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11화 – 왈라키아의 밤 11 : 코제트의 선택
코제트의 선택
코제트는 미친 듯 깔깔 웃으면서 불덩어리를 용처럼 뒤엉키 게 꼬았다. 절규 같던 웃음소리가 멈추는 순간, 불덩어리는 같이 멈칫하다가 엄청난 기세로 쏘아져 왔다. 준후도 이를 악물고 그 에 맞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삼매신수(三神), 물의 술수 였다. 두 개의 기운이 엄청난 기세로 충돌하자 돌 벽과 통로까지 도 우르르 흔들렸다. 준후와 코제트의 발밑이 푹 꺼졌다. 바닥을 뚫고 들어간 둘의 몸이 뒤로 밀리며 돌바닥에 길게 자국을 만들 었다. 주술로 충전된 둘의 몸은 강철처럼 굳었다. 둘은 돌바닥을 부수며 서로를 밀어냈다. 허리가 휘청 꺾이던 준후가 악을 쓰며 허리를 바로 세우며 검은 물의 기운을 코제트에게 왈칵 밀어내 자, 코제트도 질세라 불기운을 더욱더 거세게 밀어붙였다. 세 퇴 마사와 승희의 기운까지 얹은 준후의 기운이 조금 더 센 것 같았 다. 주춤거리던 검은 기운은 준후의 기합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코제트의 불덩어리들을 밀어냈다. 준후의 삼매신수의 기운이 빠 른 속도로 코제트를 향해 밀려들었다. 코제트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는 순간, 준후의 기운은 코제트의 바로 앞에서 퍽 하면서 사라져 없어졌다. 준후는 땀을 주르르 흘리면서 코제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그만하세요.”
코제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실눈을 뜨고 준후를 쳐 다보았다. 준후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제발요. 싸우지 말아요.”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는 코제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코제트는 잠시 주저하더니 왼손을 쳐들었다. 순간 번쩍하면서 코제트가 사라지더니 갑자기 준후의 뒤편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기운을 쏟아 내 허탈 상태에 빠져 있는 준후의 등을 코제트 가 채찍으로 후려치자, 준후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렸다. 준 후에게 힘을 모아 주고 있던 현암이나 박 신부도 코제트의 채찍 질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정말로 눈 깜짝 할 사이였다. 코제트는 앙칼진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희, 너희가 나를 희롱해? 그러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나 는…………… 나는……”
“코제트! 무슨 짓이냐!”
현암이 분노의 고함을 질렀으나 코제트는 눈물을 흘려 가면서 허탈하게 고개를 젓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쳤다.
“너희가 미워.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 너희가! 나를 자꾸 약하게 만드는 너희가! 나의 궁극적인 것은 힘, 무엇보다도 강한 힘!”
현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힘? 무엇을 위해?”
“호호호.”
코제트는 웃더니 번쩍이는 눈빛으로 현암을 쏘아보았다.
“나까지도 약하게 만들려는 너희를 죽이기 위해!”
순간 코제트의 몸이 현암과 박 신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 간이동술이었다. 현암이 소리를 쳤다.
“조심!”
현암이 외치는 순간, 코제트의 몸이 박 신부의 바로 옆에 나타 나더니 채찍을 휘둘렀다. 박 신부가 비명을 지르며 현암 쪽으로 쓰러졌고 현암이 월향검을 빼 들려고 했으나 어느새 코제트는 사라진 뒤였다.
“뒤다!”
현암은 월향검을 뽑으려고 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오른손에 기공을 모아 코제트를 움켜쥐려 했으나 옷자락 끝만 아슬아슬하게 잡혔을 뿐, 연속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 코제트를 잡을 수는 없었다. 코제트는 번쩍하며 현암의 뒤편에 나타나더 니 날카롭게 채찍을 휘둘렀고 현암은 채찍에 발목이 감겨 쓰러 졌다. 쓰러지는 현암의 눈에 이미 쓰러져 있는 준후의 모습이 들 어왔다.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준후의 몸 주변으로 이 상한 불꽃이 파바박 소리를 내며 일어나고 있었다. 기습을 당해 서 몸 안에서 힘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았다. 준후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그 애처로운 신음에 자극받아 현암의 분 노가 폭발했다. 현암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넘어지면서 월향 검을 꺼내 들었다.
‘저………… 저 여자를………… 저 뻔뻔스러운 괴물을…………’
쓰러지면서도 현암이 이를 갈며 생각을 집중하자 마음이 전 달되었는지 월향은 귀곡성을 내면서 분노한 듯 코제트의 얼굴로 향했다. 코제트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웃었다. 아주 짧 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후련하다는 듯 담담히 웃었다. 그것을 본 순간, 현암은 마음을 바꾸었다. 스스로를 자제하는 이성이 결 국은 더 강했다. 분노해서는 안 된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미워 해서는 안 된다.
현암은 넘어지면서 소리쳤다.
“안돼!”
월향검은 코제트가 미처 공간 이동을 하기 전에 코제트의 얼 굴을 적중시킬 뻔했으나, 현암의 고함 소리를 듣고 살짝 궤적을 바꿔 아슬아슬하게 코제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코제트의 얼굴 가죽이 출렁하면서 허물어지듯 덜렁거렸다.
“죽여! 왜 죽이지 않는 거냐! 그럼………… 그럼…….”
말을 이으며 코제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휙 하고 훑 었다. 그러자 얇은 가면이 벗겨지고 거기에 불에 타 만신창이가 된 흉측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뒤에서 연희가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코제트는 조소가 섞인 듯한 차가운 말투로 중얼거 렸다.
“이게 내 얼굴이야. 만족해? 그래, 보기 좋지? 보기 좋다고? 정말이야? 나는 원래 이렇게 생긴 여자야. 후후후, 죽어 주려고 했는데, 이젠 안 그럴 거야. 죽어 주려 했는데 왜 죽이지 않아? 내가 그렇게 미워? 그럼, 그럼・・・・・・ “
현암은 의외의 사태에 신음 소리만 냈다. 코제트가 중얼거리면서 왼손을 서서히 쳐들었다.
“너희가…………… 죽어!”
그러나 코제트 목소리의 울림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 신부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달려들어 코제트의 왼쪽 손을 잡았다. 코 제트의 손에서 반지가 번쩍하고 빛났고, 그것을 본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반지가 빛을 냈는데도 공간 이동을 하지 못했다. 박 신부가 급히 외쳤다.
“반지! 이게 없으면 공간 이동의 술수는 못 쓸 거야!”
코제트는 몸놀림이 빠른 현암만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 격을 당한 박 신부가 자기를 공격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어쩌면 박 신부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신부! 놔!”
코제트가 소리를 지르며 채찍을 내던지는 순간 코제트의 손가 락에서 길게 손톱이 뻗어 나와 박 신부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박 신부의 얼굴에 코제트의 손톱이 푸욱 박히자 박 신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도 코제트의 손을 놓지 않았고, 손가락에서 반지는 계속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코제트는 박 신부에게 잡힌 손을 휘저으며 공간 이동술을 써서 빠져나가려 하는 모양 이었으나 공간 이동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듯, 박 신부가 손 을 놓지 않자 술수는 먹혀들지 않았다.
“현암군! 어서!”
현암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움직이지 않 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받쳐서 쳐들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분 노의 감정은 아니었다.
‘반지! 저 반지만!’
월향검이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와 코제트의 손으로 날아들었 다. 코제트는 기겁을 하며 손을 거두려고 했으나 손톱이 박 신부 의 얼굴에 깊게 파고들어서인지 미처 손을 빼지 못했다.
꺄아악!
월향검의 귀곡성이 허공에 퍼지자 코제트의 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이 허공을 날았고 반지도 두 토막이 났다. 코제트는 허공 에 반지와 자신의 손가락이 잘려서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짐승처럼 커다란 비명 소리를 질러 댔다. 곧이어 코제트의 몸 주변에 시커먼 구름이 일어나 박 신부의 오라와 무섭게 충돌했다. 박 신 부는 얼굴에 피를 흘린 채 한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코제트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폭발력에 밀려서 날아가서 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코제트의 입가에 섬뜩하게 붉은 피가 맺혔다. 현암은 땅에 떨어진 손가락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쉰 다음 월향검 을 받아들고 코제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제 더 이 상주술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포기해 코제트. 죄를 뉘우쳐.”
그러나 코제트는 흉하게 타 버린 얼굴에 더욱 섬뜩한 분노의 표정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희, 너희………….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겠어.”
코제트는 허공에 대고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준후가 막아 놓았던 한쪽 통로의 돌 부스러기들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 가면서 시커먼 관 하나가 비행기처럼 날아 들어왔다. 흡혈귀들 을 막고 있던 이반 교수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것이야말로 진짜 흡혈귀의 관. 어서 저것을………….”
흡혈귀의 관이 나타나자 십자가의 기세에 눌려 있던 윌리엄스 신부를 비롯한 흡혈귀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괴성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현암이 놀라 주춤하는데 관은 허공을 미친 듯이 날아 현암의 등덜미를 모서리로 들이받았다. 현암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 가 토굴 벽에 부딪힌 다음 바닥에 처박혔다. 입에서 울컥 하고 피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현암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관을 향하여 월향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관은 재빨리 월향검을 피해 뒤로 물러나 버렸다.
코제트는 허공에 대고 울음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더 니 채찍을 주워 들고 망연히 앉아 있는 승희를 내리쳤다. 승희는 몸속에 있던 애염명왕이 잠시 몸을 빌렸기 때문인지 앉은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어 있었다. 승희의 얼굴을 노리고 채찍이 날아 드는데 옆에 있던 연희가 엉겁결에 오른손으로 채찍을 받았다. 연희의 오른손에는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의 글자가 남아 있었다. 채찍이 부적 글자와 부딪히자 팍 하는 불똥을 내면서 반대쪽으 로 튕겨 나갔다. 연희는 일단 무서운 채찍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오른손이 떨어져 나갈 듯한 심한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뒤 로 넘어졌다. 채찍은 주술력의 충격을 이겨 내지 못했는지 끝에 서부터 불이 붙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채찍 전체로 번지며 타들 어갔다.
넘어져 있던 준후가 간신히 눈을 떴다. 더 이상 술수를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쨌거나 자신도 무슨 역할을 해야만 했다.
방금 흡혈귀의 관이 들어온 통로로 누군가가 무서운 듯 웅크리고 떨면서 들어왔다. 박 신부를 따라왔던 여자아이였다. 준후 는 아이를 향하여 손짓을 했다. 여자아이는 겁먹은 듯한 표정으 로 주춤거리다가 준후가 웃는 얼굴로 부르자 코제트에게 얻어맞 은 고통도 잊은 듯, 준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이반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반 교수는 윌리엄스 신부를 비 롯한 흡혈귀들을 떨쳐 버리고 그 아이에게 달려왔다. 흡혈귀들 이 이반 교수의 뒤를 따라오자 이번엔 준후가 흡혈귀들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스 신부님! 제발, 제발 정신 차리세요!”
관은 현암을 강타하고는 허공을 날아 광장 가운데 우뚝 섰다. 관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시퍼렇고 찌글찌글 말라 버린 흡혈 귀가 누워 있었다. 흡혈귀는 관 뚜껑이 열리자 움찔거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막 여자아이를 들쳐 안은 이반 교수가 비명을 질렀다.
“저, 저것이야말로 진짜 흡혈귀!”
현암은 사자후의 일갈을 터뜨리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 검을 내던졌다. 현암의 입에서 기합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와 사방으로 튀었고, 월향검은 현암의 피를 몸으로 받고 더욱더 흉 흉한 기세로 엄청난 귀곡성을 내며 흡혈귀의 심장을 향해 날아 갔다.
꺄아아악!
흡혈귀는 눈을 뜨려는 찰나에 월향검이 날아오는 것을 느낀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캭 하는 소리를 냈으나, 월향검은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심장을 뚫으며 관까지 부수고는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됐다!”
현암은 쾌재를 불렀지만 흡혈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한 고함을 질러 대자 광풍이 현암 쪽으로 몰아쳐 왔다. “엇!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코제트는 불붙은 채찍을 던져 버리고 이번에는 연희와 승희 를 향해 날카롭게 뻗친 손톱으로 공격하려고 했다. 이반 교수가 여자아이를 안고 가까이 다가서자 코제트는 비명 소리를 내면서 뒷걸음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코제트는 다시 몸에서 불의 기 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너 또너….. 그래…. 그럼 또 죽어…………. 다시 죽여 주자…………. 몇………… 몇 번이라도………….”
이반 교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반 교수는 놀랍고 무서워서 발버둥 치는 여자아이를 한 손으로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성 수병들을 꺼내서 코제트에게 집어 던졌다. 코제트가 일으키는 불길은 마지막 남은 힘을 간신히 짜내어 일으키는 것이어서인지 아까만큼 흉흉한 기세가 없었고, 이반 교수의 성수병들이 깨어 지면서 흘러나오는 성수에 조금씩 꺼져 가는 듯이 보였다. 이반 교수가 소리를 쳤다.
“코제트! 무섭지 않아? 네 동생이다! 네 동생이야! 이 애의 얼굴을 봐!”
“으아아악!”
코제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을 떨고 경련을 일으키 면서 주술도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듯, 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도 영문을 모르고 무서움에 떨며 발악하듯 울어 댔고 그 소리는 현암과 준후가 흡혈귀들과 싸우는 소리와 뒤엉켜서 토굴 안에 메아리쳤다. 이반 교수의 눈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요녀! 네 죄의 대가를 받는 거다! 죽어! 죽어 버려!”
이반 교수가 외치는데 박 신부가 뒤에서 쑥 하고 여자아이를 빼 안았다. 이반 교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하십시오. 너무 잔혹합니다.”
“예?”
박 신부는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여자아이를 뒤로 돌려세웠 다. 그런 다음 통로 쪽을 향하여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 아이는 무서움에 질린 나머지 쪼르르 통로로 뛰어갔다. 그 저편 에는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헤매고 있었다. 코제트가 박 신 부와 충돌하여 큰 타격을 입자 마을 사람들에게 씐 주문이 깨진 것 같았다.
“이반 교수님! 저 사람들을 인솔하여 밖으로!”
“아니! 그렇지만 코제트는……………. 조금만 더 하면……..”
“코제트는 이제 힘이 없어요. 제가 맡겠습니다. 어서….”
“하지만………….””
이반 교수는 박 신부의 마음을 짐작했다. 박 신부는 사실 이반 교수가 아무리 코제트를 상대한다고는 하지만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이용한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아무리 악녀라 지만 코제트의 심리 속에 있는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 더 나아가 서 이반 교수가 바로 코제트의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증오의 심정으로 코제트를 대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반 교수는 아직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흡혈귀 쪽을 잠시 살펴보았는데 그때 박 신부가 기도력으로 이반 교수의 몸 을 밀어냈다. 이반 교수가 통로 저쪽으로 주욱 미끄러지며 멀어 져 갔다.
“어! 신부님!”
“어서 가세요!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반 교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큰 소 리로 외치면서 마을 사람들을 통로 저편으로 데리고 나갔다. 준후는 수인으로 흡혈귀들을 벽 쪽으로 밀어붙이다가 부적에 생각이 미쳤다. 평상시처럼 부적들을 붙이면 흡혈귀들이 잠잠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소맷자락 안을 뒤져 보았지만 이미 부적은 한 장도 없었다.
“아차차!”
준후가 당황해하는 그 짧은 순간,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가 준후에게 팔을 휘둘렀다. 강한 바람이 몰아쳐 나오면서 준 후는 균형을 잃고 땅에 뒹굴었다. 그러자 다른 흡혈귀들이 우르 르 준후의 온몸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꺄아아악!
귀곡성이 울리며 월향검은 관 뒤에서 흡혈귀의 머리 부분을 뚫고 나왔다. 머리 위쪽이 반쯤 날아가 버렸는데도 흡혈귀는 아 직 손을 내저으며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흡혈귀는 준 후를 잡고 있는 부하 흡혈귀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현암에게 손 짓을 했다. 아마도 자신을 계속 공격하면 준후를 가만히 두지 않 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현암은 월향검으로 하여금 흡혈귀를 완 전히 반쪽 내 버릴까 생각하는 참이었는데 흡혈귀가 무언의 협 박을 하는 것을 보고 머뭇거렸다. 준후가 소리쳤다.
“주저하지 말아요! 흡혈귀를 먼저! 먼저 해치우면! 아악!”
그럴 수가 없었다. 저 흡혈귀를 먼저 해치우면 다른 흡혈귀들 도 다 같이 정상이 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지만, 만에 하나 그렇 지 않다면? 준후는 흡혈귀들에게 사지가 붙들린 채 비명을 내지 르고 있었다. 현암이 흠칫하는데 흡혈귀가 흐흐흐 하는 웃음소 리를 내며 현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을까?’
박 신부는 코제트 쪽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연희는 쓰러져 있었고, 승희는 여전히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 람들이 이쪽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 현암은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허공에 머물러 있게 한 뒤, 서서히 다가오는 흡혈귀를 노려보고 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오른쪽 팔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무슨 짓을 하건 방어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러자 흡 혈귀는 목적한 바를 이뤘다는 듯 징그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현 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현암은 보이지 않게 공력을 모아 흡혈귀들이 있는 쪽으로 ‘탄’ 자 결의 기공탄을 날려 볼 심산이 었다. 그러나 현암의 단전에는 공력이 모이기는커녕 허전한 기 운만이 느껴졌다.
아차! 내력이 고갈되었구나!’
윌리엄스 신부를 뺀 다른 흡혈귀들도 현암이 강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윌리엄스 신부에게 준후를 맡기고는 모두가 현암 쪽으로 다가들기 시작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뒤에서 준후를 꼼 짝 못하게 붙잡고 목을 물어뜯을 듯한 자세였다. 흡혈귀는 간사 하게도 허공에 월향검이 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현암에게 월 향검까지 내려오게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런!”
공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월향검까지 내려오게 한다면 현암은 꼼짝없이 흡혈귀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박 신부는 천천히 코제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상처가 심해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진 않았 지만, 몸 주변에는 여전히 찬연하게 오라가 뿜어 나오고 있었고 한 손에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들고 있었다. 코제트가 소리를 질 렀다.
“오지 마! 빌어먹을 늙은이!”
“코제트.”
“아아!”
코제트는 마지막 수단인 듯 이를 악물면서 손으로 허공에 커
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스타로트 아도르…………. 카메트 페리에이트…………….”
과거 좀비들을 부리던 호웅간이 최후의 수단으로 시도하려 했 던 주술. 박 신부는 그 주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의 증오의 주술. 그러나 헛수고야, 코제트”
코제트는 박 신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당황하는 기 색이 역력했다. 박 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코제트…………. 그 주술, 내가 잘 알지. 그건 무적의 주술이야. 상대방의 증오심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니까. 어떤 강 한 상대도 물리칠 수 있는 주술.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한 주술이 었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지. 상대가 너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코제트는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는 없어!”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천천히 코제트에게로 걸음을 옮기 고 있었다.
“나는 너를 증오하지 않아. 그래서 그 주술은 헛수고에 불과해.”
“그럴 수가! 내가 밉지 않아? 내가 사악하고 증오스럽게 보이지 않는다구?”
“너의 죄는 미워도 코제트 너는…..”
박 신부의 눈에서 한 가닥의 눈물이 흘러내리자 코제트는 마 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는 가엾은 여자일 뿐이야. 힘의 노예가 되어 버린 가엾 은…….”
박 신부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코제트는 힘을 얻기 위해서 지금껏 그 모든 악행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증오.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지도…………. 코제 트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흡혈귀의 두목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면서 현암에게 월향검을 회수하라 손짓하고 있었다. 현암이 이를 깨물며 망설이고 있는 데, 갑자기 저쪽에서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가 준후를 놓치면서 땅에 털썩 쓰러졌다. 현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왜 윌리엄스 신부가 쓰러진 것일까? 다가오던 흡혈귀들도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땅바닥에 뭔가 둥그런 것이 구르고 있었다. 그라쉬였다. 정신을 차린 그라쉬가 어떻게든 일행을 돕기 위해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이다. 준 후는 윌리엄스 신부가 중심을 잃자 몸을 빼면서 현암에게 소리쳤다.
“지금이 기회예요!”
준후가 소리를 지르자 현암에게 다가오던 흡혈귀들이 준후에 게 덤벼들었고, 준후는 재차 고함을 지르면서 혼신의 힘을 모아 두 발을 굴렀다.
“이야아아!!”
준후가 기합을 넣으며 땅을 쾅 하고 구르자 윌리엄스 신부와 흡혈귀들, 그리고 흡혈귀들의 두목까지도 그 자리에 덜컥 멈추 어선 채 꼼짝을 하지 못했다. 우보법(法)의 술수였다. 우보 법을 쓸 때는 준후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닥에서 흡혈귀의 관이 꿈틀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관 밑 에는 붉은 흙이 묻어 있었는데 그 색깔이 꼭 사람의 피 같았다. 관은 꼼짝 못하고 있는 준후를 노렸다. 현암은 몸을 날려 막 날 아가려는 관을 끌어내리려 했으나, 잠시 마비 상태에 빠졌던 흡 혈귀 두목이 다시 몸을 움직이려 용을 썼다. 흡혈귀 두목의 힘이 강해서인지 준후의 기운이 빠져서인지 준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 나왔다. 현암은 이반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관과 흡혈귀를 모두 다 부숴야 한다고 했다! 둘을 한번에!’
관이 격렬하게 꿈틀거리더니 현암의 몸을 그대로 밀치고 흡혈 귀 두목 쪽으로 움직였다.
“좋다. 그렇다면………..”
현암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월향검에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고는 기합을 넣으면서 관을 와락 끌어당겼다. 밀리고 있 던 현암이 기합을 넣으면서 오히려 관을 끌어당긴 것이다. 관은 힘의 방향을 잃었는지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면서 흡혈귀 두목의 정면을 향하다가 살짝 방향을 틀어 간신히 놈의 뒤쪽에 쾅 소리를 내면서 꽂혔다.
“이야아아압!”
현암은 전력을 다해 흡혈귀 두목에게 몸을 날렸다. 피할 것이 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오히려 자신에게 달려들자 놈은 눈을 휘 둥그레 뜨면서 멈칫거렸다. 현암은 오른쪽 어깨로 흡혈귀 두목 을 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때를 놓치지 않고 허공에서 돌고 있던 월향검이 번개처럼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 고, 흡혈귀를 밀고 있던 현암의 눈앞에 한 줄기 하얀빛이 스쳐 지나갔다. 흡혈귀와 관이 검기를 가득 담은 월향검에 관통되어 세로로 두 토막이 난 것이다. 말 그대로 일도양단된 흡혈귀와 관은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현암의 양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박 신부는 코제트에게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코제트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너는 더 이상 공간 이동술을 쓸 수 없어.”
박 신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이집트 반지는 두 조각이 나 버렸고 너는 더 이상 몸을 피해 서 달아날 수도 없어.”
코제트는 이를 갈면서 검은 구름을 내쏘았으나 박 신부는 피 하지 않고 오라로 맞받아쳤다. 잠시 뒤로 밀려났던 박 신부는 침 착하게 코제트를 향해 다가섰다. 코제트의 주술력은 한계에 도 달했는지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코제트는 절망적이라 는 생각이 들었는지 박 신부에게 소리를 쳤다.
“다가오지 마! 더 이상 오지 마! 나에게 뭘 바라는 거야! 그냥 죽여!!”
“회개하라!”
박 신부는 조용히 말하면서 코제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코제트의 눈빛은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회개, 회개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에게 그 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나?”
“회개해, 코제트. 그동안 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악행 을 저질렀다. 하지만 기회는 있다.”
“하!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는군. 내가 미쳤어? 나는 블랙서클의 총괄 승정이다.”
“블랙서클, 블랙서클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지? 무엇을 바라는 곳이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모든 것은 복수. 좋아하는 것들이 없 어지고, 학대받고 말살되고 저주받고 놀림받는 사람들이 복수를 하는 거야.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 그 힘은. 그 힘은…….”
“그 힘은……?”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코제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태 가 절망적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 도 하는 듯 코제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처연한 빛을 띠었다.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스타로트의 약속으로, 그리고 마스터의 명령으로…………. 이지 긋지긋한 세상을 없애 버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나 자신도 없었으면…………. 더 이상 악해지지 않아도 되고 악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고.”
박 신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박 신부는 코제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박 신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코제트, 회개해. 아직 기회는 있다.”
“기회라고? 무슨 기회지? 그렇다고 죽은 내 동생이 살아서 돌아오나? 내가 죽인 사람들이 되살아나나? 세상사람들이 흉측한 내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어?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코제트 주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아!”
코제트의 몸이 휘청거렸다. 저만치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기어 오고 있는 그라쉬의 모습을 보자 허리를 폈다.
“너, 너는………….”
“코, 코・・・・・・ “”
그라쉬는 흉악하게 변한 코제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코제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내 얼굴… 그래. 너도 역시…………”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지금.. 박신부가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코제트가 내뱉듯이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신부, 내가 갈 길은 하나뿐이야.”
코제트의 눈이 빛나더니 자신의 몸에서 모든 영기를 지우기 시작했다. 영력과 주술력으로 대결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몸에 남아 있던 영기를 지운다는 것은 항복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코제트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작은 물건을 꺼냈다.
“미안해, 신부,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늦었어. 모두 같이 가는 거야.”
“그건 폭파 장치?”
박신부는 아차 싶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토굴에 폭파 장치를 해 두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토굴은 코 제트 자신이 새로 만든 것이라고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폭파 장치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코제트는 화사 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추악해 보이는 얼굴에서 한 줄기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같이 죽는 거야. 신부・・・・・・ 당신 말이 옳을지도………….. 그러나 너희가 있으면 안 돼. 난 아직도 세상이 미워. 너희가 있으면 이 세상은 계속 살아남을 것 같아. 이런 세상을 남겨 둘 수는 없어. 절대 그럴 수는….”
“안돼!”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까지 타인의 몰락을 바라는 증오심은 도대체 인간의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박 신부는 착잡한 심정 이었으나 당장은 코제트의 행동을 제지하는 것이 급했다. 박 신 부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코제트는 박 신부를 향해 웃어 보이며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늦었어. 너무 늦고 말았어. 모든 것이…………. 같이 가자…..모두 안녕…….”
코제트는 단추를 눌렀다.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통로의 양쪽 출구가 무너져서 순식간에 꽉 막혀 버렸다. 토굴 천장도 찍 찍 금이 가더니 흙먼지와 돌 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양쪽 통로를 먼저 붕괴시킨 다음에 안쪽에 있는 화약은 늦게 터지게 장치한 듯, 통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코제트의 몸 위로 제일 먼저 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누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코제트에게로 뛰어들었고 돌무더기는 부연 먼지를 일으 키며 둘의 몸을 덮었다. 그라쉬였다.
흡혈귀 두목을 해치운 현암은 박 신부가 코제트에게로 다가가 는 것을 보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폭발음이 돌리자 벌떡 일어났다. 흡혈귀의 두목이 죽자 반대편 구석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윌리엄스 신부와 다른 사람들을 서둘러 일 으키고 있던 준후도 폭발음에 놀라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불 기둥이나 폭풍이 일어나는 대폭발이 아니라 순간 귀만 멍멍했을 뿐이었다.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먼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놀라 일제히 올려다보니 천 장 전체에 시커먼 금이 번개처럼 무섭게 사방으로 뻗어 가는 것이 보였다.
“천장이 무너져요!”
연희는 큰 소리를 지르며 가부좌를 한 채 꼼짝도 않고 있는 승 희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암이 오른손에 기공력 을 모아 승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려는 돌덩어리를 후려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월향검을 손에 쥔 채였다. 칼을 꽂아 넣 을 틈조차 없었다.
준후도 안에 있던 사람들을 일단 반대쪽 구석으로 피하게 했지 만 양쪽 통로는 막혀 버린 상태였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먼지와 돌 부스러기는 폭포 같았다. 온통 금이 간 천장은 금방이라도 무 너질 것처럼 보였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런! 이럴 수가!”
천장이 무너지는데도 박 신부조차 속수무책이었다. 앞에는 돌 더미에 깔린 코제트가 상반신만 간신히 내밀고 있었고, 그 옆에 는 코제트를 꼭 끌어안고 있는 그라쉬의 가죽 옷자락이 비죽 나 와 있었다. 박 신부는 그런 코제트의 모습을 보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코제트는 숨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는지 눈동자를 돌 려 옆에 비죽 튀어나온 그라쉬의 가죽 옷자락을 쳐다보았다. 코 제트가 신음하듯 입을 열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 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 는 잔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코제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이건… 그….. 그라…… 쉬?”
“그래, 코제트. 그는 너의 얼굴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어. 진정으로 너의 모든 것을 좋아한 거야. 아깐 단순히 놀랐을 뿐이 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너에게………….”
“아아…………… 아……………. 나는…………… 나는………………”
코제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악녀 코제트도 죽음을 앞두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죽지 말… 하하………… 하하하………….”
박신부는 가슴이 미어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코제트는 눈 물을 흘리면서도 힘겹게 미소를 띠었다.
“하………… 그래도 회, 회개는 안, 안 해. 아. 나, 난 죽어도………. 이젠 영혼도…….”
“코제트,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편히………….”
코제트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 안 돼, 난, 난, 죽으면……………. 아스타로트의 약속. 그것・・・・・・ “
“뭐라구? 그게 무슨…………?”
“아………… 아…………. 내………… 내 영혼……………. 계………… 계약………….”
혹시 코제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블랙서클 사람들이 죽으면 갑자기 나타나서 몸을 흡수해 버리고 사라지는 검은 원이 아닐 까? 코제트는 숨을 헐떡이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 갔다.
“하………… 할 수 없…… 후후…… 나는…………… 나는…… 이러는 게………… 내가 나에게 벌을…………… 후후………… 만족…… 맞아, 그래야…………….”
코제트는 두서없이 중얼거리다가 박 신부를 올려다보았다.
“지………… 신부…… 나. 나…… 예………… 쁘……?”
“아아!”
박 신부는 눈물과 동시에 긴 한숨이 나왔지만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뻐.”
“하… 하…. 거짓・・・・・・ 거짓말・・・・・・ 거짓말쟁이 신부……………. “
코제트는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푹 꺾었다. 마지막의 빈정거림 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너무도 밝 은 얼굴이었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회개한 코제트 박 신부가 보기에 그녀는 정말로 예뻤다. 몸을 숙여서 코제트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그대의 죄를 사하노라.”
박 신부가 코제트의 눈을 감겨 주자 코제트의 주위에 검은 기 류가 일었다. 박 신부는 코제트의 몸이 원 안으로 흡수되는 광경 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검은 원에 대해서는 대 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또 그것은 코제트가 말한 대로 아스타로트와의 계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제트의 마음은 구원했어도 영혼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박 신부의 마음에 무섭게 파고들었다. 박 신부는 상황이 급박하 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잊은 채 망연히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