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5대호가 면해 있는 캐나다 남부는 몇십 년 만에 최고 라는 눈보라와 함께 찾아온 강추위에 시달렸다. 폭군의 압정처 럼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와, 삐죽삐죽 솟은 침엽 수림과 산등성이를 뒤덮은 흰 눈은 이곳 겨울의 특색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런 눈보라와 시린 추위 는 히터를 튼 차 안에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영하 45도를 가볍 게 넘긴 강추위는 삼중, 사중 유리로 단단히 방어된 창문도 유령 처럼 비집고 들어와 집 안을 시리게 만들 정도였다. 얄팍한 유리 한장으로 이루어진 차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내와 이혼 후 오랜 경찰 생활을 그만두고 사설탐정으로 전 직한 더글러스는 하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으로 자신을 보낸 의 뢰인과 추위에 적절한 대비 없이 이곳으로 달려온 자신의 무지를 저주하며 기침을 했다. 그의 고향은 따뜻한 플로리다였기에 지금 사는 뉴욕도 겨울에는 꽤 춥다고 생각하여 나름대로는 두 툼하게 입은 것이지만, 이런 날씨 속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이대 로라면 감기는 고사하고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알량한 패딩 점퍼 대신 북극곰 가죽으로 만든 에스키모 방한복을 걸쳐야 했다. 그 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더글러스는 신경질적으로 기침을 하며 구식 세단의 히터 온도를 더 올리려 했다. 다시 보니 온도는 이 미 최고치로 설정돼 있었건만 차 안은 실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추웠다. 운전석으로 내뿜어지는 열이 차 안을 데우기도 전 에 바깥의 찬 기온에 열을 빼앗긴 것이다. 더글러스는 앞을 살폈 다. 앞 차창에 부딪히는 눈이 너무도 많이 쌓여 와이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눈이 얼어붙어 버리면 와이퍼도 정지하게 되 고, 그러면 차를 몰 수 없다. 때문에 가끔씩 차를 세우고 바깥으 로 나가 얼음을 손으로 떼어 내야 했다. 밖으로 나갈 때에도 엔 진은 정지시킬 수 없다. 십 분만 정지시켜도 엔진이 식어 시동조 차 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한 시간만 세워 두면 대강 채운 싸구 려 부동액도 견디지 못하고 얼어서, 이 고물 차는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리라. 어지간하면 폭설을 핑계 삼아 의뢰 를 미루거나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 었다.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외모나 머리도 특출 나지 않았으며, 체력은 있지만 내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유머 감각도 별 로인데다 패션 감각은 없다시피 했다. 더구나 게으르고 지저분 했으며 성격이 괴팍해서 사교성이 모자랐다. 갈색에 가까운 짙은 금발은 담배와 기름때로 엉켜 있었고 덥수룩한 수염은 그렇 지 않아도 불도그 같아 보이는 험악한 인상을 더 강조했다. 고집 스럽게 빛나는 파란 눈은 피곤으로 번들거렸고 앙다문 입술은 당장이라도 험담과 욕설을 쏟아 놓을 듯 기묘하게 비틀려 보였 다. 더글러스는 자신을 올바르고 정직하며 착한 사람이라 믿었 으나 적어도 남의 눈에는 반쯤 약쟁이에 반쯤 주정뱅이로 보였 다. 어렵게 시작한 결혼 생활조차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해 버렸고 아이도 없었다. 부모도 세상을 떠났고 마땅한 친척도 없 었으며 유산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경찰과 불화만 일으 켰고 이직한 이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 천지라 화이트 트래시라 불릴 만했다. 더글러스는 어릴 때부 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가 남겨 준 유일한 유산은 ‘뭔가 하나는 특출나야 한다’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더글러스는 ‘끈기’를 자신의 장기로 삼아 일생 내 내 노력해 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이제는 어떤 일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반대로 집착이 지나쳐 그가 일으킨 모든 불화의 절반 정도를 낳았으니 좋은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어쨌든 더글 러스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움이 닥치면 습관처럼 이 말을 내뱉었다.
‘겨우 이 정도냐? 응?”
* white trash: 미국에서 무지한 백인 빈곤층을 일컫는 말.
욕설처럼 되뇌면서 더글러스는 차를 몰았다. 눈과 추위 때문 에 차의 기름 소모가 예상보다 엄청나게 컸다. 주유소를 만나지 못한다면 속절없이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기름이 반 정도 남은 순간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나 더글러 스는 물러서는 대신 앞으로 내달렸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 능이 없는 것처럼 뒤돌아 간다거나 포기한다는 단어는 더글러스 의 사전에 없었다. 고집마저 잃는다면 자신의 실패하고 찌그러 진 인생이 그야말로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 생 각했다.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었다. 아니, 걸 수밖에 없었다.
가솔린이 다 떨어져 계기판의 주유등에 불이 들어왔다. 앞 유 리에는 쌓인 눈이 얼어붙어 와이퍼가 끽끽거리며 비명을 올렸 다. 눈은 그치지 않았고 바람과 추위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죽으라는 거냐? 흥! 겨우 이 정도냐? 더! 더 괴롭혀 보란 말 야! 이 정도로 내가 죽을 것 같아? 포기할 것 같아?”
더글러스는 독하게 소리치며 차를 세웠다. 그리고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옆 좌석에 팽개쳐 둔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 다. 음주 운전이 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추위에 밖으 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경찰이 단속하러 와 준다면 기꺼이 웃으며 맞아 줄 수 있었다. 딱지를 떼는 것이 얼 어 죽기보다는 나으니까.
위스키를 몇 모금 들이켜고 병을 옆 좌석에 팽개친 다음 심호 흡을 하며 차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추위 추위라기보 다는 살을 파고드는 독뱀의 이빨 같았다가 아우성치며 몰려 들었다. 눈도 뜨기 힘들었다. 간신히 차창 앞의 얼음을 손으로 짓부숴 가며 털어 내고는 차에 타려는데, 저만치에 뭔가가 보였 다. 눈보라 속이라 어스름한 그림자만 얼핏 보인 것이지만, 분명 침엽수나 산등성이의 삐죽삐죽한 윤곽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선 이 아름답게 이어진 인공적인 물체의 윤곽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더글러스는 쾌재를 부르며 재빨리 차에 올라 차를 몰았다. 기 름이 거기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뛰어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추워요.”
준후가 굳어 버린 혀로 말했다.
“춥긴 하군.”
박 신부도 씁쓸하게 대꾸했다. 현암은 입을 열지 않고 뒤에서 간신히 따라오는 승희를 돌아보았다. 승희는 현암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에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을 떼어 내며 말했다.
“난 얼어붙어서 말 못해.”
“얼었는데 어떻게 말을 해. 아직 견딜 만하구나.”
현암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승희는 성질을 부렸다.
“꼭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냐. 응?”
“그러는 너는 꼭 그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리니?”
“아. 미치겠네!”
“내 옷까지 벗어 줬는데도 그렇게 말해야겠냐?”
내공으로 추위를 다스릴 수 있는 현암은 자신의 방한복을 승 희에게 건네준 지 오래였다. 준후도 주술을 부려 몸을 덥혔고 박 신부마저도 견디다 못해 오라 막을 펼쳐 눈보라를 조금이나마 막으려 했다. 추위가 너무 심해 특별한 능력이 있는 퇴마사들도 버티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마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 다. 그러나 내공이나 주술력도 한계가 있다. 다급해진 현암은 짜 증을 냈고 승희도 야속한 듯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생색을 내야 해?”
박신부는 허탈한 듯 말했다.
“차라리 싸우게나. 그럼 열이 날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두 시간이나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다. 조심성 많은 박 신부가 준비를 했기에 방한복 등의 준비는 잘 갖추었지만 차가 문제였다. 싸구려 중고차를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역시나 차는 도중에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인적도 없고 누군가 에게 구조를 요청할 수도 없었다. 죽기 살기로 전진하는 편이 낫 다고 주장하며 현암은 제일 앞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눈을 공력 으로 밀어내 길을 뚫었다. 그러나 이제는 현암의 막강한 공력도 바닥을 보이고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방한복까지 벗었 으니 공력이 떨어지면 현암이 제일 먼저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근데 정말 여길까? 젠킨스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 여기라 생각하기엔……..”
승희가 종알거렸다. 그러자 현암은 눈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진 나무를 옆으로 밀어내며 대답했다.
“코제트가 말한 젠킨스가 틀림없다면 여기가 제일 유력해, 사 람들이 적은 외딴곳이니 지옥문을 열기에도 적합할 거고.”
“그러나 여기 있는 젠킨스는 연구소장이고 과학자라잖아. 블 랙서클의 승정이라기엔 생뚱맞은데.”
“젠킨스가 과학자인 것은 맞지만, 이 연구소는 수상해 상당히 큰 규모로 빙하와 태양 흑점을 연구한다는데, 논문을 발표한 적 도 없고. 그런데 사람들은 굉장히 많이 고용하고 있지.”
준후가 불쑥 말했다.
“고용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죠.”
그 말을 듣고 승희가 말했다.
“아, 그래. 나도 알아. 안다구! 그런데 정말 가기 싫거든? 이러다 얼어 죽을 거 같아.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백호 씨가 준 위 성 전화로 구조를 요청하면 되잖아.”
그러자 박 신부가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통화가 안 될 걸세. 그리고 여기는 꼭 조사해봐야 해.”
“윈디고 때문에요?”
승희가 간신히 대답하자 박 신부가 안경에 붙은 눈을 털어 내며 말했다.
“그렇지.”
윈디고는 캐나다에서 인디언 전설로 내려오는 존재였다. 거대 한 해골 거인의 모습을 한 유령이자 악신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저주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죽이게 하는 존재로 알 려졌다. 나타날 때마다 무서운 혹한과 추위를 동반한다고 했다. 오래된 전설로만 여겨져 왔지만, 근래 이 일대의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반투명의 해골 거인 모습을 본 목격자들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일부러 구경을 오거나 지역의 싸구려 타블로이드 잡지 에까지 실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목격자들이 단순히 헛것을 보 았다고 생각했으나 퇴마사들만은 달랐다. 준후도 리매를 불러낼 수 있으니, 블랙서클이 마음만 먹는다면 윈디고 같은 존재는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단서는 너무 도 적었다. 세 가지뿐이었다. 그 방법이나 결과는 어떨지 몰라도 블랙서클은 어쨌든 지옥문을 열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 술이나 알려지지 않은 초능력을 이용하게 마련이라는 것. 그리 고 남은 두 명의 승정의 이름. 젠킨스와 히루바바. 승희는 승정 의 이름이 존이나 톰, 하산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중얼거 렸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정보의 전부였다. 이것들은 단순한 정 보였지만 블랙서클의 존재로 의심하려면 이 미약한 세 가지 정 보가 일치해야 했다. 다행히 백호와 정보기관의 간접적인 도움. 그리고 연희까지 가세하여 분석을 한 결과 몇 곳을 물망에 올릴 수 있었고, 이미 두 번이나 허탕을 쳤다. 분산해서 찾았으면 쉬 웠겠지만, 지난번 왈라키아에서 승정 중 한 사람인 코제트에게 고생을 했던 터라 박 신부는 퇴마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연희와 백호는 히루바바라는 이름을 추적하고 있었고, 윌리엄스 신부와 월터 보울, 이반 교수는 코제트가 언급 한지옥문을 여는 방법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외딴곳에 세워진 고립된 연 구소라는 조건, 그리고 윈디고 괴담과 목격담이 조금씩 나타난 다는 점, 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뒤를 캐 보니 수상쩍은 점이 있는 연구소장 젠킨스. 이 정도면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다만 심한 추위 때문에 방문 자체에 목숨을 거는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호텔은 누추하고 낡은데다 비좁기까지 해서 호텔이라기보다 는 중세의 선술집 같았다. 하지만 더글러스로서는 다른 선택지 가 없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니 살 것 같 았지만,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
이곳은 연구소에 물자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었다. 하도 길이 험하고 연구소에서 요구하는 물건이 많다 보니 자그마한 캠프가 모여 마을을 이룬 것이다. 공동 숙소 같은 집이 대여섯 채. 사람들은 대부분 운송업자들이고 몇몇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더글러스가 눈길을 헤치고 꽁꽁 언 채 도착하자 마을에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이 작은 마을에 연구소 직원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치안 유지 명목으로 보안관이 파견되어 있을 뿐이었다. 헌데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도 모두 마을을 떠나 기를 강력하게 바랐다. 보안관은 눈으로 길이 막혔으니 날씨가 풀릴 때까지는 나갈 수 없다고 하며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있던 모양이다.
완전히 막혔다던 산맥 사이의 눈길을 따라 더글러스가 들어오 자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더글러스가 온 것을 보고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며 마을을 빠져나가겠다고 난리를 부렸 다. 그러나 보안관은 응낙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글러스에 게 길이 얼마나 험한지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라고 했고, 영문 을 모르는 더글러스는 자신이 겪은 바를 말했다. 이런 날씨에 안 전한 마을을 두고 나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 과장되게 주장하며 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니 그냥 있으라고 설득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가겠다고 고 집을 부리다가 보안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결국은 총에 눌려 끌 려갔다.
더글러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눈보라와 혹한 속에 주민들이 왜 이리 필사적으로 떠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 았다. 보안관의 태도도 수상쩍었다. 명목상으로는 지금 마을을 떠나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서 그런다고는 하지만, 정도가 심 했다. 마을을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보안관 에게 끌려간 몇몇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울먹이고 공포에 떨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더글러스는 간신히 몇 사람에게 왜 떠나려 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물었으나 사람들은 대 답하지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딱 한 사람만이 주저하다가 흘리 듯 말했다.
“윈디고………… 밤이 되면 그게…………..”
이 말만 남긴 채 뒤돌아서 달음질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더글러스만이 호텔에 덩그러니 남았다. 이 호텔은 보안관이 운영하는 것이라 더는 뭐라 물을 수조차 없었다.
더글러스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설마하니 정말로………….
‘그럴 리가 없잖아.’
더글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의뢰를 받아 이곳에 온 것이지만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돈이 급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의뢰인의 애절한 호소가 없었다면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하고 내쫓 았을 것이다.
-윈디고가 아들을 잡아갔소. 죽었을지도 모르오. 아들을 찾 아주시오.
-네? 뭐라구요?
-윈디고・・・・・・ 윈디고 말이오. 얼음의 악령이………… 그 악령이 내 아들을………… 경찰은 믿어 주지도 않소. 당신만이 내 희망이 오. 제발…….
눈가와 이마에 굵은 주름이 겹겹이 잡힌 얼굴이 죽은 더글러 스의 외조부를 연상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정신 나간 늙은이 의 의뢰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더글러스는 금발에 푸른 눈이었 지만, 그의 외조부는 의뢰인처럼 인디언계였다. 의뢰인처럼 평 생을 힘겹게 살아온 인생의 여정이 굵은 주름에 배어 있는 역사 의 뒤안길로 사라진, 한때는 위대했다는 초원 전사들의 후손. 아니. 아니, 그런 것은 관심 없다. 활 한번 안 쏴 본 늙은이가 무슨 전사냐. 그냥 노망든 노인네의 푸념일 뿐이지. 나는 후퇴를 모르 는 더글러스야. 돈이 급했기에 수락한 것뿐이라고.
절대로, 절대로 그 늙은이가 의뢰비로 꺼낸 돈이 꼬깃꼬깃 접 혀 있었기 때문이 아냐. 지폐 한 장 한 장이 늙은 몸을 혹사해 가 며 간신히 주워 모은 돈이라는 것 따위를 알아채서 맡은 의뢰가 아니란 말야. 난 돈이 필요했을 뿐이야. 노망든 노인의 헛소리는 내 알 바 아니니 접어 두고, 어디선가 사고라도 당했을 아들을 찾아 주거나 시체라도 발견해 주면 할 일은 끝나는 거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가라앉는 배에서 도망치려는 것 같던 마을 주민들의 절박한 표정이 떠올랐다. 뭔가 있다. 틀 림없이 있다. 더글러스의 직감이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고 개를 저으며, 분풀이라도 하듯 코코아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럴 리가 없잖아. 윈디고라니..’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마을 전체가 윈디고를 겁 내어 도망치려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 되는가?
마을 보안관이 눈으로 뒤덮인 모자를 털며 호텔 안으로 들어 섰다. 그는 위압감이라도 주려는 듯 커다란 산탄총을 어깨에 메 고 다녔는데 거기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보안관은 총을 바닥에 툭툭 쳐 눈을 털어 낸 다음, 성큼성큼 걸어와 더글러스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웃어 보였다.
“아. 정말 지옥같이 춥군. 윈디고가 나올 만큼 눈보라도 심하고. 코코아는 마음에 드시오? 몸은 좀 녹으셨나?”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윈디고라고요?”
더글러스가 되묻자 보안관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바보들의 헛소리일 뿐이오. 어린애들도 아니고 왜들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보안관은 미소 띤 얼굴로 껄껄 웃다가 더글러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윈디고라는 것은 과거 인디언 때부터 내려오는 캐나다 지방 의 전설이오. 악령이나 요괴라고 할 수 있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보안관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설에 의하면 윈디고는 키가 오 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인, 그것도 해골 거인이었다. 뼈만 남은 온몸에는 살 대신 얼음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모 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인간을 만 나면 꽁꽁 얼려서 아삭아삭 깨물어 먹는다고 했다. 보안관은 덧 붙였다.
“윈디고는 그런 마력뿐 아니라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결국에는 전설 속의 이야기일 테지만 말야. 사람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내리는 마력인데 혹시 요괴가 잡아먹지 않거나 도망친다 해도 윈디고를 한 번 본 사람은 반쯤 홀린 상태가 되어 까닭도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을 품는다는 거요.”
“살의를 품게 된다고요?”
“하하. 그렇소. 무섭지? 때문에 윈디고가 나타나는 곳에는 인 명 피해는 말할 것 없고 혼란 상태가 야기된다는 거지.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그러한 혼란을 틈타서 윈디고는 버젓이 마음대 로 돌아다니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더글러스는 넌지시 보안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윈디고가 정말 나타났었나요?”
보안관은 껄껄 웃었다.
“말도 안 돼. 사람들이 전부 이상해진 것 같소. 다들 윈디고를 보았다고 떠들어 대는데, 매일 밤 순찰을 도는 나는 한 번도 못 보았거든?”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키가 오 미터나 되는데다 남을 저주하 고 사람을 죽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해골 거인이라고? 말도 안 되지.’
더글러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보안관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근래 큰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소.”
“네? 어떤 사건이?”
“사람이 몇 죽었소.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 모를 이상한 사건이지. 그러나 내 역량으로는 해결할 수 없소. 전문가를 불러야 하는데 알다시피 날씨가 이 모양이라 부를 수가 없소. 그 때문에 사람들 마음이 흉흉해져서 괴담이 떠도는지도 모르지. 아이들 같다니까!”
더글러스의 육감이 기지개를 켰다. 여기까지는 그냥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허나 사건이 뒤따른다면 수상하다. 보 안관은 정색을 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제일 먼저 톰슨이 죽은 채 발견되었소. 사흘 전이지. 아, 당 신은 톰슨을 모르지. 조 톰슨. 조그마한 주유소를 운영하던 사람 이오.”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러자 보안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얼어 죽었지. 집에서.”
더글러스는 깜짝 놀랐다.
“네?”
“아아. 놀라지 마시오. 이 날씨를 겪었잖소. 히터가 고장 났든 지. 머리가 이상해져서 덥다고 창문이라도 열고 잠들었을 테지. 어쨌든 천장만 빼고 집 안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지. 톰슨은 소파에 앉은 채였는데,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 집 안 도 꽁꽁 얼어서 빙하시대 동굴같이 되었고.”
더글러스는 깜짝 놀랐다. 보안관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지 만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서워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절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다.
“이상하잖습니까?”
보안관은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어디 보자. 생각해 보니 톰슨은 뭔가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는 자세였던 것 같군.”
“아무리 날씨가 춥고 창이 열려 있어도 그렇게 얼어붙지는 않 습니다! 더구나 자고 있던 것도 아니라면…………….”
더글러스가 놀라고함을 치는데도 보안관은 느긋하게 맞장구를 쳤다.
“자고 있었던 건 아냐. 톰슨은 눈 뜬 채 죽었는걸?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한데.”
“히터가 고장 난 상태였습니까? 창문은 열려 있었나요?”
“이봐, 당신. 내가 배지를 달고는 있지만 전문가도 아니고 수 사관도 아냐. 난 그냥 이 작은 호텔의 주인이고, 억지로 배지를 단 것뿐이라구! 그렇게 조사할 전문 지식도 권리도 없어. 전문가 가 올 때까지 현장을 보존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어.”
“그, 그건 맞습니다. 그러셔야죠. 보존은?”
“잘은 모르지만, 얼어 있었으니 창문과 문을 열어 녹지 않게 했지. 자칫 녹게 되면 상할 테니까. 천연의 보존 방법인 셈이지.”
보안관의 말은 정론에 가까웠고 이런 작은 마을에서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사람의 집의 창문과 문을 열어 놓았다면 사람들이 그 무서 운 광경을 보았을 것 아닌가?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애당초 톰슨의 죽음 자체가 미스터리 아닌가? 어떻게 사람이 소파에 앉아 눈도 감지 못한 채 얼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윈디고의 저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더글러스는 소름이 끼쳐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보안관은 넉 살 좋게 말했다.
“아아.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꼬맹이들처럼 공포에 휩싸이진 말라구. 마을에 남은 꼬맹이들 달래는 것만도 힘에 겨운데 짐을 늘리고 싶진 않아. 날씨만 풀려 경찰과 전문가들이 와서 조사하 면 해결될 일이야.”
“그런데 아까 듣기론 사건’들’이라 하신 것 같습니다만.”
“한 명 더 있었지. 톰슨과 비슷해. 멜리사라는 할망구인데, 할 망구답지 않게 드세고 기술이 좋아서 차 수리와 정비를 전문으 로 했지. 그 할망구도 죽었어.”
“어떻게요?”
“자네는 호기심이 많군. 뭐, 얼어 죽었어. 집 안에서 죽은 건 아니니 의심하지 말게. 수도꼭지를 고치려다가 선 채로 얼어 죽 었지. 하지만 바깥이니…………….”
더글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보안관은 조금도 눌리지 않고 마주 호통을 쳤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왜 흥분하는 거야?”
“아, 아니, 흥분한 건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추워도 어떻게 사람이 선 채로 얼어붙는단 말입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
보안관은 눈을 부릅뜨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우리 눈앞에서 일어났으니까. 그렇지 않아? 날뛰지 말고 자리에 앉아.”
더글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보안관의 기세에 눌려 자리에 앉았 다. 경찰 시절, 포기를 모르는 더글러스라 불릴 정도로 독한 성격 이었지만, 보안관의 눈빛은 그런 그조차 압도하는 뭔가가 있 었다. 그러자 보안관은 금세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염려 마. 그다음부터는 얼어 죽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 수상한 사건은 네 번이나 더 있었어. 갑자기 누군가가 죽는 거 야. 총에 맞기도 했고, 뒤에서 칼로 찔리기도 했어. 여기는 모두 얼굴을 알고 지내는 한적한 곳이야. 환경이 험해서 서로 돕고 살 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 모두가 친구였고 다툼이나 싸움도 일어 나지 않았어. 그런 이곳에서 사흘 사이에 여섯 명이 죽었어!”
어지간히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아왔지만, 그런 더글러스에게도 이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이.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절대…..”
“그래, 사람들이 미치기 시작했어. 미쳐 가는 거야. 하필 이때 윈디고 이야기가 퍼져 나왔어. 누가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안하 려고 전설을 떠올린 거야. 안 그러면 미쳐 버릴 것 같을 테니까. 윈디고라고? 그걸 믿나? 난 아냐.”
보안관은 이제야 웃음을 지우고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괴 로운 듯 말했다.
“이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분명해. 네 명이나 죽었으니까. 앞 에 얼어 죽은 사람들은 사고사일지도 모르고, 그 살인자가 그렇 게 만든 것인지도 몰라. 또 윈디고 이야기도 그 녀석이 퍼뜨린 것일지도 몰라. 미리 계획을 짜고 조금씩 조금씩………….”
더글러스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보안관의 말이 맞다면 그 자는 정말 무서운 녀석일 것이다. 지능범에 심리적인 면까지 꿰 뚫고 있다. 보안관은 말을 이었다.
“나도 바보는 아냐. 앞의 두 사람도 정상이 아니란 건 벌써 눈 치채고 있었어. 모를 수가 없잖아! 그러나 어떻게 하나? 살인자 가 있는데 난 조사할 여력도, 전문 지식도, 장비도 없어. 더구나 나머지 넷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살인마가 버젓이 마을 안 에서 날뛰는 거야. 더구나 윈디고라는 발뺌거리를 만들어 사람 들의 시선을 돌려놓고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거야!”
“위험한 상황이군요. 그래서………….””그래, 그놈이 정말 두려워. 미치도록 두렵다구! 마을 사람들이 위험에 빠진 건 알아. 허나 그놈이 아무리 그래도 이 마을 안 에서야. 그런 미친놈을 풀어 놓을 수는 없어. 사흘에 여섯 명! 하! 피에 굶주린 미친놈인데다 선량한 가면을 쓰고 우리 안에 섞여 들어와 있어! 그런 놈을 LA나 뉴욕에 풀어 놓으면 피바다 가 될 거야. 더구나 그놈이 해친 사람들은 내 이웃이기도 했어. 반드시 내 손으로 잡아야 해. 반드시 잡아 내 손으로 단죄할 거야…….”
말끝을 얼버무리며 보안관은 더글러스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 아보았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아무도 못 나가. 당신도, 당신은 밖에서 들어왔으니 좀 낫지만 난 당신도 완전히 믿지 않아. 누가 알겠 어? 내 눈은 당신도 지켜보고 있어. 이 눈보라가 그치고 어떻게 든 외부와 연락이 될 때까지만 버티면 돼. 지금 마을 사람들은 전부 미쳤어. 이웃을 의심하기 싫어서 윈디고라는 괴물을 생각 해 내고 그리로 도피하는 거야. 하지만 나까지 미칠 수는 없어. 난 놈을 잡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그러려면 놈의 수작에 넘어가서는 안 돼! 그러니 망할 윈디고 따위의 이야기는 내 앞에 서 꺼내지도 말라구!”
보안관은 호통을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에서 술 병 하나를 집어 들고 몇 모금을 들이켰다. 더글러스는 이제야 보 안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이 공포에 빠진 이유도, 그러면서도 아무도 나가지 못하는 것도, 주민들이 공개적으로 윈디고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더글러스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사설탐정이고, 전에 경찰 강력반에서 근무했었죠. 제가 도와 드릴까요?”
보안관은 술을 들이켜다 말고 더글러스를 노려보았다.
“말은 고맙지만 됐어. 난 자네도 믿을 수 없다고 했지? 나로서 는 자네가 범인인 게 맘이 편해. 오래 같이 지낸 이웃을 의심하 느니 그편이 낫다구.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날씨가 풀릴 때까지 알아들어?”
더글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습니다.”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는 미친 양 떼 속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해합니다.”
“그리고 보니 인사도 잊었군. 정신머리하고는. 자네 이름은 뭔가?”
“더글러스.”
보안관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더글러스 탐정. 난 젠킨스라고 하네.”
“저쪽에 불빛이 보입니다.”
승희를 업고 있던 현암이 반갑다는 듯 외쳤다. 그러자 준후를 안아든 박 신부도 정색을 했다. 해가 진 후라 사방은 금방 어두 워졌다. 눈이라도 파고 몸을 숨길까. 더 움직일까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이럴 때 불빛을 보다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예. 눈보라 사이로 언뜻 보았지만, 틀림없습니다. 건물 같은 것도 보였고요. 이제 살았습니다.”
승희와 준후는 거의 탈진 상태여서 두 사람에게 업히고 안기 지 않으면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박 신부는 참을성이 많아 내색 하지 않았지만 소모된 기력은 비슷했다. 몸에 공력을 돌리는 현 암도 견디기 힘들 정도니 오죽했으랴.
“어서 가자. 어서………. 나 얼어 죽어…………….”
현암의 등에서 승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암도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앞을 막고 있는 눈을 밀어냈다.
“그래, 어서 가자.”
보안관은 다시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더글러스에게 건넸다. 이 미 두 사람은 권하고 받으며 반병 이상의 술을 들이켠 다음 이었다. 더글러스가 얼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캐나다 사람입니까?”
“반쯤은. 나머지는 뒤죽박죽 섞여 있어. 미국인도 있고, 멕시코인도 있지.”
“보안관님은요?”
“난 캐나다 토박이지.”
더글러스는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했다.
“혹시 여기 프라일리라는 미국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까?”
“프라일리? 프라일리라… 프라일리…………. 기억이 안 나는 데. 혹시 연구소 직원이라면 내가 모를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사 람은 왜?”
더글러스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보안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자네가 탐정이란 걸 잊고 있었군. 그 사람을 찾으러 온건가?”
더글러스는 짧게 대답했다.
“네.”
“흠…………. 나는 잘 기억이 안 나네만, 기억력이 안 좋아 그런지 도 모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겠네. 그런데 연구소 직원 은 아닌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의뢰인이 말해 주지 않았어요. 사진하고 신상명세만 전달받았죠.”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날지도.”
더글러스는 품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보안관은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네. 프라일리라는 이름도 기억이 안나고.”
“뭐, 의뢰인이 잘못 알았나 보죠. 어차피 애매한 의뢰였습니다. 그러니 사설탐정인 제게 왔겠죠.”
“미국인인가? 아버지는 미국에 있고?”
“예.”
“그러면 캐나다에서 아들이 뭘 하는지 제대로 모를 수도 있지.”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만약 연구소라면…………….”
“내가 다음에 연구소로 들어갈 때 프라일리라는 직원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더글러스는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연구소 건물이 꽤 큰 것 같던데요? 저도 건물 윤곽을 보고 간신히 찾아왔으니까요.”
보안관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그래, 크지. 커다란 요새 같지.”
“그런데 연구소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까?”
보안관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무슨 비밀 연구를 하는지 그 지역은 출입 금지야 연구
소장도 괴팍한 사람이라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직원들도 마찬가지지.”
“물자 조달은요?”
“연구소장이 나와 내 조수들을 택했네. 그 외에는 아무도 들어 가지 못해 모르는 얼굴들도 아닌데 나조차도 한 번 들어가려면 삼십 분도 넘게 오만가지 몸수색을 받는다네.”
“안에 사람은 많은가요?”
“몇이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 다만 내가 본 사람은 열 명 도 넘고…………. 들어가는 물건들 양을 봐서는 서른 명쯤 있지 않을까?”
“꽤 많군요.”
“그런 셈이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려오지도 않는다는건……………”
“내가 알게 뭔가? 다만 수송해 주면 값을 후하게 쳐준다네. 그 러니 이런 험한 곳까지 악천후를 무릅쓰고 사람들이 모이는 거 지. 나도 그랬고…….
“무슨 연구를 하는 걸까요?”
“말로는 태양 흑점이니 빙하 연구니 하지만, 실제로는 군 연구소일지도 모르지. 뭐, 상관없잖아.”
더글러스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시 눈을 빛냈다.
“아무리 보안을 중시하는 연구소라도 아랫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누가 나와보지도 않나요?”
“글쎄. 안 나오는 걸 난들 어떡하나?”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나요?”
“말했지. 물론 두 번째 사건이 났을 때. 그러나 소장이 꿈쩍도 않더군. 되레 연구소 보안을 강화하는 것 같았어. 할 수 없는 일 이지. 맡은 임무가 다르니까.”
“바깥과 연락을 취할 수는 없나요?”
“없어 여긴 오지라서 애당초 전화도 없고 무전기를 가진 사람 도 없어. 날씨만 이렇지 않으면 차로 몇 시간 달리면 도시가 나 오니까.”
“연구소에는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장비가 있지 않을까요?”
보안관의 눈이 빛났다.
“아, 그럴지도.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런데 이런 날씨에 외부 에 연락을 한다고 누가 와줄까?”
더글러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수사 전문가들의 조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 람들도 외부와 연락이 통하면 조금 진정할 테구요. 그리고 외부에 미리 연락을 취해 놓으면 수사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자네 머리 좋군. 미처 그 생각을 못했어. 내가 가서 연구소장에게 이야기해 봐야겠네. 깐깐한 작자지만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네.”
그때 보안관 조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외쳤다.
“보안관님?”
“왜 그래?”
“눈길을 뚫고 네 사람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걸어서요.”
“허, 저런 사람들이 또 나가겠다고 난리를 치겠군. 넷 다 괜찮 은가?”
“탈진한 것 같지만 별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넷 다 동양인인 데. 가족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허. 동양인이라고 못 오라는 법은 없지만…………. 가족 같다고?”
“나이 든 남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어린 남자아이. 그러면 가족 아니고 뭐겠습니까?”
보안관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도 여기서는 못 나가게 해. 잘 돌봐주고.”
보안관 조수가 말했다.
“만나 보시지는 않을 겁니까?”
“나는 연구소로 가서 통신 시설이 있는지 물어봐야 해. 알다시피연구소는 나 말고는 못 들어가잖아.”
“알겠습니다. 그럼 호텔로 데리고 오죠.”
보안관 조수가 나가자 보안관은 남은 위스키를 훌쩍 들이켠다음 더글러스에게 말했다.
“외부인이 네 명이나 들어오니 자네도 적적하지 않겠군. 그들 에게 이곳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말해 주지 않겠나?” “그러죠. 다른 일도 없으니.”
더글러스가 쾌히 승낙하자 보안관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연구소 정문에 와서 나를 찾아. 내가 안에 있으니 들여보내 주진 않아도 인터컴 따위로 연결은 시켜 줄 거야.”
더글러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는 외부인일 뿐인걸요. 조수분을 시키시죠.”
“내 조수들이 몇 명 있지만 말만 보안관 조수지 그냥 인부야. 여기 사람들은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외부인은 같은 외부인 인 자네가 돌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자네는 탐정 아닌가. 위스키 값을 한다고 생각하고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더글러스가 승낙하자 보안관은 총을 집어 들고 모자를 눌러쓴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더글러스는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보안관이 나가고 삼십 분 정도 지난 후 퇴마사 일행은 호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희와 준후는 탈진 상태여서 방에 눕혔고, 박신부가 그들의 상태를 살피며 간호했다. 현암은 박 신부가 시 키는 대로 뜨거운 물과 담요 등을 날라 왔고, 더글러스도 현암을 도왔다. 그러느라 둘은 변변히 통성명도 하지 못했다. 둘의 상태 가 호전되어 방을 나서고 나서야 그들은 그제야 카운터 테이블 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는 더글러스위브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왔고 사설탐정이죠.”
“저는 이현암이라 합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저는 박윤규라고 합니다. 저도 한국에서 왔지요.”
박 신부가 마음이 놓인다는 듯 성호를 긋자 더글러스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가톨릭 신자신가요?”
“사제입니다.”
“아, 신부님이시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가족이십니까?”
더글러스가 묻자 박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혈연관계는 없지만, 가족과 같은 사이입니다.”
“한국은 멀죠?”
“예, 지구 반대편에 있죠.”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여기는 왜 오신거죠?”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목적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지라 현암은 대충 둘러댔다.
“여행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고생하셨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예. 정말 심하더군요.”
더글러스는 주정뱅이라도 된 것처럼 보안관이 남기고 간 위스키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저도 온 지 몇 시간 안 됩니다. 차가 고장 났지요.”
“저희도 그랬습니다.”
“좀 드시겠습니까? 몸을 녹이는 데는 이게 최곱니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더글러스는 대답하는 현암을 힐끗 보고 갑자기 말투를 바꿔나직하게 물었다.
“어디쯤에서 차가 고장났습니까?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글쎄요.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먼 곳에 세웠나 보죠?”
“걸어서 서너 시간 이상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자 더글러스는 위스키 잔을 잡은 채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더글러스를 바라 보았다. 더글러스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는 큰 소리로 껄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박 신부는 잠자코 있었지만 현암은 의아하기도 하고 조금 불쾌하기도 해서 나직하게 말했다.
“왜 웃죠?”
더글러스는 웃음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손사래까지 치며간신히 말했다.
“아하하……. 우습죠. 아니, 당신들은………… 하하… 우습지않습니까?”
“뭐가 우습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럼 그렇게 빤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우습지 않다구요?”
현암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찰칵 하는 소 리가 났다. 어느새 꺼냈는지 더글러스가 작은 권총을 꺼내어 이 쪽을 겨냥했다. 박 신부와 현암은 안색이 변했으나 더글러스는 계속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지금껏 만난 범죄자들 중에 가장 멍청하군. 이봐. 거짓 말을 해도 정도껏 하란 말이야. 살인자들아.”
현암은 더글러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화를 내며 외쳤다.
“뭐라고? 살인자?”
“오해요.”
박 신부도 점잖게 말했지만 더글러스는 총을 치우지 않았다.
“이봐, 우선 거기, 사제라는 작자. 당신 사제라고 하면 사람들이 속아 주던가? 저 위에 있는 여자와 아이를 간호하는 솜씨를 보니 대단하던데? 전문적인 의사의 솜씨더란 말이야.”
현암과 박 신부는 당황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박 신부는 확 실히 사제가 되기 전에는 의사였지만 그런 것에서 오해를 살 줄 은 몰랐다. 허나 그게 이상해 보였다손 치더라도 어째서 난데없 이 살인마라는 것일까? 더글러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속아 주더라도,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을 오겠어? 거짓말이잖아. 더구나 차를 타고 오다가 고장났 다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을 텐데,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 지? 헤매다 보니 우연히 여기가 나왔다고는 하지 마.”
“아니, 그게…….”
어이가 없어진 현암이 대답하려는데 더글러스가 말꼬리를 채갔다.
“뭐, 그것도 그럴 수 있다고 쳐. 허나 너는 완전히 엉터리 같은 말을 했어. 너는 걸어서 몇 시간 동안 눈보라를 뚫고 왔다고 했 는데, 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야.”
“사실이야!”
현암이 외치자 더글러스는 총으로 현암의 눈을 겨냥하며 맞받아 고함을 쳤다.
“지금 바깥 기온은 영하 50도에 가까워. 그런데 그런 눈보라 속을 방한복도 걸치지 않고, 몇 시간 동안을 걸어왔다고?”
그러고 보니 현암은 승희에게 방한복을 벗어 주었기에 아직까 지도 그냥 스웨터 차림이었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못해. 절대로! 너희는 그렇게 멀리서 온 것도 아니고, 여행하다가 길을 잃은 것도 아냐. 이 근처에 숨어 서 여기 사람들을 희롱하고 살해하다가, 마침내 본격적으로 일 을 벌이려고 온 거지?”
더글러스의 입장에서는 수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 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황당하여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박 신부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여기서 살인이 일어났소?”
“모르는 척하지 마.”
“우린 정말 모르는 일이오. 살인이 언제 일어났소?”
“시치미 떼지 말라고.”
현암이 한숨을 깊이 쉬며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살인하는 자들도 있습니까?”
“흥. 변명하려 들지 마. 왜 여기 온 것이며 무슨 목적이 있는 지. 합당한 이유를 대. 살인하러 왔다고 한다면 고맙게 받아들이 겠어. 그게 아니라면………….”
더글러스가 계속 외치자 현암은 슬픈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러지 맙시다. 총은 치우죠?”
“헛소리하지 마.”
현암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을 빠르게 움직여서 더글 러스의 손에 들린 권총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기공력을 집중하 여 움직인 터라 더글러스는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빨랐다. 다음 순간, 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이 총구를 아래로 기울인 채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총이 나무 테이 블에 박히자 더글러스는 깜짝 놀라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현 암이 재빨리 팔을 잡아 옆으로 슬쩍 던졌다. 더글러스의 몸이 뒤 로 날아갔다.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현암이 슬쩍 민 힘 이 너무 강해 저항도 할 수 없었고, 단단하게 틀어박힌 권총도 빠지지 않았다. 더글러스가 와당탕 뒤로 넘어지자 박 신부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현암군, 말로 하지 왜…………..”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터질 것 같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글러스는 넘어지자마자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미친 듯 주 먹을 휘두르며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현암은 귀찮다는 듯 자리 에 앉은 채 손을 휘저었고, 더글러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현암군, 말로 하라니까…………….”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저 사람이 덤빈 거죠.”
그런데 더글러스는 고함을 지르며 병까지 주워 덤벼들었다. 기세가 하도 흉흉해서 현암도 이번에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발’ 자결의 기공력으로 더글러스를 조금 세게 밀어냈다. 더글러스 의 몸이 허공을 공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다시 바닥에 부딪 혔다가 튀어 올라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박 신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 현암군, 이번에는 너무…………”
그러나 더글러스는 곧바로 다시 일어났다. 기절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제는 악까지 쓰며 덤벼드니 현암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글러스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겨우 이 정도냐? 응?”
“이봐요. 끈기는 대단하지만 나에게는 안 됩니다.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현암이 차갑게 말하자 박 신부가 현암을 제지하며 나섰다.
“더글러스 탐정, 당신이 의심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우린 정말 눈보라를 헤치고 몇 시간 동안 걸어서 왔습니다. 보통 사람 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여기 현암 군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 가능했던 거요. 우리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겠 소. 우리는 여행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요. 그 점 사과 하고 인정할 테니 제발 그만두시오.”
더글러스는 숨을 헐떡였지만 조금도 눌리지 않고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자 현암이 조금 차갑게 말했다.
“내가 살인자였다면 당신이 아직 살아 있을 것 같습니까?”
“그야 모르지. 정체를 숨기려………….”
현암은 말없이 기공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 테이블에 박힌 권 총을 꽉 쥐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권총이 부서졌다. 워낙 단 단하여 그리 찌그러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내부는 망가졌을 것 이다. 그것을 보고서도 더글러스는 물러서지 않았으나 눈빛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대단하군. 기계 인간 같은 건가?”
현암은 냉소했다.
“순수 자연산입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처리하려고 온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빠지십시오.”
현암은 차갑게 말했다. 다짜고짜 총을 들이대고 살인자 취급 한 것이 기분 나빠서였다. 그때 방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승희가 외쳤다.
“현암군! 저 사람 잡아! 수상해!”
현암이 승희 쪽을 힐끗 돌아보았고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더 글러스는 멍하니 승희를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승희가 앙칼지게 외쳤다.
“저 사람! 능력자야! 수상하다구!”
현암은 번개처럼 앞으로 날아가 더글러스를 오른손으로 잡아 올렸다. 헝겊 인형을 들듯 가볍게 멱살을 잡아들어 올리자 더글러스는 당황해서 헐떡였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현암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당신, 이제 보니 블랙서클 소속이었어? 네가 공포의 승정인가?”
더글러스는 말 대신 팔다리를 휘두르며 반항했다. 포기를 모 르는 성격은 대단했지만 현암에게 대드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현암이 두어 번 공처럼 집어 던지자 더글러스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짓이야. 블랙서클은 뭐고, 승정은 또 뭐야. 난 몰라. 그런 거 몰라.”
“승희 앞에서 거짓말을…………….”
현암이 한 번 더 던질 듯 다가서는데 승희가 말했다.
“어머? 정말이네?”
현암의 안색이 변했다.
“뭐… 뭐가 정말이란 거야?”
“어, 저 사람 블랙서클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현암은 삽시간에 난감해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봐 승희야, 네가 수상하다고 해서 막 다루었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면・・・・・….”
“난 막 다루라고 한 적 없거든? 잡으라고만 했어.”
박 신부가 일어나 현암을 뒤로 밀어내고 더글러스를 부축해 일으켰다.
“피차 오해가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라 성격이 급한 것 아 니겠습니까. 제가 사과드리죠.”
“아니….. 그건 그런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블랙서클 은 뭐고 승정은 뭡니까? 그리고 왜 날 그런 사람으로 본 거죠?”
승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탐정님이 능력자니까 그렇죠.”
“능력자라고요?”
“네. 아, 그렇구나. 신기한 능력이네요. 손을 대서 물건에 남았던 시간 기록이나 인물 기록을 읽는…………… 그런 것 같은데.”
박신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사이코메트리.”
거기까지 말하자 더글러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 그렇지 않아. 내가 뭘 했다고? 난 그런 능력 없어.”
승희가 빈정대듯 말했다.
“에이, 탐정님. 그것 때문에 고민도 많이 하셨던 것 같으니 이해는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숨기시려고요. 이미 제가 다 읽었거든요?”
“읽・・・・・・ 읽었다고? 뭘?”
“탐정님 마음이요.”
“뭐・・・・・・ 뭐라고?”
“그걸 투시라고 한다죠? 우린 같은 처지예요. 그러니 숨길 것 없다구요. 순간적으로 내 투시가 안 통해서, 탐정님을 능력자로 착각했지 뭐예요. 제 투시는 수준 높은 능력자들에게만 안 통하 거든요. 근데 됐다 안 됐다 하는 걸 보니 탐정님도 안됐네요. 이 젠 외로워 마세요. 세상엔 탐정님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우리를 비롯해서요. 호호호……..”
빠르게 떠들어 대는 승희의 말에 연속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더글러스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거의 기절할 것 같았다. 현암은 박 신부에게 슬쩍 말했다.
“저래도 되는 겁니까? 저렇게 막 털어놓으면…………….”
“승희에게 맡겨 보세.”
“아니, 그래도 일단은 숨기는 게………….”
“현암 군. 일은 자네가 저질렀어. 저 총하고 테이블 자국, 그리고 탐정의 증언은 어쩌려고……………. 쯔쯔.”
박신부가 나무라는 어조로 말하자 현암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비틀어진 총을 테이블에서 뽑아 멍하니 있는 더글러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미안합니다.”
현암은 테이블에 생긴 자국을 손으로 떼어 냈다. 단단한 원목 으로 만든 테이블인데도 진흙처럼 떼어 낸 현암은, 멍하니 바라 보는 더글러스를 향해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테이블, 불량품 같네요. 그렇죠?”
더글러스는 승희가 기관총처럼 쏘아 대는 말과 현암의 무지 막지한 힘에 눌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박 신부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윈디고의 전설 때문에 여기 왔습니다. 그걸 조종하는 게 블랙서클이라 믿고 있어요. 이야기가 깁니다만, 들어 주시겠 습니까? 아마 마을에 무슨 일이 많이 벌어진 듯한데, 저도 이곳 사정을 듣고 싶군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해는 완전히 떨어져 눈보라가 날리는 흰색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밤이 되자 길목을 경계하 는 보안관 조수들 외에는 아무도 밖으로 나다니지 않았다. 그전 까지는 몇몇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겠다고 수선을 피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길을 헤치고 길을 떠나려는 사람도 없 었다. 가는 도중에 윈디고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 을지도 몰랐다. 밤이 깊어 갔지만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연구소와 연결된 큰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집의 창문에는 대부분 불 빛이 꺼지지 않았다. 모두 공포와 두려움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마을의 곳곳을 지키던 보안관 조수들도 추위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안으로 들어갔고 교대해 나온 두어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듯한 바람 소 리만큼이나 불안과 공포감이 감도는 밤이었지만 얼어붙은 눈 더 미처럼 평온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루가 또 지나는가 싶었는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윈디고! 윈디고!”
마을 북쪽에 살던 잭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눈보라를 뚫고 미 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가 외치는 소리에 즉각적 으로 반응이라도 하듯, 꺼져 있는 창문들에 일제히 불빛이 들어 오더니, 이어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똑 똑히 볼 수 있었다. 두려움에 놀라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는 잭의 등 뒤로, 여전히 쏟아져 내리는 눈보라 속에 거대한 해골의 형체가 포효하는 광경을.
“괴물이다!”
“윈・・・・・・ 윈디고! 정말 있었어!”
집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반대편으로 도 망치거나 혹은 총을 집어 들어 해골의 형체를 향해 탄알을 난사했다. 눈보라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기는 했으나, 해골의 형체는 전설이 말하는 윈디고의 모습과 꼭 같았다. 거대한 키는 오 미터 를 넘었고, 온몸의 뼈에는 살 대신 얼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으며, 눈에서는 시뻘건 핏빛 광채를 뿜어 댔다. 윈디고는 뼈 다귀와 얼음이 붙은 양손을 휘저어 대며 크게 포효했다. 그 울음 소리는 너무나 커서, 거친 바람 소리도 단번에 뚫어 버리고 사람 들의 귀를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집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했는데, 믿지 못할 일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이 나와 아우성을 치자, 길목을 지키던 보안관 조수가 달려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는 더글러스와 보안관에게 말을 전해 주던 남자였다.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윈디 고가 나타났다고 떠들어 댔다. 조수가 외쳤다.
“윈디고라니 무슨 헛소리들이오! 뭐가 있다고!”
사람들은 윈디고를 보았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저쪽을 보라며 앞다투어 외쳐댔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윈디고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참을 보다가 멍하니 말했다.
“대체 뭐가 있다는 거요? 난 안 보이는데?”
“뭐, 뭐라고? 저게 안 보여?”
“당신들, 무슨 약이라도 했소?”
그때 윈디고가 다시 한번 귀가 얼얼할 정도로 길게 포효했다.
사람들은 이 소리가 안 들리냐고 외쳐댔으나 보안관 조수는 태연히 말했다.
“무슨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바람소리뿐인걸?”
사람들의 공포감은 절정에 달했다. 눈앞에 윈디고가 날뛰는 것이 보이고,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보안관 조수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미쳐서 환 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거란 말인가? 아니면 윈디고가 자신들에 게만 보인단 말인가? 순간적인 마음속의 혼란이 공포심과 광기를 부추겼다.
“이 악마! 괴물아! 죽어라!”
사냥총을 들고 나왔던 남자가 윈디고를 향해 마구 총을 쏘아 댔다. 보안관 조수는 제지하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말 을 듣지 않았다. 총을 가지고 나온 다른 사람들도 윈디고의 머리 를 향해 앞다투어 총알을 퍼부었다. 수십 발이 넘는 총탄을 퍼부 었는데도 윈디고는 움찔도 하지 않았다. 되레 윈디고는 눈빛을 더더욱 빛내며 크게 포효했다.
“이봐! 왜들 총질을 해대는 거야! 미쳤어? 다들 집으로 들어 가”
보안관 조수는 화를 내며 사람들을 말리려는 듯 소리를 질러 댔으나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흰 색의 돌풍이 덮쳐 왔다. 이 강추위 속에서도 대번에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냉기였다. 보안관 조수는 하던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얼어붙어 등 뒤에 있는 윈디고의 형상만큼이나 참혹한 얼음 기둥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가뜩이나 고조되었던 혼란과 공포가 극한으로 치달았다. 사냥총을 쏘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 면서 총을 던지고 뒤로 돌아 도망치자 다른 사람들도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보안관 조수의 얼어붙은 몸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피가 튄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얼음덩어리가 되어 사방 으로 쪼개졌다. 얼어붙은 그의 손이 발 앞에 떨어지자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견딜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음 순간, 그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뒤돌아 도망치던 사람 들이 속속 쓰러져 갔다. 이미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처참하 게 죽어 널브러졌다. 보안관 조수를 제외하면 얼어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시체는 무서운 한파로 인해 곧 얼어붙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에는 윈디고가 핏빛의 눈을 빛내며 계속해서 포효 했다.
그때 호텔에서 다섯 사람이 달려 나왔다. 사람들은 그들이 눈 길을 뚫고 마을에 도착한 다섯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들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더글러스가 도망치는 사람들 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밖에 있는 건 더 위험하오!”
그러나 사람들이 멈칫하는 사이에도 또 한 사람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자 더글러스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집 안에 들어가서 피하란 말이오! 무리하게 도망치려 하면 위험해!”
그래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려 하자, 갑자기 동 양인 청년-현암이 뛰쳐나왔다. 현암은 사람들을 호텔 쪽으 로 집어 던졌다. 사람을 검불처럼 쉽게 내던지는 힘도 놀라웠지 만 빠르기도 했다. 살아남아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열댓 명 정도 였는데,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현암에 의해 호텔 안으로 집어 던져졌다. 그사이에도 윈디고의 거대한 그림자는 사람들의 뒤를 쫓듯 성큼 다가와 있었는데, 호텔 쪽으로 던져진 사람들은 자그 마한 꼬마와 조금 덩치가 큰 동양 남자가 앞으로 나서서 윈디고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준후와 박 신부였다.
박신부가 힘을 발하자 연녹색의 오라가 퍼져 나가 주위를 감 쌌고, 준후의 양손에서는 불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충격과 공포 로 대부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들은 두 줄기의 긴 불줄기 가 윈디고 쪽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더글러스가 호 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문을 닫아걸었다. 한 사람이 외쳤다.
“이게 뭐요! 저 사람들은 누구요!”
그러자 더글러스는 자신도 놀랐으면서도 침착하려고 애쓰며 딱 잘라 대답했다.
“우릴 도와 윈디고와 맞서는데, 누구든 무슨 상관이오!”
“여기 몰려 있으면 갇혀서 죽어!”
누가 소리를 질렀지만 더글러스는 힘 있게 반박했다.
“이 혹한에 흩어져 도망치는 게 더 위험하오! 도망치려고 몸을 노출시키면 위험해!”
“여기 있다가는 윈디고에게 몰살당해!”
다시 누가 비명처럼 외쳤으나 더글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지켜 줄 거요.”
“저들이 어떻게? 총도 안 통하는데!”
누군가가 울부짖었지만 더글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은 할 수 있소. 윈디고는 전설에서 튀어나온 괴물이오! 그러니 전설에서 튀어나온 저들만이 막을 수 있을 거요!”
“신부님! 이상해요! 주술이 안 통해요!”
준후가 고함을 질렀다. 안 그래도 탈진한 준후가 힘을 짜내 쏘 아 낸 두 줄기의 멸겁화는 허망하게도 윈디고의 몸을 통과하여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박 신부도 외쳤다.
“뭔가 이상하다! 저놈에게는 아무 기운도 없어.”
그때 박 신부 옆에 있던 눈 더미가 퍽 하고 폭발하듯 튀어 올 랐다. 박 신부가 크게 오라 막을 펼치고 있는데도 뭔가가 날아와 박힌 것이다. 현암이 급히 몸을 날려 박 신부를 밀어냈다. 두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마자 박 신부가 있던 자리가 다시 한번 폭발하듯 터져 눈과 얼음 조각을 흩뿌렸다.
“이건 주술 같지 않은데요?”
현암이 놀란 얼굴로 말하자 박 신부도 멍하니 말했다.
“이건, 이건 탄흔 같아. 월남전에서 수없이 겪었어. 누가 저격을….”
뒤에서 승희가 외쳤다.
“이상해! 저 괴물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능력이 세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존재 같아.”
준후 뒤에 있던 나무의 큰 가지가 퍽 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갔다.
“준후야!”
현암이 외치면서 달려가는데, 아까 보안관 조수를 덮친 것 같 은 흰색 안개가 준후를 향해 확 뿜어져 나왔다. 준후는 놀라며 몸을 돌리며 소맷자락을 떨쳤다. 하도 놀란 터라 수십 장의 부적 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부적들은 저절로 불이 붙어 준후 의 앞을 겹겹이 차단했다. 바로 다음 순간, 현암이 몸을 날려 준 후를 안고 뒹굴었다. 짧은 순간이었고 부적이 막았는데도 준후 의 눈썹과 얼굴에 성에가 끼고 반쯤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다. 준 후는 뻣뻣해진 입술로 간신히 말했다.
“혀, 형…… 저건 주술이 아니・・・・・・ 절대 아니에요.”
현암이 외쳤다.
“승희야! 저 괴물 말고 다른 사람이 이 근처에 있는지 투시해봐!”
“어어, 왜 난데없이……………”
“어서!”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는 작게나마 호텔 안까지 들려왔다. 동 양인들이 외치는 소리를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소리가 들 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살아 있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한숨을 돌리자 한 사람이 울면서 외쳤다.
“난 미쳤어. 우리 모두 미쳤어. 저건 헛것이야. 세상에 저런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내 눈엔 보여! 보인다구!”
더글러스는 군중 속에 히스테리가 전파되면 얼마나 무서운 결 과를 낳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귀에 입을 바짝 대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미치지 않았어! 내 눈에도 윈디고가 보여! 우리 모두 가봤잖아! 저게 뭐건 간에 우린 그에 맞서야 해!”
다른 사람이 외쳤다.
“보안관 조수는 못 보았어! 왜 그는 못 본 거지?”
더글러스는 급히 대답했다.
“그가 거짓말을 한 거야. 그는 윈디고와 관련이 있고, 뭔가 흑막이 있어. 난 보안관을 의심하고 있어!”
그러자 나이가 들어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자못 침착하게 말했다.
“보안관이? 그가 왜 그런단 말이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소.”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난 당신이 의심스럽군. 당신, 여기 온지 하루도 안 되었잖소!”
“난 사람을 찾으러 온 탐정이오. 보안관이 제지해서 여러분을 만날수도 없었지만.”
“거짓말! 네가 이 일을 꾸민 것 아냐?”
다른사람들이 외치자 더글러스는 반박했다.
“내가? 내가 저런 괴물을 불러낼 능력이 있다면, 왜 굳이 모습을 보였겠소?”
그러나 침착한 노인이 다시 말했다.
“보안관이 일을 꾸몄고, 보안관 조수도 같은 편이라 저게 안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군.”
“맞소.”
“그러나 조수는 죽었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우릴 속이려고 죽음을 자초한단 말이오?”
더글러스는 협박하듯 노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빛냈다.
화가 치밀어 성깔이 나온 것이다.
“그놈도 속아서 이용당하고, 버려진 거야!”
“믿을 수 없어.”
노인이 반박하려 하자 더글러스는 악을 썼다.
“당신이 믿고 안믿고는 상관없어. 윈디고가 안 보인다던 그도 윈디고에게 죽었어. 그러니 윈디고는 있는 거잖아! 그놈이 틀렸 고 그놈이 미친 거지. 나나 당신들이 미친 게 아냐! 그러니 현실 을 인정하고 이겨 낼 방법을 생각하란 말야! 애들처럼 질질 짜거나 불평 따위 늘어놓지 말고!”
노인은 더글러스의 기세에 눌린 듯 간신히 말했다.
“우, 우리가 뭘 어쩐단 말이오. 총도 안 통하는데.”
더글러스는 노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라도 하든지. 아니, 어떻게든 살아남으시오.”
더글러스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버럭 외쳤다.
“할 게 없으면 문과 창문이라도 보강하고! 남은 무기와 총알 도 점검해! 정할 게 없으면 부엌에 가서 요리를 하든, 술이라도 마셔! 어쨌든 뭔가 해!”
더글러스는 한숨을 훅 내쉬며 옆의 의자를 부수고 판자를 챙겨 들며 말했다.
“포기란 건 없소! 뭘 하든 포기는 하지 마시오! 그게 당신들과나. 힘없는 자들의 임무요. 알겠소?”
윈디고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로 포효했지만, 이제 현암은 두렵지 않았다. 투시를 행한 승희에게 윈디고 뒤에 사람들이 여러 명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현암은 모든 것을 파악했다.
“저건 가짜입니다. 주술력으로 상대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라고? 하긴 저 정도의 영적 존재라면 우리가 아무것도 못 느낄 순 없지.”
준후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저게 가짜라고요? 아니, 어떻게 저렇게 했을까요?”
“나도 기술적인 건 잘 모르지만…………. 이크, 준후야, 고개 들지마!”
준후가 고개를 숙이자 총알 한 발이 현암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분명했다. 주술도 뭣도 아닌 총알이었다. 현암 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기술적인 건 모르지만 홀로그램 종류일 거야. 입체 영상 말이지.”
“와 신기하네요?”
놀라워하는 준후를 보며 현암은 ‘사람들은 저런 것보다 너나 나를 더 신기하게 생각할 텐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준후 는 다시 말했다.
“그럼 차가운 냉기는요?”
“나도 잘은 모른다니까. 아마도 액체 질소 같은 걸 뿌리는 게 아닐까 싶어. 소방차가 물 뿌리듯 말야.”
“와. 그게 그렇게 차가운가요?”
“영하 196도야. 엄청나지. 더구나 기화되면 공기 중 질소와 똑 같아지니 흔적도 안 남고 이 마을에서 얼어 죽었다는 두 사람도 저런 고압 호스로 액체 질소를 뿌려 댔다고 하면 설명이 가능해. 괴담을 퍼뜨리고, 저런 짓을 해서 주술로 위장한 것 같아.”
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뺨까지 발그레해져서 탄성을 질렀다.
“와, 그래서 멸겁화와 부적진으로 막았는데도 뚫고 들어온 거 군요. 현암 형, 신기해요.”
현암은 ‘아니, 겁화와 부적진 같은 걸 막 쓰는 네가 더 신기하다니까’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현암 형.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아, 대학 때 시험에 나왔었는데, 찍어서 맞혔거든. 그래서 안 까먹어.”
“와, 현암 형. 대학에서 그런 것도 학문으로 가르쳐요?”
“나 공대 출신이거든? 전에 말해 줬잖아!”
저편에서 박신부가 소리를 쳤다.
“지금 잡담할 때인가? 무슨 방법을 찾아보게나!”
현암은 볼멘소리로 답했다.
“신부님, 저도 총알은 못 막는다구요.”
승희도 현암을 거들듯 말했다.
“신부님, 저자들은 저격수예요. 그나마 눈보라가 심해 빗나갔 지. 안 그랬다면 우린 전부 죽었을 거라구요.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살아남은 건 그 덕분…….”
승희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더 듣지 않고 현암은 월향검을 꺼 내려 했다. 상대가 사람인 이상 월향검을 쓰기 싫었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준후가 말했다.
“어. 현암 형. 그거 쓰지 마요. 사람에게 쓰는 거 싫어하잖아요.”
“어쩔 수 없잖냐.”
“뭐・・・・・・ 사람이라면………… 제가 해 볼게요.”
그러더니 준후는 눈밭에 엎드린 자세에서 엉거주춤하게 수인 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눈보라 속에서 희미한 형체 두 개가 나 타나기 시작했다. 리매였다.
“그렇지! 그거 좋다! 리매는 총과 상관없지?”
“에고, 세 마리 부르려고 했는데………… 여긴 우리나라도 아닌데 다 좀 지쳐서..”
“저걸로 충분하다! 다 집어 던져 버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리매가 기세를 살리듯 포효하며 쿵쿵거 리며 다가가자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사람의 외침이었다. 그와 함께 총알이 집중되어 리매의 몸을 관통했지만 반투명한 리매에게는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와 함께 호텔 문이 열리면서 총을 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맨 앞에는 더글러스가 서 있었다.
“도망치지 않겠소! 당신들과 함께 싸울 거요!”
영어에 능통한 승희가 외쳤다.
“윈디고는 쏴 봐야 소용없으니, 위를 노리지 말고 조종하는 사람들을 쏘세요!”
“상대가 안 보이잖소!”
더글러스가 외치자 박 신부가 크게 소리쳤다.
“적이 안 보여도 탄막을 치면 됩니다. 적은 사람이니 그걸 고 려해 전방에 탄막을 치시오!”
박신부가 월남전에서 종군할 때 얻은 지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더글러스는 무엇인가 깨닫고 외쳤다.
“훌륭하군! 당신 용병이었소?”
“사제라고 했잖소?”
“무슨 사제가 의학에 전술까지 아는 거요?”
“지금 잡담할 때요?”
더글러스는 사람들을 지휘하여 일제 사격을 가하게 했다. 사냥에다 산탄총에 권총 등 잡다한 화기였지만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격을 가하자 저쪽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저쪽이라고 총알을 겁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누가 명중되었는 지는 알 길 없었지만 저편이 쏘는 총소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 다. 그 대신 비명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리매가 저격수들 을 찾아내어 때려눕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자신이 붙은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사격을 가했고 마침내 허공에 떠 있던 윈디고의 영상이 사라져 버렸다. 모두 놀라 잠잠히 있는 데 뒤에서 투시에 집중하던 승희가 외쳤다.
“저들이 도망쳐요! 전부 도망치고 있어요!”
더글러스는 하! 하고 고함치며 크게 팔을 휘둘렀고 생존자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준후도 좋아하며 현암에게 말했다.
“한두 명 잡아오게 할까요?”
현암이 말했다.
“아니, 그럴것 없어. 그런데 리매는 정말 총 맞아도 안 다치지?”
“네, 왜요?”
현암은 준후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준후는 알아들었다는 듯 수인을 맺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두 마리의 리매가 쿵쿵거 리며 이편으로 다가왔다. 기뻐하던 더글러스가 깜짝 놀라 부르 짖었다.
“저건 또 뭐야!”
박 신부와 승희는 그들이 준후가 부리는 리매인 것을 알아보 았지만 그들이 쏘지 말라고 하기도 전에 현암이 크게 외쳤다.
“진짜 괴물들입니다! 쏘세요!”
“어라? 현암 군.”
의아해진 승희가 현암에게 뭐라 말하려 했으나 저만치에서 준 후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더글러스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답게 용감하게 외쳤다.
“모두 장전하고….. 가만……… 아직 아니오. 조금만………… 조금만…………….”
사람들은 더글러스의 지휘에 따라 재빨리 총에 재장전을 하고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다가 리매가 가까이 다가와 완전히 모습 을 드러냈을 때, 더글러스는 크게 외쳤다.
“발사!”
십여 개의 총들이 리매를 향해 불을 뿜었다. 리매들은 그냥 멍 하니 있었지만, 현암의 눈짓에 준후가 의미를 알아듣고 수인을 맺자리매들은 크게 소리를 쳤다. 그냥 포효하는 것이지만 더글 러스 등의 눈에는 리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글러스는 신이 나서 외쳤다.
“재장전하고…… 서둘러! 일제 사격한다! 발사!”
총들이 정신없이 불을 뿜었다. 현암이 이쯤하면 되었다 싶어 눈짓을 하자 준후는 리매를 사라지게 했다. 리매의 모습이 서서히 허공으로 사라져 가자 더글러스는 도취되어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며 외쳤다.
“겨우 이 정도였나? 응? 이 망할 괴물들! 맛이 어때!”
사람들도 덩달아 환호했다. 준후만 시무룩하게 말했다.
“망할 괴물들 아닌데………….”
현암이 되물었다.
“준후야, 너 영어 못하잖아.”
“아………… 단어 몇 개는 알아들어요. 망할 괴물이라고 한건 분……”
“왜 그런 말만 알아듣니?”
승희가 눈을 털며 다가와 말했다.
“원래 외국어는 욕부터 배우는 거야. 그나저나 현암 군, 이게 무슨 쇼야?”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해야 뒤끝이 없지. 저들이 정말 악령과 싸운 걸로 믿 어야 될 것 같아서. 죽은 사람도 많은데 홀로그램 기술로 이렇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집요하게 뒤를 파헤칠 거 아냐. 위험해. 차라 리 귀신 짓이라 믿어야 그냥 조용히 넘어가지.”
어느새 다가온 박 신부가 말했다.
“잘했네, 현암 군.”
“아까 뒤처리 이야기로 핀잔을 들어서 이번엔 잘해 보려고 머리 좀 썼습니다.”
“원 저런 아직도 꽁해 있나?”
“꽁해 있는 거 아닌데요.”
사람들은 괴물을 물리쳤다고. 이제 살았다며 환호하고, 혹은 울 기도 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냉정을 잃지 않고 다가와 말했다.
“이제 정말 끝난 거요?”
현암이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이제 분명해지는군요. 저 연구소야말로 흑막이 있는 곳이에요. 보안관도 그렇고.”
그러자 더글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나도 보안관을 의심했소.”
“왜 그랬죠?”
현암이 묻자 더글러스는 빠르게 말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았지만, 사실은 보안 책임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방향으로 사태를 몰아가고 있었소. 사람들 사이에 살인마가 있다면, 그들을 흩어지게 해서 는 안 되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행동을 통제하며 지켜야 하오. 그러면 추가 살인은 억제할 수 있지. 이건 아주 간단한 상 식이오. 한곳에 모여 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는데 보안관은 마을만 봉쇄하고 모두 흩어지게 했소. 계속 사람이 죽어. 공포가 확산되라고 부추기는 짓이지. 추리 소설 같은 데서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지만 말이오. 모두 모아 놓으면 불편한 점은 있어도 절대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없거든.”
“그렇군요. 그것만 가지고 보안관을 의심했나요?”
“그는 퍽 치밀했지만, 말실수로 거짓말의 꼬리를 잡혔소.”
“어떤 거짓말이었죠?”
“그는 분명 캐나다인이라고 했는데 ‘그런 살인마를 뉴욕이나 LA에 풀어 놓으면 피바다가 될 거요’라고 말했지. 캐나다인이라면 캘거리나 토론토를 예로 들어야 하는데, 너무 익숙하게 뉴욕 이라 하더군. 캐나다인은 자신들이 미국인으로 보이는 걸 아주 꺼려 정체성을 지키려는 거지. 그러니 골수 캐나다인이 그런 말 을 할 수는 없지. 그는 미국인이면서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 고 있는 거라 생각했소.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데 거짓말을 한다 는 건 목적이 있다는 거니까 다른 말도 거짓일 수 있다는 거지. 또 연구소를 자기만 드나들게 되어 있다고 했고, 그만한 연구 소라면 무선 장비가 없을 리도 없는데 내가 말하자 그제야 생각 난 듯 그리로 간다 했지. 연극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날 속이진
현암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럴듯하지만 더글러스 탐정님 추리는 넘겨짚기가 많고 허점 도 있는 걸 아세요?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확증을 가질 요소들은 못 되잖습니까.”
“그렇게 따질 거 없잖소. 아, 그래. 내가 성격이 급해서 간혹 잘못 짚기도 하지. 그래서 실수를 해서 경찰도 그만둔 거고. 인 정한다구. 그러나 보안관은 수상했소. 언뜻 보면 마을 사람을 위 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 또 추리로요?”
현암이 모나게 말하자 더글러스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자네. 아까 내가 잘못된 추리를 해서 총을 겨눈 걸 마음에 두고 있군.”
그러자 현암은 또박또박 말했다.
“절 겨눈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신부님을 겨누었어 요. 그건 그냥 넘어갈 수 없거든요. 당신의 추리는 그럴싸했지만, 총부터 겨눌게 아니라 우리 여권을 확인하든지 해서 증명해 보였어야 합니다. 전 그게 화나는 겁니다.”
“미안하네.”
“내가 아니라, 신부님께 사과하세요. 그리고 의심하지 마세요. 원래 의사셨고, 종군도 하셨어요. 또………… 교단에서는 파문당하셨지만 그래도 신부님 맞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신데…….”
현암이 말끝을 흐리자 더글러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안하네. 꼭 사과를 드리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제는 됐습니다. 저도 사과드리죠. 그런데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보안관이 수상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난……… 저 초능력자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조금 특별한 힘이 있네.”
“사이코메트리라고 불리는 능력이죠.”
“그래.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냐. 미친 것처럼 아무 때나 발동되다가 또 안 되다가 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어. 그런 데 아까 보안관이 술을 따라 줄 때 그걸 통해서 뭔가 느껴지더라 구. 그는 정말 일을 꾸미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내 의뢰인의 이름을 숨겼지.”
“그랬나요?”
“보안관에게는 내가 찾는 실종자를 프라일리라고 했지만, 실 제는 제닝스라는 이름이었네. 사진도 그냥 갖고 있던 다른 수배자 사진을 보여줬지.”
“왜 그렇게 하셨죠?”
“제닝스라는 이름을 그냥 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보안관의 이름과 비슷했거든. 이름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면 모를 리 없 는데, 보안관이 뭔가 꾸민다면 문제지. 섣불리 실종자 이야기를 꺼내면 나도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랬군요. 잘하셨습니다. 이름이 많이 비슷했나요?”
“젠킨스, 제닝스, 비슷한 이름이잖은가.”
현암의 안색이 변했다.
“보안관 이름이 뭐라고요?”
“젠킨스라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내가 그자의 이름을 말 안했었나? 왜 그렇게 놀라지? 그게 중요한가?”
현암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중요하죠. 아주 중요합니다.”
“바보들아! 왜 안와? 왜 안 오는 거야? 어서 와야 하잖아!”
젠킨스는 연구소 안에서 미친 듯 낄낄거리며 떠들어 댔다. 아까 엄숙하던 보안관의 모습은 복장과 함께 지워 버린 듯, 실험실 의 학자와 같은 흰 가운을 걸친 그는 미친 과학자라도 된 양 킬 킬거렸다. 급기야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서 큰 소리로 광기를 쏟아냈다.
“어서와라. 그 멍청이 탐정에게 그만큼 언질을 주었는데도 내 정체를 모를 만큼 너희, 바보였어? 일부러 이름까지 알려 주었는 데도? 젠킨스가 여기 있다! 블랙서클의 공포의 승정! 나 젠킨스 가 여기 있단 말이다! 어서 들어와서 나를 잡아 봐! 망할 놈의 주술사들!”
젠킨스는 초조한 듯 CCTV를 조종하여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고함을 질렀다.
“왜 안 오는 거야! 어서 오라구! 네놈들을 위해 일생일대의 연기를 했어! 어렸을 적 꿨던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서는 꿈을 네놈들 때문에 함정 파는 데 써 버렸다구! 더글러스 탐정! 내 연기가 어땠어? 정말 속은 거야? 내가 이 일을 저질렀다는 걸 모른거야? 그 정도로 바보였어?”
젠킨스는 고함을 지르며 탁자 위의 공구 하나를 집어 화풀이 라도 하듯 벽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 듯 말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덜덜 손을 떨며 다른 책상으로 갔다. 그 위 에는 이미 명을 달리한 블랙서클의 다른 구성원들의 사진이 놓 여 있었다. 호웅간이나 케인, 리, 카프너 등. 마지막으로 코제트 의 사진도 있었다. 젠킨스는 눈물을 흘리며 코제트의 사진을 들 어 소중한 듯 가슴에 껴안으며 울먹였다.
“개, 개자식들아 어서 와서……… 날………… 나도 잡아 봐! 나도 죽여 봐! 너희가 코제트에게 한 것처럼, 내 동료들에게 한 것처 럼 갈가리 찢어서 시체도 안 남게 이 개자식들아…………….”
젠킨스는 눈물을 흘리며 다른 자들의 사진도 끌어안았다. 리, 호웅간, 카프너 그러다가 케인의 사진에 이르자 낯빛을 확 바꾸 면서 사진을 쳐 땅에 떨어뜨리고 발로 짓밟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싫어, 케인. 넌 잘 뒈졌어.”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가 뛰어 들어왔다. 아직도 몸에 눈이 쌓 여 있고 저격총을 들고 있는 그는 보안관 조수 중의 한 명이었다.
“그들이 옵니다.”
“아! 그래! 와야지!”
그러자 조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가 쓰는 것 같은 허상이 아니라, 진짜 괴물을 불러냈습니다.”
젠킨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껄였다.
“아, 그럴 테지. 그들은 대단해. 정말 대단하거든! 나 같은 과 학자가 아니라 진짜 주술사란 말씀이지! 안 그러면 더 이상한 거 야! 그들을 봤어? 엄청나지? 인간도 아냐. 그들을 상대하려고 이 걸 지어야만 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들인지….” “우리 계약에 그런 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조수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으나 젠킨스는 킥킥거리며 외쳤다.
“그래서?”
“그리고………… 샘을 왜 죽였죠? 그는 충실한 동료고, 당신을 위해 하라는 건 다 했습니다.”
“아. 누구라고?”
“샘 말입니다! 당신이 액체 질소로 얼려 죽인! 왜 그런 명령을 내렸죠?”
“아, 그럴 만하니 그런 거지.”
조수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번쩍였다.
“그래? 그럼 나도 이럴 만하니 이러는 거라 생각해.”
그러면서 그는 젠킨스에게 총을 겨누었다. 젠킨스는 킬킬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쏘려구?”
“너는 미쳤어! 미친 짐승일 뿐이야! 애당초 너 따위의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다.
젠킨스는 악마같이 웃었다.
“돈은?””
그러자 조수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젠킨스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친 놈이면・・・・・・ 돈 때문에 미친 놈 말을 듣는 놈은 뭐지? 더 미친 놈 아닐까?”
조수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약속한 돈이나 내놔! 당장!”
“아아, 알았어. 너희는 고생했지. 내가 만든 이 걸작품, 함정을 만들고, 마을을 형성하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공포심을 유발시 키고.”
“네 미친 짓 따위 떠올리기도 싫어! 내 머리를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젠킨스는 킥킥거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아아, 숭고한 이상을 몰라 보시는군. 이봐. 그렇게 하지 않으 면 그들을 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초인들이 아무 능력도 없는 날 거들떠나 볼 것 같아?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날 만나 주지도 않을 텐데? 이러지 않고 는 어떻게 복수를………… 내 소중한 사람의 복수를………….
젠킨스는 코제트의 초상을 끌어안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조수 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총구가 저절로 약간 아래로 수그러졌다.
“당신 사정 따위는 몰라. 난 미친 짓에서 이만 빠지겠어. 내 부하들도 모두! 그러니 어서 돈을 내놔!”
“날 죽이고 돈을 모조리 뺏으려는 거야? 재계약은 안 될까?”
젠킨스가 뻔뻔스럽게 묻자 조수는 총을 들어 올리며 악을 썼다.
“난 강도가 아냐! 약속한 대가만을 원하고, 재계약은 없어!”
“아아. 흥분하지 마. 대가를 줄게, 대가를.”
젠킨스는 비척거리며 사진들을 안은 채 방구석의 금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수는 젠킨스에게 바짝 총을 겨눈 채 뒤를 따랐 다. 젠킨스가 금고 다이얼을 돌리자 조수는 그 와중에도 무의식 중에 탐욕스러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딸깍 하고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젠킨스는 킥 웃으며 말했다.
“여기 돈이 있어.”
조수는 긴장하며 총을 들이대고는 명령했다.
“네가 꺼내! 직접 꺼내 내게 넘………….”
다음 순간, 조수의 머리 위에서 탕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금고의 바로 뒤편 천장에는 신호를 보내면 수십 발의 총탄이 나가는 장치가 되어 있었고 그중 두어 발이 조수의 몸을 위에서부터 관통한 것이다. 생명을 잃은 몸이 풀썩 쓰러져 내리자 젠킨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아. 미안, 미안. 보안 장치가 있었는데 말해 주지 않았네? 용서해 주겠지?”
젠킨스는 권총을 뽑아 죽은 조수의 머리를 향해 거푸 몇 발이 나 총을 쏘아댔다. 그러면서 젠킨스는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누구에게 명령이야? 이 개자식아!”
젠킨스는 화난 표정이 되어 모니터들이 설치된 한쪽 벽면으로 달려가더니 만족한 듯한 함성을 질렀다. 그곳에는 연구소 문을 힘으로 때려 부수고 들어오는 현암과 퇴마사 일행의 모습이 떠 올라 있었다. 젠킨스는 주먹으로 스위치 하나를 쾅 쳤고, 그러자 연구소 실내 전체에 젠킨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 그래! 왔구나! 와주었어. 환영한다. 퇴마사들! 내 사랑 하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간 개자식들아!”
“젠킨스?”
현암이 제일 먼저 호통을 쳤다. 박 신부도 고함을 질렀다.
“젠킨스! 블랙서클의 공포의 승정이지? 맞지?”
젠킨스는 모니터 너머로 퇴마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맞받아 외쳤다.
“그래! 나다! 내가 바로 공포의 승정 젠킨스다! 뭐 하는 거야? 살인마들아! 어서 와서 나를 죽여 봐!”
“누가 살인자라는 거지? 너야말로 마을의 죄 없는 사람들을…..”
박신부가 외치자 젠킨스도 맞받아 악을 썼다.
“너희가 죽인 거야! 안 그러면 너희를 끌어들일 수 없었을 테 니까. 이런 괴담을 만들고, 일을 벌이지 않으면 너희가 여기까지 올 리 없잖아? 히히히. 우히히히.”
젠킨스의 소름 끼치는 웃음이 복도로 퍼져 나가자 현암이 표정을 굳혔다.
“이 악마. 미쳤군.”
눈을 감고 투시를 행하던 승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미친 것 같은데? 미친 척하는 것뿐.”
“뭐?”
현암이 눈을 부릅뜨는데 젠킨스가 외쳤다.
“악마? 악마라고? 시체조차 남지 않게 사람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너희는 그럼 뭐지? 응?”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 그건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 박 신부가 외쳤으나 젠킨스는 여전히 비웃었다.
“아아, 그래. 맞아. 위대하신 능력을 가진 초인들이신데. 그렇 게 말하시겠지. 다들 스스로 죽어서 시체도 스스로 없애 버렸겠군, 너희, 주술사들이란 원래부터 비논리적이지만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리를…………..”
박신부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들은 블랙서클에 말려들어 소멸된 거요. 젠킨스!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요. 블랙서클의 사람들은 모두 그 영향하에 있어. 영혼을 저당 잡힌 셈이지. 때문에 죽으면 몸도 혼백도 모조리 빨 려 들어간단 말이오. 우리가 시체를 훼손한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그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해!”
“이미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을 자주 보았을 텐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우리나 블랙서클의 다른 자들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소?”
“아, 아냐. 너희는 살인자야.”
젠킨스의 목소리가 떨리자 승희가 재빨리 말했다.
“저자는 광기를 가장해서 공포를 숨기고 있어. 세상에. 공포의 승정이라더니 왜 이리 겁이 많지?”
준후가 말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당하면 겁나지 않을까요?”
그사이 박 신부는 다시 외쳤다.
“당신들의 몸을 빨아들이는 블랙서클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오. 당신들 조직의 이름이 왜 블랙서클인지 아직도 모르겠소? 우린 그걸 막고 싶고, 당신도 구하고 싶을 뿐이오.”
젠킨스는 발악하듯 악을 썼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난 못 믿어. 믿을 수 없어! 내 동료들이, 동료들이 왜………..”
박신부가 대답했다.
“동료들을 사랑했소? 그런데 왜 세상을 사랑하지 않소? 당신 동료들도 세상의 일부였는데 왜 거부하려 드는 거요?” “우리는, 우리는 남들과 달랐어!”
“누구나 마찬가지요. 우리도 이상한 능력이 있지만 보통 사 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소. 당신들 스스로가 남과 다르 고, 별종이라 여겨 그렇게 몰고 간 거요. 이제라도 잘못을 되돌리시오.”
젠킨스는 덜덜 떨며 말했다.
“안 돼. 난 난 할 수 없어…………. 난 너희가 무서워. 그러니 죽 어 줘. 다들 죽어 줘………….”
젠킨스는 죽어 만신창이가 된 조수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고는 힘없이 웃었다.
“쓰레기들과 함께………… 나도 함께………… 난, 난 무서워 무서워 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모르는 힘이 나타나고………… 내가 모르는 존재들이 얼씬거리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내가 저지 른 짓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게 두려워 난 난 더 견딜 수 없어…….”
승희가 비명처럼 외쳤다.
“자폭하려고 해요!”
“젠킨스! 그만둬!”
현암이 급히 외쳤으나 박 신부는 침착하게 현암을 제지하며 말했다.
“젠킨스, 무엇이 두렵소? 그렇게 두려우면, 왜 그 두려움을 떨 치지 않는 거요? 단지 인정만 하면,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오. 그런데 왜 두려움에 떠는거요?”
“아아…………… 난…………… 난 무서워. 코제트・・・・・・ ・・・・・・ 그들은 믿 으려 했는데………… 숨어 살려 했는데………… 다 죽었어………. 나도 죽을 거야………….”
승희가 다시 외쳤다.
“정말 미쳐 가고 있어요!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요.”
박신부는 침착하게 외쳤다.
“젠킨스, 당신은 지옥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그리고 또 다른 승정, 히루바바는 대체 누구요? 당신들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소?”
“지옥………….. 문…… 그래. 그게 있었지…………. 하하… 어차 피 끝이야…………. 다 끝이야………….”
“그게 가능한 일이오? 아니, 그렇게 해서 대체 뭘 하려는 거요?”
박 신부의 확신에 찬 말에 정신을 잃어 가던 젠킨스가 희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새 세상…… 정화………… 마스터가 그렇게 말하셨어. 그는 성자야………….”
“마스터………….”
박신부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승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박 신부가 젠킨스를 설득하고는 있으나 자폭 장치를 누르면 끝장인 것이다. 그때 현암이 준후에게 작게 속삭였다.
“준후야. 여긴 연구소 전기로 작동된다. 그렇겠지?”
“그런데요?”
“네 뇌전은 전기에 가깝잖아. 그걸 최대로 써 볼 수 있겠니?”
“아・・・・・・ 근데 왜요? 어디에다가요?”
“아무 데나 괜찮아. 아주 세야 한다. 연구소 전체에 퍼질 정도 로 세야 해.”
“아이구, 잘될까………? 연구소가 아주 큰데…………. 근데 왜요? 못하면요?”
현암은 씩 웃었다.
“못해도 별건 아냐. 그냥 우리도 젠킨스와 함께 날아가 버리는거지. 쾅하고.”
준후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해야겠네요.”
“젠킨스 마스터는 누구지? 그리고 대체 지옥문을 여디에 연다는 거야? 어떻게 그걸 막지?”
“히히히, 내가 왜 말해 줘야하지? 응?”
“정말 세상을 멸망시키고싶은거냐?”
“어어… 난, 난 몰라. 난 다 싫어. 내가 죽으면 끝인데………… 왜 내가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하지? 응? 히히히. 그냥 다 같이 가 자. 나도 같이 가잖아…………. 억울할 것 없잖아…………. 그만 떠들 자. 응?”
“젠킨스! 정신 차려!”
박신부가 고함을 치자 승희도 울 듯이 외쳤다.
“자폭하려 해요!”
현암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준후야!”
준후의 양손에서 지지직 하며 뇌전의 빛이 어렸고 준후는 있 는 힘껏 양손으로 벽에 달린 인터컴을 짚었다. 푸른 불꽃이 튀기 며 순간적으로 연구소 복도의 사방에 스파크가 난무하더니 연구 소는 암흑천지가 되어 버렸다.
잠시 동안 완전히 캄캄해진 공간에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현암의 푸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야, 수고했다.”
준후는 너무 힘을 써서 의식을 잃은 다음이었다. 현암은 손으 로 더듬어 준후의 몸을 찾아냈고 박 신부는 비상용으로 지녔던 휴대용 랜턴에 불을 켰다. 현암이 준후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준후가 성공했어. 우리 모두를 구했어요.”
승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채 흐느꼈다.
“울지 마. 준후는 탈진한 것뿐이야.”
현암이 말하자 승희는 흑흑거리며 말했다.
“다 죽을 뻔했잖아. 나 무섭다구!”
“괜찮아. 연구소는 폭파되지 않을 거야. 이제 젠킨스를 찾아야해.”
그런데 갑자기 젠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가 아닌,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정말 그럴까?”
박신부가 놀라 랜턴을 비추자, 젠킨스의 광기 어린 얼굴이 드 러났다. 한 손에는 코제트의 영정 사진을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현암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젠킨스는 권 총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아니 아니 그럴 것 없어. 너희와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왜…………..
젠킨스는 침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몰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어서 빠져나가라.”
“무슨 수작이지?”
그러자 젠킨스는 처연하게 말했다.
“잘난 척하지 마. 물론 저 꼬마는 슈퍼맨 같았지. 연구소 전기 시설을 한순간에 태워 버렸어.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에너지 발생량이 계산이 안 돼. 그건 놀랍지만, 수동 점화 장치도 있어. 이 미작동시켰으니 한 삼사 분 남았을 거야. 어서 나가.”
젠킨스의 마지막 목소리는 너무도 쓸쓸해서,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같이 갑시다. 젠킨스.”
젠킨스는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난 지옥문에 대해서는 몰라. 가르쳐 주 고 싶었는데 모르는걸. 히루바바에 대해서는 좀 알아. 그는 아프 리카에 있어. 그는 말리 부근의 도곤족 출신이야. 그는 좀 더 알지도 모르지.”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같이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젠킨스.”
“아니 아니, 난 정말 무섭다니까. 그러니 날 이대로 놔둬. 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과 같이 있는데 지쳤어. 이제 쉬고 싶어.”
박신부는 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마음을 바꾸었소?”
“글쎄……… 코제트 생각이 나더라구…………. 이러면 안 된다고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데……………. 그녀는 블랙서클에 영혼까지 흡수되었다는데 어찌…….”
그러다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내 악행을 용서해 달라고는 않겠어. 다만 책임을 지고 싶고, 쉬고 싶을 뿐이야. 어서 나가. 시간 없으니까.”
젠킨스는 그러면서 손에 쥔 권총을 힘없이 흔들어 보였다. 퇴마사들이 밖으로 달려 나오고 일 분도 안 되어 연구소는 안 에서부터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려갔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그 안에 있던 젠킨스는 아마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권총으로 자 살했을 것이다. 젠킨스의 영혼과 몸도 블랙서클로 빨려들어 갔 을까? 그런 일은 네 명의 퇴마사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소가 파괴되고 다음 날이 되자, 그렇게 지독했던 눈보라 는 거짓말처럼 개었다. 어둠을 지배하던 얼음의 악령, 윈디고가 사라진 것처럼……………. 모든 일은 저절로 수습되었다. 캐나다 경찰 이 몰려왔다. 살인 사건들은 보안관이자 연구소장이었던 젠킨스 가 저지른 것이고, 나타났던 윈디고나 괴물들은 젠킨스가 쓴 트 릭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자는 리매는 정말이었다고 했으나 그런 이야기는 웃음거리로도 통하지 않았다.
퇴마사들은 조용히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더글러스는 끈 기 있게 그들을 놓치지 않고 달라붙어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 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블랙서클의 승정, 고통의 승정이라는 히루바바를 상대해서 그들이 열려 하는 지옥문에 대해 알아야만 했으니까. 그들의 마 음은 걱정으로 가득 차 벌써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었지만, 한편 으로는 마지막에 젠킨스가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무엇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또 제정신으로 되돌렸는지에 대해 저마다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