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31화 – 아스타로트의 약속 9 – 영원한 약속
영원한 약속
연희는 망연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벽에서 어린아이의 팔 이 툭 튀어나오자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앗! 이건!”
연희는 놀라서 엉겁결에 손을 잡았다. 준후의 손・・・・・・ 그렇다……
“아악! 안 돼!”
연희는 소리를 치면서 벽 쪽으로 달려갔다. 준후가 무사한가 보기 위해서였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자 벽은 아까와는 달리 아무 저항을 하지 않고 연희의 몸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방 안은 처참한 싸움이 벌어 졌던 것 같았다. 벽에 금이 가고 천장까지도 구멍이 뚫린, 전쟁 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연희의 발 앞에는 불에 온통 그은 준후가 쓰러져 있었고 이반 교수는 엉망이 되어서 구석에 처 박혀 있었다. 승희는 석상이 되어 버린 듯 방의 중앙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고 한편의 벽에서는 입에서 하염없이 피를 쏟고 있는 현암과 벽에 반쯤 파묻혀 버린 박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이럴수가!”
연희의 귀에 낯익은 귀곡성이 들려왔다. 월향검이 우는 소리. 월향검마저도 마스터의 손에 잡혀 발버둥치고 있었다. 마스터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도 보실 텐가? 어둠의 제왕, 당신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좌절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마스터를 당해 낼 수 없 었다. 아니,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연희 는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모두가 그냥 꿈 이었다면……. 그러나 마스터의 목소리는 계속 연희의 귓전을 울렸다.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연희의 귀에는 어떤 악마의 소리 보다도 징그럽게 들렸다.
“조용히 앉아 구경하시게. 세계를 악마에게 통째로 바치면 무 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여는 지옥문은 삼백 군데가 넘지만, 불행히도 너희는 여기 한 곳만 볼 수 있겠지. 저기 블랙서클이 바로 지옥문일세. 여태껏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보내기만 했지 만, 이제는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올 수 있게 된다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마스터는 말을 잇다가 연희가 매서운 눈을 하고 뚜벅뚜벅 걸 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연희는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서슴없이 마스터를 향하여 느리지 만 단호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 리를………… 기억하지?”
마스터의 눈빛이 연희가 쥐고 있는 구리 십자가를 향했다. 그 러더니 살짝 비웃음을 지었다.
“잊었다네.”
“네가 그분을…”
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 남자………… 그 남자의 영혼은 이자의 술책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 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려워 않던 마스터가 연희의 눈을 보더니 놀랍게도 찔끔하듯, 눈을 돌렸다.
“저리 가시게.”
마스터가 위협하듯 말했으나 연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 지 않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극한 슬픔, 그리고 가슴 속을 메우고 있는 비통함. 마스터가 다시 한번 완연한 협박조로 말했다.
“가라고 했네.”
“너…너는…”
“오지 말라고 했다!”
마스터는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왼손으로 준후가 쏜 것 같은 가느다란 뇌전의 줄기를 내쏘았지만 연희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뇌전의 줄기가 연희의 미간으로 날아드는 순간, 눈앞에 푸른 것이 뛰어들었다. 바로 연희가 가지고 다니던 구리 십자가 에 깃들어 있던 남자의 염체였다.
“아…………… 안……………”
연희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지를 않았다. 그사이 염체가 뇌전 에 적중되어서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허공에 흩어지는 모습이 느린 동작처럼 들어왔다. 그 남자, 리가 지켜 준 마지막 기억, 항 상 연희를 지켜 주겠다던 약속…………. 그는 약속을 지켰고 이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연희의 입에서는 이제 말도 아닌, 공허한 울부짖음만 나왔다. 마스터는 안색을 구기더니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다음 순간, 키 는 크지만 가녀린 연희의 몸은 반대편 구석으로 날아갔다. 그 와 중에도 연희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 염체가 사라진 허공 으로 손을 뻗으려 애썼다.
“아아………… 아아안………… 안………… 안 돼! 안돼!”
연희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지하에 메아리쳤고 그 울림은 사 방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그건 귀로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오로지 사랑의…………. 연희는 모든 것을 쏟아붓듯 외마디 소리만 지르고는 땅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스 터가 월향검을 처리하려고 하자 눈앞에서 뭔가가 꾸물거리면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으음? 저건…….”
염체는 가지가지였다. 장난스럽게 뛰어다니는 듯한 염체, 붉 은 장미꽃 모양의 염체, 너울거리는 저녁노을의 모습, 그것들은 분명 연희가 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건 바로.
“아! 와주었군요.”
틀림없었다. 그건 분명 그 남자, 리라고 불린 남자가 평소에 만들어 냈던 염체들이었다. 염체들은 연희를 잊지 못하는 남자 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가 연희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 곳곳에 서 몰려든 것이 분명했다. 그 남자는 영원히 연희를 지켜 주겠다 고 했다. 영혼은 지옥으로 빠져 버렸는지 모르지만, 영원한 약속 을 지키러 온 것이다.
“고마워요. 고마………… 고마워………….”
연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북받치는 눈물을 터뜨렸다. 허공 을 일렁거리던 염체들이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했다.
“꺼져 버려.”
염체들이 하나씩 하나씩 허공에서 무섭게 터지면서 바스러져 갔다. 연희가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
“안돼! 제발! 그것만은! 그것만은 안돼!”
마스터가 말했다.
“널 두려워하는 게 아냐 난 여자가 우는 걸 싫어해. 그러니 입을 다물어.”
리가 남긴 염체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을 본 연희는 흑흑거리면서 손으로 입을 감싸다가 기절해 버렸다. 그러자 마 스터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에 쥐었던 월향검을 손가락으로 한 번 튕겼다. 월향검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현암의 옆으로 굴러 갔다.
현암이 기를 쓰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마스터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보이지 않는 힘이 천근 같은 무게로 현암과 사람들을 내리 눌렀다. 박 신부조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 스터가 말했다.
“쉿. 난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너희는 그럴 가치도 없고, 너무 도 약해. 이제 지옥의 대악마, 아스타로트께서 오신다. 눈 크게 뜨고 잘 봐둬라.”
아까 형성되었던 블랙서클은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마스터의 말대로 그 너머에서 불완전하고 안개 같은 형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투명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검은 안 개뭉치 같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보 통 인간의 두 배 정도 크기인 그것은 급기야 완전히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어 소용돌이치고 있는 블랙서클의 앞에 버티고 섰다. 얼굴은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검은 구멍과 같았지만 팔다리와 몸 은 사람과 같았다. 굽히지 않던 현암의 마음속에도, 굴할 줄 모 르던 박 신부의 마음속에도 ‘끝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솟아올 랐다. 오로지 마스터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