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3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6 : 숨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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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2권 3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6 : 숨은 인물


숨은 인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 박 신부는 손짓 발짓으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나가려고 했으나 스 즈키는 박 신부를 붙들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스즈키가 무어라 고 말하는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아마도 그 영상이 나타냈던 것 을 막아 준 박 신부를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매정하 게 떨쳐 버릴 수도 없고, 또 직접 영상을 보고 나니 섬뜩한 느낌 도 지울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계속 머물기로 했다. 현암이나 준 후 쪽과 계속 연락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사이토가 쓰러져 서 옮겨지는 통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휴대 전화 가 없어지면서 연락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어도 하지 못 하는 스즈키와 의사소통이 안 돼 다른 사람들을 찾았으나 경호 원들은 로봇처럼 입을 꼭 다물고 대꾸도 하지 않아, 말이 통하는 지 통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박 신부는 스 즈키의 옆에 주저앉아 그의 동태를 살폈다.

스즈키는 박 신부의 눈을 피해서 간간이 무언가를 코에 대고 있었다. 코카인으로 보이는 마약을 흡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말릴까 생각했지만 중독성이 강하지 않은 코카인을 사용 하는 것이 지금의 악몽 같은 기분을 겪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스즈키는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옆에 있던 경호원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고 다시 불러오기도 하면서 오락가락했다. 스즈키의 딸 오키에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바늘방 석에 앉은 기분으로 버틴 후에야 박 신부의 답답함은 야마모토 라고 자신을 밝힌 의사가 들어옴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그 의사 와는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사이토 씨는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다지 위중하지 는 않을 것입니다. 심리적인 쇼크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박 신부는 야마모토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내용을 설명해 주어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공연히 불안감만 가중시킬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자 마약 기운이 퍼졌는지 스즈 키는 곯아떨어졌다. 박 신부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방 한구석에 있는 작은 탁자에 야마모토와 함께 앉았다. 마침 바깥에서 준비 해온 커피와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면서 박 신부는 야마모토에 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코카인을 흡입하는 것 같던데요.”

“제가 권했습니다. 할 수 없었지요.”

예상 외로 명쾌한 야마모토의 대답이었다. 박 신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로 이겨 내야 한다는 것이 박 신부의 생각이었지만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기가 싫어서였다.

“오키에 양은요?”

“오늘 아빠를 보고 싶다고 잠시 온 것이랍니다. 지금은 돌아갔”지요.”

“어디로요? 집으로?”

“그렇겠지요. 오키에의 운전사는 말이 없지만 충직한 사람이 니까요. 어려서부터 내내 오키에를 데리고 다녔지요.”

“야마모토 씨는 스즈키 씨의 주치의인 것 같으신데 ………”

“그렇습니다.”

“스즈키 씨와 알게 된 지는 오래되었습니까?”

“십오년,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군요.”

박 신부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정리되 지 않은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뇌리에 되살아났고 박 신부는 그 것들을 신중하게 곱씹어 보았다. 저쪽에서 스즈키의 코 고는 소 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부동명왕의 현신임을 자처하던 자와 대위덕명왕의 현신임을 자처하던 자두 사람 모두 얼이 빠진 것처럼 현암과 승희, 그리 고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던 여자가 꿇어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 라 있었다. 승희는 여전히 차에 기대어 턱을 괴고 선 채 피식피 식 웃고 있었고, 현암은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는 여자를 위아래 로 훑어보고 있었다.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을 제외하면 별반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수수하게 생긴 여자였다. 여자는 승 희의 입을 통해서 나온 애염명왕의 호통 소리를 듣고 나서는 그 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 도 움직이지 못한 채 눈을 꼭 감고 식은땀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 다. 현암 쪽으로 다가온 도운이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 더니 현암에게 말했다.

“방심하지 맙시다. 저들이……………..”

현암이 끄덕해 보이고 고개를 돌리는데 저만치에서 부동명왕 의 현신이라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도운 이 눈을 치켜뜬 현암에게 통역해 주었다.

“도대체 무슨 사악한 술수를 부렸느냐고 하는군요.”

현암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에게 다짜고짜 주술을 부리려던 자들이 도리어 사악한 술수를 부렸다고 성토해 대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현암은 영어로 이제 그만 꺼지라고 소리쳤 다. 그러자 그자들은 몸을 움찔하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슬슬 앞 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위덕명왕을 자칭하던 자가 손에 들 었던 목도를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러자 나무로 된 날 부분이 쑥 빠지면서 예리한 칼날이 드러났다. 목도의 날 부분은 실은 칼 집이었고 아주 가늘고 예리한 연검이 안에 갈무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자는 부동명왕이라는 자와는 달리 나직하게 뭐라고 말을 했는데 현암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 는 승희가 그자의 마음을 읽어 낸 듯, 현암에게 좀 귀찮다는 말 투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저 여자를 빨리 내놓지 않으면 사생결단을 내겠대. 사생결단 은 지네들 혼자서 하나………………”

부동명왕을 자칭하던 자도 협박하듯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붕 붕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아까 현암과 겨룰 때보다 더욱 크 게 손이 부풀어 올랐다. 그자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그것을 뿌리고 문질렀다. 그러자 안 그래도 커져서 징그러운 손이 보라 색으로 물들어 갔고 도운이 눈을 찡그리면서 현암을 돌아보았다. 

“저자가 독을…”

도운이 조금 꺼림칙한 기색을 보였지만 현암은 흠 하고 짧은 신음 소리를 냈을 뿐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승희가 옆에 서서 예의 귀찮은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 여자를 그냥 내주면 안 될 것 같아. 재미있잖아? 이 여자 지위가 상당한 것 같은데……………. 명왕교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순순히 털어놓을까?”

현암이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말을 안 한다고 고문이나 협박을 할 퇴마사들이 아니었으니 말을 안 해 버리면 도리가 없었다. 승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얘는 이제 내 밥이야. 꽤나 오래 수련한 것 같은데……………. 임자 만났지 뭐. 아무 염려 없어. 이젠 내 말 잘 들을 테니까 염려 마. 저 이상한 작자들이나 어서 쫓아내. 문제없지, 현암 군 실력이 면?”

현암은 어이가 없었으나 각오를 하고 다가오는 저들에게 무슨 조치를 취하기는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이 통하는 것 도 아니고…………. 현암은 주먹질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현암이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두 서너 발자국을 옮겨 앞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위덕명왕 이 차라랑 하는 맑은 소리를 내는 연검을 휘두르며 현암에게 달 려들었고, 부동명왕도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들었다. 현암이 숨 을 깊이 들이마시고 손에 공력을 모아 가는데 도운이 무슨 말인 가를 중얼거리면서 먼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아까 승희가 말한 대로 대위덕명왕과는 과거에 사이가 무척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도운은 대위덕명왕이 뱀처럼 구불거리면서 찔러 오던 연검을 철추를 휘둘러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연검 은 도운의 철추의 줄을 거침없이 잘라 버리고 지나갔고, 도운의 철추는 그대로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쿵 하면서 박혀 들어갔다.

놀란 도운이 품에서 과거에 톡톡히 위력을 보였던 슈리켄(표창) 몇 개를 꺼내어 휙 하고 던졌으나 대위덕명왕은 재빨리 몸을 날 려 공중제비를 넘으면서 피했다. 도운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남아 있던 철추의 줄을 쇳소리도 요란하게 돌리면서 대위덕 명왕에게 달려들었다.

현암은 연검을 자유로 사용하는 대위덕명왕이 아무래도 도운 에게 힘겨운 상대 같았지만, 일단 붙은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어 서 부동명왕 쪽으로 공격을 돌렸다. 그자는 기합 소리를 요란하 게 지르고 붕붕 소리가 나도록 허공에 손을 휘두르면서 현암에 게 달려들었다. 현암은 아까 도운에게서 그 손에 독이 발려 있다 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함부로 접근하지 않고 일단 손동작을 자 세히 보면서 일타를 날릴 작정이었다. 그자의 장법(掌法)은 상당 히 조예가 깊은 듯, 어디 한 군데를 뚫고 들어갈 곳이 없었다. 부 동명왕은 아까 현암에게 당하고 난 뒤에 조심하는지 빈틈없이 손을 휘둘러 손 그림자로 온몸을 감싸면서 현암에게 공격을 가 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사실 현암은 태극기공과 파사신검 이외에는 특별한 무술을 배 워 본 적이 없었다.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계 체조로 몸이 단련된 덕이고, 검술을 익히느라 몸놀림이며 눈썰미 같은 것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정식으로 손과 발을 이용해 서 싸우는 방법에는 큰 장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칠십여년의 내력이 실린 현암의 일격을 받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막거 나 피하려 해도 ‘투)’자 결이나 ‘발’ 자 결의 힘을 버티어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렇게 독 기운을 손에 바른 상대 에게 맨손으로 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손발을 놀리 지 못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렇다고 전설에서나 나오는 장풍 같은 방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한 가지 있다. 면 ‘탄(彈)’자 결뿐인데 저자가 ‘탄’ 자결을 버틸 정도의 실력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현암은 수련중에 ‘탄’ 자결의 위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측정 해본 일이 있었다. ‘탄’ 자결 한 방에 물을 가득 담은 큰 철제 드 럼통이 앞뒤가 관통되면서 사정없이 찌그러져 버리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현암은 ‘탄’ 자결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탄’자결의 한 방은 총알보다도 위력이 셀 뿐만 아니라, 수류탄과 맞먹을 만한 파괴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무예로 단련되었더라도 사람의 몸으로 그것을 막아 낸다는 것은 상식적 으로 불가능했다.

현암이 당혹스러워하는데도 승희는 파이팅 어쩌고 하면서 태 연자약하게 킥킥거리고만 있었다. 현암은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 고 뒤를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월향검을 빼 어 들었다. 반은 협박이라고나 할까? 현암이 월향검을 빼 들자 월향검이 낮지만 날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자가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부동명왕과 대위덕명왕은 현암이 뽑아든 월향검을 보고 시선 을 주고받더니 안색이 파리하게 변하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 다. 현암은 그런 그들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꼿꼿이 선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는 애염명왕을 구할 생각도 않은 채 그 대로 뒷걸음치더니 차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현암은 구태여 그 들을 추적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뒤에서 승희의 목소리가 현암의 귓가에 종소리처럼 크게 울려왔다.

“혀, 현암군! 저들이 월향검을 알아봤어……………”

“뭐? 월향을 알아본다구? 어떻게?”

“몰라, 그 칼은 여인의 영이 봉인된 것이고 세상에 둘도 없이 무서운 것이라 자신들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교주 님만이 대항할 수 있을 거래. 그리고…….”

“교주 교주면 대항할 수 있다고?”

“저들은 월향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어. 그리고 월향의 내력 에 대해서도!”

웬만한 일로는 감정의 반응을 잘 드러내지 않는 현암의 얼굴 에 크게 격동의 빛이 일면서 눈이 크게 떠졌다. 타는 듯한 현암 의 시선을 보면서 승희는 야릇한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갈등 같은 것을 마음속에서 느꼈다.


숲 속에 숨어 있다는 가미를 찾아 나뭇등걸 사이를 헤매던 연 희와 준후는 뜻하지 않게 경비원의 제지를 받게 되었다. 잔디와 나무를 곱게 길러 놓은 정원 사이를 마구 돌아다니는 그들이 사 진 찍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관광객 정도로 보인 모양이었다. 정 말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줄 만한 형편도 되지 못하는 터라 둘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까지 와서 나라 망신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네. 후후후..”

연희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지만 준후는 애가 타는지 연희에게 빠르게 말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죠? 원 참, 들어가서 그냥 잡으면 그만인데….”

“그럼 너 혼자만이라도 들어가 보렴. 내가 여기서 경비원이 오 는지 망을 봐줄게.”

준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연희가 망을 봐 주는 동안 준후는 수풀 속 으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서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연 희의 귀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작게 들려왔 지만 연희의 귀에는 커다란 소리로 울려왔다.

“으악! 아빠! 아빠!”

한국말이었다. 앳되고 낯익은 목소리………….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라의 목소리였다.

“앗! 이건……..”

연희는 몸을 돌려 준후를 보았지만 이미 숲 속으로 모습을 감 춘 뒤였다. 연희는 본능적으로 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 몇몇이 비명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 아보고 있는 참에 저만치,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머리를 뒤로 묶어 내린 조그마한 여자아이 를 옆구리에 끼고 달음질쳐 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꽤 되어 서 그들의 얼굴은 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들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아이는 흰 윗도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아 틀림없 이 조금 전에 만났던 아라였다.

“아라야! 이, 이런!”

연희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으나 아무리 연희가 키가 크고 빨리 달리는 편이라고는 해도 남자들이 달려가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두 명의 남자는 자그마한 아라를 옆구리에 낀 채 저쪽에서 황급히 달려온 차 속으로 몸을 던지듯 들어가 버렸 고, 주변의 사람들이 채 조처를 취하기도 전에 요란한 엔진 소리 를 내면서 공원을 빠져나가 버렸다.

연희는 재빨리 차의 번호판을 보려고 했지만 거리가 꽤 떨어 져 있는데다가 차가 난폭하게 지그재그로 운전을 하면서 나아가는 통에 제대로 번호판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아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라의 아버지임이 분명했다.

연희는 숨을 몰아쉬면서 입술을 깨물고 아라의 아버지를 바라 보았다. 사십 대 중반의 매우 자상해 보이는 인상에 금테 안경을 낀 학자풍의 남자였는데, 거의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아라를 납치해간 차가 사라진 방향을 헐떡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연 희는 다가가서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뒤에서 준후가 부 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 누나! 뭐예요? 왜 여기 있어요?”

“준후야, 큰일이야. 아라가 납치된 것 같아!”

“납, 납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준후는 무척이나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희는 고개 를 끄덕이면서 아라의 아버지 쪽을 쳐다보았다. 자기 나라도 아 닌 먼 타향에 와서 난데없이 딸을 납치당한 아라의 아버지는 거 의 쓰러질 듯 넋이 나가 있었다.

“저분이 아라의 아버님인가 봐. 어쩌지?”

연희는 아라의 아버지를 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한편으 론 망설여졌다. 난데없이 누가 나타나서 말을 걸면 유괴범의 일 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였다. 그런데 준후가 빠른 걸음으로 아라의 아버지 쪽으로 달려가더니 말을 건넸다.

“아라 아버님이시죠? 어떻게 된 거죠?”

“아, 아라야……. 나, 난……………”

아라의 아버지는 준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 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리한 빛까지 띠고 있었고 몸 은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전 아라를 알아요. 조금 전에도 만났죠. 도와 드릴게요.”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 와서 본 여러 가지 복잡한 일 들을 마음속으로 하나둘 정리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명왕교와 칠인방 사이에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었다. 죽음을 당한 다카다는 명왕교의 편을 많이 들었다고 했 고, 스즈키는 그런 다카다의 주장 때문에 칠인방 내의 다른 사람 들이 다카다를 당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함정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점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명왕교는 협박 비슷한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칠인방에 별다른 압력을 가 한 적이 없었다. 스즈키는 꿈자리가 뒤숭숭해지고 이유 없이 계 획들이 틀어지곤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되짚어 보니 석연치가 않았다. 그 정치가들이 과연 꿈자리가 뒤 숭숭해지고 계획이 틀어지고 하는 일들을 명왕교의 복수와 관련 이 있다고 믿었을까? 스즈키는 명왕교에서 아까 박 신부가 본 검 은 그림자를 보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스즈키가 명왕교의 주술적인 힘을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스즈 키는 다카다의 축출 당시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야기했던가? 다 카다는 그런 일들이 명왕교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광신적인 증세까지도 보였기 때문에 다카다를 축출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박 신부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차근차근하게 생각해 보았다. 만약 칠인방이 명왕교의 주술력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면, 다카다가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해 서 축출하려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카다가 명왕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를 그토록 철저히 몇 년에 걸친 암투와 모략으로 축출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냥 웃으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라고 넘어갈 수는 없었을 까? 다카다의 의견이 그토록 나머지 여섯 명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었다면, 나머지 여섯 명도 명왕교의 협박에 대해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작은 실마리였지만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 칠인방에 대한 명왕교의 관계는 아무것 도 아닌 익명의 기부금 형태였다고 스즈키는 말했다. 그런 기부 금정도를 받는 관계였다면 칠인방은 명왕교의 주술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정치적 이 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다카다를 삼사 년에 걸쳐서 집요하게 추적하여 정치적으로 매장시켜 버린 주된 이유가 단지 명왕교의 협박에 수긍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박 신부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을 무리 없이 설명하려면 상황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칠인방 모두는 명왕교의 주술적인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기 부금보다는 그 힘을 빌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어느 정도 세력을 잡고 난 이후에는 명왕교의 이상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수용할 길이 막막해졌고…………. 그래서 명왕교와 결별하고, 계속 명왕교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는 다카다를 축출해 버린 것 은 아니었을까?’

모든 일을 무리 없이 해석하는 길은 그런 가정밖에 없었다. 그 것이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박 신부의 결론 대로라면 칠인방은 명왕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우 교묘 한 술수를 부린 것이 된다. 일단 명왕교의 요구 사항을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시키면서 명왕교의 손발이 되어 버린 다카다를 암중 모략으로 완전히 멀어져 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명왕교와의 연 결 고리를 떼어 버렸다고 볼 수도 있었다. 비로소 박 신부의 머 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다만 같은 정당의 동료가 한 종교의 편을 든다고, 또 스즈키가 말한 대로 자잘하게 이상한 일들이 벌 어졌다고 그를 삼사 년에 걸친 치밀한 모략으로 몰아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다카다를 몰아내는 것만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을 까? 다카다의 죽음은?’

박 신부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스즈키는 자신이 좋은 말로 위로하려고 과거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다카다는 비관하여 호수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언 뜻 들어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의심을 가지고 찬찬히 되짚어 나가자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했으면 다카다는 정말 인생무상만을 느 꼈을까? 복수심은 들지 않았을까? 자신을 배신하고 함정에 빠뜨 린 자들이 실은 과거 자신의 동료들이었다고 할 때는 ・・・・・・ . 그런 데 다카다는 자살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끝냈단 말인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박 신부는 정치가가 아니었지 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냉담한지는 알고 있 었다. 또한 카리스마를 키워 나가는 정치인들의 보복심이나 원 한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육인방은 그 후 이상한 괴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이 미 죽은 다카다의 짓이라며 의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카 다가 인생무상을 느끼고 자살한 것이라면, 그럴 때 그들은 왜 다 카다를 두려워한 것일까?’

박 신부는 일본에 오던 첫날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지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과 한편이 되지 않는 자를 집단으로 몰아서 괴롭히는 일종의 잔학 행위. 다카다는 그것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육인방 모두는 명왕교에서 발을 빼겠다 고 주장했고, 다카다는 끝까지 그것을 반대하면서 명왕교에 모 든 것을 밝히겠다고 협박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보복으 로 다카다를 매장시켰다면…………. 그냥 매장시켜 버리고 끝냈을 까? 아니면 혹시 다카다의 죽음이………….

‘육인방에 의해서?’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꼈다. 스즈키가 말한 좋은 말로 한 위로, 그것의 속뜻은 다른 데에 있 는 것이 아닐까? 박 신부는 고개를 돌려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스 즈키의 모습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박신 부를 지켜보는 야마모토의 눈빛 또한 이상스럽게 변해 가는 것 을 박 신부는 알지 못했다.


현암은 눈을 크게 뜨고 승희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승희는 잠 시 동안 망설였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의 힘, 여자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래. 그리고 그 여자의 혼이 들어가는 칼은…………….”

“그런 칼은?”

“잠시…………. 그렇게 확실하게 마음속을 읽은 것은 아니야. 대위덕명왕의 생각인데, 그 사람도 한가락 하는 사람인걸. 그러니……”

현암은 입을 다물었지만 현암의 눈이 그토록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승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그렇구나. 그 칼 칼 속의 여인…………… 역시 나는 안 되는걸까?’

승희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으나 얼굴 표정은 그와 반대로 밝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 칼은 세상에 두 자루밖에 없대 조선에 하나, 그리고 명 왕교에 하나.”

“조선에 하나? 그럼 그게 월향검? 그런데 그걸 그들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야?”

“명왕교의 전설이래. 밀교의 어느 승려가 조선에서 그 칼을 본 적이 있었던가봐. 명왕교의 교주가 물려받은 다른 칼은 밀교에 서 만든 것으로 월향검을 본떠서 만든 것인가 봐. 아・・・・・・ 그렇 게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어서 알아내기가 어려워. 다 …..”

현암의 눈이 도운을 향했다. 월향과 비슷한 칼을 밀교에서 만 들었다고 한다면, 밀교에서는 월향검에 대해 누군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였다. 그러나 도운은 지금 두 사람이 무슨 대화 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호기심에 찬 얼굴로 이쪽 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현암이 한숨을 쉬면서 승희를 쳐다보았고 승희는 말을 이었다.

“그 칼, 그러니까 월향검이겠지? 그 칼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줄은 몰랐다고 하는군.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자세한 것은? 응?”

“여인의 영도 물론이지만 여인의 한도 들어 있대. 그런 것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는군. 그리고……………..”

승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끝이야. 그는 더 이상은 몰라.”

“그게 다야?”

“응. 다만 명왕교의 교주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내 생각이 긴 하지만 아마도……………..”

현암은 낮게 신음을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현암을 보 면서 승희는 마음이 아팠다. 승희는 아직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 는 애염명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뭘 좀 알고 있니?”

승희가 밉살스럽다는 듯이 슬쩍 걷어차자 여자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땅에 박으면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쇼 하지 말고 아는거 있으면 다 말해. 명왕교 교주는 누구지?”

애염명왕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신 기하게도 승희가 일어나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데도 그 여자는 승희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흡사 예전에 현암에게 성난 큰곰이 말을 그대로 마음으로 전달해 오던 것과 비슷했다. 승희가 소리쳤다.

“영어로 이야기해! 이 멍청아!”

“아, 아주 키가 작고…………….”

애염명왕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말을 떠듬떠듬 이어갔다. 현암은 그런 애염명왕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승 희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 보고만 있었다. 실은 월향검에 대한 이 야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 편 이 맞을지도 몰랐다.

“키 말고! 이름이 뭐야?”

“그, 그건 몰라요. 모두의 이름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고…………….교주는 가면을 쓰고……..”

“무슨 가면? 노의 가면이야. 아니면 명왕의 가면이야?”

“교주는 이자나미의 가면을…………….”

“이자나미?”

현암은 이자나미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일본 전설상의 유명한 여신 이름이었는데………………”

“그것, 그것밖에는…………. 그리고 교주는 키가 작고……………”.

“키 작은 거 말고 다른 건?”

“어린・・・・・・ 어린 여자아이…………….”

그때 멀리서 핑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어 가던 애염명왕이 풀썩 쓰러졌다. 핏빛 안개 같은 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총! 누가 저격!”

현암은 재빨리 승희의 옷자락과 도운의 승복 자락을 잡고 승 용차의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승희는 놀라서 엉겁결에 균형을 잃고 넘어져 뒹굴었지만, 도운은 체구가 커서 승복 자락만 찢어 졌을 뿐 몸을 숨기지는 못했다. 또 한 번 핑 소리가 나자 승용차 의 한쪽 유리창이 거미줄을 잔뜩 쳐 놓은 것처럼 뿌옇게 금이 가 며 작게 구멍이 뚫렸다. 애염명왕을 자처하던 여자의 머리에 선 혈이 낭자했다. 단 한 방에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도운이 미친 듯 몸을 허공에 띄우다가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차 뒤편 으로 굴러떨어졌다. 현암은 엉겁결에 도운의 몸을 끌어 땅에 바 짝 붙이면서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그러나 근처에는 아 무것도 없었다.

“현암군! 이게 도대체!”

날아오는 총알 세례를 받자 승희는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고, 금방이라도 욕지기를 퍼부을 것처럼 숨을 가쁘게 헉헉거렸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던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던 여자가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처참 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현암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듯 말했 다. 현암의 눈은 바닷가의 수평선을 향해 있었다.

“저기다!”

현암의 보통 사람보다 밝은 눈에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검은 그 림자가 들어왔다. 배였다. 적게 잡아도 이삼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 것 같았으나 조준경이 달린 저격용 라이플이라면 그 정도 의 거리에서도 충분히 총알을 날릴 수 있을 것이다.

“망할 놈들!”

현암은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듯했지만 저렇게 멀리 떨 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도운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도운도 다리에 총알이 스치고 갔는지 푸 른색 승복 자락에 선혈이 물들어 있었다.

“괜찮아요?”

“예…………. 괜…… 괜찮…….”

현암은 고개를 들려는 승희를 잡아 자세를 낮추게 하고는 잠 시 궁리했다. 저들이 어떻게 알고 총질을 한 것일까? 부동명왕 과대위덕명왕이 연락을 취한 것일까?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다. 만일 그랬다면 승희가 아까 대위덕명왕인가 하는 자를 투시하고 있었으니 몰랐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결론 은……..

“저놈들 중에도 투시력을 가진 놈이 있어. 우리를 처음부터 알 고 감시해 왔던 게 분명해! 제길! 그래서 우리의 이름도 알고 있 었고, 명왕 세 사람을 보내 우리를 몰아내려 했던 거야. 그러다 가 일이 이상하게 되니까 비밀을 털어놓을까 봐 애염명왕을 죽 여 버렸고……………”

“어떻게 하지? 응?”

승희도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었지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위기에 빠져 본 적은 없었다. 저들은 잘 보이지 도 않는데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조준 사격을 하고 있 었다. 더구나 이곳은 민가나 지나가는 차도 없는 한적한 곳이라 몸을 움직였다가는 다시 총알이 날아들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서 현암에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생각을 읽고 있을 게 분명하 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다.’

현암은 재빨리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승희의 옷자락을 당겼다. 승희가 놀라서 돌아보자 현암이 총알같이 빠른 말투로 물었다.

“저들이 남의 생각을 읽는다면 승희 네 생각도 읽을 수 있을까?”

승희는 막막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많은 주술사들과 상대한 경험으로 볼 때, 적들이 어떤 능력을 가진 경 우에는 그 사람의 마음속이 먹장을 친 것처럼 읽어 내기가 무척 힘이 들었던 것이다. 승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왜 말을 그리 빨리.”

현암이 총알같이 빠른 속도로 우르르 말했다.

“오래 생각하면 안 돼! 생각을 바꿔야 해!”

승희가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냈다. 자신도 투시하여 남의 마음 속을 읽어 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승희 자신이 초능력 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읽히지 않는다면, 저들은 지금 도운보다 는 현암의 마음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현암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읽힐 틈을 주지 않으려고 재빨리 말하고는 금방 생각을 바꾸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승희는 그게 가능한지 어떤 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현암처럼 도가나 불가의 기공을 수련하 기 위해서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그게 지금의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최선 의 방법인지도 몰랐다.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현암이 재빠르 게 말했다.

“어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 나에게 말하지도 말고! 너 혼 자! 난 위험해. 나에게 알리면 안 돼!”

승희는 울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슨 일의 결단이나 상황 판단은 항상 현암이나 박 신부가 내려 주지 않았 던가? 그런데 지금은………….

승희는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눈을 감고 필사적 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승희는 으윽 하고 신경질적으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승희의 눈이 밝아졌다.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박신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스즈키는 노의 가면이 사라진 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마약에 취한 탓인지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옆을 두 명의 덩치 큰 경호원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야마모토는 박 신부의 앞에 앉 아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박 신부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스즈키가 말하려고 했던, 정말 중요한 일이라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잠든 스즈키를 깨워서 물 어볼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박 신부는 야마모토에게 물었다. 

“사이토 씨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을까요?”

“글쎄요.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는 않았을 테니 연락이 안 될겁니다.”

“어느 병원으로 옮겼습니까?”

“글쎄, 저도 잘 모르겠군요. 경황이 없어서…………….”

말꼬리를 흐리는 야마모토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박 신부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제 일행과의 연락은 사이토 씨의 휴대 전화로 하기로 되어 있 습니다. 그런데 사이토 씨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니 연락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군요. 제 일행은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제가 연락을 취해 볼 방도도 없고…………….”

“아, 그것 때문이시라면 제가 알아보도록 하죠.”

“예, 어떻게 조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즈키 씨가 불안해하시니 제가 여기서 나가기도 그렇고……”

“알겠습니다.”

야마모토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 신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스즈키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침대 쪽으로 다가가던 박 신부의 눈에 옆에 있는 책꽂이가 보였다.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박 신부는 영어로 쓰인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신화에 대해 서술해 놓은 책도 있었다.

‘명왕교가 이자나미의 성역화를 요구했다고 했지?’

박 신부는 책을 꺼내 들고 이자나미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을 찾아보았다. 모든 신과 가미의 어머니여서 그런지 이자나미 의 이야기는 상당히 앞부분에 나와 있었다. 박 신부는 시간도 보 낼 겸, 그 부분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희와 준후는 아라의 아버지 최 교수와는 조금밖에 이야기하 지 못했다. 최 교수는 두 사람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경찰서와 영사관으로 달려가려는 마음에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최 교수는 서울의 유명한 대학의 국사학자로, 연희도 이름을 들 어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독창적인 학설로 민족정기의 고 취에 힘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이번에 최 교수는 일본에 있는 백제 문화의 유적을 파헤쳐 보기 위해 왔던 것이고, 길어질 지도 모르는 기간 동안 어머니 없이 응석받이로 자란 딸 아라를 떼어 놓고 올 수가 없어 데리고 왔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정도 만들었을 뿐이었다. 최 교수는 같이 있던 일본인 학자들의 도움 을 받아 황황히 영사관으로 달려갔다.

연희와 준후는 최 교수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준 후가 가미인가 뭔지를 잡기는 했으나 별다른 소득도 없이 돌아 가야 한다는 게 허탈해서, 연희와 준후는 터덜거리며 걷기 시작 했다. 그때 문득 연희가 주머니에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생각해 냈다.

‘승희와 현암 씨는 뭐 하고 있을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만지는 순간, 승희가 애타게 연희를 부르는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앗!”

“왜 그래요. 연희 누나?”

“현암 씨와 승희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어!”

“예?”


천지가 최초로 열릴 때 다카마가하라에 봉위된 신은 아메노미 나카누시 신, 다음에 다카미무스비 신, 다음에 가미무스비 신이 고, 이 세신 뒤에 이주)주는 수를 나타내는 말에 붙어서 신체, 유골 등을 세는 말. 위라고도 한다)의 신, 그 뒤에 오 조십위(位)의 신, 마지막으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 녀 두 신(이상을 신세대 한다)이 출현한다. 이 두 라고

신은 지상의 오노고로지마로 내려와서 결혼한다.

천신(아메노미나카누시 신 이하 세 신)은 두 신에게 “떠도는 이 나라를 잘 다스려 완성하시오”라고 말하며 구슬로 장식된 창 을 주었다. 두 신이 천부교(天)에 서서 그 창을 물리고 해수 (海水)를 튕겨 올리자 창끝에서 소금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쌓여 서 섬이 되었다. 이것이 ‘오노고로지마’이다. 두 신은 그 섬으로 내려와서 아메노미 기둥을 세우고 팔심전(殿)을 세웠다. 남 신이 여신에게 “당신의 신체는 어떤 바람으로 되어 있는가?”라고 묻자, 여신은 “나의 몸은 점점 정돈되어 가지만 정돈되지 않은 곳 “이 한 곳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남신은 “나의 몸도 점점 정돈 되어 가지만 한 곳이 지나친 곳이 있다. 나의 몸에 여분이 있으므 로 너의 몸의 부족한 곳을 채워 국토를 낳으려고 생각하는데 어 떠하뇨?”라고 묻자 여신은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남 신은 “그렇다면 나와 당신이 아메노미 기둥을 돌아서 몸을 합칩시다. 당신은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돌아서 만나기로 하지

요”라고 약속하고 돌았다. 그때 여신 쪽이 먼저 “정말 멋진 남성 이군요”라고 말하자 곧이어 남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군” 하 고 응답했다. 곧 남신이 “여자가 먼저 소리친 것은 좋지 않았다” 고 불평했지만 그래도 체위를 세우고 교합하여 낳은 자식이 히루 코와 아하시마로, 히루코는 흘려 보내 버렸다. 다시 천신에게 빌 어 순서를 바꾸어서 소리치고 이번에는 정상 체위로 교합하여 낳 은 자식이 아와지시마, 시코쿠, 오키, 규슈, 이키노시마, 쓰시마, 사도가시마, 혼슈이다. 이후에도 작은 섬들을 낳았다.

국토는 낳는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신들을 낳았다. 이 중에 바 위나 흙의 신, 바다의 신, 항구 신이 있다. 항구 신의 남녀 두 신은 더욱 많은 신들을 낳았다. 이 중에 아메노미쿠마리 신, 구니노미 쿠마리 신 같은 수리(水利)를 담당하는 신이 있다. 다음으로 바람 신, 나무 신이 태어나고 산 신, 들 신이 태어났다. 이 산야의 신에 게서 사즈치 신, 사기리 신 등이 태어났고 다음으로 아메노토리 후네 신이나 오호게쓰히메 신, 마지막으로 불의 신 가구쓰치 신 이 태어났다. 불의 신을 낳았기 때문에 여신은 음부(陰部)가 타서 병으로 누웠다. 그때 여신의 구토로 화생(化生)한 신이 가나야마 비코, 가나야마비메(광산의 신), 대변으로 낳은 신이 하니스비 코, 하니야스비메(토기를 만드는 점토의 신), 소변으로 낳은 신이 미즈하노메(물의 신)와 와쿠무스비(생산의 영)가 화생한다. 이신의 자식이 도요우케비메(음식의 신)이다. 이자나미는 불신을 낳기 위해서 결국 목숨을 포기한다. 이자나기는 “사랑하는 동생 “아!”라고 시체에 매달려서 통곡했는데 그 눈물로 아메카구야마의 산기슭에 앉은 나키사와메 여신이 화생한다. 이자나미는 히바 산 에 묻혔다.

이자나기 이자나미 두 신에게서 태어난 신 이하의 신들은 인 간을 둘러싼 자연계의 의인화, 인간 생활에 필요한 음식물이나 불, 광물, 식토(土)의 주재 신이다. 일본 신화에서 중요한 점은 이 신들이 만연漫然)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최고신을 정점으로 한 신들의 계보 조직 안에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어 드 라마의 조연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묘하군. 이자나미는 역시 모든 신들과 일본에서 믿는 가미의 어머니 같은 존재로구나.’

박 신부는 더욱 흥미를 느꼈다. 바로 밑에는 황천국에서 이자 나기가 죽은 이자나미와 만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황천국(國)

후에 이자나기는 죽은 이자나미가 보고 싶어 황천국으로 갔다. 여신이 입구에 나와서 맞이하자 남신이 물었다. “나와 당신이 만 든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지상으로 돌아오기 바라오.”

“나도 원통합니다. 나는 이제 황천국의 식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무서운 일이 많아 함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황천 신과 의논하고 올 테니 그동안 기 다려 주세요.” 여신은 이렇게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긴 시간을 기다리다 못한 남 신이 빗을 문질러서 불을 켜 보니 여신의 몸에 구더기가 꾀어들 어 대뢰(이하 팔뢰신(神)이 화생하고 있었다. 놀라서 도망치려고 하자 여신은 “나를 모욕하는군!” 하고 황천추녀, 팔 뢰신, 황천군을 보내며 쫓아왔다. 황천비량판을 천인석(引石) 으로 막고 맹세를 하며 여신이 “이 나라 사람을 하루에 천 명씩 교살하겠다”고 말하자 남신은 “나는 하루에 천오백 명의 산실 室)을 세우겠다”고 하여 이승과 황천국과의 인연이 영원히 끊어 지게 되었다.


박 신부는 책을 덮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이자나미는 인간 세 상에 대해 무서운 복수심을 가진 죽음의 신이자 희생하고도 배신 당해 원한을 품고 있는 신이기도 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군. 그런데 이자나미를 명왕교에서 받드는 이유는 무엇 일까? 사실 불교나 밀교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신이 아닌가?’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 이자나미는 아무래도 근원적인 모 태, 즉 우주의 어머니로서의 태모(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명왕교가 이자나미를 숭배하는 까닭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명왕교는 비록 밀교에서 뿌리를 두고 나오 기는 했지만 일본 고유의 신앙 체계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 경찰에서 쓴 보고서에도 그런 주장이 실 려 있었고…………. 명왕교에서는 장로급인 신자들에게 명왕의 가 면을, 평신도들에게 노의 흰 가면을 씌운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 다면 교주는 무슨 가면을 쓸까? 이자나미의 가면을 쓰는 것은 아 닐까? 만일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지닌 신들과 가미의 어머니로 서의 이자나미 가면일까, 아니면 추하게 썩어 들어가 복수심에 불타는 이자나미의 가면일까?

‘그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명왕교 교주의 실물을 보 았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없으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박 신부는 불현듯 잠들어 있는 스즈키를 쳐다보았다.

“아까 스즈키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명왕교의 교주나 기원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분명 스즈키는 명왕교를 말하면서 명왕 교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렇다면………..?”

무의식중에 박 신부는 잠들어 있는 스즈키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스즈키를 지키고 서 있는 경호원이 박신 부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몇 마디 하는데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 을 깨우지 말라는 뜻 같았다.

일본에서 신도(神道)와 불교는 겉으로는 대립되는 것 같지만 역사적 기원부터 생각한다면 실제로는 많이 얽혀 있다고 들었 다. 가미와 불교의 신들이 혼합되기도 했었으니 이자나미가 불 교의 신들과 섞여서 숭배되더라도 꼭 이상하다고만은 볼 수 없 겠지.’

박 신부는 책을 책꽂이에 밀어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명왕교 의 정체에 대해 감이 잡힐 것 같았다.

‘명왕교에서는 명왕을 숭배한다 했으니, 이자나미도 불교의 어떤 신과 비교되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순간, 박 신부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명왕교에서는 이자나미를 불교의 어떤 신과 대치시켜서 숭배하는 것일까? 죽음, 공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분노…..’

박신부는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칼리!’

파괴의 신 시바의 부인이자 죽음의 신 칼리. 인간의 생피와 살 을 먹고 인간의 잘린 목을 머리에 두르고 다니며, 인간의 잘린 팔로 치마를 꾸민다는 신. 인간의 시체와 해골을 무기로 휘두르 는 검푸른 피부를 지닌 칼리 신의 모습이 박 신부의 머릿속에 떠 올랐다.

‘정말 그럴까? 지나친 상상은 아닐까?’

칼리는 원래 인도의 신들이 선악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애초부터 악신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학적인 요소가 안에 잠재되어 있다고 해도 너무도 무자비한 행동과 잔 학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나 기타 잔학한 행위의 앞에 반드시 따라붙는 이름처럼 인식되어 버렸다.

박신부가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데 있었다. 애당초 명왕교가 포괄적이고 원초적 모신으로서의 칼리나 이자나미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걱정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박 신부의 기대와 달리 이자나미가 가진 악(惡)의 극단적인 면이 숭앙되는 것이라면 명왕교 전체의 행동은 극단적 인 파괴나 살육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박신부는 침중한 얼굴이 되어 방문을 나섰다. 경호원들은 박 신부의 얼굴을 보고 조금씩 쭈뼛거리는 것 같았으나 별말은 하 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박 신부는 사이토의 휴 대 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다녀온다던 야 마모토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몇몇 경비원에게 야마모토가 있는 곳을 묻기도 했으나 경호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할 수 없이 박 신부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야마모토를 찾아 헤매었다. 계 단께까지 간 박 신부는 아래층의 어느 한 구석을 바라보고는 발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계단의 아래, 저쪽 편에 누군가 큰 대자로 누워 있었고, 대여 섯 명의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누운 남자를 둘러싸 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야마모토의 모습 도 보였고 두어 명의 덩치 큰 경호원도 있었다. 얼핏 사람들 사 이로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박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 랐다.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병원으로 옮겨졌다던 사이토 보좌관 이었다. 눈앞이 뱅뱅 도는 듯 혼란함을 느끼던 박 신부는 또 한 사람이 뚜벅거리며 누워 있는 사이토의 앞에 나타나자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노의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여기야말로 명왕교의 ……………”

박신부가 얼른 몸을 돌리려는데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린 야마모토가 큰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를 들은 아래쪽의 덩 치 큰 경호원들과 계단 저쪽의 경호원들이 박 신부를 향해 달려 오기 시작했다.

“현암군! 보여? 그 배, 아직도 있어?”


승희는 안절부절못했지만 현암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묵묵히 무념의 경지에 있다가 눈을 뜨고는 수평선 저쪽을 바라보 고 말했다.

“있어.”

말을 마치고 현암이 눈을 감아 버리자 승희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갇혀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 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잘 참고 있던 도운도 어느새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고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도운이 울상을 짓더니 현암에게 말했다.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아무리 총을 잘 쏜대 도 차를 맞히지는 못할 거 아닙니까?”

“차로는 더 이상 못 가요.”

승희는 덩달아 울상이 되어 눈짓으로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총에 맞은 차 엔진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도운이 다시 힘들게 중얼거렸다.

“엔진이 아니라 연료 탱크를 맞힌다면…………….”

연료 탱크라는 말을 듣자 현암의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연료통이 격추된다면 차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놈들은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고 초조하게 이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를 기다리는 모양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그 생각을 해내게 된다 면…………….

“앗! 생각!”

현암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저들은 분명 이쪽의 생각, 특히 현암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현암이 한 생각은……

“뛰어!”

현암은 소리를 치면서 승희를 냅다 오른손으로 밀어 버리고는 도운의 몸을 안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러는 사이 핑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차는 요란한 굉음과 불덩 이를 사방으로 날리면서 폭발해 버렸다. 현암의 옷에 불꽃이 튀 었는지 등이 쓰라려 왔다. 몸을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현암은 승 희가 무사한지 살피려고 고개를 들었다. 승희는 저만치 떨어진 나뭇등걸 아래에 처박히듯 주저앉아 있었다. 급한 나머지 너무 세게 친 것 같았다. 그곳은 해안으로부터 노출된 방향이었다. 

“승희야!”

현암은 도로 옆의 우묵한 곳에 도움을 굴리듯 던져 놓고는 몸 을 날렸다. 승희는 충격을 받았는지 정신을 채 차리지 못하고 신 음하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타깃. 좀 전에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애염명왕의 모습이 달려가는 현암의 눈에 들어 왔다.

‘머리! 놈은 승희의 머리를!’

현암은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면서 왼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월향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현암의 왼팔에서 쏘아져 나와 승희의 머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챙 하는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월향검이 날아오는 총알에 맞고 반대편으로 튀어 나갔다. 총알이 튕겨 나간 것은 월향검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았다기보다는 놈의 사격 실력이 지나치게 좋은 탓이었다. 놈은 단방에 끝내 기 위해 승희의 미간을 노렸고, 월향검은 그 부분을 가림으로써 총알을 튕겨 낸 것이다. 현암은 승희에게 재빨리 뛰어들어 왼손 으로 승희의 멱살을 잡자마자 오른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발’ 자결로 승희가 기대고 있던 나무등걸을 후려쳤다. 쾅 하는 소리 와 함께 현암은 어깨가 빠져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으나 두 사 람의 몸은 그 힘으로 데굴데굴 구르면서 도로 저편으로 나가떨 어졌다. 두어 번 땅에 흙먼지가 일었지만 맞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격 실력이 좋아도 굴러가는 사람을 맞힌다는 것은 힘든 모양 이었다.

일단 도로 옆의 팬 땅에 들어왔으니 안심이었다. 승희는 현암 에게서 배를 맞고 나가 떨어졌는지 양손으로 배를 싸매고 아파 죽겠다고 끙끙대고 있었고, 그런 승희를 보니 현암은 머쓱한 생 각이 들었다.

“승희야! 괜찮아?”

“으으! 으음!”

승희는 신음 소리를 내다가 눈을 뜨더니 현암의 따귀를 철썩 갈 겼다. 현암이 놀라서 눈을 부릅뜨자 승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디다 손을 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세게 칠 수가 있어? 감정 있으면 말로 해, 말로!”

현암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는데 저만치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승희는 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현암에게 맞아 아픈 배를 움켜쥐고 돌아눕더니만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어 쥐었다.

“연희 언니야. 내가……………..”

승희는 보트를 빌려 오라고 그랬다고 말하려다가 또 놈들이 현암의 생각을 읽어 낼까 봐서 입을 다물었다. 저만치서 오는 차 는 연희와 준후가 탄 차일 것이었다. 그 차의 뒤에는 기다란 모 터보트가 실려 있었다.

승희가 도랑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하는데 현암이 승희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연희 씨가 온다고?”

“응.”

“이런!”

현암은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지금 적들 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연희가 이리로 오고 있다니…………. 만약 연희가 오는 것을 현암이 본다면 자칫 연희까지도 위험에 처할지 모를 일이었다. 현암이 승희를 쳐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승희야, 어서 날 한대쳐. 어서!”

현암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승희에게 땅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주었다. 현암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승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이 눈을 감고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알면 안 돼. 저들이 읽어 내니까. 분명 무슨 수가 있겠지?”

차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희는 아직도 영문을 몰라 눈 만 멀뚱히 뜬 채 머뭇거릴 뿐이었다. 현암은 하는 수 없이 승희 손에 쥐어 주었던 돌멩이를 빼앗아 자신의 뒤통수를 적당히 내 리쳤다. 눈앞이 아찔하고, 눈물이 다 찔끔거렸지만 정신은 말짱 했다. 현암은 다시 한번 힘껏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번에 는 정신을 잃었는지 픽 쓰러져 버렸다. 승희는 웃을 수도 그렇다 고 울 수도 없는 광경에 기가 막혔다.

“원 참. 이럴 땐 왕무식이야.”

승희가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현암 일행이 도랑 건너편에 숨 어 있는 것을 본 연희의 차가 승희 근처로 바짝 다가들었다. 그 러자 승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차를 멈추면 또 저격을 받을지도 몰라.’

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차창 너머로 근심 어린 표정을 한 연희 와 준후의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은 쓰러진 도운과 현암을 보고 놀랐는지 급하게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승희가 재빨리 연희와 준후에게 소리쳤다.

“차를 세우면 안 돼! 그냥 그대로 가. 어서! 저기 아래쪽 안전한 곳에 차를 세워!”

“무슨 소리니?”

“설명할 틈이 없어! 저기 후미진 곳에 차를 세우고 이쪽으로 몰래 와줘! 두 사람을 내가 끌고 갈 수는 없잖아!”

“두 사람은 왜 저렇게 많이 다쳤니?”

“아이고, 별로 염려하지 않아도 돼. 어서!”

그런데 가만 보니 꼭 이 도랑 안에 웅크리고 있을 필요는 없 었다. 도랑을 따라서 가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고 걸 음을 옮길 수 있었으니까. 왜 그런 간단한 것도 생각하지 못했나 하고 승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세크메트의 눈을 들어 보였다. 연희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크메트의 눈을 꼭 쥐 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서로에 게 전달되었다. 연희는 서서히 아래쪽 길로 차를 몰았다. 승희도 힘에 겨웠지만 비틀거리는 도운과 쓰러진 현암을 끌고 도랑을 따 라 아래쪽으로 연희의 차를 따라 내려가면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아라가 납치된 걸까?’


“아아앗!”

박신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달려들던 덩치 큰 경비원 들이 오라 막에 부딪혀 튕겨 나가거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 다. 일단 경비원들을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들이 언제 다시 덤벼들지 알 수 없었다. 지체 없이 계단을 한걸음에 달려 내려가면 서 박 신부는 습관적으로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박신부가 일층으로 뛰어내리듯 내려서자 야마모토가 소리를 질 렀다. 그러자 쓰러져 있는 사이토의 옆에 있던 경비원들과 흰 노 의 가면을 쓴 남자가 덤벼들었다. 그들 중 날이 시퍼렇게 선 일 본도를 꺼내 든 사람도 있었다.

“야마모토! 당신들은・・・・・・ “

박 신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도를 든 경비원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박 신부는 힘을 모으면서 하늘 을 향해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 신부의 주위에 둥글게 맺혀 있던 연녹색 오라막이 움찔하더니 주먹만 한 오라의 구체 가 일본도를 들고 덤벼 오던 자에게 와르르 쏘아져 나갔다. 놀란 경비원은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라도 하듯 일본도를 무섭게 휘둘 렀으나 오라 구체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경비 원의 온몸에 부딪쳐 내렸다.

“으아아악!”

마치 주먹세례를 받는 것처럼 경비원의 몸이 마구 흔들리면서 뒤로 밀려나자 다른 경비원이 덤벼들었다. 박 신부는 오라 구체 를 쏠 겨를이 없어 그대로 오른팔을 들어서 그자의 주먹을 막았 다. 그러자 그자의 주먹은 박 신부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오라 막에 부딪혀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 버렸다. 그 경비원이 멈칫하는 사이 박 신부가 눈을 부릅뜨면서 크게 소리를 지 르자 오라막은 움찔하며 무서운 힘으로 경비원을 뒤로 날려 버 렸다. 그 기세에 오라 구체로 두들겨 맞아 뒤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경비원과 뒤로 밀려난 경비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뒤 엉킨 채 한참을 밀려가 벽에 부딪히고는 곧 기절해 버렸다.

야마모토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 악하면서 노의 가면을 쓴 남자와 함께 달아나려고 했다. 쓰러져 있는 사이토 보좌관에게로 걸음을 옮기던 박 신부가 소리를 지 르면서 오라의 구체를 와르르 내쏘았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 께 야마모토는 오라의 구체에 얻어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지만, 노의 가면을 쓴 자는 어느새 별장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박 신 부는 쓰러져 있는 사이토를 일으키기 위해 곁으로 다가갔다. 특 별한 외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여전히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 신부는 사이 토를 일으키려다가 허리춤에 휴대 전화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 았다.

“아! 이거면 ……………”

박 신부가 사이토의 허리춤에서 휴대 전화를 빼려는 순간, 뒤 에서 이야앗 하는 기합 소리가 들렸다. 박 신부는 반사적으로 고 개를 돌렸다. 조금 전 박 신부에게 당해 계단을 굴렀던 경비원들 이 몽둥이와 단검을 빼 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여러 차례 오라의 구체를 내쏜 다음이라 힘이 쭉 빠진 상태였지만, 박 신부는 나직 한 울림이 전해 오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쥔 오른손에 천천히 힘 을 주면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경비원들이 지르는 고함과 박 신부의 소리가 서로 엉켜 별장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현암은 정신이 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 렀는지 알 수 없었다. 현암의 눈에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 고 있는 준후의 얼굴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정신이 점점 맑아지 면서 출렁거리듯 기분 좋게 스치는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그리 고우르릉거리는 모터보트의 엔진 소리도 들려왔다.

“형, 정신 들어요?”

“아, 준후야.”

준후는 씩 웃더니 앞쪽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부적 몇 개로 막아 놓았으니 마 음이 읽히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

현암은 고개를 끄덕하고 숨을 내쉬고는 윗몸을 벌떡 일으켰 다. 현암이 뉘여 있던 곳은 모터보트의 뒤 칸이었다. 준후가 앞 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옆에는 도운이 있었다.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던 도운은 현암이 일어나자 씩 웃어 보였다. 보트의 앞자 리에서는 연희가 열심히 핸들을 돌리고 있었고, 승희는 그 옆에서 조그마한 책자와 연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트의 엔진 소리 때문에 승희가 연희에게 뭐라고 말하 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연희 씨가 모터보트 모는 법도 아나 보네.”

현암의 말에 준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 해 본대요.”

“그래?”

“승희 누나가 옆에서 조종법을 읽어 주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연희에게 보트 조종법을 읽어 주는 승희는 심한 뱃멀미 때문 에 뱃전 밖으로 자주 고개를 내밀며 토악질을 해 댔다. 그럴 때 마다 고통스러웠던지 현암이 자기를 세게 쳐서 멀미가 더 심하 다고 투덜거렸다. 현암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준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생전 처음 보트를 모는 사람이 이렇게 과속을 내 바다를 달리는 판인데도 준후는 무서움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멀리 커다란 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변이 오른쪽에 있 는 것으로 보아 저 배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좌측 으로 한동안 나아간 뒤, 뱃머리를 돌려 거꾸로 배를 향해 달려가 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승희 누나는 무조건 저 배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요. 히로시 씨의 딸이 아직 살아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세크 메트의 눈으로 연희 누나에게 보트를 빨리 가지고 오라고 했죠.. “그냥 있었어도 다른 사람들이 지나갔을 텐데……. 그러면 경찰에도 알려졌을 테고.”

준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어떻게 온 줄 아세요? 그 길에는 ‘공사중이니 돌아가 라’는 표지판이 있고 길이 막혀 있었다구요. 며칠 지나도 아무도 안 왔을 거예요.”

준후의 말을 듣고 현암은 대위덕명왕과 부동명왕이 도망치면 서 길을 막아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했다.

‘그렇다고 해도 표지판까지 붙어 있었다면 문제가 다르지 않 은가? 표지판이나 도로 차단기를 금세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텐데……’

문득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현암은 맨 처음부터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했다. 그들은 왜 히로시의 딸을 살려 둔 것일까? 육인방과 관계된 다른 모든 여자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히로시의 딸을 살려 두었다는 것이 미심쩍었다. 어쩌면 이번 일에 미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 었을까 싶었다. 더구나 그들은 처음부터 현암의 마음을 읽고 있 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부동명왕과 대위덕명왕은 현암이 히로시의 딸을 추적하여 이곳까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길을 막았을 것이다. 그들은 현암 일행을 이기지 못하자 준 비라도 했다는 듯이 총으로 저격을 가해 왔다. 만약 현암 일행이 히로시의 딸을 찾아서 이곳까지 오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우연히 격투에 임했다고 한다면, 궁지에 몰린 대위덕명왕과 연락을 했 다고 해도 보트가 다시 배에서 나오고 저격을 하기 위해서는 어 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혹시……………

‘이 모든 것이 우리를 그 배, 그러니까 명왕교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배로 유인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었을까?’

현암은 아직까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대위덕 명왕이 했던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여자의 힘이다. 그런 칼은 세상에 두 자루밖에 없다. 그 칼에는 여인의 영과 한이 들어 있다………………. ‘

명왕교의 교주는 월향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 해. 그렇다면………..

현암의 추측대로라면 그 어떤 것도 현암의 앞을 가로막을 수 는 없었다. 다른 일들도 물론이지만 월향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 해서라면 어떤 곳이든 못 갈 곳이 없었다. 현암은 입을 굳게 다 물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거대하게 다가오는 배의 모습을 바라보 았다. 배에 점점 가까워지자 도운은 총격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 서 긴장한 눈치였지만 배 위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연희는 서툰 솜씨로 서너 번이나 시도하고서야 보트를 돌려 큰 배와 나란히 수평이 되도록 만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배였는데, 배 옆면에 ‘적귀(鬼)’라고 씌어 있었다. 연희가 바람결에 흐트러 진 머리칼을 추스르고는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면서 중얼거렸다. 

“적귀라…………. 배 이름이 아카오니로군. 빨간 귀신.”

“이름도 꼭 자기네들같이 지었군. 현암 군, 이제 어떻게 할 거 지 올라가야겠지?”

승희의 말에 현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서 아카오니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갑판까지의 높이만도 십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데 잡을 것이 하나도 없어 쉽게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가야지 뭐. 그 칼 이야기도 들었으 니. 흥!”

승희는 비꼬듯이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려 자리에 앉아 버렸 다. 연희와 준후는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 았고, 현암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월향검을 쓰다듬었다. 그때 현 암의 눈에 저만치 아카오니호에서 내려진 닻줄이 보였다. 

“저쪽으로 조금만 배를 몰아 주세요.”

현암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암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보트를 몰았다. 보트가 아카오니호의 닻줄 쪽으로 간신히 다가가자 현암은 망설임 없이 굵은 쇠사슬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현암의 모습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줄에 매달려 있는 현암 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 던 승희는 눈을 감고 정신을 모으기 시작했다. 투시력으로 근방 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건물이 나 들판이 아니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배 여서 투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머리가 꽤나 혼란스 러웠지만 승희는 정신을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다. 부상을 입은 도운도 걱정스러운 듯 손에 슈리켄 두어 개를 꺼내 들고 만지작 거렸고, 준후와 연희도 초조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현암은 그다지 힘이 센 것도, 체구가 큰 것도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조금 말라 보일 정도였다. 현암의 힘은 그런 외문(外 門)의 힘이 아니라 내가공력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현암은 쇠닻 줄을 잡은 손에 공력을 모아 십여 미터 남짓한 뱃전까지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현암이 뱃전에 거의 다 올 라갔을 무렵, 눈을 감고 있던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위험…….”

승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암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나 무상자 하나가 현암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승희가 외 치는 소리를 듣고 놀란 현암이 몸을 비틀어 나무 상자를 피하려 고 했지만 상자는 현암의 왼쪽 어깨를 때리고 아래로 떨어져 첨벙 소리를 내면서 바다에 빠졌다. 현암은 왼쪽 어깨의 통증 때문 에 왼손에 잡고 있던 줄을 놓쳐 버려 오른손만으로 닻줄을 붙잡 은 채 허공에 매달렸다. 한 손으로도 몸은 충분히 가눌 수 있었 다. 하지만 밑에서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네 사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후 다시 뱃전으로 사람 그림자가 얼핏 비치더니 이번에는 나무 상자며 쓰레기 더미 같은 것이 우박처 럼 쏟아졌다. 화가 난 도운이 고함을 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슈 리켄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준후가 도운에게 소리쳤다.

“왜 그런 걸 던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 쩌려고!”

도운은 준후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운이 배를 향 해 소리치면서 슈리켄을 던지자 다급해진 연희가 준후를 쳐다보 며 말했다.

“슈리켄에 독 같은 것은 없다. 어쨌든 지금은 사정이 급하 4…….”

현암은 닻줄에 매달린 채 몸을 흔들면서 위에서 쏟아져 내리 는 잡동사니들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닻줄에 매 달려 있다 해도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현암이 소리를 치면 서 왼쪽 팔목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월향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요란한 귀곡성이 울려 퍼지면서 현암에게로 떨어지던 두 개의 상자가 허공에서 폭발하듯이 부서졌다. 그 안에 들어 있 던 나무 부스러기며 고약한 쓰레기 같은 것들을 고스란히 뒤집 어쓴 현암은 푸우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흔들어 잡다한 것들을 떨쳐 낸 뒤, 위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월향에게 맡기고 다시 올라 가기 시작했다. 월향이 떨어지는 유리병 상자를 정통으로 뚫고 지나갔다. 상자 안의 유리병들이 와장창 깨지면서 유리 조각들 이 현암의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저런!”

준후는 그런 현암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하다가 타고 있던 보트 위에 우뚝 서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닻이 내려진 부분에 안개 같은 것이 희미하게 맺히기 시작했고, 점차 일렁거리면서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승희가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리매술, 잘한다!”

리매가 형상을 갖추고 나자 배 위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 지는지 비명과 고함 소리 같은 것들이 리매의 으르렁거리는 소 리와 뒤섞여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제 위에서는 아무것도 쏟아 지지 않았다. 현암은 한참 동안 몸을 흔들어 유리 파편들을 털어 내다가 월향을 받아 왼팔 소매의 칼집에 집어넣고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뱃전의 한쪽에 서핑 하고 공기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보트의 난간 한 귀퉁이가 부서져 나갔다. 

“아이고, 총이다!”

놀란 준후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도운이 준후를 감싸듯 안고는 그대로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놈들은 저격용 총으로 수 킬로미 터 밖에서도 애염명왕의 머리를 명중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가 까운 거리에서라면 ……………. 승희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옆에 앉아 있던 연희를 껴안고 다짜고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보트 에는 몇 개의 구멍이 났다. 도운은 다치긴 했지만 수영을 꽤 하 는 것 같았고, 승희나 연희도 어느 정도의 수영 실력은 있었다. 그러나 준후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꼴깍거리면서 허우적거렸다. 도운과 연희가 준후의 옷자락을 잡고 준후를 끌어 올렸다. 다행 히 몸이 작은데다가 옆에서 자신을 잡아 주자 발버둥 치거나 하 지는 않아서 둘은 준후를 쉽게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넷은 보트의 반대편에서 머리를 내밀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 다. 상대에게 몸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것 같지는 않 았다. 연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보트 빌려 온 건데, 무지 비쌀 텐데, 으으…….”

그때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보트의 뒷부분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아까 귀신같은 사격 솜씨로 차의 연료 탱크를 맞혀 폭발시켰던 일이 도운과 승희의 머리에 동시에 떠올랐다. 

“어서 피해요! 잠수!”

도운과 승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두 사람을 잡고 물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연기가 피어 오르던 보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덩어리를 사방으로 튀기면 서 폭발해 버렸다. 불기둥이 보트에서 터져 나온 연료를 타고 바 다 위로 넓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배 위로 올라간 현암은 리매가 대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질펀하게 때려눕혀 놓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영력이나 내 가공력을 가진 자가 있다면 몰라도 리매는 연기 같아서 제아무 리 소리를 지르며 흉폭하게 달려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저쪽에 는 마음대로 때릴 수 있는 리매를 당해 내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 다. 리매가 길게 소리를 지르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을 현암 은 대견하다는 듯이 보면서도 혹시나 하고 몸을 숨길 곳을 찾느 라 주변을 돌아보는데 쾅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놀라서 소리가 난 아래쪽을 보니 현암 일행이 타고 온 보트가 폭발해 아카오니 호의 오른쪽 부근에서 불기둥이 일고 있었다. 현암은 다리에 맥 이 풀리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준후야……. 승희.. 연희 씨……”

비틀거리는 현암의 옆에서 리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현암은 눈을 번쩍 떴다.

‘준후가 일을 당했으면 리매도 사라져 버렸을 텐데 리매가 저렇게 멀쩡한 것을 보니 준후는 무사한가보구나.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그때 눈앞에서 리매가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아찔해진 현암이 길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현암이 소리를 지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젖히는 순간 뭔가 가 섬뜩한 것이 공기를 가르면서 현암의 뒤에 있던 기둥에 퍽 하 고 박혔다. 현암은 잽싸게 바닥에 몸을 굴렸다. 누군가가 총을 쏘고 있었다. 터질 듯한 마음을 억누르고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숨을 들이켜 십성 공력으로 길게 사자후를 질렀다.

“어허허엉!”

사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면서 근방에 있던 유리병이며 창문 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현암이 소리를 길게 끌면 서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월향검을 날렸다. 꺄아악 하는 귀곡 성과 함께 날아간 월향은 은빛 호선을 그리면서 한쪽에 쌓여 있 던 상자 더미를 뚫고 들어갔고, 잠시 후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 왔다. 현암은 그쪽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날려 ‘폭)’자 결로 상자 더미를 후려갈겼다. 현암의 가격에 상자 더미는 거의 콩가 루가 되어 부서졌고 그 틈으로 뒤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 가 뒤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는 세 토막으로 예리 하게 잘린 기다란 라이플이 뒹굴고 있었다. 월향이 총을 토막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월향은 바로 현암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을 날아 다녔다. 현암 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다리를 푹 꺾으면서 중얼거렸다.

“주, 준후야……. 승희야…………. 연희 씨…….”

현암은 사색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 는 소리지만, 공력으로 단련되어 청각이 예민한 현암의 귀에는 아주 작긴 해도 분명하게 들렸다. 승희의 목소리였다.

“현암 구운! 아이고, 인마, 현암아! 뭐해!”

현암은 얼른 뱃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다는 불기둥에 휩싸여 있었다. 불기둥 사이로 네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고개를 내밀고 헐떡이는 것이 언뜻 보였다. 불은 계속 그들이 있는 곳으 로 밀려들고 있었고, 네 사람은 필사적으로 손으로 물을 밀어내 면서 불붙은 기름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현암은 옆에 나뒹굴고 있던 밧줄 뭉치를 집어 네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던졌지만 밧줄은 불더미 속으로 떨어졌다. 현암은 밧 줄에 불이 붙기 전에 재빨리 밧줄을 끌어당긴 후 다시 던졌다. 다행히 네 사람이 있는 곳에 밧줄이 던져지긴 했으나 천천히 밧 줄을 끌어 올린다면 네 사람은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게 뻔했다. 그래도 네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처럼 밧 줄에 와르르 달라붙었다. 현암이 크게 외쳤다.

“꽉 잡아요! 끌어 올립니다.”

현암은 숨을 가다듬고 앞에 보이는 커다란 쇠파이프에 발을 단단히 짚었다. 그러고는 몇 번 밧줄을 손에 감고 시험 삼아 공 력을 주어 밧줄을 당겨 보았다. 그러나 한 번에 네 사람을 튀어 오르게 할 정도로 끌어당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단 둘만, 두 명만 잡아요!”

현암이 소리를 치자 네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몸무게가 가벼운 승희와 준후가 먼저 줄을 잡았다. 불기둥이 점점 그들에 게 좁혀 들었다. 현암은 기합을 넣으면서 필생의 공력을 있는 대 로 팔에 부어 넣고 단번에 줄을 잡아챘다.


박 신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더 이상 덤벼드는 자들이 없는가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사방에는 질펀하게 넘어진 자 들의 신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박 신부 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덩치 큰 거한들의 주먹에 몇 번이 나 얻어맞고 그들의 육중한 체구에 깔려 꼼짝 못할 때마다 혼신 의 힘을 다해 겨우겨우 기도력으로 밀어내곤 했다. 그들과 육박 전을 펼치며 간간이 오라 구체를 쏘아 겨우 그들을 제압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힘을 쓴 탓인지 온몸이 나른하고 몹시 피곤했다.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쓰러져 있는 자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이 많은 자들을 혼자 힘으로 쓰러뜨리다니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박신부도 안경이 깨어지고 옷의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위급했다고 해도 성직자의 몸으로 주먹까지 썼 다는 사실에 마음이 언짢았으나 별수 없었다고 자위한 박 신부 는 쓰러져 있던 사이토를 부축해 일으켰다. 사이토는 여전히 정 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허리춤에 매달린 휴대 전화는 말짱했다. 박 신부는 사이토의 휴대 전화를 서둘러 집어 들었으나 생각해 보니 자신이 도움을 청할 현암과 다른 일행은 밖을 돌아다니는 중이라 그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경 찰을 부를까 싶기도 했지만 박 신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명왕교의 비밀 소굴인데다가 자신은 혼자였다. 오히려 죄를 뒤집어쓸 우려가 있었고, 구태여 이 일을 소문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박 신부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 속 에 넣고 쓰러져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노의 가면을 썼던 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박 신부는 격투가 벌어지기 전에 보았던 상 대의 숫자를 어림해 보았다. 정문과 현관에 각각 두 명씩, 각 층 의 계단마다 두 명. 그리고 사이토의 앞 방과 옆에 각각 두 명씩 있었으니 최소한 그들의 수는 열둘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도 네 명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아니, 야마모토는 포 함시키지 않았으니 다섯 명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일단 여기서 빠져나갈까?’

박신부는 주저했다. 방금 벌어졌던 일로 보아 이곳은 결코 안 심할 곳이 못 되었다. 그러나 삼층에는 스즈키가 있었고, 아까 잠시 보았던 스즈키의 어린 딸 오키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야마모토의 말로는 오키에가 운전사와 같이 집으로 돌아 갔다고 했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해 서 스즈키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겼던 이 별장이 명왕교의 소 굴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즈키의 충복이었던 사이토가 명왕교인들에게 당한 걸로 보아 스즈키나 사이토가 함정을 판 것 같지는 않았다.

박 신부는 약에 취한 스즈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스즈 키에게 코카인을 권한 것은 자신이었다는 야마모토의 말도 기억 해냈다. 그렇다면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이 일을 꾸민 것은 야 마모토가 분명했고, 야마모토야말로 스즈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명왕의 첩자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야마모토는 아마도 오랫동안 노력하여 스즈키의 측근과 경호원들을 명왕교 의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더라도 박 신 부의 의문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명왕교는 왜 스즈키를 여태껏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야마모 토가 스즈키에게 신망을 얻고, 또 스즈키의 주변 인물을 모두 명 왕교의 사람들로 만드는 것은 웬만한 시간 가지고는 될 일이 아 니었다. 언뜻 듣기로는 야마모토가 스즈키와 알고 지낸 게 십오년가량 되었다고 했다. 십오 년 전이면 1980년 무렵이다. 그때는 다카다가 죽기 전이었으니 야마모토도 처음부터 명왕교의 무 리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박 신부는 사이토를 쓰러진 야마모토 옆으로 끌고 가 눕혀 놓 고, 야마모토를 일으켰다. 무리하면서까지 기절한 야마모토를 깨울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야마모토였다. 박 신부가 야마모토를 깨우기 위해 그의 몸을 흔 들려는데 삼층 쪽에서 비명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앙칼지고 톤 이 높은 것이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오키에구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가려던 박 신부는 잠시 주저했다. 남 아 있는 최소한 다섯 명의 경호원들. 혹시 그들이 위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본능적으로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당황한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에 박 신 부가 간신히 이길 수 있었지만, 정신을 차린 저들이 무슨 계략이 라도 꾸며 놓았다면 위험할 것이었다. 스즈키도 명왕교의 인물 일지도 모른다. 이 일을 꾸민 장본인이 스즈키라면? 만일 지금의 짐작대로라면 자신은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들었다. 후일을 도모하려면 나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사이 토만이라도 데리고 나갈 수 있다면…………. 지금 기절한 사이토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이토를 버리는 셈인데…..

박신부가 망설이는 사이 다시 한번 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린 여자아이의 비명 소리. 박 신부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비록 아까 물리치기는 했지만 잠시 보았던 미라의 환영. 아직도 남아 있는 미라의 모습이 마음을 굳 히게 만들었다. 박 신부는 쓰러져 있는 사이토를 번쩍 들어 어깨 에 들쳐 메었다.

‘함정이 있건 없건 죽거나 살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다.’

박 신부는 사이토를 어깨에 들쳐 멘 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검 하나를 주워 오른손에 들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기 시 작했다. 축 늘어진 사이토를 멘 박 신부의 왼손에서 베케트의 십 자가가 조용한 기도의 울림을 전해 주고 있었다.

“됐다!”


현암이 필생의 힘으로 잡아챈 밧줄이 팽팽해지면서 준후와 승 희의 몸도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다음이 중요했다. 둘의 몸이 치솟자 일순간 밧줄이 느슨해졌다. 현암은 허겁지겁 밧줄 을 손에 감아쥐었다. 가능한 한 많이 감아쥐어야 두 사람이 다시 불 가까이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밧줄이 팽팽해 졌다. 현암은 더 이상 밧줄을 감아쥐기를 멈추고 오른손으로 단단하게 밧줄을 잡았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두 사람의 몸이 가속도가 붙어 내려가다가 출렁하고 멈추면서 현암의 팔에 엄청난 무게를 가해 왔다.

“으윽!”

허리가 휘어져 버릴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현암은 기를 쓰고 버텼다. 밑에서는 뜨겁다고 아우성치는 준후와 승희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 때 배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몽둥이 같은 것을 쥐고 몰려나오는 모습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밧줄을 끌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현암에게 우르르 달 려들었다. 그중에는 칼을 든 놈도 하나 있었다. 현암은 다급해졌 다. 저놈이 줄을 끊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현암은 눈을 질 끈 감고 왼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월향이 칼집에서 빠져 나와 공중을 한 바퀴 빙글 돌며 날카로운 귀곡성과 함께 빠른 속 도로 쏘아져 나갔다.

놈들은 예기치 않은 월향의 공격에 우왕좌왕했다. 삽시간에 놈들이 들고 있던 몽둥이들이 반 토막 나 버렸고, 한 녀석이 들 고 있던 일본도에서는 쨍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더니 칼날 이 뚝 부러져 나갔다. 월향의 공격에 놀란 놈들이 멈칫하는 사 이, 현암은 죽어라 하고 밧줄을 잡아당겼다. 다시 두어 놈이 덤 벼들려고 하자 월향은 번쩍하면서 허공에 은빛 호선을 그렸다.

순간, 모자를 쓴 녀석과 머리를 묶은 녀석의 머리털이 싹둑 잘려 공중에 흩어졌다. 두 놈이 놀라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 자 나머지 놈들도 무서운 듯 움찔거리면서 꽁무니를 뺐다.

그사이 준후와 승희는 비틀거리면서 뱃전을 붙들고 배 위로 기어 올라왔다. 현암은 승희와 준후가 올라오자마자 연희와 도 운을 끌어 올리기 위해 다시 밧줄을 아래로 흩뿌렸다. 준후는 그 야말로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더니 머 리를 휙 휘저었다. 질끈 동여맨 긴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물기가 공중에 요란스럽게 흩어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놈들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준후는 갑자기 중얼거리면서 발을 탕탕 굴 렸고, 다가들던 놈들은 그 자리에 못이 박혀 버린 듯 꼼짝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우보법(禹)의 술수였다. 승희도 헉헉거리 면서 숨을 몇 번 쉬고 눈앞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 자들을 째려보 더니 한 놈의 앞으로 다가가서 아래턱을 한 대 후려갈겼다. 

“나쁜 놈들!”

승희의 멋진 일격에 몸이 굳어 버린 그자는 뒤로 휘청했다가 기우뚱하면서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동상처럼 뻣뻣이 섰 다. 승희는 주먹이 얼얼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배 주위에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승희 누나! 이자들을 어떻게 좀 해 봐요!”

준후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승희는 주변을 둘러보았 다. 여러 명을 우보법으로 정지시킬 때는 자신도 발을 뗄 수 없 기 때문에 준후는 그대로 우뚝 서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현암은 현암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도운 까지 끌어 올리려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승 희는 재빨리 옆에 나뒹굴던 밧줄 뭉치 하나를 주워 굳어 있는 놈 들을 묶기 시작했다. 다행히 놈들의 팔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묶 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놈들의 팔을 다 묶은 승희는 놈들 의 정강이를 한 대씩 후려쳐 넘어뜨리고는 굴비 두름처럼 칭칭 동여맸다. 승희는 그때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면 서 묶은 놈들의 정강이를 연신 걷어찼다. 준후는 말릴까 하다가 승희가 화풀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화가 난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할 놈들! 날 이 꼴로 만들어? 어라, 화장 다 지워졌네?”

마침 배 위로 끌어 올려진 연희가 승희를 거들어 아까 리매에 게 두들겨 맞고 기절한 놈들까지 포함해 십여 명이나 즐비하게 묶었다. 사이에도 이상한 안개는 계속 치밀어 올라와 어느새 지 척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어졌다. 준후는 놈들이 다 묶인 것을 보자 우보법을 풀고, 곧 긴장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벽조선 을 꺼내 들었다.

현암은 마지막으로 도운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도운은 체격이 큰 편이었지만 다행히 주변의 기름이 거의 타서 불이 꺼져가던 터라 아까만큼 공력을 쓸 필요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준후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뜬 채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연희와 승희도 그런 준후의 뒤에 서서 긴장하고 있었다. 준후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뭔가 느껴지네요.”

승희와 연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선 쿵 하 는 소리와 함께 도운이 갑판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물에 빠졌던 네 사람은 물론이고 힘을 쓴 현암도 땀을 많이 흘린 탓에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현암이 앞 으로 나서자 도운은 뒤를 방어하려는 듯 승희와 연희의 뒤에 서 서 경계 자세를 취했다. 현암은 긴장이 되는지 월향검을 뽑아 들 고는 준후에게 물었다.

“뭐가 느껴지는 게 있니?”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부릅뜨고 계속 앞을 노려보았 다. 현암도 긴장된 얼굴로 준후가 노려보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안개는 더욱더 짙어져 가고 있었다. 일행이 긴장한 채 서 로의 거리를 확인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앞쪽에서 뭔가가 휙 하 고 날아들었다. 현암이 재빨리 앞을 막아서며 월향검을 허공에 긋자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뭔가가 땅에 털썩 떨어졌다.

“아니!”

놀란 준후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현암도 깜짝 놀랐다. 땅바닥에는 조그맣고 예쁜 리본이 달린 기다란 머리카 락 뭉치가 떨어져 있었다. 현암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연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연희가 놀란 나머지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

“아, 아라. 저건!”

현암과 승희가 놀라서 뭐라고 하려는 순간, 갑자기 준후가 이 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고함을 지 르면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현암이 재 빨리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지만 준후의 걸음이 현암의 손보다 빨랐다. 현암은 준후의 뒤를 쫓을까 하다가 뒤쪽에 있는 승희에 게 눈짓을 했다. 사정이 급하기는 했지만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 를 정도로 놈들이 잔인하게 군다면…………. 이렇게 놈들이 전혀 예 상치 못하게 이쪽의 의표를 찌른 것은 일행을 유인하기 위한 것 이 틀림없었다. 승희가 현암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곧 눈을 감았 다. 현암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연희에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아라라뇨?”

“전에 로비에서 보았던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에요. 납치되었 어요. 그 아이가 여기에 있을 줄은……”

아라가 납치되고 나서 연희와 준후는 승희를 만나면 아라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승희와 현암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알고 난 다음에는 아라 일은 까맣게 잊고 이리로 부랴부랴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라가 여기로 잡혀 와 있다니…………. 현암은 치를 떨며 눈을 부릅떴다.

“아이를 유괴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다니! 정말 흉악한 놈들 이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던 승희가 눈을 떴을 때 현암도 흥분 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연희 와 승희도 놀라서 재빨리 현암의 뒤를 따랐고, 도운도 혼자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는지 다친 발을 절룩거리면서 뒤를 따라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여러 놈이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별장 안은 쥐죽 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자 박 신부는 자못 긴장이 되었다. 몹시 지친 상태였지만, 사이토를 어 깨에 걸머진 채 힘을 돋우어 오라 구체로 자신과 사이토를 보호 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어린 여자아이의 비명 소리 때문에 마음 은 급했지만 상대의 급습을 고려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에 도착한 박 신부는 벽에 몸을 붙이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한번 휘저어 보았다. 그러나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박 신부는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돌려 삼층으로 향했다. 계단에 첫발을 내디딜 쯤 박 신부의 귀에 언뜻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응?”

박 신부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흐느끼는 듯한 남자 의 목소리였다. 박 신부는 무슨 일일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서 삼층에 도착한 박 신부가 소리 나는 곳 을 살펴보았으나 그다지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 한 신음 소리는 복도의 맨 끝 스즈키의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 었다. 박 신부는 목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의 양편에는 방이 많이 있었다. 방문 뒤에 놈들이 숨어 있다가 뒤에서 기습이라도 한다면……………. 삼층에서 오키에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보아 이곳에 놈들이 잠복 해 있을 게 분명했다.

박 신부는 주위에 신경을 계속 쓰면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방들을 그대로 지나쳐 가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 었지만 그렇다고 방문을 일일이 하나씩 밀쳐 볼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게다가 만일 문 하나를 부수고 들어갔는데 오히려 뒤에 서 놈들이 쏟아져 나오면 당할 확률이 더 많았다.

박 신부는 사이토를 옆에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뒤 왼손에 쥔 베케트의 십자가에 힘을 주었다. 큰 소리를 외치면서 몸의 기도 력을 모은 다음 그것을 넓게 펼쳤다.

“주의 분노!”

박 신부가 소리를 지르자 연녹색의 오라가 마치 파도처럼 넓 게 퍼져 나갔고 복도 양측으로 나 있는 문들이 쾅쾅 소리를 내면 서 일시에 부서져 나갔다. 잠겨 있지 않은 문들은 벌컥 열리거나 경첩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잠겨 있던 문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박 신부가 예상한 대로 여기저기의 문 뒤에 경호원들이 숨어 있었다. 문들이 부서지자 비명을 지르며 놀라 나자빠지는 자들도 있었지만, 서너 명은 부서진 문을 헤치면서 몽둥이나 칼 따위를 들고 복도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박 신부가 복도의 한쪽 끝에 서 있는데도 문들 이 동시에 부서진 것을 보고 주춤거리며 놀란 듯 서 있었다. 다 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큰 고함 소리와 함께 박 신부의 몸 에서 무수한 오라 구체가 몰려 서 있는 경호원들 위로 기관총처 럼 쏘아져 내렸다. 오라 구체의 공격을 받은 경호원들이 와르르 넘어지려는 순간, 박 신부는 목검을 휘두르면서 경호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순간 박 신부의 모습은 신부라기보다 고대 전쟁 때의 장군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때 넘어져 있던 경호원 한 명이 검은 물체를 박 신부 쪽으로 내밀었다. 권총이었다.


“어엇!”

“앗!

안개 속을 뚫고 현암과 준후의 뒤를 따라가던 연희와 승희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 고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도운도 희끄무레한 안 개 속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을 보고는 놀랐는지 둘의 곁으로 왔다.

“무슨 일입니까?”

연희와 승희는 놀란 얼굴로 마주 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려 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발은 허공에 뜬 채로 더 나아가지 않 았다.

“연희 언니! 이게 뭐야!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당황한 승희가 기를 쓰면서 앞으로 몸을 내밀어 보았지만 마 치 두꺼운 담장에라도 가로막혀 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 다.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안개가 두 사람에게만 단단하 게 굳어 버린 듯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도운은 놀란 얼굴 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연희와 승희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는 앞으로 몇 걸음을 떼어 보았다. 그러나 도운은 조금도 거리낌 없 이 안개 속을 오갈 수가 있었다.

“아이고, 이게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승희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쳤고, 연희도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도운이 조심스레 안개 속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안개 무슨 주술인 모양입니다.”

“주술요?”

“음! 무슨 진법인 모양인데 혹시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게 만드는 진법이 아닐까요?”

승희와 연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자들은 안으로 들 어갈 수 없게 만드는 진법이라니? 도운이 더듬거리면서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입니다. 강한 음의 기운으로 진을 친 것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석이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퇴마행을 많이 한 승희는 도운의 말이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을 굴렀다. 

“이게 뭐야. 현암 군은 무턱대고 뛰어 들어가 버리고………………”

연희는 문뜩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 러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 진은 우연히 쳐진 것일까?”

“무슨 소리야, 언니?”

“아까 승희 너한테 듣기로는 명왕교 사람들이 현암 씨의 마음 을 읽고 있었다고 했어. 게다가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으 니 현암 씨가 이곳에 있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 면 이 진은 혹시……….”

승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럼, 이 진은?”

“어쩌면 승희 너를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 친 진일지도..”

말을 채 마치지도 않고 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운상!”

현암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바깥에 있을 것인가 망설이던 도운이 연희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서 이리로 와서 승희를 보호해 주세요!”

“승희 상을요?”

“그래요! 놈들은 승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연희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놈들은 현암 과 승희, 도운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아까 보 트에서 듣기로는 애염명왕을 자처하던 여자가 명왕의 저격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으니 저들은 승희가 애염명왕의 화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왕교에서는 현암이나 준후 보다 오히려 승희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운이 앞을 감싸듯이 막아서면서 슈리켄을 꺼내어 들고 다른 한쪽 손에는 철추를 잡고 버티고 서자 승희가 의아하다는 표정 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가 입을 열었다.

“이 안개는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친 것이 아냐!”

“무슨 말이야, 연희 언니?”

“놈들은 현암 씨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만일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진을 쳤다면 현암 씨를 막았어야 해. 현암 씨가 갖고 있는 월향검의 강한 위력을 저들도 역시 알고 있을 테니까 말야. 그런 데 그러지 않았어. 여자가 들어갈 수 없는 진을 쳤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기습을 당해서 다급한 사정이 되었는데도 아 라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던지는 도발적인 행동을 한 건 아무래 도 우리를 갈라놓고…………….”

승희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연희는 승희의 불안해 하는 얼굴을 보고 빠르게 말을 이으면서 주변을 휙 훑어보았다. 

“준후와 현암 씨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하고, 여자들 은 들어갈 수 없는 진을 치고. 그 저의가 뭐겠니? 그들이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 승희 너를 고립시켜서 …………. 너를 노 리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연희 언니는……………..”

“내 생각엔 내가 같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는 것 같아. 그 리고 내겐 그들을 위협할 만한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너야. 이 배는 함정일 거야!”

“함정?”

승희가 잠깐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리더니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함정! 큰일이야! 현암 군도 위험해!”

“무슨 소리지?”

“아아, 현암 군. 바보! 진작 알았어야 하는 건데.”

“무슨 소리야?”

“월향검 말이야. 교주를 만나면 월향검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 그게 함정이야!”

“뭐라구?”

“현암군이 월향검을 얻었을 때, 월향이라는 여인의 영이 현암 군을 구하기 위해 칼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어. 틀림없어. 그렇다 면 명왕교에 전설적으로 내려온다는 여인의 한과 영이 봉인된 칼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

승희는 말을 하다 말고 붉게 열이 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두어 차례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그런 칼을 조선에서 보았다고 했어. 그 러나 현암이 월향검을 얻은 건 십 년도 채 안 돼. 그전까지 월향 은 여인의 영이 봉인된 귀검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검이었을 뿐 “이야.”

연희도 승희의 이야기를 듣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그렇다면…….”

“함정이야! 교활한 교주 놈! 그자는 현암의 마음을 읽고 있었 던 거야. 그래서 월향의 이야기를 흘리면 바보 같은 현암 군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것까지 예상했던 거야. 그래서 아까 우리와 만난 대위덕명왕에게 미리 그런 소리를 해 둔 것이고, 아아, 이건…………… 이 배는 모조리 함정이야. 위험해! 현암 군이 위험…….”

승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안개를 뚫고 사방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세 사람을 뒤덮을 듯이 날아왔 다. 연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옆에 있는 나무 상자를 들어 승희와 자신의 몸을 가렸고, 도운도 기합 소리를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철추를 요란하게 회전시키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 발의 총소리가 복도를 요란하게 울리며 퍼져 나갔다. 이어 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그러고는 다시 두어 발의 커다란 총성이 탕탕하고 요란하게 그 뒤를 이었다. 사방은 삽시간에 정적이 감 돌면서 조용해졌다. 푸른 연기 한 줄기가 슬며시 망령처럼 나타 나 허공에서 천천히 자취를 감춘 후에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음…….”

박 신부였다. 박 신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거리면서 간신 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밑에는 기절한 경호원이 깔려 있었다. 그 경호원의 손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를 풍기는 권총이 쥐여 있 었고, 옆에는 부서진 목검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힘겹게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쥔 박 신부의 손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으윽!”

박 신부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다가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는 허리를 죽폈다. 허리를 펴는 순간 옆구리에서 피가 솟구 쳤지만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반대편 쪽에 눈을 치켜뜨고 쓰 러진 경호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호원이 쏜 첫 번째 총탄은 박 신부의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 지나갔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엄습해 왔다. 박 신부는 순간적으 로 비틀거리는 몸을 그대로 총을 든 경호원에게 돌리며 목검으 로 경호원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목검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충격을 받은 경호원이 반사적으로 총을 쏘았으나 총알은 몸을 일 으켜 박 신부를 뒤에서 덮치려던 다른 경호원의 몸을 관통했다. 박 신부는 심한 고통 때문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총에 맞아 죽 은 자들의 눈을 일일이 감겨 주면서 성호를 그었다. 박 신부의 목검에 맞은 경호원은 기절했고, 다른 네 명 중 두 명이 총에 맞 아 죽었다. 나머지 둘은 팔다리에 총상을 입고 기절해 버린 상태 였다.

‘부디 주의 자비가 있기를…’

박 신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쓰러져 있는 사이토에게로 천 천히 다가갔다. 경호원들을 쓰러뜨리고 나니 옆구리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일단 상대의 공격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 다. 박 신부는 사이토를 다시 어깨에 들쳐 메려고 했지만 옆구리 의 통증 탓에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박 신부는 사이토를 질질 끌 다시피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사이토를 끌고 복도의 마지막 방인 스즈키의 방에 겨우 다다랐을 때, 안쪽에 남 아 있던 경호원 하나가 고함을 치면서 박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한 명이 더 있었구나!’

놀란 박 신부는 다급하게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육중한 덩치 의 경호원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가슴팍을 세게 후려쳤다. 예기 치 않은 상대의 공격인데다 그나마 기진맥진해 있던 박 신부는 뒤로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놈은 넘어진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 는 것을 보고는 잔인하게 웃으면서 옆에 있는 장식용 탁자에서 화분을 들어 박 신부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박 신부는 황급히 머리를 틀어 화분을 피했다. 그러나 벽에 부딪힌 화분이 퍽 하고 깨지면서 박 신부의 얼굴은 온통 흙으로 뒤덮였고, 순간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놈이 그 틈을 타 상처 입은 옆구리를 발로 걷 어찼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박 신부가 고통에 못 이겨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놈이 다시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러 나 박 신부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바람에 이번에는 허벅다리를 걷어차게 되었다. 자신의 뜻대로 안 되자 씩씩거리던 놈은 옆에 있는 장식용 탁자를 번쩍 들어 박 신부의 면상을 그대로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다 고통으로 몸을 웅크리던 박 신부의 다리가 다 가오던 놈의 발목에 묘하게 걸려 놈은 탁자를 든 채 우당탕 나뒹 굴었다. 놈이 넘어지자 박 신부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얼굴의 흙 을 털어 내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통증 때문에 여의치가 않 았다. 그사이에 넘어졌던 상대가 먼저 일어나 다시 탁자를 치켜 들었다.

‘할 수 없다. 주여!’

박신부가 안간힘을 써 기도력을 모으자 오라가 둥글게 맺히 더니 오라의 구체 두세 개가 상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기습 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놈은 탁자를 치켜든 채 무방비 상태 로 아래턱과 얼굴에 오라 구체를 얻어맞고는 기다란 비명을 지 르면서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뒤쪽의 벽에 머리를 부딪힌 놈의 몸이 주르르 물이 흘러내리듯 늘어져 버리자 박 신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삼층의 경호원들을 쓰러뜨려 놓긴 했지만 아래층의 쓰러진 경호 원들이 언제 다시 정신을 차릴지 몰랐다. 더욱이 박 신부는 심하 게 다친데다가 힘이 빠져서 이 상태라면 한 사람도 당해 낼 자신 이 없었다.

‘일어나자, 일어나 힘을 주소서, 힘을……………..’

박 신부는 길게 신음을 내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피를 흘리면서 방 안으로 절뚝거리며 들어가는 박 신부의 눈앞은 어질어질하고 물체가 두세 개로 어른거렸다.

방 안에는 스즈키가 재갈이 물린 채 묶여 누워 있었다. 오키에 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흐릿해 지고…………. 겨우 힘을 내어 가만히 살펴보니 스즈키는 눈이 휘 둥그레진 채 간절한 눈빛을 자꾸 박 신부에게 보내는 것 같았다. 박신부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그러나 스 즈키의 눈빛은 점점 더 다급해져 갔다. 눈앞이 어릿어릿하고 흐 려져 가는데……………. 정신이 마비되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아니, 이래서는 안 돼. 스즈키와 오키에, 사이토를 구해야지. 힘이 다 해 죽는다 해도 그들을 구한 다음에 죽어야지.

스즈키의 눈은 오키에를 향하고 있었다. 오키에는 눈을 꼭 감 은 채 기절한 듯 누워 있었다. 빨간 머플러로 입이 막히고 뒷짐 을 진 자세로 꽁꽁 묶인 오키에의 자그마한 모습이 가련해 보였 다. 박 신부는 휘청거리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오키에에 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꼭 감 고 있는 오키에를 풀어 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 았다. 박 신부가 흐릿한 눈으로 옆에 있는 스즈키를 쳐다보았다. 스즈키는 무언가 불안한 듯 다급한 눈짓을 보내며 온몸까지 꿈 틀거렸다. 박 신부는 스즈키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키에, 어린 오키에…………… 불쌍한 것. 먼저 구해야지, 먼저. 아마 스즈키 씨도 같은 생각일 거야. 저렇게 애절하게 눈짓을 하는 걸 보면 ・・・・・・ . 그래, 오키에부터 풀어 주자.’

박 신부의 정신은 점점 몽롱해졌다. 발밑이 둥둥 뜨는 것 같았 고 사방이 일렁거렸다. 박 신부는 오키에를 번쩍 들어 다치지 않 은 반대쪽 옆구리에 끼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심했지만 어서 스 즈키를 끌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 나오키에를 안은 채 스즈키에게 손을 뻗치던 박 신부의 눈에 뭔 가가 땅에 툭 떨어지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땅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눈부신 빛을 발하면서 너울거렸다. 빨간 머플러. 그건 오 키에의 입에 재갈로 물려 있던 머플러였다. 이상하게 여긴 박신 부가 머플러를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도 전에 박 신부 의 옆구리, 그 밑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소리. 이 목소리는 기 억에 있었다. 아까 바로 이 방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는 노의 가 면을 쓰고 나타난 가짜 미라가 중얼거린 목소리와 비슷했다. 

신부, 대단하군. 그러나 이젠 죽을 때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신부의 왼쪽 옆구리에 날카로운 것 이 비집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박신부의 허리가 휘청하고 꺾이는데, 이번에는 왼쪽 다리에 아 까보다도 더 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박 신부는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우당탕 넘어져 버렸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박 신부의 눈에 분명 꽁꽁 묶인 채 있어야 할 오키에가 빙글 재주를 넘어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자신을 째려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 키에의 눈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손에는 번쩍이는 칼 한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 너, 넌…….”

박 신부는 더 말을 하려고, 아니 눈을 더 크게 뜨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빳빳해지고 자꾸 깜박깜박 정신을 잃 어갔다. 갑자기 박 신부의 눈앞이 훤하게 밝아 오는 듯하더니 곧 캄캄한 나락으로 변해 갔고, 아득하게 꺼져 가는 박 신부의 의식을 배웅이라도 해 주듯 오키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깔깔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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