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9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2 : 이지메
이지메
두 시간 남짓 지나 어느덧 비행기는 국제공항을 향해 하강하 고 있었다. 일행은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나리타 공항 청사 안으 로 걸음을 옮겼다.
박 신부는 트랩에서 내리면서 힐끗 일행들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현암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연희는 밝은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와 준후는 우울해 보였다. 게다가 준후의 눈 주위가 부어 있어 혹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어 물어보지는 않았다.
공항에는 사이토 보좌관과 도운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운은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 밀교에서 파견되어 이곳에 마중 나왔지만 애당초 퇴마사 일행과는 예전 초치검 사건 때 대 적했던 터라 반갑다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서로 서먹서먹했다. 도운은 큰 덩치를 움찔하면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일행들에게 합장으로 인사를 해 보였고, 사이토 보좌관도 깍듯하면서도 빈 틈없는 사무적인 자세로 일행에게 인사했다.
도운과 사이토 보좌관은 일행을 고급 차에 태워 도쿄에서도 최고급이라고 하는 ANA 호텔로 안내하였다. 세 개의 방을 예약 한 모양이었으나 준후가 현암과 박 신부와 같이 있겠다고 부득 부득 우겨서 결국 객실은 두 개만을 쓰기로 했다. 도운과 사이토 는 일단 여장을 풀고 저녁 무렵에 다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 누자고 약속하고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행이라고 해 봐야 기껏 두 시간 정도여서 특별히 가져온 짐 도 많지 않은 터라 굳이 여장을 풀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다 른 방에 든 승희와 연희는 샤워라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 만박 신부, 현암, 준후 세 사람은 별로 그럴 기분도 아니어서 무 료하게 앉아 있었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침묵을 깨려는 듯 현암이 슬쩍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요? 아직도 자세한 내용을 일러 주지 않으니 원…………… 저녁때까지는 그냥 이대로 기다리고 있으라는 건가요, 신부님?”
박신부는 특별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만 한 번 갸우 뚱해 보였다. 준후는 심심했는지 TV를 켜고 이곳저곳의 채널을 돌렸다. 현암은 시끄러울 것 같아 못 보게 하려다가 무료하게 앉 아 있는 것보다는 TV라도 보게 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잠자코 준후가 돌리는 TV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TV에서는 사람들이 왁 자지껄하게 이리저리 몰리다가 우르르 흩어지곤 하는 모습이 나 오고 있었다. 현암이 일본말을 조금 할 줄 아는 박 신부에게 물 어보았다.
“저건 무슨 프로지요?”
박신부는 화면을 슬쩍 보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퀴즈 프로인가 보군.”
세계 최대의 어쩌고 하는 퀴즈프로는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일 반적인 퀴즈프로와는 다르게 사람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정 답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그대로 두고 틀린 사람들은 탈락시켜 나가는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 나오는 것은 오랫동안 방영되었 던 퀴즈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 장면만을 편집해서 방송하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 사람 수가 줄어들자 장면이 바뀌었다. 장소를 옮 겨 다니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사람들은 제각각 여행 가방 을 들고 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열 명쯤 되는 인원 이 공항에 도착하자 진행자가 그 사람들에게 가위바위보를 시키고는 진 사람들을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현암은 어이가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후도 허망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다 가 현암에게 물었다.
“저게 뭐예요? 가위바위보해 가지고 그냥 탈락시키는 게 퀴즈예요?”
그러나 박 신부와 현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준후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TV로 시선을 돌렸다. 깔깔거리면서 떨어 진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잠시 나오다가, 곧 무대가 사막으로 바뀌었다. 아마 사막 한가운데 뿌려 놓은 쪽지를 주워 오게 한 다음 문제를 맞히게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무슨 퀴즈 대회를 저렇게 하나?”
화면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무더운 사막을 헉헉거리며 달려간 사람들은 탈진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문제를 맞힌 사 람들은 기뻐서 날뛰었지만, 문제를 맞히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세상을 다 산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힘들여 집어 온 쪽지에 ‘꽝’이라고 씌어 있기도 해서 험한 길을 걸어 문제를 다시 가져 와야만 했다. 계속 깔깔거리며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바라 보던 준후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나타난 장면은 더욱 가관이었다. 퀴즈에서 탈락된 사 람들에게 진행자가 뭐라고 말을 하자 그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퀴즈에서 탈락한 당신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무 슨 수를 쓰든 이 사막을 걸어서 빠져나오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의 탈락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그 후부터는 헬리콥터에서 카메라가 탈락한 두 사 람의 행적을 추적한 것을 하이라이트로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더운 사막을 헤매다가 점점 지쳐서 탈진 상태에 빠져들었다. 물 론 카메라가 잡고 있었으니 죽을 염려는 없겠지만 준후는 “어떻 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이따금씩 몸을 떨었다.
결정적인 장면은 그다음에 나왔다. 두 사람이 녹초가 되어 쓰 러지기 직전에 헬리콥터 한 대가 구조해 주려는 듯 그들 앞에 착 륙했다. 그런데 헬리콥터에서 내린 진행자가 그 와중에도 두 사 람에게 다시 가위바위보를 시키는 것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 긴 사람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헬리콥터의 줄사다리를 잡고 기어올랐지만 진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땅에 풀썩 쓰러지더니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말은 비웃음이 섞인 농담 투였다.
잠시 후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면서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보이 던 탈락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사람은 먼지와 눈물, 콧물 로 뒤범벅이 된 채 그때까지도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웃어 댔다.
준후의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현암의 눈에 들었다. 현암도 기분이 찜찜했다.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을 괴롭히는 이따위 프로가 공공연히 방송 되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연이 어 더욱 가관인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야자수가 무성한 것으 로 보아 남국의 어느 섬인 듯했다. 최종 탈락자에게 진행자가 조 그만 배 한 척을 주며,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하 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탈락자 는 바다에 배를 띄우고 열심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지?”
준후가 중얼거리는 사이에 확성기로 탈락자에게 외치는 소리 가 들려왔다. 확성기의 소리는 영어와 일본어가 번갈아 나와서 현암도 내용을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지금 당신은 영해를 침범했으니 출발한 장소로 즉시 되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상 식적으로 동력 장치도 없는 저런 조그만 배 한 척을 저어 왔다고 해서 영해 침범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 사람이 배를 타 고 노를 젓기 시작한 게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의 나라 영해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집요하게 머리 위를 날아다니자 그 사 람은 놀란 나머지 다시 죽어라 하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 데 그때 비행기가 한 대가 날아오더니 보트 옆에다 실제로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그것을 보고 배를 젓던 탈락자는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는지 뱃전에 쓰러졌고, 뒤이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화면 가득하게 들려왔다.
준후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본 현암 이 재빨리 TV를 꺼 버렸다. 준후는 한참 동안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준후의 입에서 간신 히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죠? 남을 괴롭히고, 그것을 좋아 하는 저 사람들은……”
채 말을 하지 못하는 준후를 보고 박 신부가 깊게 한숨을 쉬면 서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것을 가리켜 일본 사람들은 이지메라고 한단다.”
“이지메요? 그게 뭐죠?”
“글쎄, 우리말에 딱 맞는 단어는 없을 것 같구나. 뭐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여럿이서 편을 짜고는 약한 사람 하나를 골 려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 뭐 그런 뜻이지.”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약한 사람을 오히려 더 잘 대해 주고 보살펴줘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저런 식으 로 사람을 골리면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무 슨 심보죠? 난 이해가 되지 않아요. 도대체가 이건…….”
박 신부는 준후의 얼굴을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면서 살며시 준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바보 흉내를 내는 출연자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다거나, 바 보 같은 짓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골탕을 먹고 쓰러져 뒹구 는 것은 어떻게 보면 코미디의 한 정형이 아니겠니? 다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습관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 지. 일본 사람들은 약자를 용납하지 않아. 모두가 강해지기를 원 하지. 어린아이한테 혹독한 극기 훈련을 시키는 것도, 회사나 기 타 단체들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지. 그러니까 여럿이 모여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그들 구성원이 약해지지 않도록 부추기는 데서 시작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발상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고 또 변질되어…………….”
박신부는 말을 하다가 TV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까 같은 그런 프로그램이야 사람을 즐겁게 할 요량으로 연 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본 사회의 한 단면 이야 물론 문화라고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공손하고 싹싹한 일 본 사람들에게 저런 이중적인 감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우 리와는 많이 다르단다.”
“하지만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저건 일본 사람들 모두가 잘못 하는거라구요.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고 하면 그만큼 오래전부터 계속 잘못을 쌓아 온 거죠. 도대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준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래, 맞아. 분명 저들은 잘못하고 있는 거야.”
현암이 말하는 것을 보고 준후도 그만 조용히 입을 다물어 버 렸다. 그러고는 한쪽 구석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준후의 그 런 모습을 보고 있는 박 신부와 현암도 울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호텔의 객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승희와 연희가 떠들썩하게 들어왔다. 승희가 평상시보다 들뜬 목소리로 일행에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어디라도 돌아보도록 해요. 명 색이 외국인데, 구경이라도 한번 해 봐야 되지 않겠어요?” “글쎄, 조금 있으면 사이토 씨가 올 텐데…………….”
현암이 머뭇거리자 승희는 까르르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이토 씨가 올 때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잖아요. 그러니 이 근처라도 둘러보러 잠시 나갔다 오자고요.”
박 신부는 손을 흔들어 나가지 않겠다는 표시를 하고 창밖을 멀거니 내다보았고, 현암과 준후는 승희에게 반 강제로 끌리다 시피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그때 준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승 희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승희 누나, 저기 좀 봐요.”
“뭘?”
준후가 턱으로 살짝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자 그곳에서는 보통 체구에 회색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와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가 준후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특이한 점이라도 있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까 비행기에서 봤던 사람들이에요.”
“비행기에서 봤다고? 비행기에 한두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니?”
“저 여자아이가 자꾸만 날 쳐다봤거든요.”
“후후후.”
승희는 웃으면서 여자아이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여자아 이도 준후 쪽을 자꾸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승희는 속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 조그만 것들이 벌써부터 눈이 맞았나? 에고, 나도 주책이 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승희는 피식 웃으면서 여자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살짝 들여다보고는 준후에게 작게 귓속말로 그 내용을 말해 주 었다.
“저 아이 이름은 ‘아라’라고 하는데? 최아라. 그런데 말이지………”
“예? 그런데 뭐요?”
“저 아이는 너를 보고 참 신기한 별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아. 한복을 이렇게 치렁치렁하게 입고 나돌아 다니는 모습이 얼빠져 보인다는데? 그리고…………….”
승희는 제풀에 우스워서 말을 잇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 뜨렸고, 로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큰 웃음소리에 모 두 승희와 준후 쪽을 쳐다보았다. 준후는 승희의 이야기에 얼굴 이 빨개져서 쪼르르 도망치더니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뒤에서 “농담이야” 하고 승희가 크게 외 쳤지만 준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현암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승희가 다시 한번 크게 웃더니 준후는 그냥 두고 가자는 듯이 현암과 연 희에게 눈을 찡긋했다. 어느 틈에 그 여자아이와 중년 남자도 가 버리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