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4화 – 와불이 일어나면 3 : 되돌아오는 출발
되돌아오는 출발
일행을 전송하는 백호를 뒤에 두고, 박 신부와 준후를 포함한 일행이 탄 차는 아침 출근의 혼잡함이 가라앉은 도심 거리를 미 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승합차를 개조한 차의 뒷부분에는 무전기 를 비롯한 몇 가지 장비가 실려 있었고, 운전하는 요원을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사람이 동승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조금 겸연쩍었는지 준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 는 자신과 일을 같이하게 될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맞은편에는 박 신부나 준후가 잘 알고 있는 승현 사미가 앉아 있었다. 백제암에서 사천왕과 함께 지내던 승현은 나이도 어리고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은 없었지만, 나랏자손인데다가 풍 수나 지세를 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추천을 받아 이번 일에 동행 하게 되었다. 승현의 왼쪽에는 수염을 시커멓게 기르고 덩치가 커다란 삼십 대 후반의 험상궂은 남자와 몸이 빼빼 마르고 염소 수염을 한 한복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텁석부리는 스스로 임악 거사라고 일컫는 사람으로 우도방(右道)에서 상당히 알 려졌다는 사람이고, 그 옆의 삐쩍 마른 남자는 풍수를 보는 데는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며 고문 경전에도 통 달했다는 묘한 인상의 정 선생이라는 남자였다. 박 신부의 왼쪽 에는 준후가 앉아 있었고 준후 왼쪽에서 조용히 합장하듯 고개 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과거에 아미파 검사였던 현정이었다. 지금은 출가하여 무련이라는 법명의 비구승이 되었지만…………. 그 녀는 회색 장삼을 걸친 채 염주 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도가의 술객 모임인 도방에는 좌도방과 우도방 두 계열이 있다. 좌도방은 기문둔 갑술과 같은 술법이나 부적술 같은 재주를 중시하는 파이고, 우도방은 순수한 정 신수련을 중시하는 파이다. 궁극에 이르면 차이가 없이 하나로 합류된다고 한다.
무련과 승현과는 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임악 거사와 정 선생이 박 신부를 대하는 눈치는 자못 쌀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수와 지세를 찾으러 가는 일에 난데없이 가톨릭 신부가 끼어들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무슨 훼방이 나 놓으려고 끼어든 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들 이 특별히 무슨 말을 하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라 서 먼저 말을 걸기도 어색했다. 무엇보다도 가끔씩 자신을 스치 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눈길에 박 신부는 거의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들에게 말을 걸더라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 박 신부는 머뭇거리다가 앞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승현 사미, 그동안에 별일 없이 잘 지내셨나? 다른 분들도 안녕하시고?”
승현은 애교 있는 웃음을 지으며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고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박 신부의 물음에 대답했다.
“백제암의 큰스님과 사천왕 네 스님께서 신부님이 저와 동행 하신걸 알면 마음 든든해하셨을 겁니다. 그분들이 무척 걱정을 하셨어요.”
“허허, 신부님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셨소?”
승현의 말을 끊고, 임악 거사가 곱지 않은 투로 끼어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정 선생은 쥐새끼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촐랑거리더니 임악 거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임악 거사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박 신부를 훑어보고 나서 못 이 기는 척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는 못 들은 척하고는 다시 승현 에게 말을 건넸다.
“같이 갈 예정이 아니었네만, 중요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에서 동행을 자원했다네.”
“예. 그러시군요. 아미타불.”
승현이 중얼거리는데, 준후가 장난삼아 승현의 발을 톡 건드 렸다. 승현도 씩 웃으면서 준후의 발을 톡톡 찼다. 어른들 속에 만 묻혀 있다가 또래를 만나게 되니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박 신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준후의 옆에 눈 을 감은 채 염주 알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무련을 향해 눈을 돌렸 다. 그녀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슬프고 처연한 듯이 보였다. 박 신부가 아까 인사를 하였을 때도 무련은 다만 합장하며 고개만 까닥해 보이면서 박 신부가 뭔가 입을 열려고 하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승은 출가한 몸이니 속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 인연대로 순리대로 되겠지요. 아미타불.”
전에 준후가 이야기했던 대로 현정, 그러니까 무련은 그사이에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던 듯, 옛날의 투지만만하고 패기 있던 모습이 아니라 보고만 있어도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저렇게 눈을 감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뭣했고, 어 떤 말을 해야 적당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입을 열려고 머뭇거리다 가 다물었다. 무련 옆에는 헝겊으로 싼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청홍검이겠지. 출가했어도 저것은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구나.’
박신부는 야릇한 기분과 씁쓸한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차내에서는 임악 거사의 흥흥대며 빈정거리는 듯한 콧소리와 그에 개의치 않고 발 장난을 쳐대는 준후와 승현의 떠드는 소 리, 그리고 단조로운 차의 엔진 소리만이 들려왔다. 박 신부는 첫 번째 목적지인 설악산을 돌아보고, 잘 곳을 정해 밤에 쉴 때쯤 차차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화해해 나갈 생각이었다. 아무 리 임악 거사가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괜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단조로운 정적을 깨고 카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전을 하던 요원은 날렵하게 카폰을 들고 뭐라고 하더니 뒤쪽을 보며 말했다.
“박신부님, 전화입니다.”
“전화라고요? 내게 무슨……………..”
“받아보십시오.”
승희였다. 흥분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전화의 감이 안 좋았다.
“신부님?”
“응. 승희냐? 아니………… 여기는 어떻게 알고………….”
박 신부가 대답을 하자마자 승희가 떼를 쓰는 듯하기도 하고 화가 난 듯도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신부님은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연락 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도대체 여기 일이 어떻게 돼 가는지도 모르시고, 도대체 신부님은 너무해요! 너무해요!”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승희의 말에 박 신부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승희야, 왜 그러니?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큰일 났단 말이에요. 현암군이 죽어 가요!”
“뭐라고!”
박신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박신부에게 반쯤은 신경질을 내고 반쯤은 울먹거리는 목소리 로 대강의 상황을 털어놓은 승희는 현암이 회복되는 대로 자세한 이야기를 다시 전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암의 자취를 찾아 무등산 자락의 나지막한 계곡으로 올라가 고 있던 승희는 현암의 주변에서 강한 영기를 느꼈다. 그 기운은 현암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그 정체가…………
승희는 그날 오후 늦게야 간신히 반쯤 허물어져서 삐걱거리고 있는 신사를 찾아냈다. 신사는 지탱해 주던 주술의 힘이 현암과 의 싸움으로 폭발해 버린 탓에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승희는 투시를 통해 신사의 밑에 현암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함정을 찾아 무작정 밑으로 내려갔다. 근처에서 밧줄 한 가닥을 구해 몸 을 묶고서 내려가 보니 현암이 반쯤 흙더미에 뒤덮인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현암의 양쪽에는 반으로 갈라진 커다란 바 위가 한쪽씩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마음을 투시하려 해도 현암은 의식을 잃은 채 꿈 비슷한 것을 꾸고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우선 현암의 머리맡 땅속에 깊이 꽂힌 월향검부터 조심스럽게 빼어서 품 안에 넣었다. 흐느끼는 듯 나지막하게 귀곡성을 내는 월향검을 다독이고는 몸 위에 덮여 있는 흙을 치우고 현암을 빼 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암의 밑에는 앳돼 보이는 여자아이 하 나가 같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어라, 이건 누구지?”
승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지만 어차피 현암이 정신 을 차려야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터였다. 승희는 현암과 이 여 자를 끌어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 시간가량 손발이 부르트도 록 씨름을 해서 겨우 두 사람을 바깥으로 옮겨 놓았다. 잠시 후 여자아이가 정신이 돌아오는지 신음 소리를 냈다. 충격을 받은 듯 덜덜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이유 없이 미워졌 다. 승희는 여자아이한테 현암 옆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톡 쏘듯 이 말을 던지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역 시 난장판이었다. 놀러 왔던 대학생들도 실종된 여학생을 찾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법석을 떨고 있었다. 승희는 투시력을 발휘해서 그들이 찾는 사람이 현암과 같이 있었던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승희는 학생들의 도움을 얻어 현암과 여학생을 병원으로 옮 겼다. 여학생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을 뿐 특별히 다친 데는 없었 고, 현암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이 현 암의 몸속에서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이상한 한기(氣)가 느껴 졌다. 체온계로 재었을 때는 정상이었지만 현암의 몸에 손을 갖 다 댈 때마다 섬뜩섬뜩 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이 승희의 몸속까 지 뻗쳐 온몸에 쫙쫙 소름이 돋았다.
의사들은 주사를 놓기도 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치료해 보려 고 애를 썼으나, 현암은 알 수 없는 한기에 부들부들 떨며 약도 넘기지 못했고 주삿바늘도 몸속으로 파고들어가지 못한 채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승희도 그렇지만 의사들도 매우 당황했다. 승희는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고 법석을 떠는 의사들을 내버려 둔 채박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를 했던 것이다.
‘도대체 현암 군이 이 꼴이 되었는데도 팔자 좋게 쇠말뚝이나 찾으러 다니고 있다니…………. 바보들!’
승희는 신경질이 나 그렇지 않아도 화난 듯이 보이는 눈썹을 더욱 치켜 올렸다. 그래도 박 신부한테 전화를 하니 불안한 마음 이 조금 가셨다.
겨우 신경질을 가라앉히고 현암의 방으로 올라간 승희는 또다 시 성질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아까 현암의 몸 아래에 안겨(?) 있었던 여학생이 옆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모습이 보였 던 것이다. 승희는 이유도 없이 이 여자가 꼴 보기 싫었고 당장 뭐라고 말을 해서 쫓아낼까 하다가 먼저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니, 저런저런! 저 계집애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야. 이거 정말’
마음속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목숨을 구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은근히 현암에게 마음을 쏟고 있었다.
“이런 불여우 같은 것이 있나!’
승희는 자기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뒤에 사람이 있 다는 것도 모른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여학생을 끌어내려다가, 여학생이 아까 벌어졌던 광경들을 떠올리는 것을 보고 화를 삭힌 뒤 마음속을 살폈다. 화를 내기보다 사정을 정확히 알고 싶어 졌다.
여학생은 담력 시험을 하다가 신사 안으로 들어섰고 암굴 속 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펄럭거리면서 다가오는 회색 유령을 보고 놀라서 암굴을 헤매고 다니다가 쫓기다시피 막다른 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한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어! 이상하다. 철기옹・・・・・・ 철기 어르신 아니야? 그분의 시신 이 왜 저기에 있지?’
승희는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계속해서 생각을 읽었다.
밖에는 유령이 있고 안에는 시체가 있다. 정신이 흐트러져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차에 현암의 목소리가 들렸고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놀라운 힘과 용기로 유령을 없애 버렸다. 자신을 위해서………….
‘놀고 있네! 너를 위해서라고? 웃겨!’
승희는 투덜거리면서도 생각을 읽어 나갔다. 다음에는 정신을 잃은 듯했는데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현암이 위험에 처해 있 는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공중으로 몸이 솟구치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갔고………….. 현 암 혼자였으면 충분히 위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 떻게 위로 오르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승희는 월향의 힘으로 현암이 위로 빠져나오려고 했다는 결론 을 내렸다. 그러나 둘을 끌어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학생 은 고마운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뒤에는 계속 암굴 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래서 여학생은 잡고 있던 현암 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현암이 따라 떨어져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를 몸으로 가 려 주었다. 집채만한 바위가 뒤따라서 떨어지는데 흰빛이 번쩍 하더니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여학생도 정신을 잃었다.
승희는 여학생의 기억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암의 성격으로 볼 때 여학생이 현암을 생각해서 손 을 놓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혼자 빠져나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암의 성격을 아는 승희로서는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 니었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이 여학생 이 아까보다 더 미워졌다.
‘요 불여우 같은 것이 없었다면 현암 군은 다치지도 않고 무사 히 빠져나왔을 것 아냐? 죽으려면 저나 죽지 왜 현암 군을 이 꼴 로 만들어? 이런 못된! 몹쓸! 망할! 빌어먹을!’
집채만한 돌덩이가 떨어져서 현암과 여학생을 짓눌러버리려 고 할 때 번쩍하고 바위를 갈라낸 것은 월향이었을 것이다. 승희 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월향검을 쓰다듬 었다. 월향검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승희는 마음속 으로 이야기했다.
‘고마워’
승희의 상상은 울고 있던 여학생이 기척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봄으로써 중단되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승희는 어떻게 든 이 애를 못살게 굴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 아니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저………….. 정 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맙긴 뭐가 고마워요. 저기 쓰러져 있는 저 멍청이한테나 고 맙다고 그러시죠.’
“멍청이라뇨?”
여학생은 승희가 거침없이 현암을 보고 멍청이라고 하자 금방 이라도 대들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누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보 고승희는 또 여학생이 미워져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학생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저분과 잘 아시는 분이신가 보죠?”
승희는 시무룩하게 있다가 쌀쌀맞게 내뱉었다.
“그래요. 원래 잘 알아요. 잘 알았으니까 꺼내 줬죠. 그냥 묻혀있게 내버려 둘걸 잘못했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저 바보 같은, 으으, 얼간이, 아이구, 열 받아!”
승희가 분통을 터뜨리자 여학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겁먹은 눈만 깜박거리며 승희를 바라보았다. 승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곧 현암이 여학 생과 둘만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마자 후다닥 문을 열고 병실 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고는 태도를 돌변해 뭐라 뭐라 수다를 떨 면서 여학생을 잡고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나요? 이젠 괜찮아요? 다 나았나요?”
정신없이 승희가 떠들어 대면서 문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바람 에 여학생은 정신이 없는 듯 따라나섰다. 승희는 계속 똑같은 말 만 되풀이하면서 병실 문을 쾅 닫고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쏟아뱉듯이 말했다.
“자, 자. 아가씨도 많이 다쳤으니까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니면 안 돼요. 자기 병실에만 꼭 있고 바깥으로 나오지 말아요. 알았 죠? 꼭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약속했죠? 예? 알았어요? 어서 들어 가요. 들어가라구요!”
승희는 뭐라고 말하려 하는 여학생을 몰아넣다시피 병실에 들 여보내고는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서서 분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으으, 열 받아.”
전화를 끊고 나서 박 신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수련을 하던 현암 군이 심하게 다쳤을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현암은 박 신부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로 공력이나 무술이 훨씬 증진된 상태였다. 그런 현암을 그토록 중상에 빠뜨릴 무언가가 하필이면 현암이 수련을 하러 들어간 조용한 산중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고, 또 승희가 어떻게 알고 현암을 구해 주게 되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세 상일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다고들 하지만, 박 신부로서는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무슨 운명의 장난에 홀 려서 말려들게 된 것은 아닐까 염려되었다.
준후도 박 신부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걱정이 되는 지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신부님. 현암 형이 어떻게 됐대요? 승희 누나가 뭐라고 해요?”
박신부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말했다.
“현암군이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구나. 이걸 어 떻게 해야 할지…..”
입장이 난처했다. 당장이라도 현암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생떼를 쓰다시피 하 여 겨우 합류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바로 어젯밤에. 그래서 출발하자마자 빠져나가기가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지금 면목이고 체면이고 중요한 게 아니지. 현암 군이 일을 당했다는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가 있나.’
생각에 잠긴 박신부가 준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후야. 내가 아무래도 현암 군에게 가 보아야 할 것 같구나. 그리고…………….”
박 신부는 고개를 들어 쑥스러운 표정으로 차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깐 죄송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발로 들어오겠다고 해 놓 고서 일을 하기도 전에 다른 일 때문에 나간다는 게 뭣하기는 하 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백호 씨께도 제가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 습니다. 그러니까……………..”
박신부가 계속 말을 이으려는데 임악 거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음. 신부님께서는 참으로 정중하신 분이군요.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가시고, 편리하네요.”
박 신부는 뭐라 대꾸할 수도 없어서 임악 거사를 쳐다보고 있 는데 준후가 눈초리를 올리면서 소리를 쳤다.
“세상일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언제 급한 일이 생 길지 거사님도 알 수 없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 건데.”
임악 거사는 준후의 목소리를 듣고 오히려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보자보자 하니 너무하는군. 능력이 있다 해서 아이까지 나를 업신여겨 인생이 어떻고 세상일이 어떻다고? 너 지금 몇 살이냐?”
준후는 아차 싶었으나 뭐라고 변명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 다. 승현도 무서웠는지 눈만 말똥거리며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정 선생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말려 보려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임악 거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는 사람이 다친 모양인데 그렇다 해도 이렇게 여 러 사람이 같이하는 중요한 일에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장 난감 다루듯 할 수가 있는 겁니까? 도대체 우리를 뭐로 생각하는 거요? 그냥 자신들의 재주가 높다 해서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 다 그 말씀이시군. 좋아요. 나도 당장 돌아가겠소. 돌아가서 나 혼자 일을 하든지 차라리 …………….”
박신부와 준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렸다. 뭐라 대답할 수도 없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지라 말을 하지 못하는데 조용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이번 일이 그렇게까지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 습니다. 비록 한 사람의 안위에 관한 일일 뿐이지만 그것을 먼저 해야할 필요도 있을 법합니다.”
말을 꺼낸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무련이었다. 현암의 안위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무련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아서 우리와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현암이라 는 분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이번 일에 그분이 동참하게 되면 일 이 훨씬 수월해질지 모릅니다. 제 생각은 아예 우리가 예정을 바 꾸어서 현암 시주의 상태를 보러 갔다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거사님도 아시다시피 능력을 지닌 분들은 비슷한 능력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일단 그분을 도운 뒤, 함께 이 일을 수행해도 늦는다거나 손해가 되지 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쪽에 있는 승현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분은 참 좋은 분이고 능력도 대단한 분이에요. 같이 다닌다면 좋겠어요.”
“하! 원참…….”
임악 거사는 계속 툴툴거리는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요? 그래, 그러면 현암이라는 자 와 같이 가야 마음이 편하고 나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이 말씀이시군. 좋소, 맘대로 하시오. 나는 원래대로 내 길을 가겠 소. 원래 예정대로 하겠소. 다가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을 테 니 그렇게 하란 말이오. 아마 백호 씨도 갑자기 예정을 바꾸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을…………….”
임악 거사가 말을 하는 도중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운전하던 요원이 전화를 받더니 말했다.
“백호 검사님의 전화입니다. 승희라는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 다고요.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 같으니 계획을 바꾸어서 무 등산 쪽으로 가서 그쪽 일부터 수행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 시는군요. 특별히 여러분들이 반대하시지 않는다면 예정된 코스 를 그쪽으로 바꾸는 것이…………….”
임악 거사의 얼굴은 붉어지면서 씩씩거렸지만 반대로 준후의 얼굴은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동해안을 향하던 차는 방향을 바꾸어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임악 거사라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 으나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승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백호 씨는 그쪽이 더 급하다고 판단했을까?’
현암이 다쳤다고 프로젝트의 일정을 수정한다는 것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백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 기치 않았던 뭔가를 알아냈거나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말인가? 박 신부가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 가운데 차는 진로를 남쪽으 로 바꾸어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