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21화 – 그들은 모두를 미워하라 했다 7 : 일대일의 결투
일대일의 결투
현암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가면을 쓰고 있는 도곤족을, 그리 고 그 중앙에 있는 히루바바를 향해 나아갔다. 박 신부나 준후 가 탈진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으나 조급한 행동을 취해 보 일 수는 없었다. 현암이 가까이 다가오자 도곤족은 서서히 현암의 주위를 둘러쌌고 그중 세 사람은 바주카포를 현암을 향해 들이댔다. 현암은 도곤족이 세 번이나 정부군을 전멸시켰다는 말 이 생각났다. 아마도 히루바바가 현암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탱크의 포들이 자신들을 공격할까 봐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바주카포는 정식 명칭이 로우(LOW)로 경화기에 속하는 것이 라 영화에서와는 달리 탱크를 부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포가 겨누어지고 있는데도, 만약 이들이 더 강한 화기를 지니고 있었 다면 탱크들까지 파괴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은 잠시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그들은 더 이상 포에는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주카포를 쏘면 근 방의 사람들이 모두 날아가버릴 것이다.
히루바바는 뭐라고 현암에게 말하더니 화려한 가면을 벗었다. 사오십 대 정도로 건장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였다. 가슴 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히루바바의 온몸에는 그 것 말고도 마치 조각가가 장식을 한 것처럼, 크고 작은 흉터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현암이 세크메트의 눈을 히루바바에게 건네주려 하자 현암을 둘러싸고 있는 도곤족이 현암에게 바주카포를 들이댔다.
‘이런 젠장! 어쩌라는 거야?’
히루바바가 현암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등 뒤에 메고 있는 세 자루의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뜻이지?’
현암은 히루바바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 다. 히루바바는 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이었다. 현암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세크메트의 눈을 내밀었으나 히루바바는 고개를 저었다. 히루바바는 왼손으로 현암을, 오른손으로 자신을 가리 켜 보이고 그다음에 창을 가리킨 다음, 이번에는 두 손으로 서 로 엉켜 싸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양손을 펴서 끝났다는 시 늉을 한 뒤 세크메트의 눈을 가리켰다. 현암은 속으로 아차 싶었 다. 지금 히루바바가 말하려는 것은 싸우자는 뜻임이 분명했다. 양쪽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치 상태에 있으니 둘이 승 부를 가리자는 것 같았다. 지금 하는 동작을 보아 히루바바도 세 크메트의 눈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세크메트의 눈을 히루바바가 받게 되면 히루바바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현암이 알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마찬가지로 현암이 아는 것 도 히루바바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위험할 수 있는 정보 의 교환은 싸움이 끝난 뒤, 승부가 정해진 다음에 하자는 뜻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암은 이런 판국에 일대일 결투로 승부를 내 자는 히루바바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어찌 생각하면 그것이 히루바바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승리한 다면 히루바바는 현암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킨 뒤 인질로 삼 아 위기를 수습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가 패한다면 도곤족도 사 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지언정 해치기는 어려워질 테니, 어쩌면 가장 빠르게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제안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히루바바가 현암을 인질로 잡을 생각을 했다면 왜 지금 그러지 않는 것일까? 무기를 든 부하들을 시켜서 현암을 인질로 잡으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현암은 그것 이 궁금했으나 좌우간 히루바바를 선뜻 믿을 수는 없었다. 히루 바바는 현암을 아무 표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주변의 도곤 족을 가리켜 보이고 양손을 가슴에 얹었다.
‘자신의 부족을 사랑한다는 표시인가?’
현암은 그 제스처가 일견 우습게 보였지만 생각을 고쳐먹었 다. 블랙서클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 해서 모두 사악하고 간 사한 술수만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른다. 현암은 과거, 자신과 일대일로 싸웠던 이름 모를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는 결코 사악하거나 비겁하지 않았다. 히루바바가 자신의 부하들을 진정으로 아낀다고 가정한다면 희생을 치르면서 현암 을 잡으려 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히루바바는 악인이 아 닐까? 현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혹한 방법으로 병사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똑바로 보지 않았던가?
현암은 조용히 히루바바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히루바바의 눈 은 오랜 수련을 거친 것처럼 무표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깊숙 한 곳에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현암은 더 이상 생각하 지 않기로 했다. 길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히루바바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하더니 정중 하게 절을 했다. 현암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마주 절을 했다. 아마도 관습이나 의례 같았는데 그런 현암의 생각이 옳았던 듯, 도곤족은 계속 우 하는 울림을 내면서 히루바바와 현암의 주변 으로 넓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울림을 멈추지 않았는데, 뒤쪽 의 장갑차들이 달아나 버리거나 무전 통신이 가능해질 테니 주 술을 풀 수는 없을 것이고, 또 그 소리로 인해 박 신부나 준후도 자신을 도울 수 없을 테니까. 현암은 히루바바와 히루바바의 등 에 있는 창을 가리켜 보인 후, 자신의 손목에 있는 월향검을 가 리켰다. 무기를 써서 싸우겠느냐는 표시였다. 그러자 히루바바 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등에 있던 세자루의 창 중 두 자루를 꺼 내 하나씩 손에 들었다. 현암도 긴장하면서 천천히 월향검을 빼 어 들어 월향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에 공력을 모았다.
히루바바는 어떤 술수를 쓸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히루바바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고 도전에 응했으 니 히루바바가 치졸한 수법을 쓸지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기 로 했다. 히루바바는 양손에 두 개의 창을 들고 조심스럽게 현암 과 간격을 유지하며 도곤족으로 둘러싸인 터 주변을 빙 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히루바바의 손에 들려 있는 창이 범상해 보이 지 않았다. 영기는 그다지 잘 느끼지 못하는 현암이었지만 창에서 매우 강한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보통 아프리카 토인들 의 창은 자루를 나무로 만드는데 저 창은 희한하게 자루부터 은 빛을 띠고 있었고 모양도 일반적인 창의 모양과는 조금 달랐다. 두 개의 창의 길이 또한 서로 달랐다.
‘방심하지 말자.’
승희가 탱크 속에서 힘을 폭포수처럼 보내 왔다. 현암은 암암 리에 지난번에 새로 익힌 ‘탄’자 결의 수법에 따라 공력을 모아 손끝에 기공탄을 맺었다. 현암이 들고 있던 월향검도 긴장한 듯, 저절로 두 자 가까이 검기를 뻗었다. 히루바바도 써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안색이 굳어졌다. 둘은 그런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 면서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다.
히루바바가 먼저 움직였다. 히루바바는 짧은 창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욱 그었다. 아까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내는 듯했다. ‘고통의 주술.’
히루바바는 고통을 느껴야만 힘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 고 현암은 잠시 생각했으나 히루바바는 손에 들고 있던 긴 창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과 함께 던졌다. 그러나 현암이 아니라 똑 바로 하늘을 향해 창을 던지는 것이었다. 현암은 영문을 몰라서 히루바바가 가장 긴 창을 꺼내 손에 드는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현암의 귓속으로 준후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현암 형 조심! 그건 절대 빗나가지 않는 주술의…. “
빗나가지 않는다고?’
준후의 갑작스런 외침에 현암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몇 걸 음 옮겼다. 곧이어 하늘로 던져진 창은 언제 궤도를 바꾸었는지 몸을 비키는 현암의 눈앞에 번쩍하면서 땅에 내려 꽂혔다. 현암 은 식겁해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창을 쳐다보았으나 어느새 땅속 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땅에 박혀 버린 것일까?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건………!’
현암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현암 이 땅에서 발을 떼자마자 발밑에서 팍 하는 소리를 내며 창이 똑 바로 위로 뚫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현암은 기계 체조 동작을 응용하여 뒤로 두어 번 재주를 넘으며 살아 있는 것처럼 덤벼 오 는 창끝을 피했다. 창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궤도를 바꾸어 서 현암을 향해 날아들었다. 현암은 뒤로 날렸던 몸의 중심을 바 로잡으며 왼손을 내밀었고 월향검이 째지는 듯한 귀곡성을 뿜으며 쏘아져 나갔다.
히루바바는 현암의 손목에서 검이 저절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쓰더니 등에서 기다란 창을 빼들고 주문을 외웠 다. 그사이 현암을 노리고 날아들던 창과, 월향검은 허공에서 정 면으로 부딪혔다.
꺄아아악!
보통 때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월향의 귀곡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고, 히루바바의 창은 세로로 꽉 쪼개지더니 허공에서 갑자 기 사라져 버렸다. 히루바바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 다. 현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도 잠깐, 월향검이 허공에서 비틀하다가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그만 땅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어엇! 월향!”
현암은 가슴이 철렁해 월향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히루바바 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문을 외우면서 긴 창을 현암에게 던졌 다. 현암은 월향검이 땅에 고통스러운 듯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 고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땅에 떨어져서 조금씩 꿈틀대는 월향 검을 집어 들려고 하는데 히루바바의 창이 날아들자 현암의 손 끝에 순간적으로 모든 공력이 모여들면서 둥그런 기공력 덩어리 가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 끝에 맺혀 빛을 발했다.
“탄!”
현암은 자신에게 덮쳐들려고 하는 히루바바의 두 번째 창을 향하여 아까부터 모아 두었던 ‘탄’ 자 결의 기공탄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면서 왼손을 재빨리 월향검 쪽으로 뻗었다.
콰쾅!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열기 없는 휘황한 빛이 작렬하면서 히루바바의 두 번째 창은 빛에 휩쓸려 흩어졌다. 히루바바가 뒤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빗나가지 않는 창을 운용하기 위해 서는 히루바바 자신도 그것과 영적인 관계로 맺어야 했고, 그런 창이 두 번씩이나 부러진 이상 히루바바 자신도 타격을 받지 않 을 수 없었다. 현암도 공력을 한꺼번에 몰아서 내쏘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월향검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해서 왼 손으로 재빨리 월향검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허억!”
월향검을 잡은 왼손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전달되었다.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현암은 신음 소리를 내면 서 월향검을 떨어뜨리지 않게 손목을 돌렸다.
“고통의 주술!”
뒤쪽에서 준후가 소리를 쳤다. 현암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히루바바가 쓰는 것은 고통의 주술. 히루바바의 창은 단순히 찌르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고통까지 전달하는구나!’
히루바바의 빗나가지 않는 창을 온몸으로 받아 쪼개어 버린 월향검은 격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하물며 현암이 손으로 잡은 것뿐인데 이 정도 의 고통이 전해져 온다면.
“아! 미안하다. 미안……………”
현암은 간신히 웅 하는 소리만 내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월향검을 더욱 꼭 쥐었다. 잠깐이라도 놀라서 월향검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어서 현암은 격렬한 고통이 전 해옴에도 불구하고 월향검을 더욱더 꼭 쥐었다.
‘차라리 내가……………. 내게 아픔을……………..’
현암이 이를 악물고 온몸에 퍼져 가는 고통을 참아 내는 사이 에 넘어졌던 히루바바가 몸을 일으켰다. 히루바바의 가슴의 상 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도 격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그러나 히루바바에게는 아직도 한 자루의 창이 더 남아 있었다.
“현암 형! 지지 말아요!”
“현암 씨! 힘내세요!”
저만치 뒤에서 준후와 연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암은 졸도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그것이 히루바 바를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히루바바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고통 의 기색이 짙게 배어 나왔다. 히루바바는 하늘을 향해 분노로 가 득 찬 고함을 터뜨리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가장 짧은 창으 로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가슴팍을 그었다. 현암도 이를 악물면 서 월향검을 왼손에 거꾸로 쥐고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현암 의 손이 월향검의 날에 베여서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제 현암에게는 히루바바의 마지막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 다. 승희가 공력을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다시 ‘탄’ 자결을 사용할 만큼 기공력이 모인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고통받고 있는 월향검을 다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암은 월향이 고 통받는 것에 마음이 아팠고 이 순간만은 히루바바도, 블랙서클 도,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양측의 향방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프지 마라. 아프면 나에게…………. 내가 다 감당할게………… 히루바바가 세 번째의 창을 던지는 모습이 현암의 눈에 느린 동작처럼 들어왔다. 현암은 온몸에 퍼지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현암은 가능한 한 최고의 기공 력을 끌어모아 오른손에 집중하고 눈앞에 날아오는 창의 날카롭 게 번쩍이는 끝을 향하여 천천히 원을 그리듯 뻗어 냈다.
‘빗나가지 않는 창이라면 그대로 맞받아 주겠다.’
창의 끝이 날카롭게 번득이면서 현암의 손바닥을 꿰뚫으려는 순간, 현암은 고함을 치면서 오른 손바닥에 끌어모을 수 있는 모 든 힘을 모아서 ‘발’ 자결로 창을 내밀었다. 미친 듯이 솟구쳐서 현암에게로 날아들던 창은 현암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에 주춤했지만, 그래도 뒤로 밀려나지는 않고 화난 독사처럼 안 간힘을 쓰고 있었다. 창이 허공에 정지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자, 히루바바는 손가락을 벌려서 자신의 가슴에 깊게 난 상처 를 쥐어뜯었다.
“크아아악!”
히루바바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창은 조금씩 힘을 더해 기세를 올리며 현암의 손바닥으로 파고 들어왔다. 승 희가 전력을 다해 힘을 보내 주었으나, 온몸에 극심한 고통을 느 끼고 있는 현암으로서는 그 힘을 제대로 운용하여 창을 밀어낼 수 없었다. 창은 서서히 현암의 손바닥 앞까지 접근했고 창이 가 까이 다가오자 현암의 오른손에서도 고통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현암은 이대로는 더 버티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루 바바는 현암이 계속 버티자 짐승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를 잡더 니 그렇지 않아도 심한 자신의 상처를 다시 한번 헤집었다. 히루 바바의 고통의 주술이란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한 후 그것을 몇 배로 불려서 상대에게 돌려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술수는…………….
‘둘 다 죽자는 말인가?’
현암의 오른팔이 뻐근해지기 시작했고 히루바바의 창은 손바 닥으로 파고들듯 힘을 더하고 있었다. 현암이 기합성을 외치면 서 손을 꺾어 힘을 거두자 창이 무서운 힘으로 현암에게 닥쳐들 었다. 현암은 재빨리 기공력의 운용을 바꾸면서 창이 가슴을 꿰 뚫으려는 순간, 자루를 잡았다.
“허억!”
창의 자루를 잡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오른팔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몸에서 식 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전신의 감각이 사라지고 하늘은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나 현암은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왼손 에서 떨고 있는 월향검만은 놓쳐 버릴 수 없었다. 왼손의 베인 상처에서 샘물처럼 피가 흘렀다. 그리고 월향검이 같이 고통을 느끼고 신음하는 듯 검신(劍)을 떠는 느낌도 그대로………………
‘져서는 안 돼!’
현암은 자꾸만 힘이 풀리는 오른팔을 부옇게 흐려진 시야 한 구석으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고 숨조 차 쉴 수 없었다. 현암은 왼손으로 잡고 있는 월향검에게 중얼거 렸다. 아니 중얼거린다고 생각했다.
‘참을 수 있어, 그렇지? 난 참을 수…’
현암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심장으로 파고들던 히루 바바의 창을 움켜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히루바바의 고 통…………. 그러나 자신은 어떤 일들을 겪어 왔던가. 히루바바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육신의 고통일 뿐이다. 현암은 지 금껏 최선을 다해 왔다. 최소한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건 물리적인 힘이나 자신의 내력으로서만 이기고 거쳐 온 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기억들, 그리고 추억들, 같이 고통을 받 았던 사람들과 동료들.
무리하게 운용되던 기공력이 제 길을 잃고 몸의 반대쪽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현암의 입에서 큭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죽을 수 있다 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난 난 불가능한 순간에도 항상 이겨 왔고 또 이겨 낼 수 있 어. 이길 수 있어. 이겨야만 하니까……’
히루바바도 전력으로 창을 몰아붙였다. 힘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 그랬는지 어느새 히루바바도 자신이 낸 상처들로 피투성 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보였다. 이기기 위해서는 계속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고 힘을 쓸 수밖에 없 을 것이다.
‘가엾은 자. 서로 고통받고, 그래서 이기면. 그러면 뭘 하지?’
영문도 모르고 승희가 계속 불어 넣어 주는 힘들이 현암의 몸 안에 소용돌이치면서 떠돌았고, 현암의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 구 석구석은 불룩불룩 튀어나오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히루바 바는 급기야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쥐어뜯었다. 그 모습을 본 현암은 히루바바와 블랙서클의 모든 사람들이 가여워졌다.
‘아, 이런 것이야. 그래, 맹목적인 미움이 미움을 낳고, 증오가 증오를 고통이 고통을…………’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희뿌연 베일 들이 한 꺼풀씩 내려와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온몸에 피를 흘려 가며 최후의 수단을 쓰고 있는 히루바바의 모습은 현암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현암은 불현듯 모든 것을 정 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더 버틸 수도 있었지만 히 루바바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계속해서 맞서는 고 통, 그리고 증오, 미움……………. 현암의 몸 안에서 미친 듯 소용돌이 치는 기공력들. 극심한 고통을 잊으려는 듯 현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외울 구결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현암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창의 존재도 잊었다. 피를 흘리는 히루바 바도, 왼손에 잡혀 있던 월향검마저 잊었다. 모두 다 잊었다.
‘부동심결.’
현암의 몸에서 밝은 광채가 뻗어 나왔다. 너무 밝은 나머지 오 히려 캄캄한 그런 빛이 사방을 가두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