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5화 – 와불이 일어나면 4 : 한빈 거사
한빈 거사
어느덧 시간은 저녁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사이 의사와 간 호사들이 병실을 들락거리며 여러 방법을 써서 현암을 검진했 다. 덜덜덜 떨고 있는 현암을 침대째 싣고 가서 엑스레이를 찍기 도 하고 단층 촬영인지 뭔지도 해 보았지만 소득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승희는 걱정이 된 나머지 현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의사 들의 마음을 읽어 보려 했다. 그들은 지금 현암의 증상에 대해 서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의사들은 두 가지 증상에 놀라고 있었다. 한 가지는 현암의 몸 주위에 팽팽하게 퍼져서 주사나 약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게 하 는 힘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승희는 속으로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현암의 공력에 의한 무의식적인 반탄력이 분명한데 그것을 아픈 증상이라고 취급하 고 저렇게 법석을 떨고 있으니. 또 한 가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한기였다.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현암의 얼굴은 얼어 죽은 사람 처럼 새파랗게 변해 있었고 온몸을 멈추지 않고 와들와들 떨었 다. 한기의 원인은 승희도 알 길이 없었고 도대체 어떤 방법에 의해서 현암 같은 철골이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는지 짐작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현암을 저 모양으로 만든 것은 몸속에 들어가 한기를 느끼게 만드는 무엇임이 분명했고, 바깥으 로 뻗쳐 나오는 힘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현암이 무의식적으 로 한기를 몰아내기 위해 공력을 운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승희 는 의사들을 따라다니면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어 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으나 알아내고 있는 중이니까 염려 말라 는 판에 박힌 말만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의사들의 그런 말에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승희 에게는 그런 선의의 거짓말이 더욱더 속을 펄펄 끓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당신들 속을 뻔히 안다거나 하나도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이 아니냐거나 현암의 공력이 몸에 퍼지고 있다거 나 하는 따위의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자기까지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이 분명했다.
승희는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 면 병원 말고 차라리 한의사에게 보였으면 더 쉬웠겠다는 생각 도 뒤늦게 들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승희가 채근하는 통에 의사와 간호사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었다. 간호사, 의사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울상이 되어 병실로 돌아온 승희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현암의 옆에 무릎을 꿇 고 앉아서 손을 꼭 잡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을 목격했다.
“이것 봐요. 왜 자꾸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요? 이 환자는 절 대 안정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안정! 안정! 알겠어요?”
승희가 언성을 높이자 여학생은 멍한 눈으로 현암의 손을 꽉 쥔 채 승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소리를 치는 것이 안정에 더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아니, 뭐라고? 지금 도대체…..”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저는 이분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 는 건데요. 이분 성함이 현암 씨 맞나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왜 제가 알면 안 되죠? 제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아, 이 분이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그러시는 거죠? 그건 염려 마세요. 절대 말 안 할게요.”
“절대 말 안 한다고 그러면서 왜 지금 나한테는 말하죠?”
“그건 억지예요. 잘 아시는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신 경을 쓰시는 것을 보면 그 문제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저도 어 떻게 된 일인지 기억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뭐라 설명드릴 수가 없네요.”
‘기억이 안 나기는 뭐가 안 나? 내가 훤하게 다 아는데, 이 여 우 껍데기를 확… 아니, 이 쬐끄만 것이 그래도 남자 보는 눈 은 있어가지고 도대체 이건 뭐…………….. 어떻게 해야 되나. 아이구, 열 받아!’
승희가 화를 내자 품속에 있던 월향검이 움직이는지 나지막한 떨림이 전달되었다. 여학생이 승희의 옷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모습에 승희는 꼼지락거리는 월향검을 손으로 재빨리 눌렀다.
‘아이고, 이런! 이것까지 보여 주면 큰일 나겠군!’
승희는 생글생글 웃음을 띠면서 여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승희가 표정을 바꾸자마자 여학생은 겁먹은 듯이 주춤거 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아니, 왜 그러세요? 또 저를 제 방으로 밀어 넣으려고 그러시 죠? 그러지 마세요. 같이 있게 해 주세요. 네? 저도 걱정되어서 그런단 말이에요.”
“누가 걱정해 달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누 워 있는 게 안 보여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 맘이 편하다고 이 바보가 그러던가요?”
승희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얼굴에 웃음기를 싹 거두면서 무서 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학생이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자 미안 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전히 현암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열이 받아 큰 소리로 말했다.
“당장 나가요 나가! 도대체 이런 머저리 같은 친구를 생각해 서 뭐한다는 거예요? 이 친구는 아가씨 같은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제발 좀・・・・・・ 아이고, 이걸 뭐 라고 얘기해야되나. 답답해서………….”
승희가 분에 겨워 가슴을 통통 두드려도 여학생은 울먹이면서 현암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것 좀 놔요. 잡고 있으면 뭐가 나와요?”
승희가 매몰차게 현암의 손에서 여학생의 손을 떼어 내자 여 학생은 뾰로통해지더니 손을 더 꼭 잡았다.
‘어! 해보겠다 이거지?
승희가 완연한 전투태세로 여학생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여자들은 좀 비켜나게나.”
승희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얼굴이 시 뻘겋고 머리를 길게 기른, 술주정뱅이 같은 인상을 주는 텁석부 리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현암 못지않게 너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눈만은 번쩍번쩍 빛났고 몸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 할아버지는 누구죠?”
“왜 나도 다리가 두 개고 걸어 다닐 수 있는데, 오면 안 되나?”
“아니, 그래도…”
노인은 승희의 위아래를 자세히 훑어보더니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놀랍군그래. 아가씨 같은 말괄량이의 몸속에 어떻게 이런・・・・・・ “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옆에 또 다른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내가 나서야 한단 말씀이야. 그러니 잠시 비켜 주시겠나? 시답지 않은 의사 나부랭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주고.”
“아니, 할아버지는…………… 아니, 영감님은…………….”
“할아버지에서 영감이라 조금 올라갔나? 긴말하고 있을 틈이 없어. 요 녀석은 매우 위험하단 말이야!”
“아니, 현암 군이 위험하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리고 누구시죠? 저는…………”
더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노인은 말을 막고 엄숙한 얼굴로 승 희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건넸다. 입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조그 마한 소리로 움찔거릴 뿐이었는데 승희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지만 옆에 있는 여학생은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이건 전음術)이라 저 아가씨는 들을 수 없으니 걱정 하지 말게. 또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지도 말고, 타심통 (他心)**은 아가씨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네.”
*내공으로 소리를 모아 가늘게 퍼져 나가도록 만들어 원하는 사람에게만 전달되 도록 하는 도가의 술수
** 공력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는 도가의 술수다. 정신 수련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접어들어 상단전이 발달하 면 자연적으로 얻게 된다고 한다.
‘전음술, 타심통……… 그게 뭐지?’
승희가 의심을 품자 노인은 승희의 마음속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재주 말이야. 설마 아가씨 혼자만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노인의 얼굴이 약간 풀려 웃는 표정으로 계속 전음술을 써서 승희에게 말했다.
“나는 이놈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이 녀석은 나한테 일 년 정도 술수를 배우다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뛰쳐나간 멍청이라네. 이놈의 마음씨가 갸륵하여 이제껏 그대로 놔두며 도방(道)의 규제도 막아 주고 간섭을 하지 않았네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나타난 것일세. 알겠나?”
승희는 현암에 관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현암에게 스 승이자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분, 도혜 선사와 한빈 거사뿐이었다. 도혜 선사는 스님이니 이런 모습은 아닐 테 고, 그러면 이분이 한빈 거사란 말인가?
놀란 승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한빈 거사가 전음으로 말했다.
“음, 그래. 이제 의심이 풀리나? 좌우간 이 친구가 꼭 풀어야 할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고 나는 별로 시간이 없단 말씀이야. 그러니 이 친구를 회복시켜 주는 동안 아까 내가 말한 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게나. 알겠어? 여기 있는 아가씨도 데리고 나가고. 잘못하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진다네.”
승희는 놀라서 얼빠진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빈 거사라니……. 그렇다면 현암 군의 스승이 직접 나타나 셨단 말인가?’
한빈 거사도 자신과 같은 투시력이나 독심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현암이 이런 일을 당하 고 여기까지 온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승희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한빈 거 사가 급하다는 듯이 손짓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한빈 거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그리고 손을 댈 때마다 현암의 몸에서 서늘하게 느껴지는 한기가 승희에게 더 이상 다 른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승희는 반 강제로 여학생을 질질 끌 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 앞에 버티고 섰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한테도 절대로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돼요.”
여학생이 뭔가 불만을 토로하려고 하자 승희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고는 여학생의 눈을 쳐다보았다. 승희의 눈빛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여학생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문 앞에 경호원처럼 뻣뻣하게 버티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엄숙한 표정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웃기는 일이었겠지만..
백호와 몇 번을 통화해서 현암이 입원해 있는 병원의 위치를 알아낸 박 신부 일행은 무등산이 보이는 광주 시가지로 접어들 었다. 오는 내내 임악 거사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간헐적으로 헛기침을 하면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고, 박 신부는 깍지를 끼 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침중한 얼굴로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 었다. 정 선생은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무련은 염주 알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준후 와 승현은 주변의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답답한지 몸을 뒤척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준후가 뭐가 생각났는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무련에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 보고 나서 참 오래됐죠. 그렇죠?”
“예, 그렇군요.”
무련이 눈을 반쯤 뜨고서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준후는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다음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다가 어린애들 특유의 돌발적인 질문을 툭 꺼냈다.
“근데 왜 출가할 생각을 하셨어요?”
박 신부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뜨끔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질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으나, 어린애가 스스럼없이 물어본 거라 상대가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했다. 무련 은 얼굴에 동요하는 빛을 보였으나 곧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미타불, 글쎄요…………. 후후후.”
무련은 호흡을 고르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준후의 질문에 답했다.
“지난번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저는 의모님의 시신을 수습해 서 장례를 치렀지요. 철기 어르신의 시신도 같이요. 그런 다음에 그분들의 옛날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과거를 조사하러 다녔어요. 도대체 왜 두 분께서는 그렇게 서로를 생각했으면서도 아웅다웅 하며 끝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지냈는지 말이지요. 두 분은 돌아 가실 때까지 앙숙이었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의모님이 저를 거두 어서 길러 주시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무련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눈빛은 애 틋한 것 같기도 했고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출가했 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일들이 다시 생각나서일까? 무련은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이야기를 술술 풀어 냈다.
“행적을 조사하던 끝에 저는 두 분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 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두 분이 섬기는 신이 서로 대립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속으로는 서로를 생각하시면서도 언감생심 마음을 품지도 못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평생을 사실 수밖에 없 었답니다.”
“신이요? 두 분이 모시는 신이 서로 맞지 않다니요?”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무련에게 불쑥 말을 붙였다.
“글쎄요. 그건…… 두 분의 믿음이었으니 저도 내면까지 속 속들이 알지는 못하지요. 하여간 그분들께 그런 고충이 있었습 니다. 그분들의 옛 이야기를 조사하다가 철기 어르신의 형님을 만나뵌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 이죠. 그러고 나서 ……………..”
“앗, 잠깐!”
박신부는 이야기를 듣다 말고 중단시켰다. 박 신부가 보았던 그 환영. 그것은 철기옹의 모습과 똑같지 않았던가? 그런데 철기 옹의 형님이 무련과 만난 적이 있다면 형님이 살아 계신단 말 아 닌가. 혹시 …………….
“혹시 철기 어르신의 형님 되시는 분이 철기 어르신과 용모가 흡사하지 않습니까?”
무련은 의아한 듯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 두 분은 쌍둥이시랍니다. 또 두 분 다 신내림을 받아 박수가 되셨고, 그리고.
“그랬군.”
박 신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환영을 보낸 사람은 철기옹이 아니라 철기옹의 형님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 그분께 우리 이야기도 했습니까?”
무련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놀랍다는 표정으로 박 신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박 신부가 그분을 알까 궁금 한 모양이었다.
“예. 철기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을 얘기하면서 잠 시 여러분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신부 님이나 현암 씨 그리고 여기 준후나 승희 씨만큼 능력이 큰 분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요. 퍽 깊은 인상을 받으신 눈치였답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분도 아마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실 거예요.”
박신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무련이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 을 이어 갔다.
“그분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지혈에 쇠말뚝질한 것에 대해서 비분강개하고 계셨지요. 그래서 말뚝들을 없애고 제거하는 데 평생을 바치셨어요. 그러나 정부에서도 소극적이고, 또 특별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산천을 여행하시면서 보이는대로 쇠말뚝을 제거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고 계셨어요.”
“그분의 존함은?”
“은기옹이라 불러요.”
“은기옹? 그분도 철기옹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을 지니신 분인가요?”
“예. 그래요. 철기옹보다 위이면 위였지 아래는 아닐 거예요. 그러나 은기옹께서는 우리나라 중요한 산에 쇠말뚝이 박히는 것 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 내시지 않았지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의 관할 아래서 우리나라 지혈에 말뚝 질을 가한 주모자 중의 한 명이 스기노방이에요. 스기노방에 대 해서는 저번에 만나보셨을 테니까 잘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건 알지요. 아! 그리고…………….”
박신부는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지난번 강화도 싸움에서 철 기옹은 스기노방이 자신의 형과 도력을 겨루다가 단단히 패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고, 또한 그 후에 우리나라의 지혈을 끊는 데 스기노방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혹시 그러면 예전에 스기노방을 도력으로 눌러 이기셨다는 분이 은기옹이십니까?”
“예. 맞아요. 은기옹이 젊으셨을 때 밀교의 수법을 자랑하던 스기노방을 찾아가서 담판을 지으려고 하셨던 모양이에요. 도력 을 펼쳐서 스기노방을 제압하셨지요. 그러고는 원통해하는 스기 노방을 향해서 ‘우리나라는 산천의 기운이 흥하고 뻗친 나라이 기 때문에 지금 너희가 아무리 날뛰어도 결코 우리를 어찌할 수 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스기 노방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산천에 못질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셨던 거예요. 정말 그 일 때문에 스기노방이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은 기옹께서는 그렇게 믿고 계셨답니다. 그 이후로 평생 동안 곳곳 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말뚝들을 제거하려 하신 겁니다.” “그러나 은기옹께서 산천의 말뚝을 제거하셨다면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특별히 관청에서 문서를 찾지 않더라 도 풍수에 조예가 있는 사람과 같이 다니셨으면 모르긴 몰라도 십 년 이내에 다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은기 어르신께서는 풍수학에는 조예가 없으셨을 뿐 아니라 당신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만큼 남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 다고 생각하셨죠. 철기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그분도 몹시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분이셨어요.”
박신부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무련의 말을 듣고 나니 사건의 전말이 이해가 되었다. 박 신부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은기옹은 퇴마사들에 대해서 무련에게 말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은기옹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면 퇴마사에게 환영을 내보냈을 법도 했다. 도대체 은기옹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그런 힘 든 주술을 써 가면서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을까? 은 기옹이 그때 말하려고 했던 입 모양이나 동작을 제대로만 이해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박 신부의 마음속에 자꾸 솟아올 랐다.
박신부가 뭔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고 옆에 있는 준후까지도 박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것 을 본 무련은 눈을 들어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박 신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일단 은 현암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고 지금 임악 거사와의 말다툼으 로 냉랭한 분위기에서 그런 자세한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 았던 것이다.
준후와 무련이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박 신부가 고심하 는 사이 차는 어느덧 현암이 입원해 있는 병원 부근에 당도했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임악 거사와 정 선생은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 있겠소.”
“저는 가 봐도 되는데
임악 거사는 딱 잘라 말한 반면, 정 선생은 우물쭈물했다. 그 러나 임악 거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째려보자 정 선생은 찔끔 하면서 옆에 순순히 앉았다. 박 신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곧 오겠습니다.”
일행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서 창구에 있는 간호사에게 현암이 몇 호실에 입원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정말 이상하 고 골치 아프다는 눈치로 자기 앞에 있는 일행을 빤히 쳐다보았 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선 네 사람의 복장이 평범해 보이지 않 았으니…………. 사제복을 입고 있는 신부에다 비구니, 자그마한 동 자승과 한복을펄렁거리면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작은 아이.
“1210호실입니다.”
간호사는 현암이 입원한 병실을 알려 주고는 뭐가 이상했던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죠?”
박신부가 뭔가 꺼림칙한 눈치를 보이는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환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가 보죠?”
간호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이 병원에서 그 환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
준후가 되묻자 간호사는 준후의 얼굴이 귀엽다는 듯 쳐다보더 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 환자야 아직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니 문제랄 게 없 지요. 그런데 여자 둘이 앞에서 난리를 치고 있어요. 조금 있으 면 수위 아저씨라도 불러서 강제로 끌어낼 모양이던데…………….. “
“예?”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현암의 병실 앞에서 두 명의 여 자가 소란을 피우고 있다니. 한 명은 분명히 승희일 테지만 다른 한 명은 누구이기에 무슨 이유로 현암의 병실 앞에서 소란을 피 운단 말인가?
“빨리 올라가 봅시다.”
“예. 그러지요.”
일행은 서둘러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현암이 입원해 있는 십이층 병실로 향했다.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비켜 달란 말이에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승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승희가 왜 저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나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박 신부를 따라 승희 가 있는 곳으로 갔다.
병실 앞에는 승희와 또 한 명의 여자가 문을 막아선 채 앞에 서 있는 의사와 간호사, 간호조무사들과 심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병자를 위문하러 온 사람이나 붕대를 두른 환자까지도 목을 내밀고 희한한 구경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뭡니까?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면 무엇하러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그까짓 아무리 찔러도 들어가지도 않는 주사를 놓으면 뭐해 요? 약먹인다고 약이 넘어나갑니까?”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한테 어쩌라는 말입니까? 환자를 맡기셨으면 치료를 하도록 해 주셔야죠.”
“환자를 입원시킨 것은 저니까 제 판단에 맡겨 주세요. 좌우간 지금은 가만두란 말이에요.”
“그 환자는 대단히 위중합니다. 지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치료는 무슨 치료야! 당신들이 치료를 했어?”
승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반 시비조로 욕에 가까운 말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승희야!”
박 신부는 구름처럼 밀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기가 멋쩍어서 뒤쪽에 선 채 승희를 불렀다. 체구가 장대하고 키가 큰 박 신부는 둘러선 사람들의 뒤쪽에서도 머리 하나만큼 더 솟아 있 어서 눈에 쉽게 띄었다.
“신부님, 와주셨군요. 어째서 이제야 도착………….”
승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랑이를 벌이던 키 작은 의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부님이라뇨? 신부님을 부르셨습니까?”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승희의 주된 말싸움 대상이 이 작달막한 의사였던 듯 그 의사는 박 신부와 승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신부님을 부르다뇨? 저 환자가 임종 직전입니까?”
더 참지 못하고 승희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이번엔 어이없게도 옆에 있던 여자가 의사의 따귀를 찰싹 후려쳤다.
“말이면 다예요!”
“아니, 이건 도대체……………”
의사는 화가 나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승희는 잡아먹을듯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서 여학생을 쳐다보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죽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는 왜 끼어들어?”
“왜 내가 끼면 안 돼요?”
“그만해, 그만해. 신부님 빨리 와 줘요. 제발 어떻게 해 줘요.”
박신부가 사람 사이를 뚫고 들어오자 승희의 주변을 까맣게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박 신부에게 길을 터 주었다. 박 신부의 뒤로 이상한 사람 셋이 따라오는 것을 보자 사람들의 눈은 더욱 더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박 신부가 앞으로 다가가자 승희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매달렸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나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 그래. 승희야, 미안하다. 그래서 이렇게 왔잖니? 자, 이 제 진정하렴.”
박신부가 승희를 달래는 동안 준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마치 승희가 밉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또 한 명의 여자를 응시하 고 있었다.
“누나는 누구세요?”
준후가 말하자 여학생은 준후를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면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귀엽기도 해라. 너도 저 안에 계신 현암 씨라는 분이랑 잘 아니? 동생?”
“예? 뭐, 글쎄요. ・・・・・ 동생? 예. 동생이라고 할 수도 있네요. 내가 형이라고 부르니까요.”
준후가 어이없는 듯 떠듬거리는 말을 듣자 여자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준후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어. 누나. 이거 뭐예요? 에그그…………… 이것 좀 놔요.’
승희가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를 쳤다.
“야! 이 바보야. 그 애는 현암군 동생이 아니란 말이야! 꿩대신 닭이냐? 음흉하기는…………….”
“승희야, 그건 그렇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 보려무나. 안에 현암군이 있니?”
박 신부가 말하면서 문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려고 하자 승희가 당황한 얼굴로 박 신부를 제지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가면 안 돼요.”
“응? 도대체 왜 그러지? 왜 안 된다는 거냐? 현암 군의 상태가…………….”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무튼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사이 간신히 그 여자의 품에서 풀려난 준후는 옷자락을 탈탈 털면서 뭐라고 구시렁거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
“엇! 저 안에서…………. 저 안에 지금 누가 있죠?”
“그게 무슨 말이냐?”
“뭔가가 느껴지는데요. 저 안에 분명히 누가…………. 어! 현암 형만큼이나 큰 힘을 가진 것 같네?”
“뭐요? 저 안에 누가 있다고?”
이번에는 저만치 밀려나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소리를 치면서 다가왔다. 따귀를 얻어맞았던 의사가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속입니까? 우리는 의료인이에요. 어디까지나 환자를 돌볼 의무와 책임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뭐라고요? 실력이라고요?”
승희와 젊은 의사가 얼굴을 붉히며 맞붙으려는 순간, 갑자기 안에서 하는 폭발음이 들리면서 문이 덜그럭거리고 문틈으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놀란 승희가 비명을 지르더니 문 을 활짝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박 신부와 준후도 승희의 뒤를 따라 병실의 안쪽 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병실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병실 안에서는 몇 가닥의 연기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여태까 지 누워 있던 현암이 꼿꼿하게 가부좌를 튼 자세로 등을 보인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한빈 거사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도대체 이건…………. 그분은 어디 가셨…………….”
여학생이 말을 하려는 것을 승희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됐어요. 됐어! 그런데 현암 군 괜찮아?”
승희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고 박 신부는 입을 다문 채 현암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준후도 쪼르르 다가가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현암의 등에다 조심스럽게 손을 대 보았다.
잠시 후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조금 맥이 풀린 듯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는 건강한 현암의 목소리였다.
한참 지나서야 병실이 조용해졌다.
현암이 멀쩡한 것을 본 의사와 간호사들은 다시 진찰해 보아 야 된다고 했지만, 현암은 이제 괜찮으니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 했다. 의사들은 그래도 현암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몰라 야단을 피웠다. 그러나 어쨌거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이 멀쩡하 게 일어났고 겉으로 보기에도 아까의 증상들이 씻은 듯 없어진 데다가 승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들을 노려보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병실에서 물러났다.
의사들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준후는 문을 닫고 그 앞에다가 수인을 맺으며 허공에 글씨를 썼다. 승현이 뒤에서 눈을 말똥거 리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준후 시주 뭐 하는 거죠?”
준후가 한쪽 눈을 깜빡하면서 말했다.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하는 거야. 지금 여긴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분도 계시니까.”
준후의 말에 박 신부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의 한쪽 구석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나오시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벽 한쪽 구석에서 사람의 모 습이 나타났다. 무련과 승현과 승희와 여학생은 놀란 나머지 앗 하며 소리를 질렀고, 그 사람의 모습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현암 이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그 사람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위풍당당한 기운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노인 은 껄껄껄 웃으면서 엎드려 있는 현암을 일으켜 세웠다. 뒤에 있 던 준후가 조그마한 소리로 박 신부에게 말을 건넸다.
“은신술! 놀랍네요. 부적 없이도 저렇게 은신하실 수가 있다 니. 현암 형이 저렇게 예를 갖출 분은 세상에 몇 분 없으니 틀림없이…….”
승희는 한빈 거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박 신부도 준후도 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됐다. 됐다. 이제 몸은 괜찮으냐?”
“예, 거사님,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현암은 격동한 듯 목소리를 떨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빈 거사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면서 현암을 토닥거려 주고는 주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불초 한빈이라고 합니다. 이 녀석이 일을 당했다기에 달려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알려 주실 것이 있다니요?”
박신부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면서 물었다. 한빈 거사는 술주정뱅이처럼 시뻘건 얼굴에 싱긋 미소를 띄우더니 박 신부에게 인사를 했다.
“신부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인자하고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이번엔 한빈 거사의 눈길이 준후를 향했다.
“준후라고 했던가? 자네도 놀랍군. 내가 아는 해동밀교의 비술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일세.”
“뭘요. 헤헤헤.”
준후는 부끄러웠던지 얼굴이 빨개졌고 한빈 거사는 그러한 준 후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원래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준후야.”
“예.”
박 신부와 준후는 한빈 거사를 처음 보는데도 마치 오래전부 터 보아 왔던 것처럼 친근한 감정이 들었다. 특히 준후는 한빈 거사가 마치 자신의 친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 해동밀교에서 천정개혈대법(天正開大法)을 익힌 적이 있느냐?”
“천정개혈대법이요? 아니요. 저는…”
준후는 얼버무리듯 말을 끊었다가 대답했다.
“저는 해동밀교의 의술에 대해서는 하나도 배운 것이 없어요.”
“허허, 이런…… 그래, 그랬구나.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한빈 거사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박 신부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서 한번 거사에게 물었다.
“천정개혈대법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한빈 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앉 아 있는 현암을 힐끗 보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해동밀교의 그 수법이 있다면 이 녀석의 막힌 혈도를 열어서 완전무결하게 공력을 사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 터인데…………. “
한빈 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암이 불쑥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거사님. 저에게는 더 이상의 힘이 필요 없습니다.”
한빈 거사가 싱긋 웃으면서 현암에게 물었다.
“어째서 더 이상의 힘이 필요 없다고 하느냐? 힘이 많으면 네 가 바라는 일을 하기에도 더욱더 좋을 것이 아니냐? 그리고 몸의 반탄강기(氣)*를 완성한다면 이렇게 상처 입고 낑낑거리며 고생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고.”
현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입는 상처나, 제가 위기에 처했던 것은 힘이 모자라 그 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이 짧고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 지요. 더 이상의 힘은 제가 감당할 수도, 또 주체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혈도를 전부 열어서 더 큰 힘 을 얻겠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현암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현암의 마음속에는 옛날에 겪었던 경험들이 주마등같 이 지나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갔다.
“힘! 그 힘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그 힘을 얻고 난 후에는 더 큰 힘을 원하고…………. 그것은…………….. “
한빈 거사가 큰 소리로 웃더니 박 신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데리고 있을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신부님께서 감화시키신 모양입니다그려. 저렇게 거칠고 막돼먹은 놈을 이 정도까지 만들어 주셨으니, 신부님이야말로 세상에 다시없는 스숭이시군요.”
“별말씀을 부덕한 저를 어찌 …………….”
“신부님의 마음이 신부님을 그런 훌륭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가 있고, 옳다고 여기는 바가 있 는 만큼, 남에게도 그러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 법이죠. 비록 저 와는 믿는 바가 다르지만 요즘 흔히 보이는 믿음이나 생각을 가 지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자 신도 더욱 존중받지 않겠습니까?”
* 몸 주위에 공력을 서리게 해 자연히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튕겨 내는 힘, 공 격하는사람이 반탄력보다 공력이 낮을 경우 공격하는 힘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 는다.
한빈 거사의 말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들도 원래 그런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는 이해합니다만…………….”
한빈 거사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 었다. 그러다가 다시 엄숙한 얼굴이 되어서 아까 했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제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이 녀석의 상태가 위중해 서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신부 님, 철기와 은기라는 두 늙은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박신부는 눈을 크게 떴다. 한빈 거사도 철기옹과 은기에 대 한 일을 알고 있단 말인가?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빈 거 사는 그런 박 신부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을 했다.
“저도 마침 은기라는 늙은이의 청을 듣고 이 근방으로 왔던 겁 니다. 그리고 저 녀석이 들어가기 전에 제가 그 신사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저 녀석이 먼저 들어가서 일을 망쳐 놓았어요. 이번 일에는 큰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의 전모에 대해서는 대략 감이 잡힙니다만, 여러분께 말씀드린다고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요. 저도 사실은 어떻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한빈 거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한빈 거 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한빈 거사는 궁금해하는 박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신사를 잘 조사해 보시고 운주사로 가십시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한빈 거사는 이번엔 얼굴을 돌려 준후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겠니?”
“예? 예, 아…….”
준후는 놀란 눈을 껌벅거리다가 주술을 풀고 문을 열었다. 그 러자 한빈 거사의 모습은 문으로 빨려 나가듯이 없어져서 허공 속으로 사라진 양 보이지 않았다. 승희는 제대로 말도 해 주지 않고 그냥 자리를 떠 버려 안타까웠으나 그렇다고 끼어들 분위 기도 아니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여학생은 넋이 빠 진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박 신부가 중얼거렸다.
“운주사라…….”
박 신부의 눈이 현암에게 돌아갔고 현암도 눈을 빛내면서 뭔가할 얘기가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