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2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5 : 명왕교의 반격

랜덤 이미지

퇴마록 혼세편 2권 2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5 : 명왕교의 반격


명왕교의 반격

“준후야! 무슨 일이니? 응?”

“어, 어…………… 연・・・・・・ 연희 누……..”

준후는 겨우 눈을 뜨기는 했으나 얼굴은 아직까지도 해쓱하게 질려 있었고 삽시간에 얼굴과 몸이 온통 땀으로 뒤덮였다. 준후 가 눈을 뜨자 주변에 휘몰아치던 알 수 없는 힘의 기운은 거짓말 처럼 사라져 버렸다. 준후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듯, 소매 속에서 벽조선을 꺼내더니만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준후야, 왜 그래? 뭐가 나왔니? 응?”

“이, 이건 도대체 말…………… 말도 안 되는…”

“무슨 소리야? 왜 그러는 거야, 응?”

준후는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리려다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 하고 땀투성이가 된 얼굴로 계속 사방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 는 준후의 입에서 새어 나온 한마디의 말이 연희를 경악하게 만 들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뭐라구? 어머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그렇지만……………,”

준후는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연희는 준후의 과거나 부모님에 대해 자세히 들은 바가 없어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했 지만, 지금 준후가 자신의 어머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아무 리 생각해도 전혀 뜻밖의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준후야,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어머니라니?”

“그, 그 가면 뒤로 어머니, 어머니가……………. 아아!”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준후가 갑자기 공중의 한 곳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저기! 저기!”

연희가 재빨리 준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빈 허공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연희 는 재빨리 예전에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이 새겨진 자신의 오른손 을 허공에 들이대 보았다. 그러나 손은 다만 허공을 가로질러 지 나갔을 뿐, 그 부적의 힘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준후는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악!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요!”

준후가 펄쩍 뛰더니 그만 풀썩 쓰러져 버렸다. 연희는 도대체 준후가 왜 그러는지, 준후만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무엇에 놀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준후야, 정신차렷!”

눈이 뒤집힌 준후의 몸에서 갑자기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준후의 팔다리가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자 연희는 급한 김에 자신의 오른손으로 준후의 눈을 가려 버렸다.

“보지 마! 보지 않으면 되잖아! 정신차려! 응?”

준후의 손에서 벽조선이 툭 소리를 내면서 땅에 떨어졌다. 연 희는 다급한 마음에 왼손으로 벽조선을 집었다. 연희가 벽조선 을 들자마자 벽조선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하고 흘러나오기 시작 했고 부채를 잡은 연희의 손끝에 짜릿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뭐야, 이건!”

짜릿한 느낌에 연희는 소리를 치며 벽조선을 무심코 집어 던 져 버렸다. 벽조선은 허공을 날다가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툭 하 고 부딪혔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방이 붉어지면서 이상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연희는 의외의 사태에 너 무나 놀라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붉어졌던 사방이 다시 확 하고 불이 밝혀지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허공에 떠 있던 벽조선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 의 일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연희는 더듬더듬 중얼거렸고 곧이어 무릎이 휘청하고 꺾이는 것을 느꼈다. 문밖에서는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반가운 목소리가 귓전 을 때리자 연희는 기쁜 나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준후의 목소리였다.

“헉……. 헉……. 이젠, 이젠 됐어요. 이제 조금 알겠어요……………”

“준후야, 괜찮니?”

“예, 고마워요. 연희 누나.”

해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현암은 차의 속력을 일부러 조 금 줄였고 옆자리의 승희는 좀 더 정확한 장소를 찾아내려는 듯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뒷자리의 도운만이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래도 수행을 쌓은 사람답게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다.

현암이 차의 속도를 줄이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차의 속도 도 덩달아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예상한 대로 이 차를 미행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고, 그렇다고 한다면 현암의 추측대로 길 을 잘못 들어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변가의 길로 접어든 지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도 눈에 띄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차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로 표지판을 도운이 신경을 쓰고 주 시했지만 특별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현 암은 옆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승희의 기색을 살폈다. 한참이 지나자 승희가 눈을 번쩍 뜨면서 외쳤다.

“여기야, 현암군! 차 세워!”

승희가 외치는 소리에 현암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끼 이익 하는 요란한 마찰음을 내면서 멈추어 섰다. 현암은 거칠게 차를 몰아 도로의 갓길에다 세웠다. 아무래도 좌측통행인 일본 의 운전 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차를 멈춰 세운 현 암의 눈에는 이렇다 할 만한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도운 도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승희는 입을 다물고 매서운 눈길로 한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저쪽이야.”

그러나 승희가 가리킨 방향에는 모래사장과 그 너머의 수평선 만이 보일 뿐이었다. 현암조차 고개를 갸웃하자 승희가 말했다. 

“건물이 아니야, 현암 군. 간신히 알아냈어. 이러니 명왕교의 행적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

“음,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럼 그들의 본부가 무슨 지하 비밀 기지에라도 있다는 말이니?”

“아니.”

승희는 고개를 저으며 살짝 웃더니만 매서운 표정으로 수평선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보여? 저게 명왕교의 근거지야. 놈들의 근거지는 저 배야.”

“배? 아니, 그럼 ・・・・・・・”

“틀림없어. 물 위에 있고 움직여. 사람들이 많이 탈 정도로 층 층으로 되어 있어. 명왕교의 주 사찰은 물 위에 떠서 움직이고 있는 저 커다란 배야. 그랬으니 경찰이건 어디에서건 아무 흔적 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현암이 나직한 한숨 소리를 냈다. 도운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따라오던 차가 멈춰 섰습니다!”

현암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쪽을 보 았다. 자신들의 뒤를 쫓던 차는 약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 있었고 막 그 차의 문이 열리면서 세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두 명은 남자였고 한 사람은 여자였다. 옆에 앉아있던 승희가 중얼거렸다.

“명왕교의 사람들일 거야. 저자들은 우리의 이름까지 알고 있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현암은 대답 대신 고갯짓을 한 번 해서 승희와 도운에게 차에 서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자신도 차에서 내렸다. 상대가 벌 써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곳에 온 목적이나 기 타 내용들 역시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자신들을 미행한 데에는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심해.”

나직한 목소리로 승희가 말하자 현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는 도운과 승희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손짓을 한 후 서서히 다 가오고 있는 저쪽의 세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 스즈키의 얼굴을 바라보던 박 신부는 다시 조용한 어조로 스즈키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스즈키 씨. 다카다 씨를 칠인방에서 몰아내고자 했을 때, 스 즈키 씨는 어떤 입장이셨습니까? 찬성하셨습니까? 듣자 하니 다카다 씨를 스즈키 씨가 위로하려고 하셨다고 해서 여쭙니다 …..”

스즈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찬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내 그 일을 마음 아파했지요.”

“다른 분들도 다카다 씨의 일을 마음 아파하셨습니까?”

“글쎄요, 다카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모두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요. 아무리 그래도 젊어서 고생을 같이한 사 이였는데…………..”

“흠…… 그럼 명왕교와 칠인방이 처음 연관을 맺게 되었을 때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군가가 자 금 지원 제의 같은 것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겝니다. 아무튼 무슨 계기가 있었으니 명왕교와의 관계가 시작됐겠지요.”

“명왕교도 일종의 종교 단체인데, 종교 단체에서 정치 단체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은 갖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우리 칠인방은 뜻은 높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모임이 었습니다. 때문에 정치 자금을 대 주겠다고 하면 종교 단체가 아 니라 아예 귀신들이라 했어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흠…….”

박신부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주제를 바꾸어서 물었다. 

“그런데 명왕교의 요구 조건이 어째서 이와마치 주변을 성역 화해 달라는 것이었을까요? 또 이와마치라는 곳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박 신부의 물음에 사이토 보좌관이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이와마치는 벳푸 부근에 있는 해변가의 작은 마을입니다. 특 별나다거나 구경할 만한 곳이 하나도 없는 곳이죠.”

“왜 명왕교는 그런 쓸모없는 곳을 이자나미 신의 성역화 장소 로 요구했을까요? 이자나미와 이와마치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박 신부는 사고의 초점을 명왕교 쪽으로 돌렸다. 명왕교는 밀 교의 여러 명왕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밀교의 한 갈래 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밀교에 뿌리를 둔 명왕교에서 일본 의 고대 신인 이자나미 여신의 성역화를 요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외래에서 들어온 대부분의 종교는 토착 신앙과 서로 영향을 끼치거나 받아서 발생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무 리 그렇다고 해도 명왕교는 종교 의례 때 노의 가면을 쓰는 등 일본적인 면모를 많이 띠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 요소가 너무 강한지도 몰랐다.

박신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런 박 신부의 얼굴을 말없 이 쳐다보고 있던 스즈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사 이토 보좌관이 재빨리 말을 옮겼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명왕교의 사람들은 이상한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토록 스즈키 선생님도 겁내고 계시구요. 이전에 칠인방의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것도 모두 명왕교의 소행이 틀림없을 거 라고 하십니다.”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증거 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명왕교에서 검은 그림자를 보낸 것이 분명할 거랍니다. 그러니 신부님도 조심하시고, 또 한 가지…………….”

스즈키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이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니 …………….”

박 신부도 스즈키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는 정색을 하고 귀를 기울이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솟아오르는 듯한 영기가 방 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잠깐!”

박신부가 스즈키의 말을 제지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 신부의 돌연한 태도에 스즈키와 사이토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뭔가가・・・・・・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듯한 기운은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어 딘지 음산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기운. 틀림없이 스즈키가 보 고 무서워하던 그 기운일 것 같았다.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 취로 느꼈던 기운과 거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 씬 강했다.

“제게 바짝 붙으십시오. 그리고 조심……..”

박신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아직 분명 대낮이었고 창문도 활짝 열려 있었는데 순식간에 온 방 안이 먹 장같이 캄캄해져 버린 것이다. 한 치의 앞도 볼 수가 없을 정도 로 캄캄했고 영기 또한 몸서리쳐질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박신 부는 처음에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둠의 힘. 박 신부의 입에서 크고 긴 호통 이 터져 나왔다.

“사악한 것들, 물러나라!”

고함 소리와 함께 박 신부의 몸에서 환하게 오라가 피어 나와 둥근 구체처럼 박 신부와 사이토, 스즈키의 세 사람의 몸 주변을 감싸자 주변은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사물과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지는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빛을 막아 어둡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박신부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데 맞은편에서 어두움이 마치 장 막처럼 일렁이면서 서서히 하얀 형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박 신 부는 긴장하여 조용히 숨을 내쉬면서 온몸에 기도력을 모아갔다.


연희의 비명 소리에 놀라서 문을 연 사람은 아까 연희와 준후 를 안내했던 온천장 주인이었다. 연희는 온천장 주인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며 대충 둘러말하고는 주인을 문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문을 닫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준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준후야? 괜찮다면 설명을 해주겠니?”

간신히 숨을 돌리고 난 연희가 벽조선을 집어 소맷자락 속에 넣고 있는 준후에게 묻자 준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연희 누나 누나는 지난번 세크메트의 대주술이라던 환영술을 기억하죠?”

“응? 그럼, 물론…….”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성질은 다르지만 오히려 그것보다 더 무서운 데가 있어요.”

“환영술이라면…… 너에게 어머니의 영상이 보였었니?”

준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시를 하자 흰 노의 가면이 보였어요. 그리고 그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죠. 제 어머님이라 했어요. 그러나 너무 끔 찍한 모습이었고…….”

준후가 말을 하다 말고 진저리를 쳤다. 잠시 후 준후가 연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 더 살지 못할 거고…………. 당신 손으로 저를…………….그런 말을…………..”

“저, 저런……..

연희는 무릎을 꿇고서 준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준후야, 환영일 뿐이야. 그런 일에 마음 쓰지 마. 알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희는 속으로 치를 떨고 있었다. 준후 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끔찍한 몰골을 하고 나타나서 기껏 한다 는 말이 자기 자식을 해치겠다니………….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는 얼마나 놀랐을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 어요. 그런데 그때 연희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던 거예요. 그래서 간신히 …………. 고마워요, 누나.”

“응, 그래그래.”

연희가 준후를 추슬러서 일으켜 세웠다. 연희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 준후는 흠흠 하며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여기엔 분명 아무런 영적인 자취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환영술을 펼칠 수 있었을까요?”

연희는 잠자코 준후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연희에게 도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었다. 바로 벽조선을 집어 던졌을 때 벽조선이 허공에서 뭔가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혔던 일이 었다. 그 일을 준후에게 이야기하자 준후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벽조선에 이상한 힘이 있어서 영과 충돌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놈은 달아난 거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영기를 느끼지 못했는걸요? 그리고 제가 본 것은 환영이었을 뿐인데……………

“환영은 영이 아닌가?”

“아니죠. 그게 정말로 환영이었다면 그건 제 오감을 마비시키 는 것뿐이지 외적으로 뭐가 보이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연희 누나의 말을 들어 보면, 제가 정신없었던 사이에 주변이 붉게 변 하고 벽조선이 뭔가에 맞아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면서요? 그렇다면………………”

준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얼까? 정령일까? 정령도 영기는 느껴지는데.”

“혹시 네가 정신이 없어서 영기를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닐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준후는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쨌거나 일본 밀교의 술법자가 투시를 하다가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이해할 것도 같네요.”

연희도 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환영이 자기 자 신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이 많고 경험 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나 쌓 아 온 업보가 클 수 있다. 따라서 반사적으로 그에 따른 충격도 더더욱 커질지 모른다고 연희는 짐작했다. 준후는 어린아이고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마음에 걸릴 일이 별로 없는데도 충격 이 이 정도라면.

“저는 어머니를 뵌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 죠. 제가 뵈었던 것은 아버지뿐인데……. 그것도 돌아가실 때에 나 알게 되었고 또…….”

중얼거리던 준후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면서 도 슬픈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듯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괜찮아, 준후야, 신경 쓰지 마. 응?”

“아무튼 환영을 본 것 자체보다는 그 환영이 아무런 기척도 없 이 다가오는 것이라 더 무서워요. 지금도 아무런 영기가 느껴지 지 않으니……..”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원래 행하려던 영사는 다 된 거니?”

“글쎄요. 다시 해 볼까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아니야. 안 하는 것이 좋겠어. 또 환영이 보이면 어쩌려구?” 

“흠, 글쎄요. 지금 제 능력으로는 이게 어떤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좀 더 연구해 본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도록 하죠. 그러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일단은…………….”

준후가 힘을 내는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연희는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풀어 주었던 그놈이나 잡으러 가요. 그놈에게서 뭔가 알 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가미 말이니? 그걸 무슨 수로 다시 잡아?”

“다 방법이 있지요.”

준후는 한쪽 눈을 깜박해 보이고는 문을 나섰다. 연희는 준후 의 속셈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준후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 었다.


현암이 아무 말 없이 뒤쪽의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을 향해 걸어 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현암을 앞질렀다. 도운이 었다. 도운은 현암을 앞질러 세우고는 자신의 앞에 선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표정으로 보아 도운은 그중의 한 사람을 알 고 있는 것 같았다.

앞의 세 사람 중 한 명은 도운만큼 덩치가 큰 남자였고 또 한 사람은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 또 한 사람은 사나워 보이는 인상 의 여자였는데 도운이 알고 있는 사람은 체구가 작은 남자 쪽인 것 같았다. 남자가 도운을 향해 뭐라고 빈정대는 투로 말하자 도 운이 노기를 터뜨렸다. 현암은 영문을 몰라 굳은 얼굴로 그 광경 을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승희가 소리를 쳤다.

“도운 스님하고 아는 사람은 전에 밀교의 승려로 도운과 같은 항렬이었는데 절을 뛰쳐나가 명왕교에 들어갔나 봐! 이거 재미 있네. 한 편의 드라마 같아.”

현암은 승희의 목소리가 너무 장난기 어린 것 같아서 힐끗 뒤 쪽의 승희를 향해 눈에 힘을 준 다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영적인 면으로 별로 발달하지 않은 현암으 로서는 앞의 세 사람의 몸에서 영기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지 만, 그래도 뭔가 분위기는 색다르게 보였다.

세 사람 중에서 사납게 생긴 여자가 도운이 떠들어 대는 소리 를 무시하고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너희들, 썩 꺼져라. 성역 부근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그리고 명왕교의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마라. 알겠나?”

“간섭할 만하니까 간섭하는 거지!”

현암의 뒤쪽에서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승희가 깔깔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현암과 도운은 물론이고 앞의 세 사람조차도 멍하니 승희에게로 눈을 돌렸다. 승희는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다가 여전히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현암에게 소리쳤다.

“호호호. 저 셋이 자칭 명왕교의 명왕 현신들이래. 호호호. 큰 남자는 부동명왕, 중간의 남자는 대위덕명왕, 그리고 ・・・・・・ 으하 하하… 저 여자는 애염명왕의 현신이래! 우하하!”

현암도 말을 듣고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승희의 앞에서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니? 그러나 그쪽에서는 승희와 현암이 뭔가 자신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소리를 질러 댔다.

“건방진 것들! 변변찮은 재주 가지고 조선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여기까지 와서는 오히려 우리를 비웃어? 너희들, 라가라쟈 분노를 당해 볼 테냐?”

현암은 조선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오자 눈을 부릅떴지만 승 희는 라가라쟈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오자 이제는 배를 잡고 자 지러질 듯 마구 웃어 댔다. 남들이 보면 저러다가 숨이 막히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 가자 스스로 부동명왕의 현신임을 자 임하는 뒤쪽의 덩치 큰 남자가 음 하면서 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현암에게 암암리에 보이지 않는 힘이 밀려왔다. 흔히 공 력이나 정신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보이지 않게 암경을 발동해서 상대에게 밀어 보내는 수법이었다. 그렇다고 현암도 그런 정도의 공격에 놀랄 사람은 아니었다.

현암이 곧바로 몸에 오성의 공력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현암의 몸에도 반탄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저쪽의 부동명왕의 현신이라 던 남자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자의 공력 수준은 와불 사건 때 겨뤄 봤던 임악 거사 정도였다. 현암 이 씩 웃으며 속으로 혼 좀 나 봐라 하는 생각으로 단번에 공력 을 십성으로 끌어 올리자 그자는 으악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뒤 로 허공을 붕 날아 우당탕 소리를 내며 땅에 나뒹굴었다.

그것을 보고 승희는 더욱더 큰 소리로 깔깔깔 웃어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칙쇼! 이것들이!”

대위덕명왕을 사칭하는 몸집이 작은 자가 현암에게 달려들려 고 했으나 도운이 재빠른 동작으로 그 앞을 막고 섰다. 도운이 품에 감추고 있었던 듯 지난번 초치검 사건 때 선보였던 쇠철추 를 꺼내어 들자 대위덕명왕을 사칭하는 자는 목도를 뽑아 들고 맞섰다.

땅에 나뒹굴었던 몸집이 가장 큰 자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 으키더니 허공에 대고 큰 기합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자의 손 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대수인(手印)? 저건 티베트 밀교의 수법이 아닌 가?’

그 순간 크게 부풀어 오른 손 그림자가 현암에게 닥쳐왔다. 현 암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그 손을 노려보더니 몸에 힘을 주어 태극기 중의 ‘나’ 자결로 그 힘을 밀어냈다. 두 사람의 손 바닥이 마주 닿자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현암의 어깨가 조금 흔 들렸고, 상대는 눈에 띄게 몸을 비틀거렸지만 입을 꾹 다물고 버 티고 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경련 을 일으켰다.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는 여자는 노기를 띠고서 승희를 향해 달 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승희는 달려드는 상대를 전혀 신경 을 쓰지 않는지 차에 기대어 턱을 괸 채 어지럽게 다투고 있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잘들 한다…………….. 재밌는데?”

승희의 그런 태도를 보고 여자는 달려들던 걸음을 멈추고 수 인을 맺으면서 노기 띤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 자 여자의 손에서 불길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야, 재미있다. 너도 재주가 많구나. 근데 그걸로 뭘 어쩌려구?”


* 내공의 힘으로 손을 크게 부풀게 만들어 강력한 파괴력을 내게 하는 일종의 장 법(掌法),


승희가 여전히 손으로 턱을 괴고 차에 기대어 서서 재잘거리 는 사이에 승희에게 다가서던 여자가 주술을 쓰려고 주문을 외 우는 것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현암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사람에게 함부로 주술을 쓰려는 여자가 못마땅했을 뿐 아니라, 별다른 힘이 없는 승희가 주술을 받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현암은 단번에 상대를 떼어 버릴 생각으로 운용하고 있 던 ‘나’ 자결을 ‘발’ 자결로 바꾸고 극도의 공력을 단번에 상대에게 쏟아부었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리면서 자칭 부동명왕의 현신이라는 덩치 큰 남자는 또다시 허공을 부웅 날아서 땅바닥에 틀어박혀 버렸다. 현암도 단번에 공력을 쏟아부은 탓인지 손목과 어깨가 뻐근했 다. 현암이 다소 힘에 겨운 것으로 보아 부동명왕의 현신이라 자 처하는 상대의 술수도 그리 녹록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자가 아무리 날고 기는 밀교의 술수로 수련을 했다고 하더라도 일 갑자도 넘는 칠십 년의 공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현암의 상 대가 될 수는 없었다.

현암이 몸을 돌리면서 힐끗 옆을 보니 도운과 대위덕명왕은 한창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가지고 싸우기 는 해도, 둘의 무기에 살기는 실려 있지 않았다. 현암은 그것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현암이 승희에게로 달려가기 위해 막 몸을 돌리고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는 여자가 승희를 향해 뭐라고 고함을 크게 질렀다. 그러자 미친 듯 한불줄기의 기운이 승희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앗! 승희야!”

현암이 고함을 치면서 급한 김에 월향을 날리려고 왼팔을 치 켜들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승희에게로 달려들던 그 불길 모양의 주술이 승희의 몸 근처에 이르자 휘르륵 흔적도 없 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현암은 놀랍기도 하고 영문도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했지만 현암의 그런 태도도 아랑곳없다는 듯 승희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자세로 차에 기댄 채 턱을 괴고 비웃 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했냐?”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는 여자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몸까 지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 는 주술이 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듯 물러서는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고 휘청거리기 까지 했다.

“안됐구나. 그런데 재미없었어. 또 다른 것 없니?”

승희가 약을 올리는 소리를 듣고 그 여자는 이를 부드득 갈며 재차 공격하기 위해 수인을 맺으려는 찰나, 승희의 입에서 벼락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 썩 무릎을 꿇어!”

승희가 내뱉은 고함이 한국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갑자기 털썩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을 보고 현암은 영문을 몰라 깜짝 놀랐고 뒤쪽의 도운과 대위덕까 지도 싸우던 동작을 멈추고 승희를 쳐다보았다.

“네 따위 게 무슨 힘을 가지고 감히 누구에게 덤비겠다는 것이냐?”

현암의 귀에는 승희가 내뱉는 호령이 평소 승희가 하는 말과 는 다르게 들렸다. 순간 뭔가가 현암의 뇌리를 스쳤고, 입에서 가벼운 감탄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그렇군. 애염명왕의 화신인 승희에게 애염명왕의 주술 을 쓰는 것이 먹혀들 리가 없지. 저 여자는 애염명왕을 섬겨 왔 을 터이니 당연히 꼼짝 못하는 것이겠구나. 조금 우습게 되기는 했지만, 잘만 하면 일이 훨씬 빨리 풀리겠는데?’

현암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승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염명왕의 화신이라는 여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멍한 눈으로 승희를 쳐다보고 있던 도운과 대위덕명왕의 현신도 어느새 싸움 을 그치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박 신부는 눈을 크게 뜨고 어두운 저편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둠을 장막을 걷어 내듯 천천히 나타나는 그 흰 형체를 노려보면서 박 신부는 몸의 기도력을 끌어 올려 오라로 사이토와 스즈키를 포함하여 자신의 몸까지도 수호했다.

어둠 저편에서 일렁이던 흰 형체는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소리 를 내며 조금씩 형상을 맺어 갔다. 그 모습은 점차 뚜렷하게 바 뀌더니 놀랍게도 하나의 커다란 사람 얼굴 모양의 형체를 만들 어 냈다. 말로만 들어 오던 노의 흰 가면이었다.

“으흐…으으으….”

반쯤 울음이 섞인 듯한 스즈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 신부는 스즈키가 그 광경을 보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얼른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절대 보면 안 돼요! 두 분 다 눈을 감으시오!”

그러나 스즈키는 박 신부가 외치는 소리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박 신부는 스즈키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 고는 얼른 한쪽 손으로 스즈키의 눈을 가려 주었다. 스즈키의 눈 을 가리고 있던 박 신부가 옆에 있는 사이토의 얼굴을 힐끗 쳐다 보았다. 사이토는 멍하니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흰 가면의 얼 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가면은 마치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스스로 젖혀지더니 뒤 편으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윤곽이 뚜렷한 게 아니라서 구 체적으로 사람 얼굴이라고 장담할 순 없었지만 그러한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어 왔다. 가위에 눌렸을 때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솟아 나오는 공포와 비슷한 것이라고나 할까? 박 신부는 숨을 죽이고 당장 힘을 써서 물리쳐 버릴까 하다가 잠시 모습 을 주의 깊게 보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면의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 작했다. 박 신부는 침착하게 그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박 신 부가 사이토에게 어서 눈을 감으라고 다시 한번 소리를 치려고 하는데 옆에서 사이토가 짐승이 내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사이토가 미친 듯이 일본말로 중얼거리면서 비명을 지르며 몸 을 뒤틀어 대는 모습에 박 신부는 얼떨결에 다른 한 손으로 사이 토의 뒷덜미를 잡아채고는 뛰쳐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이토가 비명을 지르자 스즈키도 소리를 질렀다. 스즈키가 내지르는 소 리가 무슨 뜻인지 박 신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중간중간 ‘오 키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 자기 딸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덩치가 크고 나이에 비해 뚝심이 꽤 좋은 편이었지 만 발버둥 치는 두 사람을 붙들고 있기에는 힘이 부쳤다. 그렇지 만 박 신부는 두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친화력의 오라를 발동 하여 두 사람의 몸을 지켜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눈을 크게 뜨고 가면 뒤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얼굴을 이를 악물고 바라보 았다.

먼저 하얗고 창백한 뺨이 나타났고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면 뒤에 숨었던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박 신부는 그 나타난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놀라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 신도 모르게 헉하며 비명 소리를 냈다.

“너, 너는……………. 네가 도대체 어떻게………….”

가면 뒤에서 나타난 창백하고 파리한 표정의 얼굴. 그것은 바 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박 신부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의 딸 미라의 얼굴이었 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납빛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미라는 온통 피로 얼룩진 것 같은 붉은 눈과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띤 입을 하고 박 신부의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박 신부는 눈을 부릅뜨 고 그러한 미라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라, 넌…….”

“난, 난 어디든지…….”

“신부님이 있는 곳이면 난 어디든지 가요. 왜 그때 나를 살려 주지 못했죠? 어째서…………….”

박 신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라의 눈과 입에서 붉은 피 가 주르륵 흘러내려 옷자락을 선명한 붉은 무늬로 적셨다. 미라 는 그런 모습으로 양손을 앞으로 쳐들고 박 신부를 향해서 조금 씩 다가왔다.

“신부님이 대신 죽어요. 대신!”

박 신부는 눈을 빛내면서 다가오는 미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미라가 박 신부에게 다가오면 올수록 그 얼굴은 점점 창 백하게 변해 갔다. 눈과 입에선 계속 피를 뿜어 댔고 자그마한 손가락은 뻣뻣하게 앞으로 뻗어 나오며 박 신부의 얼굴을 쥐어 뜯으려는 듯 조금씩 다가섰다.

미라가 박 신부를 잡을 수 있을 만큼까지 다가왔을 때, 박신 부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사악한 것! 썩 없어져!”

박 신부의 호통 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박 신부의 기도력이 강력하게 뻗어 나가 박 신부에게 다가오고 있 던 미라의 환영을 덮쳤다. 미라의 환영은 공중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나를 나를 두 번 죽이려구……………..”

“너는 미라가 아니야! 미라는 나를 신부님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어. 나는 그때 의사였고. 그리고 미라는 죽어 가면서 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어. 죽는 순간까지 나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단 말이야. 너는 거짓된 환영이고 잘못된 영상일 뿐이야. 감 히 선하게 잠들고 있는 아이의 영혼을 사칭하다니! 어서 썩 사악 한 형체를 드러내랏!”

박 신부는 단숨에 소리치면서 기도력을 배가시켰다. 그러자 미 라의 모습은 크게 출렁거리면서 짓이겨지듯 꿈틀거리더니 이상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펑 하는 섬광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캄캄해졌던 방 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도망쳐 버렸군.”

박 신부가 씁쓸하게 말하며 그때까지 무의식적으로 꽉 움켜 쥐고 있던 스즈키와 사이토를 풀어 주기 위해 손에서 힘을 뺐다. 스즈키는 박 신부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풀어 주자 흐흑거리면 서 주저앉았으나 사이토는 박 신부가 덜미를 잡은 손을 풀자마 자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아, 이런! 사이토 씨, 사이토 씨!”

박신부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를 듣고서 그제야 바깥에서 우 르르 거한들이 들어왔다. 박 신부는 의아한 눈으로 거한들을 살 펴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까는 무슨 주술적인 결계가 쳐져 있었는지 안에서 내지르는 소리가 바깥으로 하나도 전달되지 않 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지금 박 신부가 사이토를 부르자 그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 같았다. 스즈키가 그동안 환영을 보 아 온 것도 이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옆에 경비원이 있 다 해도 껴안고 있지 않는 한 환영은 얼마든지 스즈키에게만 영 상을 만들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박 신부의 오라가 스즈키를 감싸고 있었기에 박 신부에게도 그 환영이 보인 것일 테지만………………

‘이런 판국이니 아무리 가까이에 경호원들을 많이 둔다 한들 하나도 도움이 될 리가 없지.’

박 신부는 사이토의 눈을 까뒤집고 안색을 살펴보았다. 사이 토는 눈동자의 초점을 잃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박 신부는 사이토의 맥을 짚어 보았다. 몹시 약하고 불안정했다. 도대체 무 엇을 보았기에 멀쩡하던 사람이 삽시간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박신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군. 내가 오라로 수호하고 있었으니 영적인 타격을 가 하지는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것 일까? 그런데 미라의 영상을 보고 사이토가 왜? 흠, 도대체 이건….’

박신부가 중얼거리면서 사이토의 호흡을 편하게 해 주기 위 하여 단추를 끄르고 있는데, 경호원들을 제치고 누군가가 앙칼 진 울음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스즈키가 오키에 라고 소리치면서 울면서 달려 들어오는 여자아이를 꼭 끌어안는 것이 보였다.

‘오키에 스즈키의 딸이로구나.’

박신부는 중얼거리면서 슬쩍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고 귀여운 오키에는 머리를 뒤로 질끈 동 여매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에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잔뜩 얼 룩져 있었고 얼굴에 얼핏 멍 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박 신부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통역을 맡은 사이토가 정신을 잃은 마당이니 오키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박 신부는 달려온 의사에게 잠자코 사이토를 넘 기고 스즈키의 옆에 조용히 섰다.


온천장 밖으로 나온 준후가 영문을 몰라 하는 연희와 함께 찾 아간 곳은 근처에 있는 숲이 우거진 작은 공원이었다. 준후는 연 희에게 별 얘기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한복 자락을 휘날리면서 공원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들락 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꽤 있었는데, 그 지나가던 사람들이 준후를 한 번씩 힐끗거렸다. 그러나 준후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계속 공원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감이 잡히는 것이 있 는 듯 씩 웃으며 뒤따라오던 연희를 쳐다보았다.

“찾았어요.”

“찾다니? 무슨 말이지? 아까 도망쳤다고 한 가미인가를 잡으 러 가는 게 아니었니?”

“네, 맞아요.”

“그 가미가 이 공원에 있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인데?”

“그런 것 같아요.”

“어. 그래?”

“아까 제가 잡았을 때 그놈의 기운에다가 약간의 힘을 보태서 표시를 해 놓았죠. 그러니까 영적인 표시라고나 할까요? 그놈은 공원의 숲 속 어딘가 나뭇등걸 같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 정령 같은 것이 정말로 있기는 있나 보구나. 하지만 이 런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 있을 줄은…….”

준후가 숲 속의 나무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막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잠깐만.”

들려온 목소리는 앳된 여자아이의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한국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준후와 연희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 다. 거기에는 준후와 연희에게 낯익은 여자아이가 생글생글 웃 으며 서 있었다. 비행기와 호텔, 그리고 노 극장에서 보았던 아 라였다.

“한국에서 오시지 않았어요?”

아라가 준후의 앞쪽으로 타박타박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준 후는 왜 아라가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고 신기하기도 했으나 대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연희는 그런 준후를 바라보고 싱긋 미소를 짓더니 아라에게 말했다.

“반갑구나. 너도 한국에서 왔지?”

“예, 언니, 이 오빠가 한복을 입고 있어서 눈에 띄어서요. 안녕, 오빠? 이름이 뭐야?”

“나? 응. 난・・・・・・..”

준후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만 꿀꺽하고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대답을 했다.

“난 준후라고 해. 너는 아라 맞지?”

“어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준후는 속으로 아차 싶었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꼬마 아이는 더 귀엽고 조금은 고집이 셀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장난기 어린 발걸음으로 준후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준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헤헤. 오빠 옷 멋있다아. 귀여워………”

“응? 뭐? 귀엽다고? 어험어험…………..”

“한복 입고 있으니까 특이해 보여. 근데 오빠,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으응?”

“응……. 그건 그러니까………………”

준후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연희가 살짝 웃으면서 아라에게 말해 주었다.

“호텔에서 우리가 잠깐 봤을 때 이름을 알게 되었단다. 정식으 로 인사하자꾸나. 나는 서연희라고 하고 이쪽은 장준후라고 한 단다. 준후는 올해 열다섯 살이지.”

“아, 그래요? 제 이름은 최아라라고 하고 올해 아홉 살이에요. 많이 귀여워해 주세요.”

연희는 그렇게 말하는 아라가 귀여워 밝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준후는 어색한지 자꾸 쭈뼛거렸다.

“준후야, 인사하렴.”

준후는 연희가 이야기하자 마지못해 아라에게 고개를 꾸벅해 서 인사를 했다. 아라는 준후가 인사를 하자 손뼉을 치고 팔짝팔 짝 뛰면서 까르르르 웃어댔다.

“하하, 재밌다아. 심심했는데 말 통하는 오빠랑 만나니까 너무 좋아. 나랑 놀자아, 오빠아? 응?”

“응? 놀다니?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 그러지 말고 나랑 놀아. 응? 우리 아빠는 일 때문에 바쁘다면서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는걸, 뭐.” “응. 참……. 넌 아빠랑 같이 왔지.”

준후가 부끄럼을 타는지 멋없게 중얼거리자 연희가 대신 아라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아빠는 어디에 계시니?”

“공원 저쪽에서 손님 만나고 계셔요.”

아라는 연희에게 애교스럽게 웃어 보이고는 준후의 소맷자락 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준후는 여자아이가 이러는 것을 본 적 이 없어서인지 절에서 자랐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얼굴까 지 빨개져서 쩔쩔매고 있었다.

“너무 재미없어, 치. 나랑 놀아 응? 아, 참! 오빠 나랑 같은 호텔에 있지? 이따가 놀러 가도 돼? 응?”

“아, 아니, 우리는 이쪽으로 호텔을 옮겼어. 우린 여기 벳푸로 옮겨서 …………. 아이고…………….”

“치이. 오빠 왜 그러는 거야?”

준후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처럼 아라한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준후의 모습이 우스워 연희가 깔깔거리며 웃자 준 후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연희는 간신히 웃음을 멈 추고 살짝 윙크를 했다.

“그런데 아라야. 지금 우리는 여기서 해야 될 일이 있단다. 나 중에 놀면 안 될까?”

“안 돼요 안돼! 왜 간다는 거야. 만나자마자 이런 게 어딨어? 히이잉…….”

아라는 귀엽게만 자라서 그런지 버릇이 없어 보였지만 투정 을 부리는 게 밉지만은 않았다. 준후가 당황해서 어떻게 하면 좋 겠느냐는 듯한 간절한 표정으로 연희를 자꾸 쳐다보아도 연희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준후는 아라를 달랬다. 

“아라야, 우리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안 되겠다. 응?”

“싫어, 싫어! 안 돼 안 돼! 오빠가 무슨 어른이라고 중요한 일 이 있어? 나랑 놀아. 응?”

“아이구, 이거 참…….”

준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아라가 토라진듯이 눈을 샐쭉이 뜨더니 볼멘소리로 준후에게 말했다.

“그러면 약속해. 내일도 이 공원으로 나오겠다고. 응?”

“응? 내일?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잘……………”

“으아아앙! 싫어, 싫어!”

아라는 이제 떼를 쓰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기세였다. 준 후는 놀라서 말마저 더듬거리며 아라를 달래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준후는 웃고만 있는 연희가 원망스러운 듯이 자꾸 그쪽 을 바라보았지만 연희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울지 마! 내일 시간이 되면…… 아니, 아니・・・・・・ 시간이 안 돼도 꼭! 꼭 올게!”

“으아아앙! 내일 언제? 으아앙!”

“꼭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제발 울지 말고, 응? 제발 좀! 아이고, 제발 좀! 그만 울어! 더 이상 어떻게 하라고 그래! 으으……”

준후도 울기 직전이었다. 그러자 아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엽게 헤헤 웃으며 준후에게 말했다.

“약속했어. 알았지?”

“으, 응……..”

“그럼 내일 봐? 응?”

“으응……..”

“안녕! 헤헤…..”

그제야 아라는 손을 흔들면서 쪼르르 공원 저쪽으로 달려갔다. 준후는 그러한 아라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었고 연희는 그때서야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웃어댔다.

“연희 누나,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나는 도대체 …………. 아무튼 여자들은 도대체 왜 저 모양이지.”

“여자들이 뭘! 내가 보기에는 귀엽기만 하던데.”

“정말로 여자들은요……. 아니에요.”

준후는 말을 하다 말고 연희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연희는 그런 준후가 여전히 귀여웠다.

“나이는 열다섯이나 먹었어도 순진하기 짝이 없어. 아무튼 저 아라라는 애도 대단하구나.’

연희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준후가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자자, 어서 그놈이나 잡으러 가요. 네?”

“응. 그래 알았어.”

준후는 또다시 아라가 따라올까 봐 무서워서인지 재빨리 연희의 옷소매를 잡고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