혀진 구역만 을 수색한 것이니 아무것도 발견될 리가 없죠.”

연희를 통해서 이반 교수의 말을 전달받아 듣고 있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성이라면 밤에 사람들이 상주하지는 않습니까?”

“예. 저녁때가 되면 성은 문을 닫고 해가 지기 조금 전이면 모 두 퇴근하죠. 공무원들의 퇴근 시간이 오후 다섯시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해가 지고 난 이후에는 이곳에 남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일행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준후는 알아듣기 힘든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어느새 눈을 감고 뭔가를 투시를 하더니 현암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여기가 좀 이상해요. 뭔가가 느껴지는데요?”

“음. 어디 말이니?”

현암이 준후를 돌아보자 준후는 자신의 발밑의 땅을 가리켜보였다.

“이 부근이요. 그리고 이상한 기운들이 저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느껴져요.”

준후는 말하는 것과 동시에 산 아래의 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현암은 준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 알아챌 수 있었다.

“땅속에 뭔가가 있는 것 같단 말이니? 그게 서쪽 산 아래로 쭉 이어지고 있다는 거야?”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만 있던 승희도 준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휘휘 젓 더니 눈을 감고 발밑의 땅속에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밑에 뭔가가 있어. 가만있는 것도 있고 들락거리며 움직이는 것도 있군. 음울한 기운도 느껴지고.”

승희가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쓰면서 이야기하자 박 신부와 이 반 교수도 하고 있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승희에게로 눈을 돌렸다. 연희가 이반 교수에게 승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투시? 놀랍군요. 아무리 그래도 땅속의 기운을…………….”

이반 교수가 눈을 빛내면서 기분 나빠 보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승희도 역시 서쪽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저쪽이 맞아. 저쪽에도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이 성에는 틀림 없이 뭔가가 있어.”

승희가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양쪽에서 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그런데 서로 다른 것 같아. 둘 다 음울하고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현암이 준후가 가리킨 서쪽 방향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 다. 육안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멀지 않아 보였지만 길은 빙빙 돌아가게 나 있었고 어귀에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그 외에는 끝 없이 이어진 황야만 보일 뿐, 의심이 갈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 았다.

“저 마을은 뭐죠?”

이번엔 준후와 승희 둘이 같이 현암이 가리킨 마을을 향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이반 교수는 이상한 눈으로 그런 둘을 쳐다봤다.

“글쎄요. 이상한 느낌이에요. 저 마을………….”

승희가 인상을 쓰면서 눈을 뜨고 마을 쪽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요. 전혀요.”

박신부가 승희의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 없지 않니?”

“아뇨. 너무 완벽해요. 블랙서클의 사람들을 투시할 때처럼 말이에요. 뭔가로 완전히 가리고 있는 느낌.”

“맞아요. 석연치가 않아요.”

준후도 눈을 뜨고 승희의 의견에 동의했다. 인상을 약간 쓰고 있는 준후의 모습이 현암의 눈에 자못 늠름해 보였다.

‘이제 열네 살인가? 벌써 많이 컸구나.’

이상하게도 키는 열 살 때와 거의 똑같이 하나도 자라지 않아서 승희의 허리춤밖에 안 닿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예전 에 비하면 얼굴이나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 어서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준후는 자기를 바라 보고 있는 현암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상해요. 성은 영기가 너무 짙고 마을은 하나도 안 느껴져 요. 으레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 약간의 기운은 느껴지게 마련 인데 너무나 조용한 것이 이상해요.”

이반 교수가 궁금한 표정을 짓자 연희가 준후의 말을 이반 교 수에게 옮겨 주었다. 그러자 이반 교수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라큘라 성은 원래 복잡한 곳이죠. 만약 당신들의 투시가 맞 다면 그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일종의 비밀 통로일지도 모르겠군요.”

“비밀 통로라니요? 그러면 성에서 마을까지 그렇게 긴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박신부가 놀란 듯 큰 소리로 말하자 이반 교수는 여전히 딱딱 한 표정으로 마을 쪽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중세의 성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비밀 방이나 지하 탈출 구 등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요. 특히 저 성을 만들었던 드라큘라 공은 지모가 깊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아무도 모르는 비 밀 시설을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밝혀 지지 않은…….”

“그러나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드라큘라 성이 투르크에 의해 함락될 적에 성의 병사들은 전 멸했지요. 드라큘라 공에 대한 투르크족의 적개심은 대단했으니 까요. 그때 드라큘라 공은 투르크의 장수로 변장을 하고 지하 비 밀 통로로 탈출하려다가 아군에 의해 오인되어 사살당했다고 합 니다. 그러니 이 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지요. 그리고 비밀 통로는 하나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흡혈 귀들이 이용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돌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즐겁게 돌아다니고 장난을 치는 몇몇 관광 객들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잠자코 있던 현암이 급한 성질이 발동됐는지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디부터 먼저 조사해야 할까요? 성부터? 아니면 마을부터?”

박신부는 성과 마을 쪽을 번갈아 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낮에는 흡혈귀들이 설치지 못한다니 해가 있는 동안은 아무 일 없을지도.”

“성부터 들어가 볼까요?”

“아니, 난 반대로 생각하네. 마을 쪽을 먼저 조사해 보고 싶군. 이번 일에 블랙서클이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렇겠죠. 급히 달려왔으니까요. 함정도 파 놓았을 거구요.” 

“자네 말대로야.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조사를 해 보고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윌리엄스 신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윌리엄스 신부님이 잡혀간 지는 벌써 며칠이 지났네. 몇 시간 더 조사한다고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는 않을걸세.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조사를 해 두고 일을 시작해야 성공 확률 이 더 높을 것 아닌가?”

현암도 박 신부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 성 주변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비워 두고 가기는 어째 그런데요?”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두 무리로 나누어서 다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녁 여덟시경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면 어떻겠나?”

박신부가 제안하자 다른 사람들도 찬성했다. 일행은 이반 교 수와 박 신부, 준후를 한 조로, 현암과 연희, 승희를 다른 한 조로 나누었다. 양측에 영어가 능한 사람과 어느 정도 투시가 가능한 사람이 하나씩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반 교수가 말했다. 

“어차피 관광객이 드나드는 성입니다. 지금 들어가 보아야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밤이 된 후에나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신부님은 저와 함께 마을로 가 보시죠. 저도 마을은 아 직 조사해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하죠.”

박 신부는 이반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암을 돌아 보았다. 현암은 박 신부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려 하는 것임 을 눈치채고 즉시 말했다.

“그러면 저는 승희와 연희 씨와 함께 이 부근이나 성을 돌아보 도록 하지요. 이곳 지형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모두 모이기 전까지는 성급한 행동은  하지 말게나.”

박신부가 말하는 사이 연희는 세크메트의 눈 한 개를 준후에게 쥐어 주었다.

“만약의 경우에도 의사소통은 되어야지? 후후후.”

준후는 싱긋 웃음을 지으며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 준후는 마을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현암과 연희, 승희는 성의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박신부가 왜 이러는지 머리로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윌리엄 스 신부가 잡혀 있을 것이 분명한 드라큘라 성을 눈앞에 두고 빙 빙 돌며 성의 겉모습이나 근처 지리를 돌아보는 일 따위는 현암 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근처의 조그 마한 노점상에서-그러고 보니 아직 사람이 많은데도 근처의 작은 상점 몇몇이 서둘러 문을 닫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이 름도 알 수 없는 것을 사서 씹으면서 현암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오자 근처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질을 억눌러 참다 못해 부 아가 머리끝까지 끓어오른 현암은 기분을 삭이려는 듯, 언덕배 기에 서서 팔짱을 끼고 먼 하늘만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연희는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다녔다. 왜 주변이 이렇게 한가한가. 그리고 왜 저녁때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려고 하는가. 별로 신통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 다. 이곳은 저녁이 되면 음침해지고 기분 나쁜 일들이 자주 일어 나기 때문에 요즘은 일찌감치 사람들이 성에서 떠난다는 이야기 를 몇 사람에게서 들었을 뿐이었다. 기분 나쁜 일이 어떤 것이냐 는 질문에는 사람들 모두가 대답을 회피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이 든 노점상 여자가 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떠나려 하자, 승희가 살짝 연희의 어깨를 쳤다.

“뭐라고 해요. 언니?”

“글쎄, 왜 이곳에서 피하려는지 이유는 말하지 않는걸.”

연희의 말을 들은 승희는 눈을 감고 여자에게 정신을 모았다.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다.

“여긴 드라큘라 공의 집,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흠..”

“드라큘라 공의 집? 하긴……………”

“잠시요. 음…………… 근처에서 몇몇 사람들이 실종된 적이 있었 던 모양이에요. 저 아주머니도 그래서 두려워하는 모양이네요. 해가 지면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도 이럴 정도인데, 경찰은 왜 수색조차 안 하는지…………..”

“믿지 않는 거겠지. 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기도 하고.”

언제 옆으로 왔는지 현암이 연희에게 말했다.

“이제 해가 지고 있어요. 연희 씨, 신부님 쪽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나요?”

“아뇨, 준후가 그걸 손에 들고 있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무런 기색이 안 느껴지네요.”

“뭣들 하는 거지? 어서 오지 않고.”

현암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승희는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사이에 나이 든 노점상 여자도 길을 떠났다. 경비원으로 보이 는 남자가 이제는 그만 나가는 것이 좋을 거라며 막무가내로 셋 을 밀어냈다. 연희는 다른 일행을 기다리다가 갈 테니 염려 말라 고 경비원에게 변명했고, 그러자 경비원도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곳을 떠나라고 몇 번 더 당부하더니 마지막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이제 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서 이상스러운 안개가 성 주변을 부옇게 만들고 있 었다.

연희는 다시 한번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고 준후와 연락을 해 보려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연희가 고개를 젓자 현암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신부님과 준후가 같 이 갔으니.”

현암이 염려의 눈짓을 보내자 이번에는 승희가 정신을 집중해 준후의 마음속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준후는 뭔가 희한한 상상을 하고 있었고 위험에 빠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 위험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아무 생각이 없네. 후후후.”

“그렇다면 왜 이리 안 오는 걸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이거 원.”

현암은 혀를 끌끌 차면서 다시 한번 안개로 덮여 가는 성을 바라보았다. 조금 먼 곳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자 연희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것을 보고 승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 하나는 죽이네요. 후후후. 사람들이 떠나갈만한데요?” 

“저런 울음소리는 정말로 기분 나빠. 흠흠!”

연희가 승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현암은 안개로 덮인 고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록 영능력은 없어도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빛이 번뜩이며 성의 높 은 곳의 한 창가에 밝은 것이 보였다.

“앗! 저건……”

현암이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자 승희와 연희가 얼떨결에 성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도 성의 사층쯤 되는 높이의 작은 창문으로 불빛 같은 것이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누가 있네.”

승희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연희가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까? 관광객? 아니면 경비원?”

“지금은 근무 시간도 지났어요. 그리고 저 성은 내부 수리중이라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승희의 말에 연희는 긴장이 되는지 몸을 떨었다.

“수리중이라면 일하는 인부가 아닐까? 아무리 근무 시간이 지 났다고 해도 조금 늦게까지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아냐?” 생각에 잠겨 있던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문 으로 드나드는 인부는 아직껏 보지 못했어요. 실제로 공사를 하 는 중이라면 누가 드나들었을 것 아닙니까?”

현암이 말을 마치자마자 먼 곳에서 다시 늑대의 울음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고 울려왔다. 연희가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요즘도 늑대가 있나요?”

“그런가 보네요.”

“소름 끼치네요. 저 소리 좀 안 들었으면”

현암은 연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하더니 성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승희가 박 신부 일행을 기다리자고 말했으 나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수상해. 더 이상 그냥 있지는 못하겠어. 신부님 쪽도 시 간이 오래 걸릴 만한 사정이 생긴 거겠지. 성안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걸로 봐서 누가 있는 건 분명해 들어가봐야겠어.”

“그렇지만………….”

“별 문제 없을 거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연희 씨가 세크메트의 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될 거야. 너무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잖아.”

현암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텅 비어 있어야 할 성안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은 누가 있다는 것으로밖에 받 아들일 수가 없었고,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 랐으니까. 그리고 현암과 함께 간다면 무서울 것이 없을 듯했다. 

“좋아. 그럼 같이 가보자구.”

내켜 하지 않는 연희를 가운데에 두고 셋은 성으로 다가갔다. 성의 주위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고, 거기에 커다란 성문이 다리처럼 내려져 있었다. 유사시에 올려서 성을 완전히 고립시 키게끔 만들어진 다리였다. 지금은 다리가 항상 내려져 있는 것 같았고 대신 안쪽에 철창으로 된, 요즈음에 만들어 붙인 문이 닫혀져 있을 뿐이었다.

현암은 철창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려 했으나 쇠사슬로 감겨 있는데다 큼지막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현암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자물쇠를 보고 씩 웃었다.

“자물쇠 하나 부순다고 죄가 되지는 않겠지. 설마 이놈이 문화재는 아닐 테니까. 후후후. 그럼…….”

현암이 팔뚝에서 월향검을 빼 들고 자물쇠를 쓱 하고 긋자 자물쇠는 속절없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끼끼끽 하고 요란한 소리 를 내는 철창을 밀어젖히고 현암이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서며 승희와 연희에게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자. 어서 갑시다.”

승희가 들어가자는 사인을 보내자 연희는 머뭇거리더니 내키 지 않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고 승희가 뒤를 따랐다. 성문 의 안쪽에는 다른 성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현암은 그 벽의 문을 열고 있었다.

“어서 들어갑시다. 빨리 위층으로 가 보아야 해요.”

현암은 서둘러서 다시 하나의 문을 밀어젖혔다. 두 번째의 성 벽을 통과하고 나자 비로소 성의 거대한 주 건물이 나왔다. 성벽 이나 도개교의 크기도 산꼭대기에 있는 성으로서는 믿어지지 않 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바깥에 씌어 있는 ‘내부 수리중이라 는 팻말은 거짓이었는지, 성의 내부는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공 사를 하고 있었던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미로처럼 된 나지막한 관목들과 그나마 요즈음에 만 든 듯, 쉽게 갈 수 있도록 다른 길을 내놓았으니 망정이지 예전 대로 놔두었으면 길을 찾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 다나지막한 벽들을 재빨리 지나서 일행은 몇 분 만에 성의 주 건물의 대문에 도착했다.

사방의 안개는 짙어질 대로 짙어져 있었고 몸에 닿는 밤기운이 몹시도 썰렁했다. 주 건물을 돌아보는 현암의 눈에 삼층 창가 에 아까와 같은 불빛이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또 보인다! 어서!”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동시에 여러 마리의 늑대 울음소리가 화 답하듯이 들려왔고 그 소리를 들은 연희와 승희는 불안감에 몸 을 부르르 떨었다. 현암은 거칠 것 없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 겼고, 연희와 승희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던 준후는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정신 이 돌아오는 듯했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 아니, 꿈을 꾼 게 아니었던가? 꿈이 아니라면 내가 왜 잠들었었지? 참 이상한 일 이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게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었던 것 인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구름 위를 밟고 다니는 것처럼 붕 붕 뜨는 묘한 기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도대체 왜………….’

준후의 귀에 짤막하게 끊어지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굵은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고, 그에 화답하는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에 있는거지?’

준후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인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분명 자신은 이반 교수와 박 신부와 함께 드 라큘라 성에서 멀리 떨어진 아랫마을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래, 맞아. 그다음엔……… 음…………..

준후의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끊어졌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서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솜 방 석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 오만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 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희미하게 짧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야릇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러고는…………….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저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힘에 의해 자신의 몸이 실 제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감촉이 없었다.

‘누가 내 몸을 들어서 옮기고 있구나. 누굴까? 도대체… ‘

준후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크메트의 눈 소맷자락에 들어 있는 세크메트의 눈만 손에 쥐 면 일행과 연락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소맷자락에 손을 넣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끝마디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준후는 몸을 움직이려는 것을 포기하고 눈이라도 떠 보려고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준후가 눈꺼풀에 힘을 주자 희미 하게나마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이상한 고함 소리가 들려 왔고 정신을 잃기 전에 맡았던 야릇한 냄새가 코를 덮쳤다. 준후 는 또다시 정신이 희미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저 먹먹한 회색 구름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 그러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미친 듯 사방을 뒤지고 있었다. 어느 틈엔지 준후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럴 수가……………. 분명 우리 뒤를 잘 따라오고 있던 아 이가 대체 어디를 갔단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큰일이군. 아멘.”

당황한 박 신부는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준후는 흔적도 보 이지 않았다. 이반 교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박 신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 진정하십시오. 박 신부님. 서두른다고 아이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어느 사이에………….”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박 신부이지만 막상 준후가 사라지자 이번만큼은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얼굴까지 붉게 상기된 박신부에게 이반 교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손짓을 했다.

“침착하십시오. 박 신부님. 잠시 주변을 살펴보세요.”

박 신부는 이반 교수가 말하는 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 나 쓸쓸하고 몹시 낡은 듯한 분위기 이외에 그다지 수상쩍은 것 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이 마을에 말입니다.”

“이 마을에요?”

그러고 보니 박 신부는 마을 입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준후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 찾는 데만 골똘했을 뿐, 마 을의 동태에 대해서는 눈여겨보지 않고 있었다.

“잘 보세요. 이 마을에서는 별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해가 지기는 했지만 그다지 늦은 밤도 아닌데, 이토록 거리에 사 람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반 교수의 말에 박 신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반 교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긴 사람 사는 마을 같지가 않습니다.”

박 신부는 일단 준후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두고 사태를 냉정히 보려고 마음먹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반 교수의 말처럼 거리에 지나가는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호젓한 것이 되레 을씨년스러워 이상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나지막하고 지저분해 보이 는 오랫동안 손질을 안 한 것 같은 낡은 건물들의 창에는 여기 저기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흠! 인기척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영적으로 지나치게 평 온한 상태에 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합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불 들은 많이 켜져 있지 않습니까?”

박신부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집으로 다가갔다. 그 집에는 나지막한 창문이 있었고 거기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 었다. 박 신부는 집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방안엔 그다지 수상쩍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여자아이 가 뒤로 돌아앉은 채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고, 집 안이 누추하고 가난해 보이는 것 외에 이상한 점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 하기는커녕 오히려 평화로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박 신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창문에서 눈을 떼고 다른 집 을 살펴보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아이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박 신부는 의외의 광경에 몸을 움츠렸다. 아이는 꽤 예쁘장한 얼굴이었으 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지능이 모자라 보이는 얼굴, 초점을 맺지 못하고 있는 눈, 그리고 약간 헤벌린 듯한 입 의사였던 박 신부 는 아이가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심한 뇌성마비 환자로군. 가엾게도………….’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는 계속 박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박 신부도 여자아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이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둘이 그렇게 한동 안마주 보다가 박 신부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여자아 이도 헤 하고 웃는 듯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아이에게 손을 한 번 살짝 흔들어 주고는 창문에서 눈을 떼었다. 준후가 없어진 판에 여자아이와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박신부가 창에서 눈을 돌리자 이반 교수가 말을 건넸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까?”

“흠! 아뇨. 이상한 점은 별로 없군요. 그나저나 여기도 마을이 니만큼 분명히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저 집에는 여자아이가 잘 놀고 있고요.”

“그렇군요. 신부님이 보시는 동안 저는 저 맞은편에 있는 집을 잠깐 들여다보았는데 거기도 사람들이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좀 심상치 않네요. 이 이상한 분위기는 대체………….”

박신부는 심상치 않다는 이반 교수의 말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심상치 않다고요?”

“예. 직접 보시죠.”

박 신부는 이반 교수가 가리키는, 그러니까 자신이 보았던 집 맞은편에 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안을 힐끗 보았다.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었 다. 조금 있다가 방문이 열리더니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 을 보니 방금 자신이 보았던 어린아이의 얼굴과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었다. 초점 없는 눈과 텅 빈 듯한 무표정한 얼굴.

‘아니! 여기도?’

박 신부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집에 모두 뇌성마비 장애인이 살고 있다니, 우연치고는 이상했다. 박신 부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아까 의 여자아이와는 달리 여자는 박 신부가 쳐다보건 말건 개의치 않고 남자를 난폭하게 자리에서 일으켜서 목발을 짚어 주는 것 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 남자의 얼굴 또한 여자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멍한 남자의 얼굴이 박 신부 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

박 신부의 뇌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비슷한 병에 걸린 사람 들이 자신들만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여기는 뇌성마비 환자나 장애인이 모여 사는 곳일까? 그런데 뇌성마비 환자뿐만 아니라 팔다리가 성하지 않은 장애인 까지 있다는 말인가?’

박 신부는 고개를 돌려 이반 교수를 쳐다보았다. 이반 교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이 마을…………… 정말 이상하군요. 집집마다 장애인들만 있군요.”

이반 교수는 박 신부가 방금 그 집 창문을 들여다보는 동안 몇 곳을 더 살펴본 듯했다. 박 신부는 턱을 몇 번 쓰다듬더니 말 했다.

“여기도 촌락은 촌락이니만큼 갖가지 기능을 가진 단체들은 있을 것 아닙니까? 상점도 있을 것이고, 경찰서나 하다못해 자치 단체라도 있을 겁니다. 준후의 문제는 그곳에 가서 도움을 청해 봅시다. 우리가 이 안을 헤매고 다녀 봐야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잡힐 것 같지 않군요. 준후도 상당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아이인 데, 그렇게 쉽게 없어졌을리가 없어요.”

“그러는 편이 낫겠군요.”

박 신부의 제안에 이반 교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사방 을 둘러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반 교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고 본래의 냉정한 표정에 하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 다. 이반 교수의 그런 면에 박 신부는 이상스레 호감이 갔다. 한 참 동안 한쪽을 응시하던 이반 교수가 박 신부에게 말했다. 

“가만 저쪽에 조금 큰 건물이 있는 것 같아요. 거기가 혹시 마 을 회관이나 자치 단체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여간 여기도 분명히 공공 기관은 있을 테니까요.”

“그럼 가봅시다.”

마을 중앙에 있는 건물로 향하면서도 박 신부는 준후를 몇 번 이나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고, 내다보는 사람도 하나 없었 다. 박 신부는 길가에 있는 집들의 창문들을 힐끔힐끔 들여다보 았으나 역시 하나같이 뇌성마비나 이상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사 람들, 또는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들만 보일 뿐, 성한 사람은 어 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마을이 생기게 된 것인지, 그리고 이 마을과 드라큘라 성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까 준후가 말한 대로 이 마을에 전혀 영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두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박 신부도 약간의 투시 능력이 있는지라 투시를 해 보았지만, 아 무런 영적인 조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이상한 것투성이 였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짬이 없었다.

‘만약에 블랙서클이나 코제트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면, 그들 의 손에 준후가 잡혀간 것이라면……….’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박 신부의 마음은 더욱더 조급해 졌다. 박 신부는 이반 교수보다도 빨리 걸음을 옮겨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성으로 들어간 현암은 아까 보았던 불빛을 추적하기 위해 계 단을 찾았다. 그러나 성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뒤따라오던 연희가 무서웠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불을 밝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너무 어두워요.”

승희가 연희의 말을 이어받았다.

“현암군, 성냥이나 라이터 없어?”

담배를 피우지 않는 현암에게 성냥이나 라이터가 있을 리 없 었다. 현암은 눈에 공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었다. 복도의 벽이나 큰 사물 정도는 분간이 되었던 것 이다.

현암이 둘에게 말했다.

“당장 불을 밝힐 수는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내가 재빨리 올라가서 불을 찾아 내려올게.”

승희가 말했다.

“현암 군. 태극패 있잖아. 태극패로 약하게나마 빛을 낼 순 없을까?”

현암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승희의 말이 옳았다. 태극패에 공 력을 집중하면 파란빛이 어느 정도 번져 나오긴 할 것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승희는 주변에 이상한 조짐이 느껴지지 않는지, 이상한 것이 다가오지 않는지 확인을 해 봐. 연희 씨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그런 건 염려하지 말라구.”

자신 있는 승희의 대답과는 달리 연희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 암은 근래에 들어 잘 쓰지 않았던 태극패를 꺼내어 오른손에 들 고 공력을 모았다. 아직 공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기에 살짝만 가 했다. 그러자 태극패에서 성냥불 한두 개비 밝기쯤 되는 파란빛 이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어둠이 눈에 익기만 하면 승희나 연희 도 주변을 대강 분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태극패를 오 른손에 들고 있는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들 수 없는 점이 조금 마 음에 걸렸다. 갑자기 현암이 소리쳤다.

“저거!”

“뭐, 뭐, 뭔데?”

놀란 승희가 더듬거렸으나 현암은 승희의 말이 채 떨어지기 도 전에 복도 끝에 있는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하도 빨라서 계 단이 현암을 빨아들인 것 같아 보였다. 승희와 연희도 현암의 뒤 를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달려갔다. 그러다 보니 승희도 투시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계단 두어 층을 올라서자 현암은 잠시 걸음을 멈췄고, 잠시 후 연희와 승희도 숨을 헐떡이며 현암 뒤로 다가왔다. 현암은 푸른빛이 번쩍거리는 태극패를 들고는 심각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서 뭔가가 보였어.”

“뭐가요?”

연희가 물었다.

“그림자 같은 게 휙 하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현암이 올라서 있는 계단으로부터 양쪽으로 긴 복도가 나 있 었고 복도마다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현암은 그중에 어느 방으 로 사라졌는지까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분명히 이 근처일 텐데. 이 근처 어딘가로 그림자가 숨어들어 갔어.”

다른 때처럼 정신없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어두운 가운데 적을 추적하는 것이라 승희도 으스스했고, 연희는 소름 이 끼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느 방으로 들어갔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연희가 뭔가를 보고 놀랐는지 큰 소리를 질렀다.

“엇! 저게・・・・・・ 저게 뭐예요?”

현암과 승희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연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서 있는 곳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초상화였다. 깡마르고 혈색이 파리한 키가 큰 남자의 초상화. 그러나 이상한 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현암이 눈썹을 찌 푸렸다.

“저게 왜요?”

현암이 뭐가 이상하냐는 투로 툴툴거렸다. 승희가 허리를 숙 이고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초상화 아랫부분에 씌어 있는 글자를 읽어 갔다. 잠시 후 승희가 입을 열었다.

“이건 드라큘라 공의 초상화라는데? 이 성의 주인이었던 드라큘라 공 말이야.”

“그래? 흠. 그런데 왜 놀라셨죠. 연희 씨?”

“지금・・・・・・ 저 초상화의 시선이 움직인 것 같아서요.”

“예? 그림의 눈이 움직였다는 말입니까?”

“예. 아까는 분명히 저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방금 저를 쳐다봤어요. 지금은 다시 원래대로 눈을 돌린 것 같군요.”

현암은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별달리 이상한 점은 발 견할 수 없었다.

“잘못 본 것 아닙니까?”

현암이 심각하게 물었다. 물론 초상화나 그림에 영이 빙의되 어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일은 여러 번 겪은 바 있었다. 그 러나 초상화에 영이 깃들었다면 아무리 어둡다 해도 승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초상화에서 별다른 영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암은 연희가 잘못 본 것이라 고 생각했다. 연희가 주춤주춤 초상화 앞으로 다가가서 유심히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잘못 보았나 봐요.”

현암은 아까 보았던 수상한 그림자를 떠올렸다.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방들을 하나씩 뒤져 볼 테니.”

“알았어요.”

“그래, 현암 군, 잘 다녀와.”

현암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암이 방으로 들어가자 복도는 더욱 캄캄해졌다. 연희는 몸을 떨면서 승희에게 바짝 붙어 섰다.

“현암 씨가 가니까 너무 어두워지는데 우리도 차라리 현암 씨 뒤를 따라다니는 게 어때? 행동을 같이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럴까. 언니?”

“응. 그러자구.”

둘은 주춤거리면서 벽을 더듬어서 현암이 들어간 문으로 들어 섰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은 태극패를 들고 있으니 파란 불빛이라도 보이련만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어? 현암 군이 어디로 갔지?”

방에는 바깥으로 창이 나 있어서 짙은 안개 너머로 아주 희미 하게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방 안의 상태를 어렴풋이 나마 식별할 수 있었는데 현암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암 군은 어디로 간 거야. 이 좁은 방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리도 없고.”

“글쎄. 어떻게 된 거지.”

승희와 연희는 방의 양쪽으로 갈라져서 혹시 현암이 열고 나 갔을 만한 문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문이라고는 자신들 이 방금 들어온 방문 하나뿐이었다. 그렇다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닌 듯싶었다. 만약 그랬다면 당연히 창이 열려 있어 야 하는데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예 열 수도 없게끔 고리가 걸려 있었다.

“창문으로는 나가지 않은 것 같………….”

“아앗!”

연희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갑자기 승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 다. 연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 가? 방금까지 곁에 있었던 승희마저도 어디로 증발했는지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승희야, 승희야! 어디 있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높고 긴 비명을 질러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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