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화 – 연희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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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1권 1화 – 연희의 크리스마스


1994년 12월 24일 조금 흐림

서울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 이상 지났다. 박 신부님, 현암 씨, 준후는 아직 미국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 백호 씨와 나만 먼저 귀 국하게 돼서 미안하기 그지없다. 승희처럼 그냥 그곳에 남아서 시중이라도 들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서울로 먼저 와야 할 이유는 있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닌, 내 도움을 꼭 필요로 하는 일이 생겼단다. 하지만 상상외로 별일 도 아니었다. 나도 큰일 날 사람인가보다. 하도 이상한 경험을 많 이 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일 가지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 심장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연호 오빠를 만나고 크리스마스라고 놀러 온 수정이도 만나고 해서 즐겁기는 하지만 왠지 허전한 느낌이다. 글쎄,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 보니 그들과 여러 곳을 오랫동안 돌아다녔고 무서운 일과 힘든 난관들을 같이 헤쳐 나가면서 퍽 정이 든 것 같다. 준후 의 귀여운 얼굴, 신부님의 자상한 미소, 승희의 화난 듯한 얼굴, 그리고 현암 씨의 믿음직한 모습.

하지만 비단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비록 다치기는 했지만 조 금 있으면 나을 것이고, 또 이젠 블랙서클 같은 위험한 세력은 사 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그냥 같이 있지 않아서일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래,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일기장에 쓴다 는 게 꺼림칙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 일기장을 볼 리는 없지 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일을 글자로 남기고 싶진 않다. 그건…….


연희는 들고 있던 연필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연희는 다른 필 기구보다도 연필을 애용했는데 그건 연필심이 종이에 긁히는 감 촉이 좋아서였다. 연필로 쓴 글씨는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릿해 지는 것이 좋았고, 연필심이 무뎌져 쓰는 감촉이 싫증나면 다시 칼을 꺼내어 심을 깎아 내는 기분 또한 좋아했다.

지금 연필을 내려놓은 것은 연필심이 무뎌져서가 아니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연희는 목에 걸고 있는 구리 십자가를 쥐고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몇백, 몇천 번을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는 연희가 손으로 쓰다듬어 도, 뺨에 대고 비벼도 구릿빛 십자가 그대로였다. 십자가 안에서 파랗게 빛나던 낯익고 친근한 그 사람의 목소리…………. 항상 연희 의 귓전에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던 그 염체는 사라지고 없었 다. 마스터와의 최후의 싸움 때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뇌전의 주술을 대신 맞고 사라져 버린 염체, 그리고 약속.

“o…….”

모든 것이 잘되었다. 블랙서클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퇴마사들도 모두 무사했다. 그리고 ‘리’라는 그 남자는 스 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렇지만 연희 자신은………….

연희는 일기장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크리 스마스이브인 터라 연호 오빠와 수정이 밖에서 즐겁게 장난치 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연희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어깨 를 들썩였다. 그냥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참을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


어두웠다. 연희는 주춤거리며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곳 을 걷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 있 는 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누구도 나 타나서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았다. 혼자였다. 저만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렁거리면서 지나갔다. 무엇이었을까? 등 뒤에서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뚜벅뚜벅.

“누구야!”

연희는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누가 뒤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는 데……………. 다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또다시 뒤에 서 들려왔다. 자신의 발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발소리는 자신의 발소리보다는 조금 늦게 같은 템포로 들려왔다. 누가 따라오는 걸까?

연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가느다란 더운 바람 한 줄기가 연희의 얼굴에 훅 하고 불어왔다. 연희는 흠칫하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던 듯한 정적 과 어두움만이 있었다. 무엇인지 형체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 는 혼돈과 어지러움으로 만들어진 물체들, 검은 기둥과 성곽이 나 나무처럼 보이는 형체들, 연희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휙 뒤를 돌아보았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연희는 앞을 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자신의 발소리……………. 분명 자신이 지금 걷는 이 길, 아니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희는 스스로를 타이르려고 애썼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없잖아? 텅 빈 길인걸’

연희는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씩 걸음을 옮기다 보니 용기가 솟았다. 뒤에서 발소리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들려왔다. ‘마음대로 하라지. 난 안 무서워 무섭지 않아!’

연희는 마음을 다잡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는 더 이 상신경 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쾌하게 깡충깡충 앞으 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난 기분 좋아. 뭐가 무섭겠어? 무서워할 것 없어.’

이번에는 뒤에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그 소리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희는 여전히 유쾌한 척 흥얼거 리면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발소리와 함께 그 씩씩거리 는 숨소리가 달려들듯이 가까워졌다.

연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 빨리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 자기 눈앞이 시뻘겋게 변해 가더니 벽이며 천장이며 기둥들까지 꿈틀거렸다. 물이 출렁거리듯, 아니 물보다는 더 찐득거리는 느낌의………….

‘피!’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등 뒤에서 씩씩거리던 소리는 이제 연희의 목덜미에 닿을 듯 한 거리에서 무슨 소린가 속삭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까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돌아본다면………………

연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달아나려고 막 한 걸음을 내딛는 찰나 발 앞의 땅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발밑의 땅과 주 변의 모든 것이 출렁거리면서 회오리치듯이 빙빙 돌아가기 시작 했다.

넌 누구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연희는 더 이상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연희의 몸이 공중에 붕붕 뜬 채로 이 리저리 바람에 휘몰리듯 붉은 액체 속으로 밀려다니기 시작했 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붉었고 또 기분 나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계속 등 뒤에서는 씩씩거 리는 숨소리가 기분 나쁘게 속삭이는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넌 이제 마지막이야. 아무도 너를 생각해 주지 않아.

“아냐, 그렇지 않아.”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아. 

“아냐!”

귓전에서 앵앵거리며 외쳐 대던 목소리와 섞여 미친 듯이 빙 글빙글 돌아가는 핏빛 너울거림을 피해,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연희는 간신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든 것도, 그렇다고 몸을 일 으킨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는 벌판처럼 펼쳐진 일기장의 페이 지가 희미하게 보였고, 그 위에 거뭇거뭇한 자국이 부연 발자국 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연희가 잠들기 전까지 끄적거린 글씨였 다. 연희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아까까지의 악몽 같은 정경들이 꿈속의 일이었다는 그것만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정말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일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도…………..’

무서운 꿈에서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은 이미 메울 수 없는 깊 은 외로움으로 변해 있었다. 연희는 여전히 일기장에 얼굴을 대고 엎드린 채 눈을 돌려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저 십자 가 덕분에 블랙서클과의 최후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 적어도 연희를 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는…………. 연희는 구리 십자가의 염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아 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모습이 물속을 통해 보는 것처 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리, 리라고 했죠? 난…….’

연호 오빠와 수정이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 다. 그러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그들의 것일 뿐 연희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불러 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행 때문에 피곤하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고 푹 쉬게 내버려 두 라고 말해 놓았으니까. 바로 방문 너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뜬 가족이 있음에도 연희는 완전히 혼자였다. 앞을 가로막은 얄팍한 방문과 벽을 넘어갈 수 없었다.

연희는 십자가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마루 밖의 이야기에 귀 를 기울였다. 수정이가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연희를 부르자고 했지만 연호 오빠는 피곤할 테니 그냥 쉬게 두자며 좋은 말로 타 일렀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을 테지만 그 말이 연희에게 는 섭섭하게 들렸다.

구리 십자가로 다시 눈을 돌렸지만 예전처럼 쓰다듬고 있어도 반짝거리던 푸른 빛깔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

연희는 고개를 휘휘젓고는 방의 불을 껐다. 기분 나쁜 꿈을 꾸긴 했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서글프 고 답답하고 외롭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냥 다 잊 고 자자 푹 쉬고 나면 괜찮겠지. 연희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서 편안한 기분을 가지려고 애썼다. 생각보다 피곤했는지 곧 눈앞이 흐릿해졌다.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두컴컴하면서도 혼란에 가득 찬 분위기, 아무것도 없으면서 기분 나쁜 것이 바글거리며 소용돌이치는 곳에 서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분명히 방에서 잠들었는데.’

연희는 사방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작은 구리 십자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십자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떠올랐다.

“어? 있었군요!”

십자가에 맺혀 있던 푸른 염체는 깔깔거리듯 흔들리다가 휙 하고 십자가에서 뛰쳐나왔다. 연희는 너무나 반가워서 날아가는 푸른 염체를 만지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가느다란 번개 한 줄기가 저만치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분명 전에 그 염체를 없애 버렸던 것과 똑같은 치명적인 뇌전의 빛줄기가…………….

“안돼!”

놀란 나머지 손을 내뻗으려는 찰나, 연희를 포함한 주변의 모 든 움직임이 멎어 버렸다. 아니, 완전히 멎은 것은 아니었다. 마 치 시간이 백 배 정도로 느려진 것 같았다. 연희는 염체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손은 천 근처럼 무거웠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는데도 달팽이 걸음만큼이나 느리게 움직 일 뿐이었다. 눈앞의 염체도 서둘러 피하려는 모습이었지만 느 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다 같이 느리게 움직이는 가운 데에도 저쪽에서 심술궂게 다가오고 있는 빛줄기의 속도만은 다 른 것들보다 훨씬 빨랐다.

‘안 돼! 또다시… 안돼!’

연희는 소리를 지르려고 발버둥 쳤지만 입술마저 무거워져 한 없이 천천히 열렸다. 마치 연희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시간이 몇 백 배로 빨라진 것 같았다. 연희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안간힘을 다하여 손을 뻗었지만 지금 손은 겨우 이삼 센티미터 정도 움직였을 뿐이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입술은 바작바작 타들어 갔다.

‘아! 저, 저건……..

애타하는 연희의 귓속으로 갑자기 벽력같은 소리가 들이닥쳤다. 

하하하. 막지 못할걸?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럴 거야.

신기하게도 아까 자신이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난 번에 꾸었던 꿈이 아니라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저 목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넌 누구야!’

연희는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했 다. 연희도 초자연적인 경험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 긴 몸이었다. 이 정도의 일로 기가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 천히 움직이는 몸에 속도를 붙일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 푸른 염체의 느리지만 애달픈 모습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제 가느다란 빛줄기는 어느새 반 이상 접근해 있었고, 그사 이 염체는 겨우 몇 센티미터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연희가 힘을 주면 줄수록 손은 더욱 무거워졌다. 연희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었다. 아까의 목소리가 빈정거리듯이 소리쳤다.

너는 못할 거야. 넌 할 수 없어.

“아니야, 해낼 수 있어. 내가 지켜 줄 거야. 내가……………..”

연희는 이를 악물면서 손을 추켜올리려고 애썼다. 뇌전에 맞 아 손이 날아간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저 푸른 염체는 자기의 목숨을 여러 차례 지켜 주었고, 무엇보다 연희가 잊지 못 하는 리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번 잃어버린 소 중한 존재를 지금 여기서 다시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용을 쓰기 시작하자 온몸이 축축이 젖어 갔 으나, 연희는 오른손을 아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올릴 수 있었 다. 연희는 진이 빠질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한없이 무겁기만 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마구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은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또다시 빈정거리는 소 리가 울려왔다.

정말 막아 낼 수 있어? 그걸 막으면 네 손은 없어져 버릴지도 몰라. 고운 손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도……..

‘상관없어!’

연희는 더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뇌전의 빛줄기는 염체에 닿을락 말락 했고, 연희의 손도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염체를 감쌀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그러나 너무도 힘이 들었다. 마치 온몸에 있는 기운을 모조리 뽑아내어 밑도 없는 독에 쏟아붓는 것 같았다. 다리에도 힘이 풀렸고 숨 쉴 기운마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목소리는 연희의 귓가에서 계속 조잘거리며 연희를 조롱했다.

손이 없어지면 기분 좋을 것 같아? 그래서야 되나.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것이 어때? 너는 그때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잖아.

‘아냐, 할 거야. 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

어쨌거나 마찬가지야. 저것도 너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하고 있지 않 을걸? 항상 너를 그렇게 지켜 주었지만 넌 뭘로 보답했지? 그냥 부서지고 산산이 흩어지게 놔둔 것 외에 뭐가 있어?

‘아냐, 아냐! 난……..’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하하하. 말로는 최선 을 다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저 빛줄기에 손을 날리지는 않을걸? 충분히 핑계를 생각할 시간도 있잖아? 넌 못해.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넌 못해……

‘아냐, 해! 난…… 난 할 수 있어!’

연희가 더욱더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주위로 강한 바람이 몰려들면서 사방이 소용돌이치며 흔들렸다. 갑자기 목소리가 당황한 듯 외쳤다.

제기랄! 방해자가 나타났군. 너, 나를 다시 불러. 그러면 저걸 구할수 있을지도 몰라. 날・・・・・・・

‘무슨 소리야. 앗!’

연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방이 흔들리더니 눈앞에서 빛줄 기와 푸른 염체가 모두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귓가에서는 목소 리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멀어지면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나를 다시…………… 다시 불러. 그럼, 하하하. 기다리겠어………….


“꺄!”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는 바람에 연희는 눈 을 번쩍 떴다. 눈앞엔 수정이 놀란 눈을 하고 서 있었고 자신은 오른손을 번쩍 든 채였다.

“언니, 왜 그래? 놀랐잖아.”

“아, 그래, 수정아, 꿈 때문에…………….”

연희는 눈을 뜨고 나서 몸을 일으키면서 치켜 들었던 팔을 내 렸다. 꿈이었나? 연희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온몸은 마치 도둑맞은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연희는 고개를 몇 번 휘휘젓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두 눈 을 깜박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수정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수정아, 왜 왔어?”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 헤헤헤. 그래서 정말 자나보려고 온거야.”

“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언니는 지금 좀 피곤하거든…..”

“할 수 없지 뭐. 근데………….”

수정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연희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살펴보았다.

“언니, 괜찮아?”

연희는 씩 웃어 보였다.

“그럼 괜찮고말고. 후훗..

“눈이 쑥 들어간거 같아.”

“어, 정말?”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맞은편에 있는 화장대의 거울을 쳐다 보았다. 정말 그 짧은 시간 동안 연희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린데 다 눈 밑도 거무죽죽한 것이 며칠 밤을 샌 듯한 모습이었다. 연 희는 속으로는 떨었지만 어린 수정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수정아. 난 괜찮아. 조금 자면 나아질 테니 나가서 놀고 있으 렴. 응? 나도 곧 갈게.”

“졸리면 그래야지 뭐. 그럼 나간다. 꼭 나와. 헤헤헤.”

수정은 크리스마스라는 게 마냥 즐거운지 방문을 닫고 쪼르르 나갔다.

연희는 품안의 구리 십자가를 꺼내 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빛도 없었다. 연희는 현기증이 일어 몸을 비틀거리다 입술을 깨 물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왜 이렇게 온몸에 힘이 없는 걸까?

연희는 숨을 몰아쉬며 굳은 머리를 돌리려 애썼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은 꿈이었음이 분명했다. 한번 부서진 염체가 다시 나 타날 수도 없고,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아니, 어쩌면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고 의 속도만은 평상시와 같았으니까. 혹시 무언가가 그렇게 보이 게,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도록 헛것을 보인 것이 아닐까? 몸이 썰렁했다. 그리 오래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입고 있던 옷 과 이불까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엇보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연희는 자리에 누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꿈속에 서 너무나 힘을 썼기 때문일까? 가위 눌림은 아니었을까? 한가 지 이상한 점이 연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자신이 겪 은 일이 가위 눌림이었다면, 어째서 수정 때문에 잠에서 깰 때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자신을 다시 부르라고 했을까? -너, 나를 다시 불러. 그러면 저걸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을 부르면 저걸, 그러니까 염체를 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서져서 없어져 버린 염체야. 꿈속에서 구해 준다고 해도 염체가 되살아날 수는 없는데……………..”

연희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꿈속에서 그 런 일이 생긴 것일까? 지난번 마스터와 싸울 때에 염체가 자기 대신 희생되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물론 자신 이 꿈에서 염체를 구하더라도 실제로 염체가 돌아오리라는 것 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연희 자신 이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있었겠지만─잘 알 고 있었다. 비록 아무리 꿈속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상상으로나 마 염체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바람마저도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꿈속의 일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 후후..’

연희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추스르면서 힘없이 웃었다. 그 런데 뭔가 머릿속을 퍼뜩 스쳤다. 아까 꿈속에서 손이 잘 올라가 지 않아 안간힘을 쓸 때에도 땀은 깨어 있을 때처럼 났던 것 같 았다. 만약 꿈속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다면 당연히 연 희의 몸에서 나는 땀도 천천히 솟아야 하는데……………. 분명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각뿐이었고 그 외 주변의 모든 것은 그 염체와 뇌전마저도 느리게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 “런데 땀이 정상적으로 솟았다면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평상시처럼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꿈속의 일인데 뭐. 꼭 이치에 맞으라는 법은 없지. 아, 피곤해.

연희는 애써서 생각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왜 이리 피곤하지? 혹시…….

만약 꿈속에서 어떤 사악한 존재가 자신을 오도 가도 못하게 몰아넣고 힘을 쓰게 함으로써 그 힘을 빨아들이고 있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연희는 여태까지 믿지 못할 것들을 수없이 보고 겪었다. 지난 번에 퇴마사 일행과 대적했던 블랙서클의 승정들은 사람의 증오 심이나 공포, 고통 같은 감정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지 않았 던가. 하물며 연희가 쓰는 힘도 무언가가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 로 만들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악몽을 만들 어 내고 힘을 쓰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몽마(夢魔)!’

그랬다. 몽마라고 하는, 영도 아니고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것 이 사람의 정기를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 다. 악몽을 꾸게 하고 그 악몽에서 사람의 힘을 빨아들여 그 힘 으로 살아가는 것…………. 박 신부님의 친구 한 분이 그것에게 걸 려서 혼이 났다고 준후가 농담처럼 이야기해 준 기억이 났다.

연희는 무서워졌다. 혹시 자신의 꿈속에 몽마가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 . 그런 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무서운 것들과 대적을 할 때에도 연희는 그다지 공포를 느끼 지 않았다. 왜냐하면 퇴마사라는 동료가 항상 연희의 곁에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희는 혼자였다. 가족이 있기는 했 지만 갑자기 더 아득하게 멀어진, 얄팍하지만 육중하고 굳게 닫 힌 문 너머에 있었다. 지금 눈앞을 막고 있는 방문이 문제가 아 니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들에게 말해 줄 수도 없었다. 이쪽의 세상은 자신의 가족 같은 일반인의 영역이 아니다. 끼어들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연 희와 가족 사이를 막고 있는 넘을 수 없는 벽이자, 굳게 닫힌 문 이다. 연희는 꿈속에서 들었던 말을 생각했다.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도 너를 도와 주지 않아.

무서워졌다. 자신에게 정말 몽마가 들러붙었다면 도대체 어떻 게 해야 할까? 잠을 자지 않으면 될까? 아니, 언제까지 그럴 수 는 없겠지. 그때 연희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몽마인지 뭔 지 하는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는 자신을 부르면 온다고 했다. 그러니 가까이 오지도 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잠들면 아무 일 없 을 것이다. 준후는 항상 또랑또랑하게 자신 있게 말했다. 신념을 가지라고. 그리고 스스로를 믿으라고. 그래, 그러면 된다. 자신 에게 특별한 힘은 없었다. 그랬어도 그따위 몽마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사악한 것과 여러 번 맞서지 않았던가. 그런 것쯤이야 한번 크게 웃으면서 털어 버리면 깔끔하게 없어질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리도 말했잖은가. 좋은 것만 생각하라고. 그 래, 그러면 된다.

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래, 리. 그 리고 염체리의 마지막 선물. 그것은 부서졌지. 나는 그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자신의 꿈은 단순한 악몽이나 가위 눌림이 아니다. 몸에서 이렇게까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도 이상했고, 무엇보다도 예감이 그러했다. 무슨 능력을 타고나 지는 않았지만 여태껏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사악한 존재에 대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한 막연한 예감은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었다. 뭔가 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틀림없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지금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 었다. 연희가 피하거나 달아나지 못할 선택. 그건 바로 항상 연희 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낫지 않는 상처로 자리 잡은 쓰라린 기억이 었다. 꿈속에서 연희가 헛되이 힘을 쓴다 하더라도 염체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누가 보는 앞에서 그것이 비록 몽마일지 라도─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연희는 이제 무섭다기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놈들은 치사 하게도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장난을 걸고 있었다. 그 장난에 응해 이겨 보았자 아무런 득도 없고 질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혀 수지가 맞지 않 는 도박이다.

‘그런 것에 응할 필요는 없어.’

아무런 힘이나 능력도 갖추지 못한 자신이 몽마를 불러들인 다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자신이 없었다. 화가 나는 동시에 몸이 떨렸다. 박 신부님이나 현암 씨, 준후가 옆에 있었다면 뭐라고 할 까. 금방이라도 리의 유체가 나타나서 그런 짓을 하면 절대 안 된 다고 말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은 분명 바보짓이지. 연희는 고요히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자 끝없 는 절벽 아래로 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몰려왔다. 연희 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타나 다시 기회를, 다시 한번 기회를 줘. 나와, 어서…………….’


마치 몸이 소용돌이치면서 아래로 빙글빙글 휘감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연희는 자신이 잠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평상시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자칫 잠에 빠져들어 서 자신이 평상시에 생각하던 것을 놓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잠이 든다고 해서 꼭 아까 꾸었던 그 꿈을 다시 꾼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꿈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 이 전개되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겪어 왔다. 그러니 꿈속에서 평상시의 사고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어찌 보면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번만은 반드시 해내야 했다. 지금 자신을 괴롭 히는 것이 몽마라면 의지를 굳게 다져야 대적이 가능할 것 같았 다. 꿈은 마음속에 있는 것. 마음만 굳게 먹으면 꿈에서나마 리 의 염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가만 보니 형체와 자취를 느낄 수 없을 뿐, 온갖 것들이 뒤섞여 들끓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 가는 긴 터널을 빠져나가면서 연희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잊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거렸다.

연희는 오른손을 굳게 쥐었다. 꿈속이었지만 몸이 가늘게 떨 렸다. 한참을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몇 번이고 마 음속으로 다짐을 했지만,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무 엇을 생각하는지 종잡기 힘들었다. 그사이에 사고의 줄기를 놓 치고 말았고, 그러다 보니 또다시 생각이 여러 줄기로 갈라져 더 욱 혼란스러웠다. 본래대로 바로잡으려고 할수록 생각은 더욱더 옆으로 비껴 나가 마침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갈라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머릿속이 미친 듯이 들끓으며 억제하고 있었던 온갖 잡념이 봇물처럼 흘러나왔다. 염체, 리의 얼굴, 십자가, 푸른빛, 준후의 얼굴, 죽어 가는 케인의 모습, 푸른 하늘빛, 블랙서클, 현암과 신 부님, 유체, 염체, 환영, 그리고 알 수 없는 혼돈………….

그때 뒤에서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려 보 니 퀭한 소용돌이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었지 만 여러 가지 색깔이 아우성을 치듯 뒤섞여 들어가는, 넓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텅 빈 공허. 그 안에 연희는 반쯤 떠 부유하고 있었 다.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의식할 틈도 없이 자신을 부른 목소 리는 공간을 가득 메우며 비웃는 듯 울려 왔다.

왔군.

잠으로 깊이 빠져드는 혼돈 속에서 무엇 때문에 자신이 꿈속 으로 들어왔는지 이유는 잊었지만, 막연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기억이 났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줘.”

목소리는 빈정거리듯 기분 나쁘게 말을 건넸다.

생각은 이미 많이 한 것 같은데……. 널 이리로 다시 데리고 오느라 몹시 힘들었다. 그런데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험받기를 원해? 

“잔소리 그만하고 다시 …………. 그분이 남긴 것을 되찾을 거야.” 눈앞에 낯익은 푸른빛이 서서히 떠올랐다. 연희는 자신의 왼 손을 쳐다보았다. 왼손에는 구리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고 푸른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 바로 이거야.”

연희가 염체를 잡으려고 오른손을 뻗자 염체는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만 연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저만치에서 뭔가가 번쩍하면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날아왔다.

아까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아까와 똑같은 광경. 그래, 기억난다. 구해 줘야…………….

연희는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떠오른 채 머뭇거리고 있는 염 체 앞을 막아서려고 했으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연희의 생각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돌아갔다. 저만치에 서 달려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도 연희의 속을 태울 정도로 천천 히 다가왔고, 허둥거리며 빛줄기를 피하려 하는 염체도 몹시 느 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연희의 오른 손이었다.

‘또, 또 그렇구나. 그러나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연희는 빛줄기를 막기 위해 이를 악물면서 있는 힘을 다해 오 른손을 뻗으려 했다.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실제와는 아무 상 관도 없고, 자신의 노력도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 가 어떻게 되든 빛줄기를 막고 싶었다.

자, 좀 더 좀 더 낄낄…….

연희의 몸속에 있는 힘이 오른손을 통해 거침없이 빠져나갔 다. 숨이 거칠어지고 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거칠게 내뿜는 숨이 하얗게 변했다. 분명 이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저 염체와 자신의 손과 날아오는 뇌전의 빛줄기는 이토록 느린데 다른 모 든 것들은 그래 봐야 주변에는 아무것도 형체를 갖춘 것이 없었지만 왜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일까…………….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극도로 불만스러웠다.

이제 뇌전의 빛줄기와 염체와의 간격은 상당히 좁혀졌고, 있 는 힘을 다한 덕분인지 연희의 손도 저번보다는 조금 빨리 움직 이고 있었다. 연희는 계속 힘을 쓰면서 들려오는 방향이 어딘지 모르는 목소리를 향해 외쳤다.

“네, 네 목적은 뭐지? 이 빌어먹을 몽마야!”

다시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연희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연 희의 하얀 손등 위로 땀이 맺혀서 떨어졌다.

몽마? 몽마라고? 낄낄낄.

연희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목소리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내가 몽마? 바보로군!

“그・・・・・・ 그럼 뭐냐? 넌……………”

그때 연희의 주변을 붉게 감싸고 있던 풍경들이 꿈틀거리면 서 살아 있는 듯 움직였다. 날아오던 빛줄기가 부풀어 오르면서 커졌다. 목소리는 중얼거리면서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연희에게 다가왔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나는 케인이다.

연희가 반쯤은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애썼던 과거의 일 들이 삽시간에 와르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케인이라면 리와 비슷한 능력을 지녔던 블랙서클의 일원.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던가.

“너는 죽었는데・・・・・・ . 몸도 혼도 아스타로트에게………….”

나는 케인이 남긴 기억이고, 케인이 남긴 마음이다.

연희는 이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케인이 생전에 만들어 두었던 염체가 꾸민 일이었다. 리의 마음과 염원이 염체로 바뀌어 연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케 인도 염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연희를 달아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린 이 목소리는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케인의 사악함이 응집되어 만든 염체였다.

연희는 숨을 가쁘게 들이켜면서 눈앞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푸른 염체를 똑바로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스터의 하얀 번개는 푸른 염체의 코앞까지 다가들고 있었 다. 염체는 안간힘을 쓰면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고, 연희를 향 해 서글프고 애절한 기색을 내보였다. 연희는 더더욱 안쓰러워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갔고, 악다 문 입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힘이 들었다.

너는 이번에도 구할 수 없을 거야…..

“아냐!”

연희는 있는 힘껏 소리를 쳤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을 들어 올린다면 …………….

손으로 가려 준다 한들 별수 없을걸? 그 희고 예쁜 손이 시커멓게 타서 산산조각 날 텐데.

“괜찮아! 괜찮다고!”

그래, 하하하. 마음대로 해 봐. 마음대로…………….

“내 몸이 모두 부서지고 가루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너 따위는 몰라. 영원히 모를 거야. 그는 나를 지켜 준다고 했어. 그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오싹한 기운이 온몸을 감돌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머리를 스쳤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었 는데.

리는 약속했다. 항상 연희를 지켜 주겠다고. 실제로 리는, 아 니 리의 마음은 연희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마지막 순간까 지리의 마음을 담은 염체는 연희를 위해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 졌다. 그런데…………….

이 염체는 리의 마음일까? 리의 마음이라면 내 눈앞에서 이토 록 고통스럽게 도망치려고만 할까? 정말 내 손이, 내 몸이 조각 조각 부서지더라도 혼자 저렇게 달아나려고 할 수 있을까?’

연희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다. 이건 리의 마음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지켜 주고 싶어 한다면, 리 마음의 염체도 달아나기 위해 연희의 손이 부서지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그분의 마음이 아냐!”

연희는 소리쳤다. 그러자 사방이 와르르 허물어지듯 흔들리면 서 눈앞의 푸른 염체가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었 다. 날아오던 흰 빛줄기도, 다른 것들도 금방이라도 폭발하여 터 져 나갈 듯 부르르 떨었다.

“모두가 거짓이야! 거짓일 뿐이야!”

연희는 분노의 숨을 몰아쉬며 손을 내뻗었다. 아까보다는 훨 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힘이 빠져나가 탈진할 지경이었 지만 거짓된 속박을 벗어 버리고 난 후라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연희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푸른 염체를 지나쳐 날아 오던 뇌전의 흰 빛줄기를 꽉 움켜잡았다.

“아악!”

열기를 품은 전기 같은 충격. 흰 빛줄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 연희의 몸은 벼락을 맞은 듯 덜덜 떨렸다. 극심한 고통 이연희의 온몸을 휘저었다.

“모두가 거짓, 거짓이야. 거짓……”

연희는 고통에 겨워 이를 악물면서도 손에 힘을 주었고, 그러자 극심한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희의 손에 뭉클한 촉감이 전달되어 왔다. 놀랍게도 빛이나 에너지 덩어리라고 여겼던 뇌전 줄기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연희 의 손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징그러웠다. 진짜 빛줄기나 뇌전이 아니라 이것 역시 케인의 마음이 속임수로 만들어 낸 염 체에 불과했다. 연희는 자신의 오른손에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의 힘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희가 염체를 움켜쥔 오른 손에 힘을 주자 짜릿짜릿한 느낌이 전해오면서 가벼운 떨림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케인의 염체는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불덩어리가 되어 사라졌다.

연희는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붉게 물들어 있던 주변은 시선이 닿을 때마다 흐트러지고 뭉개지면서 아무것도 없 는 무(無)로 변했다.

너. 네가 네가……

“비겁한 자! 더러운 속임수! 용서할 수 없어!”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연희의 기억 속에서 파도처럼 쏟아 져 나왔다. 이건 내 꿈속이다. 주인은 나다. 의지를 잃지 않는다 면 모든 것은 힘 한 번, 눈길 한 번, 생각 한 번이면 사라지게 만 들 수 있다. 연희에게는 이미 죽어 버린 케인의 보잘것없고 사악 한 찌꺼기 같은 마음이 만든 염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너, 이리 나와!”

연희의 입에서 침울한 듯 그러나 위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세 당당했던 케인의 목소리는 이제 한없이 나약하고 애처롭게까지 들렸다.

안, 안 돼! 안…….

“나와!”

연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눈앞에 떠 있는 푸른 염체의 뒤쪽 에서 그림자가 엉기더니 서서히 희미한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 작했다. 추악하고 더럽고 야비한 느낌만으로 뭉쳐진 형체도 갖 추지 못한 채 꿈틀거리는 음산한 회색의 덩어리. 그것이 케인의 마음이었고 속임수를 써서 연희의 힘을 빼앗으려고 했던 추악한 자의 본모습이었다. 그 덩어리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연희의 의지에 가로막혀 도망치거나 사라지지도 못하고 다만 절 망적으로 꿈틀댈 뿐이었다.

너, 너는……………. 아악!

연희가 오른손을 쳐들자 손바닥에서 휘황한 빛이 뿜어 나왔 다. 준후의 부적이 꿈속까지 따라왔는지 안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꿈속이라 간단했다. 그 속에는 연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준후의 마음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금방이라도 케인의 염체를 내려칠 것 같던 연희의 손 은 허공에서 꼼짝하지 않고 멎었다. 만사를 포기하고 절망적으 로 꿈틀대던 케인의 염체는 그런 연희의 모습을 보고는 뭔가 알 아냈는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 그래. 하하하.

연희의 눈앞에는 아직도 푸른 염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것 역시 케인의 거짓된 마음이 만든 가짜가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래, 다시 생각해 봐. 거짓이어도 좋다고, 단 한 번만이라도 네 마음 을 보일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했지? 그래, 너는 네 의지 로 내 시험을 받기 위해 들어온 거야.

연희는 꼼짝하지 않았다. 케인의 염체는 슬그머니 조그마한 푸른 염체의 속으로 빨려들듯 들어가 숨어 버렸다. 그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네가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알아낸 것은 지금이 아냐. 그래, 너는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이리 온 거야. 지금 확인했을 뿐이지. 그래, 날 없 애. 없애 버려. 그러나 날 없앤다 해도 너는 진 거야…………… 이긴 게 아냐. 

“나・・・・・・ 난………..”

연희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연희의 손은 어느새 아래로 내 려왔고, 손바닥에서 나오던 휘황한 빛도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케인은 신이 나는 듯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너는 분명히 말했지. 거짓이어도 좋고 네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그래서 잠이 들면서 나를 부른 것이고……. 네가 졌어……. 네 사랑이 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어.

“그만해. 그만!”

연희는 귀를 막으면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역시 내 말이 맞았어. 내 짐작이 맞았어. 너희는 완벽하게 서로를 위 해주고 사랑한 것이 아니야. 너도 아니고 리도 그렇지 않았어. 

“아냐, 아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리도 너를 의심했어. 나는 들었어. 나를 만든 케인이 죽기 직전에, 만 에 하나를 대비해 옥상의 뒤에 숨어 나를 만들어 내고 있을 때, 그걸 들었지.

“뭘? 뭘 들었단 말이야!”

현암이 리와 싸우는 동안 리는 내내 네가 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현암 을 보냈다고 여겼어. 리도 그렇고 너 역시 리를 의심했어. 리가 네 동생을 잡아가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만!”

거짓말쟁이들……. 너희는 위선자야. 너희는 아무도 서로를 위해 주 지 않았어. 지금 리의 마음은 뭘 하고 있지? 내가 너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데 왜 그의 마음은 없지? 하하하. 오지 못할 거야. 하하하. 네가 의 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의 마음도 의심으로 가득 차 있을 테고, 너 를 보고 실망했을 테니까. 안 그래? 하하하.

연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 았다. 자신이 리의 마음을 구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한단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 같이 보았던 그의 어두운 기억들, 구리 십자가, 해 지는 모습, 자신을 구하고 산 산이 흩어져 버리는 푸른 염체, 빛, 어두움. 그리고 그의 목소리……………

‘좋은 것만을 생각해요.’

느낌만 남기고 숨을 거두어 비참하게 말라 버린, 그러면서도 웃고 있던 그의 표정, 그의 선물, 허공을 가득 수놓았던 그의 마음, 그의 생각들…….

“아냐.”

의심하더라도 또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속았거나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진정 자신은 그를 사랑 했고 또 그것이면 되니까………………


연희가 고함을 내지르자 사방의 모든 것이 회오리치면서 부 서져 없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기둥과 벽, 케인의 끈적끈적한 염 체, 거짓된 푸른 염체, 자기 자신,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무(無) 까지도 산산이 부서져 없어졌다. 연희의 마음속에 있던 모든 것 들이, 꿈속에서 보이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마저도 그 너머의 혼돈마저도 없어져 갔다.

어둡고 텅 빈 공간에 연희 혼자 떠 있었다. 아니, 자신은 이미 없었고, 몸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다. 그냥 떠 있을 뿐.

반짝거리는 빛들이 하나둘 나타나 반딧불처럼 너울거리면서 연희의 주변을 맴돌았다. 기억이 난다. 그래, 저건 지난번에 나 를 구하러 달려왔던 리의 염체들. 그리고 널리널리 퍼져 세상을 가득 메운 그의 마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속이었지만 그들은 있었다. 연희도 원했으니까. 모든 것이 거짓이고 의심스럽고 믿을 수 없다 해도 그것만은 남아 있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 오면서 연희의 모습도 다시 나타나기 시 작했다. 별빛이 생기고 저녁노을이 생기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주위에 아름답고 울긋불 긋한 염체들의 영상이 떠다녔다. 아무런 목적 없이 리가 만들어 냈다던 허공에 수를 놓기 위해 만들었다던 염체들. 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났다.

기쁘고 즐거웠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좋은 것만을 생각 한다는 것. 없어졌던 세상이 되살아났고 그 모습은 전보다 아름 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한층 빛났 다. 의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불신, 슬프고 고통스럽고 어두 운 기억들 역시 그와 함께했던 추억의 일부였고 그가 남긴 염체 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걸 느끼면서 연희는 행복해졌다. 연희의 꿈은 더욱더 밝아지고 더욱더 풍요로워졌으며 더욱더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잉, 언니 잠만 잔다.”

수정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연호도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수정의 말로는 연희의 얼굴이 아까까지 피곤하고 수척 한 얼굴이었다는데, 지금은 발그레하니 화색이 돌고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수정은 칭얼거리면서 언니와 같이 놀고 싶다고 했 지만 연호는 웃으며 수정을 가볍게 감싸 안았다.

“저렇게 편하게 자는데 그냥 두자. 몹시 피곤한 것 같았다면서?”

“응.”

수정은 씩 웃으면서 자고 있는 연희를 향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언니, 메리 크리스마스. 헤헤헤.”

연호는 행여 연희가 깰까봐 수정을 다독거렸다.

“그래, 그래. 그런데 …………….”

“응?”

수정이 눈을 크게 뜨고 연호를 올려다보자 연호는 살짝 미소 를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벌써 연희는 꿈속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네. 저렇 게 웃으면서 곤하게 자는 걸 보니까. 하하하.”

연호는 수정을 데리고 방문을 나서면서 다시 한번 연희의 자 는 모습을 보았다. 연희의 손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꼭 쥐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듯했다. 연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조용한,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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