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12화 – 왈라키아의 밤 12 : 붕괴
붕괴
이제 천장은 거의 허물어져서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았 다. 현암이 어디서 쇠기둥 하나를 들고 와서 있는 힘을 다해 천 장을 받쳤으나 천장의 가운데 부분이 내려앉는 것을 지연시켰을 뿐, 바깥쪽 천장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연희도 정신이 없었다. 연희는 정신을 잃은 승희의 몸을 껴안 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를 맞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한쪽 구석에서는 준후가 갈팡질팡하여 막힌 통로로 빠져나갈 틈 이 없나 살펴보고 있었으나 워낙 커다란 돌들이 통로를 막고 있 어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박 신부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을 일으켰 다. 윌리엄스 신부는 아직도 얼굴에 흡혈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달리 저항을 하지는 않았고 멍한 눈으로 박 신부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따를 뿐이었다. 박 신부는 혀를 찼다.
“얼마나 지독하게 물렸으면……………. 그나저나 어서 빠져나가야 할 텐데!”
“제가 해 보죠!”
현암이 천장에 받침대를 세워 놓고 통로 쪽으로 달려가려 했 으나 갑자기 통로 쪽의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바람에 도저 히 다가갈 수 없었다.
“아! 여기서 모두 죽고 마는 것인가.”
박신부가 참담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연희의 머릿속에 언뜻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아까 드라큘라 공이 했던 말!’
-이곳의 지리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요. 아가씨 가 나를 부르면 한 번은 도와드리겠소.
‘그래! 혹시나 비밀 통로 같은 것이 더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연희는 승희가 손에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감싸 쥐고 마 음속으로 드라큘라 공을 간절하게 불렀다. 연희의 구리 십자가 에서 파란 염체가 평소보다 훨씬 밝은 빛을 뿜어냈다. 영력이 염 체로 흘러들어 간 것일까? 염체는 기운차게 휙 하고 뛰어나오더 니 난데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돌 부스러기를 피해 한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 현암이 세워 놓은 쇠기둥의 좁은 부분부터 양쪽 벽까지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무너져 내린 돌 부스러기로 거의 꽉 메워져 있었다. 모두가 절망 에 빠져 당황하고 있는데 염체가 연희의 십자가로 되돌아왔다. 그 순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반투명한 사람의 모습 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음산한 목소리가 연희의 마음속에 친근하게 전달되었다.
이겼군요. 후훗.
연희는 마음속으로 급하게 외쳤다.
‘지금 몹시 위험합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영은 연희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띠는 듯했다. 그런 다음 한쪽 벽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흡혈귀의 관은 크로커스의 것이라오…....
영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준후와 박 신부, 현암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해했다. 연희가 영이 사라 져 간 쪽의 벽을 파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현암이 벽을 힘주어 두들겨 보자 과연 그 뒤는 비어 있는 듯했다.
“통로다!”
그러나 벽의 진흙을 긁어 내자 통로는 엄청나게 커다란 네모난 돌로 막혀 있었다. 그 돌은 퇴마사 세 명이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암이 기공력만 고갈되지 않았어도 빼낼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남았던 공력도 천장에서 쏟아지는 돌들 을 쳐내느라 모두 써 버린 상태였다.
“아, 이럴 수가!”
연희까지 달려들어서 힘을 보탰지만 마찬가지였고 마을 사람 들 몇몇이 가세했지만 여전히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뒤 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크악 하는 괴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윌리엄스 신부가 달려들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눈은 원 상태로 돌아온 듯했으나, 얼굴은 아직도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입에는 긴 송곳니가 다시 비죽하게 나와 있었다. 준후가 놀라 소 리를 쳤다.
“아니! 윌리엄스 신부님이 아직도!”
그러나 뜻밖에도 윌리엄스 신부의 입에서는 원래의 익살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우! 나도 몰라! 하지만 비키세요!”
박 신부는 순간적인 경계심으로 윌리엄스 신부를 향해 오라를 뿜어 댔으나 윌리엄스 신부는 본체만체 커다란 돌덩어리가 놓 여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얏 하는 기합 소리를 내며 윌리엄 스 신부가 힘을 쓰자 놀랍게도 돌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윌리엄스 신부를 도와 돌을 밀어내니 반대쪽에 커다란 통로가 보였다.
“와!”
그러나 기뻐할 시간도 없었다. 연희와 준후는 아직도 몸을 움 직이지 못하는 승희를 부축하여 통로로 들어갔고, 박 신부는 사 람들에게 통로 안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사이 아직도 흡혈귀의 모습이 남아 있는 윌리엄스 신부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덩어리를 무서운 힘으로 쳐 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켜 주고 있었다. 박 신부가 몸을 반쯤 넣었을 때 쇠기둥이 무너지며 천장 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덩어리가 박 신부 의 몸에 부딪히려는 순간, 윌리엄스 신부가 아까처럼 괴성을 지 르면서 소맷자락을 떨쳐냈다. 그러자 소맷자락에서 엄청난 바 람이 몰려 나와서 떨어져 내리던 돌덩어리들을 옆으로 날려 버 렸고, 그 틈을 타서 박 신부와 현암까지도 무사히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윌리엄스 신부가 들어서자 또다시 와르르 하는 폭 음과 뿌연 먼지를 내면서 지하 토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여파로 통로마저도 흔들리더니 무너질 조짐이 보였다. 사람들은 앞을 향해서 죽어라 달렸고 토굴의 벽과 천장이 그들을 뒤쫓듯 이 무너져 내렸다. 윌리엄스 신부가 비탈길을 미끄러지듯이 내 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토굴 바깥쪽으로 빠져나왔 다. 하늘 저편에서는 희뿌연 안개 너머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언덕 한쪽에 있는 자그마한 동굴이었다. 잔가지와 관 목들로 덮여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아 온전히 보존된 것 같았 다. 이제는 그것도 끝인 듯, 토굴이 우르르 무너지는 커다란 울 림이 발밑으로 전달되어 오면서 토굴 쪽에서 엄청난 먼지가 뿜 어 나왔다.
“모두・・・・・・ 모두 무사한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기는 했으나 다 행히 모두 무사했다. 현암은 토굴 속을 내달리면서 어느새 한 방 얻어맞았는지 피가 흐르는 머리를 만져 보고는 멋쩍은 듯이 웃 고 있었고, 연희는 바깥의 빛을 보게 된 것이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었다. 승희는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준후는 윌리 엄스 신부를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 부는 햇빛을 보자마자 실신하여 땅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이반 교수님과 마을 사람들도?”
승희가 눈을 껌벅이다가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눈을 뜨며 환하게 웃었다. 그것을 본 준후가 고개를 끄덕거리 는 것을 보고 박 신부는 그제야 얼굴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