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4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7 : 명왕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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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2권 4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7 : 명왕교의 비밀


명왕교의 비밀

현암은 아무런 생각 없이 안개를 뚫고 나가면서 소리 높여 준 후를 불렀다. 처음에는 무언가 비밀 장치나 함정 따위가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는데,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장치는 없었다. 하긴, 배에 그런 것들을 만들어 놓는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그래도 언제 명왕교도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터라서 현암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상하다. 앞에 간 준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뭔가 나타나기는 해야 할 텐데…………… 아무리 큰 배라지만 별다른 구조물 하나 없이 이렇게 허허벌판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현암은 걸음을 멈추고 앞뒤를 둘러보았다. 안개의 색깔은 아 까의 흰색과는 달리 어딘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앞서 달려간 준후의 모습도 뒤따라오리라 여겼던 승희나 연희, 도운의 모습 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진법인가 보군.’

현암은 지금까지 몇 차례 이런 진법을 겪어 본 일이 있었다. 경험으로 보아서 이 진법에 말려들게 되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 려 그 자리에서 뱅뱅 돌게 된다.

‘도대체 밋밋한 배 위에서 무엇을 이용해서 진을 쳤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우리가 기습을 했으니 진을 치 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테고. 명왕교도들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는 배 위에 순간적으로 진이 쳐졌다면……..’

현암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짙은 안개를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배 자체가 함정’

현암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때 당황한 현암 앞으로 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안개가 슥 하고 스쳐 지나갔다.

‘뭘까?’

현암은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준후의 앙칼진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가 진법을 깨고 있구나!’

준후가 현암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반가운 마음에 안개를 헤치면서 달려갔다.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준후의 모습 이 보였다. 현암은 반가워서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흠 칫 하고 뒤로 물러섰다.

‘속임수!’

준후는 분명 아까 물에 빠져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현암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준후는 젖은 데라고 는 한 군데도 없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들면서 소리를 질렀 다. 그러자 현암의 목소리와 월향의 귀곡성이 합해져서 우르릉 거리며 주변에 울려 퍼졌다.

“너는 누구냐!”

준후의 형상을 한 자가 서서히 뒤로 돌아섰다. 얼굴엔 흰 노의가면이 씌어 있었다.

“헉!”

현암은 순간적으로 꿈틀하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순간 주변이 깜깜해지면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려 왔다.

“하하하.”

“깔깔깔깔.”

웃음소리가 커지면서 현암의 주변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갔고, 그 사이에서 흰 노의 가면들이 너울너울 춤추듯 돌아다니며 사방을 덮어 갔다.

“흥, 변변찮은 술수!”

현암이 사자후의 수법으로 고함을 지르자 현암의 주변을 떠돌 던 가면들이 질풍에 휘날리는 것처럼 한쪽 구석으로 흩날렸다. 

“월향!”

주저 없이 현암이 왼손을 내뻗자 월향이 귀곡성을 내면서 가 면의 영상들이 엉켜 있는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폭죽 같 은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됐다!”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한 현암은 왼손을 내밀고 월향을 불렀 다. 그러나 월향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

흰 노 가면의 영상이 사라진 후 주변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암흑이 되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현암 은 초조하여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월향!”

그러나 낯익은 월향의 귀곡성도, 번쩍이는 은빛의 모습도 여 전히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현암이 무작정 앞으로 달려들기위해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한 줄기 빛이 현암 앞에 비치더니 장막처럼 앞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커튼이 갈라지듯 반 으로 쭉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사람이 서서히 현암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아니, 넌…….”

희끄무레하던 모습이 현암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날 잊었어, 오빠?”

현암이 잃어버렸던 동생 현아였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 정신을…………. 아아, 주여!’

온몸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반무 의식 상태에서도 박 신부는 계속해서 부르짖었다.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오키에 같은 어린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다리에 격렬한 통증이 왔다. 입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신음 소 리가 새어 나왔다. 도저히 눈을 뜰 수도,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기도를 하니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서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다.

박 신부의 귓전으로 흐릿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본말이어 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굵은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 울음소리와 두려움에 가득 찬 소리도 들렸다.

“놔줘, 놔줘, 넌 누구야! 왜 날………..?”

이번에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말이었다.

“더 말이노하라! 더, 더!”

“으아앙!”

여자아이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박 신부의 귓전을 때렸 다. 박 신부는 정신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여자아이, 미라, 그리 고 자신의 과거. 맑고 티 없는 아이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아무 죄 없는 저 어린 것이 고통을…………….

“더 하라! 더!”

“으아앙. 무서워! 아파! 왜들 그러는 거야!”

또다시 굵은 목소리의 여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말해라! 더!”

“아악! 너 도대체 누구야? 왜 나와 얼굴이 ……………. 으아앙.”

박 신부가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베케트의 십자가에서 따뜻 한 울림이 전해져 왔다. 박 신부는 눈꺼풀을 조금 움직일 수 있 을 것 같았다. 지금 눈꺼풀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이 악령과 맞 서 싸울 때보다도 더 힘든 것 같았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눈 에 흐릿하게 방 안의 정경이 들어왔다.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싸늘한 미소를 짓고서……………. 오키에였다.

그리고 두 명의 경호원들이 다른 한 명의 여자아이를 붙들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두 갈래로 머리를 묶었던 모양인 데, 한쪽 끝이 무참히 잘려 풀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 치 두 여자아이의 얼굴이 똑같았다.

오키에가 입을 열었다.

“됐다.”

오키에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놀랍게도 한국말이었고, 어 린아이의 목소리와 굵은 여자의 목소리가 반쯤 섞인 음성이었 다. 오키에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굵 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오키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라와 똑같은 목소리가 오키에의 입 에서 흘러 나왔다.

“됐다. 후훗. 이제부터 나는 아라야. 한국에서 온 최아라.” 

울어대던 다른 쪽 여자아이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으아악? 하하하하.”

오키에가 아라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는 크게 웃었다. 아라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저쪽의 여자아이가 악을 썼다.

“아냐! 아라는 나야. 나야!”

“하하하.”

오키에는 아라의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박 신부는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키에 오키에가 바로 명왕교 교주로구나. 교주의 영이 지금 오키에의 몸을 지배하고 있어. 저 아이, 아라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군. 그런데 두 아이의 얼굴이 저리도 닮았다니! 그 러나 도대체 왜?’

오키에가 손짓을 하자 경호원 한 명이 아라를 질질 끌고 밖으 로 나가 버렸다. 아라는 끌려가면서도 악을 써 대며 울었다. “아빠! 엉엉엉. 아빠아. 준후 오빠, 준후 오빠!”

‘주, 준후라구?”

박 신부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저 아이는 준후와 아는 사이 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오키에가 아라라는 저 아이의 목소리 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이유는…….

박 신부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조금 움찔거리는 느낌 만 왔을 뿐 더 이상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오키에가 힐 끗 박 신부 쪽을 돌아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다가 왔다.

“명도 길구나. 아직도 죽지 않았다니……………”

오키에는 아라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한국말로 말하고 있었 다. 목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어떤 주술을 썼기에 이리 도 빨리 한국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박 신부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키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팔목에 숨겨 놓 은 기다란 바늘을 꺼냈다.

“더 이상 꿈틀거리지 말고 죽어. 알았지?”

오키에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다란 바늘은 박 신부의 심장 부근을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준후는 정신없이 달리는 중이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까 땅바닥에 떨어진 아라의 잘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마치 아 라의 머리가 떨어진 것처럼 느꼈다. 어린아이에게 그따위 짓을 하다니! 어린아이를 납치하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들을 그냥 보아 넘길 준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고 해도 준후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흥분하고 있었다. 학 교 다니기를 포기하고 난 후 지금까지 준후는 같은 또래의 여자 아이들을 많이 보아 왔으나 특별한 감정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 다. 사실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보다도 한참 어리고 귀여운 아라의 모습은 왠지 준후에게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동생 같은 느낌이 드는 애였는데…………. 아라야, 무사해라!’ 달리던 준후가 우뚝 섰다. 이상했다. 배 갑판이 이토록 넓을 리 없었다. 준후는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건 일종의 진법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채 이곳에 마구 뛰어들어 왔다고 생각하니 언짢아졌다.

“진법으로 홀리려고!”

준후는 코웃음을 치고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바닥이 쿵 쿵 울리게 몇 걸음을 옮기면서 부적 하나를 태우자, 준후의 눈앞 에 있던 안개가 흐려졌다. 바로 자신의 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었 다. 뒤를 돌아보자 미처 예상치 않았던 광경이 준후의 눈에 들어 왔다. 약 십오 미터쯤 뒤에 현암이 있었고, 현암이 있는 곳으로 부터 오 미터쯤 앞에는 월향검이 못 박힌 것처럼 허공에 떠 있었 다. 연희와 승희, 도운은 보이지 않았다. 현암 형과 월향검이 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걸까? 준후는 정신을 차리고 현암이 있는 곳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현암은 양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허 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암이 바라보는 쪽에는 보 이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음흉한 기운이 엉켜 있었다. 준후는 자 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어머니라고 자처 하는 여인의 환상을 보고 멍하니 서서 괴로워했던 일. 그때는 연 희가 자신을 불러 주어서 깨어날 수 있었다. 지금 현암도 그런 상태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준후는 서둘러서 현암의 앞쪽에 뭉쳐 있는 영기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정신을 모았다. 틀 림없었다. 아까 자신이 겪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자처하던 영기 의 기와 똑같은 성질의 기운이었다. 지금 이것은 현암의 마음속에 가장 큰 상처로 자리 잡고 있는 여동생 현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현암 형!”

준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부적을 꺼내려고 막 소맷자락 속으로 손을 넣는 순간 무언가가 휙 하고 준후의 몸을 낚아채면서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준후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몸이 밧줄 로 묶인 채 위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준후의 몸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하늘과 갑판과 안개가 마구 뒤엉켜 준후의 눈 에 비쳤다. 배 갑판의 건물 꼭대기에서 두어 명의 괴한들이 줄을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것도 잠깐이었 다. 준후의 몸은 허공을 크게 빙글 돌아 배 구조물의 강철 벽에 쾅 하고 부딪혔다. 준후는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의식이 희 미해졌다.


“오빠, 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현아의 모습을 현암은 얼이 빠진 듯 바 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을 가르고 나타난 현아의 모습은 처 음에는 멀쩡했지만 서서히 현암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니, 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너……”

현암이 멍해진 눈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자 현아의 목소리가 약간 일그러진 채 들려왔다.

“난, 난……………. 오빠는 없었지? 오빠는 날 구해 주지 않았지?그리고 ・・・・・・ “

한발자국씩 현암에게 다가올수록 현아의 몸은 점점 물로 변 해 녹아내렸다. 동시에 현암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는 마 치유리병인 양, 그 물들을 모아 차곡차곡 채우는 듯했다. 벌써 현암의 무릎까지 끈끈한 물이 출렁거렸다.

“오빠, 난 외로워. 더 이상, 더 이상은……?

현아가 다시 현암 앞으로 한 발 다가서자 현아의 오른쪽 어깨 부터 아랫부분이 쫘악 하고 물이 되어서 쏟아져 내렸다. 출렁거 리던 물은 현암의 허벅지까지 차올라왔다. 순간, 현암의 멍해졌 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현암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넌 현아가 아니야!”

다가오던 현아의 출렁거리며 녹아들던 모습이 잠시 멈추었다. 

“현아는 내 기억 속에 있어. 그 따위 몰골을 보여서 날 희롱하 려고 들지 마!”

“나도 현아야 오빠의 가엾은 동생 현아. 오빠가 지켜 주지 못 한 동생…………. 이건 물속에서 내가 흘려 온 눈물이야. 내 눈물들….”

현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은 현암의 허리띠 위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현암은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는 참혹한 현아의 모습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차가운 눈초리로 계속 노려보았다. 

“너는 거짓 환영이야. 진짜 현아가 아니라구!”

“오빠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만약 내가 진짜라면? 그러 면 영원히 후회하게 될 거야.”

현암은 그 말을 듣자 눈을 부릅뜬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아는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서 흐물흐물 녹아 물로 변 해가는 왼팔을 들어 현암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지난번에 오빠도 같이 갔어야 했어. 그런데 왜 안 갔지? 지금 이라도 나와 같이 가. 응?”

말을 끝내자마자 현아의 모습은 완전히 녹아 물로 변해 버렸 고, 그 순간 수면이 높아지면서 현암의 머리 꼭대기까지 단번에 채워 버렸다. 현암을 삼킨 물줄기는 위로 솟구치면서 한데 뭉치 더니 무서운 속도로 소용돌이쳤다.


도운이 철추를 휘두르자 창창 소리가 나더니 승희와 연희에게 로 날아들던 물체 중 몇 개가 땅에 떨어져 내리다가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언뜻 보니 그것들은 검은색의 단검으로 손잡이 부분 이 줄에 매달려 있었다. 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 다.

“그물!”

승희와 연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출렁하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줄로 짜인 그물로 세 사람을 뒤덮어 버리려는 수작이었다. 도운은 고함을 지르면서 철추를 왼손에 옮겨 쥐고 품에서 슈리켄을 꺼내어 승희와 연희를 옭아 맨 그물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나 슈리켄은 무엇에 부딪힌 듯 챙 하는 소리만 내고 땅에 떨어져 버렸다.

“쇠줄인가?”

도운이 혀를 차면서 다시 품을 뒤지는데 누가 도운의 뒤를 덮 쳤다. 도운은 어깻죽지를 세게 얻어맞고 비틀거렸으나 워낙 덩 치가 크고 힘이 좋은 편이라 승희와 연희를 옭아맨 그물을 잡고 간신히 뒤로 돌아설 수 있었다. 도운을 기습한 것은 대위덕명왕 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하하하. 교주님은 무불통지한 분이시지.”

대위덕명왕이 소리를 지르면서 예의 연검을 휘두르며 도운에 게 덤벼들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도운의 귓가에 나지막한 소리 가 들렸다. 승희였다.

“저 사람을 이쪽으로 유인하세요. 그러면 칼을 빼앗을 수…………….” 

승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위덕명왕의 칼날이 도운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도운은 철추로 대위덕명왕의 공격을 간신 히 막아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무기에서 불꽃이 튀었다. 도운은 재빨리 팔을 돌려 철추에 남아 있던 줄을 대위덕명 왕의 연검에 얹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나 대위덕명왕도 만만 치가 않아서 쉽사리 끌려오지는 않았다. 연희는 그물에 옭매어 있어서 경황이 없었지만 두 사람이 겨루면서 나누는 대화를 엿 들을 수 있었다.

“네놈! 감히 밀교를 배반하고 사악한 자들의 주구가 되다니!” 

“흥, 웃기는 소리. 밀교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밀교가 순리를 배반한 것이지.”

“헛소리 마라!”

“세상은 여성적인 것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남성들만 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밀교가 무슨 소용 있단 말이냐? 더 이 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연희는 그 와중에도 눈을 치켜뜨고 생각에 잠겼다.

‘여성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는 세상이라고?’

도운이 계속 연검을 엮어 맨 철추의 줄을 잡고 씨근거렸으나 대위덕명왕은 힘으로는 절대 도운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도 여유 있게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도운이 갑자 기 으윽 하는 비명을 지르며 철추의 줄을 놓고 뒤로 나자빠졌다. 

“이런이런 실력이 많이 줄었군그래.”

대위덕명왕이 여유롭게 중얼거리면서 연검을 한 번 허공에 긋 자연검을 옭매고 있던 철추의 줄이 툭 하더니 멀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운은 겁을 먹은 듯 바닥을 기어서 대위덕명왕의 반대편 쪽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대위덕명왕은 자연스럽게 몸 을 돌려 연검의 끝을 도운에게 들이댔다.

“너를 이자나미 신의 제물로…………… 으아아악!”

대위덕명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면서 무릎을 풀 썩 꺾으며 검을 떨어뜨렸다. 놀란 연희가 고개를 드니 승희가 눈 을 감고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영적 주파수가 맞지 않는 대위덕 명왕에게 힘을 밀어 보냄으로써 대위덕명왕을 쓰러뜨린 것이었 다. 대위덕명왕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도운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연검을 주워 들어 그물을 베었다. 승희와 연희의 몸이 털썩 바닥 에 떨어졌고, 둘은 간신히 그물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됐다!”

그물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승희는 곧 정신을 집중해 현암과 준 후가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으악! 큰일이야!”

“아니, 왜 그래?”

승희가 놀라는 것을 보며 연희가 묻자 승희는 앞에 뿌옇게 가 려진 안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현암 군이 위험…….”

그때였다. 안개를 꿰뚫고 눈부신 황금빛이 번쩍하며 뿜어져 나왔다. 세 명은 눈부신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두 손으로 가렸다. 승희가 그 와중에서도 큰 소리로 외쳤다.

“부동심결! 현암군이야!”

눈부신 황금빛은 아주 잠시 동안 비추었을 뿐이지만 세 명은 강렬한 빛을 쐰 나머지 눈앞이 캄캄해져서 한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연희가 간신히 눈을 떠 보니 부동심결의 강한 기운 때문인지 뿌옇던 안개가 어느새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었 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현암이었다.

“현암군!”

승희가 소리치며 현암에게 다가가려는데 무언가가 휙 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어 승희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승희가 놀라서 위를 쳐다보자 낯익은 은빛의 월향검이 무섭게 번쩍이고 있었다.

“어, 너 왜?”

승희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도운이 승희의 어깨를 잡았 다. 굳은 얼굴이었다. 도운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연희가 뒤 따라와 승희에게 통역해 주었다.

“지금 건드리면 안된대.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서………..” 

승희는 놀란 눈으로 현암을 바라보았다. 몸에서는 무럭무럭 김 같은 것이 나고 있었고,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생각해 보 니 현암은 부동심결을 쓸 때면 으레 승희 자신의 힘까지 끌어다쓰고서도 거의 탈진 상태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승희의 도움도 없이 공력 소모가 엄청난 부동심결을 사용했으니 자칫 주화 입마 될 우려마저 있었다.

“아이고, 현암군! 이 미련퉁이!”

연희가 흥분한 승희의 팔을 꽉 붙잡았다. 연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승희가 뒤를 돌아보자 연희의 커다란 눈 역시 파 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준후는 준후는 어디 있지?”

현암의 부동심결의 힘으로 눈앞의 안개는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배의 거대한 철제 구조물도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그러나 준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가 안보여!”


연희가 외치자 승희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사방을 두리번 거렸고, 도운도 상황을 알아챈 듯 입술을 깨물고 사방을 둘러보 더니 부서진 철추의 줄을 다시 감고 옆에 있는 큼지막한 쇠파이 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연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준후 혼자 안으로 뛰어든 것일까?”

승희는 겁먹은 눈으로 녹이 슬어 있는 배 위의 커다란 철제 구 조물을 바라보았다. 한쪽에 퀭하니 구멍처럼 뚫린 문이 조금 열 려 있었다. 준후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저 안으로 혼자 들어가버린 게 아닐까?

“어떻게 하지, 연희 언니?”

연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의 얼굴은 고통스럽기보다는 싸늘하고 무표정했으나, 이마에서 줄 줄 흐르는 땀이며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김이 심상치 않 았다. 지금 준후를 찾으러 안으로 들어가면 현암을 이대로 방치 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셋이 흩어지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 같지는 않았다. 셋 중에서 그나마 상대를 맞아 싸울 수 있는 사 람은 도운밖에 없으니…………. 연희가 호신술을 한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총이나 장검 같은 것을 휘두르는 놈들이었다. 그런 그들 과 맞서 대적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었다. 승희가 연 희에게 힘을 보태 주는 것도 가까운 거리와 어느 정도 정신을 집 중할 시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연희가 입술 을 지그시 깨물며 도운에게 말했다.

“도운 스님께서 여기 현암 씨를 좀 지켜 주세요. 저희 둘은 준 후를 찾아보겠어요.”

“둘이서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연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승희는 도대체 연 희가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 다. 궁금한 듯 승희가 연희를 바라보자 연희가 대답했다.

“명왕교도들은 준후와 현암 씨를 흥분시키려고 아라의 머리카락을 잘라 던졌어요. 그리고 짙은 안개의 진을 쳤구요. 진은 여 자들은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승희와 나, 우리 둘이 안으로 들어가면 명왕교 측에서는 당황하지 않겠 어요? 그들은 우리가 진을 부수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더구나…………….”

승희가 연희의 말을 자르듯이 가로막았다.

“그래. 아무래도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 들어온다면 저자들도 놀라겠지. 그렇지?”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현암 씨 모습을 보니 감이 잡혀. 준후도 그랬지. 아마도 어떤 환영을 보고 몹시 괴로워하다가 부동심결로 잡념을 없애려 했 을 거야. 스즈키도 환영에 시달렸다고 했고 히로시도 그렇고 다 른 죽은 모든 사람들도……………. 아까 대위덕명왕이 여성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 걸로 보아 저들은 남성들에 대해 어떤 힘을 가하는 전문 집단일 거라는 생각이 들 어. 그러니 어쩌면 여자인 우리가 오히려 잘 대항할 수 있을지고…”

연희가 말을 잇는 사이 철제 구조물의 안쪽에서 무언가 길게 울부짖는 비명 소리 같은 것과 요란하게 부서지는 듯한 소리, 그 리고 사람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어, 저 소리는?”

승희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귀를 곤두세우더니 잠시 후 기쁜 듯이 외쳤다.

“리매의 울음소리야! 준후가 불러낸 것이 틀림없어!”

그때 뱃전 저쪽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와르르 배 위로 올라 왔다. 명왕교도들이 보트를 타고 왔거나 아니면 밑에 있던 다른 보트에서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도운이 소리를 질렀다. 

“저놈들은 내가 맡겠소!”

도운이 현암의 앞을 막아섰고, 연희와 승희는 망설이다가 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운이 기합성을 내면서 달려드는 명왕 교도들을 맞아 싸우는 사이, 허공에 떠 있던 월향검이 부르르 떨 더니 툭 하고 현암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월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악몽과 환영의 연속이었다. 머리를 산발한 채 음산한 분위기 를 띤 파리한 얼굴의 여자. 온몸에 구더기가 들끓고 반쯤 썩은, 긴 옷차림을 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코앞에서 박 신부를 바라보 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이 우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미 라의 목소리일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아이. 시트를 묶어 만든 길게 늘어진 올가미 파리하고 가는 목, 음산한 목소리……………… 네가 대신 죽을 수 있었는가?

사방에서 나타난 여러 얼굴들이 휙휙 몸을 돌리면서 박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일그러진 현암의 얼 굴이 다가오다가 펑 하고 폭죽처럼 터져 버렸고, 뒤에서는 준후 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물의 내장 같 은 것이 흐느적거리며 검디검은 하늘을 휘감아 돌고, 커다랗고 둥근 눈알들이 일그러진 채 둥실둥실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현웅 화백이 박 신부의 멱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참견하지 마!”

승희와 주희, 두 자매의 얼굴이 겹치다가 산산이 흩어져 버렸 다.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밑으로 한없이 떨어졌다. 그 아래의 공 간이 사라지고 바닥없는 밑이 쪼개져 흩어졌다. 수많은 손들이 박 신부의 몸을 쥐어뜯으며 조각조각 내 버리려는 듯 벌 떼같이 달려들었다. 하늘에 피가 비처럼 내리더니 소용돌이가 되어 박 신부를 휘몰아 넣었다. 가슴! 가슴이 아팠다. 뭔가 커다란 벌레 같은 게 박 신부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와서 몸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앙상한 해골이 나타나 박 신부의 양팔을 잡아당겼다. 

‘주여, 주여!’

박신부는 하염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중간중 간 간신히 입을 떼고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희미하게 앞 이 보였다. 축축한 기분. 지하실 같았다. 지금 자신은 양팔이 꽁 꽁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 까 가슴을 찔렸는데…………. 심장이 찔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요행히 비켜 지나간 것일까? 아무튼 박 신부는 아직 살아 있다. 그 러나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폐를 다친 것일까? 가슴이 답답해 지면서 기침이 날 것 같았으나 그럴 기운마저도 없었다. 박 신부 는 시익시익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정 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또 그 악몽으로 빠져들 지도 모른다. 아니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르다. 그러나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명왕교도, 오키에…………. 오키에가 명왕교의 교 주였다니. 그것도 엄청난 능력을 가진…………….

가슴이 쓰라려 왔다. 고통이 너무나도 심해 다른 곳의 고통은 거의 느낄 수도 없었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참아야 했다. 그러 면 무엇이든 생각을 계속해야만 했다.

‘오키에…………….”

오키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가 이런 엄청난 음 모를 꾸미고 그런 경천동지할 능력들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아니야, 아닐 거야. 그렇다면 그 목소리………….”

오키에의 목소리. 그것은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빙의된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독특한 억양의 쉰 목소리. 어느 정도 나이 를 먹은 듯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렇다. 오키에는 다른 사람의 영에 빙의된 것이 틀림없었다.

‘여자? 혹시 이자나미? 아냐. 그 정도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원래의 명왕교 교주?’

그편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채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가 슴에 고통이 엄습해 왔다. 이번의 고통은 너무나 격심해서 박신부는 몸을 비틀고 이를 악문 채 신음 소리를 냈다.

덜컹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누가 다가오고 있었다.

“신부, 슬슬 네 차례가 돌아왔군. 어때, 재미있었어?”

여자아이의 목소리, 잠깐 들었던 아라라는 아이의 목소리. 그 렇다면 오키에가 분명했다. 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깐 더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손에 힘을 덜 주었지. 어때, 고맙지 않아? 조금이나마 더 살 수 있게 해 줘서…………. “

박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고통보다 도 오키에가 가련하다는 마음이 더 먼저 들었다. 박 신부가 오키 에, 아니 오키에의 몸을 점유한 명왕교 교주를 위해 속으로 기도 를 올리려는 순간, 분노에 찬 오키에의 목소리가 쨍 하고 들려 왔다.

“빌어먹을 것! 주제넘게 나를 동정해? 너 스스로나 동정하란 말이얏!”

아까 찔렸던 가슴에 퍽 하고 충격이 왔다. 박 신부는 크윽 하면 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꺾였다.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죽으면 안 돼. 네 역할이 남아 있어. 네 일행들하고 모두 같이 가야지. 안 그래?”

누군가가 머리채를 쥐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박 신부는 약간 의식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오키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눈치채고는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나를 이용해서 모두를 유인하려 하고 있어. 안 돼!’


승희와 연희가 배의 구조물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철로 된 방 안에서 소리가 울려서인지 리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은 더욱더 크게 들려왔다. 두 사람이 뛰어든 곳은 아마도 선내의 창고쯤 되 는 곳이었던 듯 꽤 널찍했다. 그 한쪽 구석에서 희뿌연 기운으로 뭉쳐진 리매가 일단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리매는 무엇을 지키려는 듯 허공에 팔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이 상하게도 리매는 그 사람들과 아무런 접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리매의 앞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뭔가 널찍한 것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승희는 언뜻 그 여자들과 소리 지르며 물러서고 있는 리 매와의 틈 사이로 뒤쪽으로 꽁꽁 묶인 채 버둥거리는 조그마한 사람을 발견했다. 준후였다.

“준후야!”

승희가 소리를 지르자 고개를 돌린 사람은 정작 그 소리를 들 어야 할 준후가 아니라 리매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여자들이었 다.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얼굴에는 모두 노의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기분 나쁜 얼굴들을 대한 승희와 연희가 움찔하는 사이에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 자 한 명이 손짓을 하면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만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꽤나 나이가 들어 보였고 얼굴 생김 새도 흉측했다. 그 여자라기보다는 노파가 다른 사람들에게 뭐 라고 명령하자 노파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승희와 연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사이 노파는 아까 리매를 밀 어내던 널찍한 모양의 물건을 휘두르며 협박하듯 손을 휘젓는 리매에게 뛰어들었다. 연희는 달려오는 명왕교의 여신도 한 명 을 옆차기로 차서 넘어뜨리면서도 곁눈으로 노파를 쳐다보았다. 엄청난 크기의 리매에게 노파가 단신으로 덤벼드는 것이 무모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실제의 결과는 연희의 예상과는 달랐다. 노 파가 들고 있던 둥글고 널찍한, 마치 방패와 흡사한 물체를 리매 의 몸에 대고 기합을 넣자 엄청난 몸뚱이는 바람이 빠져나가는 고무풍선처럼 쭈그러들면서 그 둥근 방패 속으로 휘리릭 빨려 들어갔다.

“아이고, 저런! 리매가…………….”

승희가 다급한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명왕교 여신도 한명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면서 그 여신도의 팔을 잡고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 여신도는 전기 에 감전이라도 된 듯 크게 비명을 지르다가 풀썩 쓰러져 버렸다.

쓰러지고 나서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연희도 달려드는 다른 여신도의 아래턱을 주먹 으로 후려갈겨 저만치로 쓰러뜨려 버렸다. 나머지 네 명의 여신 도들은 기가 질렸는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두 사람의 눈 치를 살폈다.

리매를 없애 버린 노파는 묶여 있는 준후를 낚아채고 발로 걷 어차 구석으로 굴려 버렸다. 그런 다음 널찍하고 둥근 모양의 물 건을 손에 들고 연희와 승희가 있는 곳으로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다가왔다. 그러자 네 명의 여신도들은 일제히 뒤로 한 걸음 씩 물러섰다. 연희와 승희는 긴장을 풀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그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놀랍게도 실 로 수를 놓는 틀에 불과했다. 둥글고 꽤 큰 틀이었는데 거기에는 바늘이 몇 개 꽂혀 있었고 알아보기 힘든 기이한 문자들이 붉은 실로 가득 수놓여 있었다. 노파는 연희와 승희의 앞으로 다가오 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저 꼬마와 같은 일행이냐? 감히 여기까지 겁 없이 뛰 어들다니. 명왕교를 우습게 보아도 유분수지. 어디 한번 맛 좀 볼 테냐?”

노파는 일본어로 지껄이고 있어서 연희만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희와 승희는 자신들 앞으로 다가오는 노파를 두려 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노파는 굉장한 재주를 지닌 사람 같아 보였다. 가만히 연희를 쳐다보다가 승희에게로 시선을 옮기던 노파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노파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연희가 얼른 승희에게 눈짓을 했다. 노파는 승희가 명왕의 화신임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승희가 인상을 쓰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노파는 한 걸음 뒤 로 물러서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수틀을 황급히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가느다랗게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노파에게 다가가 던 승희가 놀란 얼굴을 한 채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어, 승희야!”

연희가 놀라서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는 놀란 나머지 멍한 표정을 한 채 몸이 휘청거리면서 한쪽 무릎을 꺾었다. 연희의 눈 에 승희의 오른쪽 어깨에서 뭔가 가느다란 것이 마치 전등의 빛 을 반사시키듯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어느 사이에 노파가 수틀 에 꽂혀 있던 바늘을 날린 것이다.

“어, 중…….”

연희가 채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승희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못한 채 쓰러져 버렸다. 혈도 부근에 바늘을 맞아서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노파가 깔깔대며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웃었다. 

“명왕의 화신이지만 힘을 쓸 줄 모르니 전혀 소용이 없군그 래! 나, 귀자모신(鬼母神)의 단장침(斷腸針)** 하나도 피하지 못하다니. 깔깔깔.”

연희가 쓰러진 승희의 안색을 살펴보니 승희는 그야말로 석고 상처럼 몸이 굳었는지 꼼짝하지 못했다. 연희는 어찌할 줄을 몰 라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앞을 막고 섰다. 자칭 귀자모신이라는 노파는 비웃음을 흘리며 연희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노파의 손 에 들려 있던 수틀이 연희를 공격하려는 듯 허공으로 올라갔다. 막 수틀을 휘두르려는 순간, 노파의 발치에 번뜩이는 빛줄기 하 나가 박혔고, 예기치 않은 공격에 놀란 귀자모신은 기겁해서 재 빠른 동작으로 몸을 날려 옆으로 네다섯 걸음 물러섰다. 날아온 빛줄기는 낯익은 것이었다. 준후의 뇌전이었다. 연희가 빛이 날 아온 곳을 보니 몸이 꽁꽁 묶인 채 버둥대던 준후가 급한 나머지 몸을 뒤로 굴린 채 손만으로 수인을 짚어 되는 대로 뇌전을 날 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손뿐만 아니라 입까지 틀어막힌 채 고 개를 틀어 뒤를 보며 공격하다 보니 정확하게 겨냥이 되지 않았 다. 준후가 서툴게나마 마구잡이로 뇌전을 몇 줄기 발사하자 놀 란 명왕교도들은 우르르 벽 쪽에 붙어서 몸을 피했고, 귀자모신은 이를 갈았다. 연희는 준후를 풀어 주어야 귀자모신인지 뭔지 하는 노파와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비된 승희를 내버려 둔 채 냅다 준후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귀자모신은 큰 소리로 고함 을 지르면서 손에 든 수틀을 다시 날렸고 그를 본 준후도 엉겁결 에 뇌전 한 줄기를 발사했다. 달려오는 연희를 사이에 두고 양쪽 에서 뭔가를 날린 셈이었다. 연희는 준후가 뇌전을 날리자 엉겁 결에 몸을 움츠렸으나 겨냥이 잘못되었는지 준후의 뇌전은 연희 의 얼굴 쪽으로 똑바로 날아들었다.

“아앗!”

연희는 피할 사이도 없이 반사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준후의 눈도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졌다. 준후의 뇌전이 정통으 로 연희의 얼굴을 가린 손으로 작렬해 들어가자 파지직 하는 불 똥이 튀었고, 연희는 충격을 받은 듯 옆으로 튕겨나가 쓰러졌다. 그사이에 귀자모신의 수틀은 무섭게 날아서 쓰러지는 연희의 어 깨를 가볍게 스치고는 옆벽에 붙어 있던 책상 하나를 박살 내면 서 그 안에 박혀 버렸다. 뇌전을 맞고 쓰러지는 연희의 모습이 준후의 눈에 마치 슬로 모션처럼 들어왔다. 한동안 준후의 눈동 자가망연해졌으나 잠시 후 돌연 기쁨의 눈빛으로 변해 갔다. 준 후가 쏘아 낸 뇌전이 연희의 손을 파고들어 간 것이 아니라 이글 거리며 연희의 손에 맺혀 있었다. 연희는 옆으로 쓰러지기는 했 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 유아를 보호 · 양육하는 신 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선녀신(善神), 포악 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잡아먹는 야차(夜叉)였으나, 후에는 석가의 교화 를 받아 불법 및 유아 양육의 신이 되었다.

** 소설상의 가상의 술수로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을 주는 암기로 설정되어 있으나, 귀자모신의 성격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으므로 주로 혈도를 제압하여 마 비시키는 침으로 나온다.


연희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오른손에는 뇌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희는 예전에 준후가 자신의 명을 담은 부적을 오른손에 새겨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 부적의 힘 때문에 준후가 쏜 뇌전을 그대로 받아 낼 수 있었으리라. 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쪽에서 귀자모신이 한쪽 손을 떨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책상에 박혔던 수틀이 붕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날아 귀자모신 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순간, 연희는 한쪽 어깨가 화끈해지더니 통증을 느꼈다. 왼손으로 어깨를 만지자 피가 묻어 나왔다.

수들은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는지 귀자모 신이 실을 당겨서 수틀을 회수해 갈 때 실이 연희의 어깨를 베고 지나간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귀자모신의 손에 수틀이 들어갔으 니, 노파가 다시 수틀을 날린다면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요행을 기대할 수 없을 터였다. 두꺼운 나무로 된 책상을 일격에 박살 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틀이니 그것에 한 대라도 맞는다면 아마도………………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 준후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 을 보고 귀자모신은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수틀을 날릴 듯 자세 를 취했다.


도운은 한참 동안이나 고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인 철추는 다 잘려 나가 줄만 남았는데 그나마 싸움중에 놓쳐 버렸고, 또 다른 장기인 슈리켄마저 다 썼는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궁리 끝에 쇠파이프 하나를 주워 들고 휘두르다가 그마저도 놓 쳐 버려, 자신의 큰 체구를 무기 삼아 글자 그대로 육탄 공세를 벌이면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총상을 입어 한쪽 다리 를 절름거리는 상태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도운은 애타는 눈길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현암을 힐끔거리며 오기로 버텼다. 상대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다들 무술에 능한 자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쓰지 않고 살기가 강하 게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생포하려는 것처럼 보였 다. 그렇게 한동안을 버티자 기력이 떨어진 탓인지 도운의 눈이 서서히 감겨 오기 시작했다. 그사이 도운을 상대하던 자들 중의 한 명이 아까 승희와 도운이 잡아 묶어 두었던 대위덕명왕과 다 른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그들 모두를 풀어 주었다.

대위덕명왕은 기세등등하게 도운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 다. 대위덕명왕 하나도 상대하기 힘든 처지였는데 도운은 그 외 에 십수 명이나 되는 자들과 한꺼번에 맞서다 보니 결국 수없이 두들겨 맞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대위덕명왕은 쓰러 진 도운을 묶으라고 손짓하고는 자신의 연검을 찾아 들고 현암 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방금 배 위로 올라온 여섯 명의 부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현암의 실력을 접해 본 적이 있는 터라, 지금 현암이 기력이 쇠해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 지만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현암 쪽으로 다 가섰다. 현암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월향검의 위력이 더욱더 무서웠다. 귀신이 들려서 저 혼자 날아다니고 검기를 맺는 칼. 현암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월향이 날아들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대위덕명왕은 더더욱 조심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현 암 가까이에 접근하고 보니 현암이 앉아 있는 뒤편에 월향검이 힘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대위덕명왕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서워할 것이 없군. 단번에 덤벼서 저놈을………………”

대위덕명왕이 막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데 가만히 앉아 있던 현암이 푸우욱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위덕명왕의 얼 굴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니! 저놈이 어느새 ……………..”

대위덕명왕은 채 말을 마치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현암이 감 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대위덕명왕과 무술가들이 미친 듯 달려오는 것을 보자 급히 공력을 모아서 있는 힘을 다해 사자 후의 일갈성을 질렀다.

“어허허헝!”

사자후의 엄청난 고함 소리가 사방을 휩쓸면서 퍼져 나가자 잡동사니들이 휘말려서 어지러이 휘날렸고, 달려들던 무술가들과 대위덕명왕마저도 주춤하면서 걸음을 멈추거나 뒷걸음질을 했다. 그 틈을 이용해 현암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운기행공을 끝내자마자 사자후의 수법을 사용해서인지 아랫배가 허탈한 것 이 오래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아까 현아의 모 습을 한 환영과의 대면에서 너무나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정 신적으로도 몹시 피곤해서 정신이 잘 집중되지 않았다. 물론 부 동심결을 쓰고 무아지경으로 들어가 운기행공을 할 때에는 잡 념이 없었지만, 눈을 뜨고 명왕교와 대적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사자후 한 번만으로도 단전 부근이 허탈해져 옴을 느끼면서 현암은 재빨리 왼손을 내밀었다. 아까 날렸던 월향검이 되돌아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그랬던 것인데…………. 월향검은 돌아오 지 않았다. 현암이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만치에 번쩍이던 섬광을 잃은 채 떨어져 있는 월향검이 보였다. 현암의 사자후에 멈칫하던 대위덕명왕과 다른 무술가들은 고함 을 치면서 다시 달려들었다. 현암은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면서 왼손을 뻗어 월향검을 집으려고 하는 동시에 오른손에 공력을 모아 몸을 방어하듯 휘저었다. 한 놈이 발차기 공격을 가해 왔지 만 현암이 휘두른 오른팔에 발이 부딪히자 현암의 팔에서 솟아 나는 반탄력에 뒤로 떠밀려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러나 현 암의 팔에도 아릿하게 통증이 왔다. 공력으로 보호하고 있었는데도 통증을 느낄 정도라면 저자들은 상당한 고수임이 틀림없었 다. 이번엔 두 명의 무술가가 현암을 공격했다. 한 명은 주먹으 로, 한 명은 발로 날카롭게 현암의 앞을 찌르고 들어왔다. 현암 이 내친김에 오른팔에 힘을 주어 발로 찌르고 들어오는 자의 다 리를 후려치자 우두둑 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사이 다른 한 명의 주먹이 가슴께를 그대로 치고 들어왔고 현암은 짜릿한 통 증을 느끼면서 힘에 밀려 뒤로 주욱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간신 히 월향검을 집어 드는 순간, 다른 자가 오른쪽 어깨를 감싸 안 았다. 자신의 몸이 허공을 돈다고 느낀 현암은 어깨에 공력을 실 어 순간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였다. 현암의 오른쪽 어깨는 혈도 가 통하던 곳이니만치 반탄력도 엄청난 듯, 현암을 집어 던지려 던 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쇠로 된 배 갑판에 나가떨어진 현암은 정 신이 아찔해졌다. 그러나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또 다 른 자가 몽둥이로 현암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쳤다. 무거운 머리 를 움직여 간신히 옆으로 피하자 몽둥이는 현암의 머리 바로 옆 을 치고는 금속성의 긴 울림 소리를 내며 뚝 하고 부러졌다. 그 틈을 이용해서 현암은 몸을 튕겨 일으키면서 놈의 아래턱을 머 리로 들이받았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놈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현암은 휘청거리는 몸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썼다. 상대의 공격 에 대비해 자세를 취하면서도 상대의 발놀림과 동작을 주시했다. 고도의 무술을 지닌 여러 명과 동시에 싸우자니 정신이 잘 집중되지 않았고, 또 공력을 제때에 운용할 틈을 찾지 못해 어려 움을 느꼈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승산이 …………….’

현암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등 뒤에 날카로운 일격이 가해졌 다. 이번에는 현암도 버티지 못하고 신음하며 몸을 데굴데굴 굴 렸다. 현암의 몸 위로 다시 두세 차례 강한 타격이 가해졌다. 놈 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을 끈다면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좋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현암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둥글게 움츠리면서 속으로 공력을 끌어모았다. 지금으로서는 공력을 끌어모을 시간이 절대 적으로 필요했고 그러자면 이자들을 주춤거리게 만들어야 했다. 현암은 배의 갑판이 철로 되어 있고 자신이 발을 세차게 구르 면 바닥이 흔들릴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공력을 채 모으 지도 못하고 이대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짧은 시간 사이에 우당탕거리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타격을 받 았다. 그러나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공력이 오른팔에 터질 듯 모이자 현암은 몸을 펴면서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야아!”

소리를 치면서 현암은 오른손에 ‘흡吸)’자 결과 ‘발’자 결의 힘을 동시에 운용하며 자신이 딛고 있는 배의 갑판 위를 세차게 내려쳤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구결의 힘을 미리 모아 두었다가 거 의 동시에 발산하는 것은 요 근래에 고된 수련으로 얻어 낸 결과 였다. 두 가지 상반된 힘이 철로 된 바닥에 가해지자 바닥이 출 렁했다. 아주 짧은 사이에 당기고 미는 힘이 동시에 가해진 탓 에, 물결치는 것처럼 힘이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 나 갔다. 원래 현암이 수련한 기운이 검에 적합한 것이라 철로 된 물건에 가장 잘 번져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 판단이 적중한 것이 다. 물론 그다지 멀리까지는 아니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현암 을 공격하던 자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끌었다가 튕겨 내는 힘이 바닥에 동시에 가해지자 지진이 난 것처럼 공격하던 자들이 와르르 넘어져 버렸다. 짧은 틈을 이용 하여 현암은 재빨리 용수철을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전세 가 역전됐다고 여겼다. 그러나 현암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누군 가가 길게 고함을 지르면서 비호같이 현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위덕명왕이었다. 그는 현암이 쏟아 낸 힘의 파장이 번져 오기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현암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의 허를 이용한 것이었다. 대위덕명왕의 공중차기는 현암이 막 몸을 일 으키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공격이라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라 할 수 있었다. 대위덕명왕의 눈이 자신감으로 번쩍 빛났다.

현암의 눈이 매우 침착하게 슬로 모션처럼 대위덕명왕의 동 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위덕명왕의 달려오던 몸은 허공에 떠 오르면서 공중차기의 자세를 취했고 발끝은 현암의 얼굴을 노리 고 있었다. 대위덕명왕 정도 되는 고수의 발차기를 맞으면 단번 에 요절날 것이었다. 현암은 재빨리 그러나 지금의 현암의 시 각과 사고로는 매우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가장 화급한 위기를 맞이하여 본능적 인 잠재력이 극도로 발휘된 때문인지 현암의 마음은 대단히 평 정한 상태였고 눈은 조금의 깜박거림도 없이 크게 뜬 채 냉정하 게 상대를 주시했다. 주변의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 다. 오직 하나, 날카로운 무기처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발끝 이 보일 뿐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이런 순간이 현암 에게는 무척이나 즐겁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현암은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과 수련을 해 왔지만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보지 못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고요한, 가장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온 조용하고 가라앉은 기 분. 무념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감정은 무술을 하는 사람 이라면 평생에 몇 번 오지 않을 달관과 몰입의 무아적인 경지라 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지는 수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현암은 그런 것을 채 깨달을 사이도 없이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앞을 향해 내밀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날아들던 대위덕명왕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공격이었는데 현암은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막아냈다.

대위덕명왕의 발은 살짝 젖힌 현암의 얼굴 옆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고 현암의 오른팔이 그런 대위덕명왕의 다리를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공격해 들어온 대위덕명왕의 다리 는 현암의 목과 오른팔 사이에 끼고 말았다. 현암의 팔은 강철 처럼 대위덕명왕의 다리를 조여들었다. 날아오던 대위덕명왕의 몸은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의 다리를 찍어 누르는 형국이 되고 말 았다.

“으아악!”

대위덕명왕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옆으로 꺾인데다 밀려드는 힘에 짓눌린 다리 가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현암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대위덕 명왕을 허공에 던진 다음 몸을 뒤로 빼었다. 대위덕명왕은 갑판 바닥에 나가떨어졌고 고통에 가득 찬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그렇다고 현암의 처지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현암의 공격 에 의해 쓰러졌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참혹하게 쓰 러져 있는 대덕위명왕의 모습을 본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살 기가 어려 있었다. 아까 현암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진 한 명을 빼고는 현암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서서 무기를 하나씩 꺼내어들었다. 품 안에서 칼을 꺼내어 펴 드는 자도 있었고, 쇠파이프 며 스패너 같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공구류를 주워 드는 자도 있 었다. 결단코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눈치가 역력한데도 현암은 아까의 몽롱한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가늘게 뜨 면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귀자모신이 내던진 수틀이 허공을 날았다. 연희는 뒤에서 쌩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땅에 풀썩 엎드려 슬라이딩을 하듯 준후에게 몸을 날렸다. 귀자모신 의 수틀은 아슬아슬하게 연희의 머리 위를 스치면서 준후 쪽으 로 날아들었다. 묶인 채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준후로서는 절체 절명의 위기에 빠진 셈이었다. 연희도 다급한 나머지 비명을 지 를 뻔했으나, 막 준후에게로 날아들 것 같던 수틀이 가볍게 방향 을 위로 틀어 도로 허공을 빙글 돌아 귀자모신의 손으로 되돌아 갔다. 귀자모신이 수틀과 연결된 실을 조종해 도로 끌어당긴 것 같았다. 무슨 이유로 준후를 해치려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 었지만 지금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

연희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몸을 몇 번 굴려 준후에게 다가갔 다. 연희가 몸을 틀자마자 귀자모신의 단장이 날아들어 발치 에 꽂혔다. 간신히 준후 곁으로 간 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준후의 손을 묶은 끈을 풀어 헤쳤다. 그 모습을 본 귀자모신은 화가 치미는 듯,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뒷전에 물러서 있던 명왕교 여신도들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명왕교 여신도들은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연희에게로 뛰 어들었다. 어느새 품 안에서 이상하게 구불구불한 단도를 하나 씩 빼어 든 상태였다. 다급해진 연희가 정신없이 준후의 손을 묶 은 끈을 푸는데 한 여신도가 달려들었다. 연희는 반사적으로 여 신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연희의 어깨에 밀린 여신도는 칼을 휘 저었으나 찌르지는 못하고 큰 대자로 바닥에 넘어져 버리고 말 았다. 여신도가 넘어지는 와중에 휘두른 칼이 준후의 다리를 스 쳐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 바람에 다리를 묶은 줄도 같이 끊어졌 다. 다리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준후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츠렸다가 묶였던 끈이 느슨해진 것을 알고는 땅을 박차며 오 뚝이처럼 발딱 일어났다. 손을 묶은 줄은 아직 풀지 못한 상태였 고 입에도 여전히 재갈이 물려 있었다.

연희와 넘어진 여신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다른 세 명의 여신도가 준후에게 덤벼들었다. 준후는 크게 고함이라기보다 는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억눌린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을 뿐이 지만ᅳ을 지르면서 발로 땅을 쾅쾅 굴렀다. 우보법의 방위를 밟 은 것이다. 달려들던 나머지 세 명의 여신도들은 못 박힌 듯 우 뚝 멈추어 서 버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 번에 여러 사람의 몸 을 정지시킨 상태에서는 준후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승희는 땅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연희는 간신히 여신도를 때려눕혀 가는 상태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본 귀자모신이 기 분 나쁜 미소를 띠고는 수틀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들 쪽으로 다 가섰다.

간신히 한 명의 여신도를 때려눕히고 난 연희는 칼에 긁히고 상대의 주먹에 몇 대 맞아 자그마한 상처들이 생겨 몸이 쑤셨지 만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절체절명에 가 까운 순간이었다. 준후는 손이 뒤로 묶이고 입이 막힌 채 일어나 있었지만 우보법의 기술로 여러 명의 여신도들을 붙잡아 두느라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저쪽에서는 귀자모신이 이쪽을 향해 다시 수틀을 던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늙은 노파의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인지 연희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현암이 오지 않는 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버텨 보아야 했다.

겨우 몸을 추슬러 준후 쪽으로 가려던 연희의 눈에 묶여 있는 준후의 손이 보였다. 준후는 원래 수형도의 수법으로 손을 묶은 줄을 푸는 게 가능했지만 그건 줄이 손가락까지 같이 묶었을 경 우이고 지금처럼 손목만 묶여 있었을 때에는 손을 칼처럼 변하 게 하는 수형도 술수로는 줄을 끊을 수 없는 듯했다. 하긴 손가 락까지 묶여 있었다면 수인을 맺어 뇌전을 날리는 일도 하지 못 했을 터였다.

연희는 재빨리 땅에 떨어져 있던 구불구불한 단검 하나를 주 워 준후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연희의 눈앞을 위협하듯 이 귀자모신의 수틀이 휙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기겁을 해서 걸 음을 멈추었다. 순간 연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저렇듯 맹렬 하게 공격하는 귀자모신의 공격술이 목표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 보니 자신을 꼭 맞히려는 것 같지 않았고 다만 준후 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위협만 하는 것 같았다. 연희가 돌아보자 귀자모신은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는 표정이었 지만 살의는 별로 없어 보였다.

“이봐, 꼬마야. 그리고 머리 긴 아가씨. 내 잠깐 뭐 좀 물어보 겠네.”

귀자모신이 그다지 악의 없는 듯한 말투로 말을 꺼내자 연희 는 의아했다. 준후는 귀자모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연희 와 귀자모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여 버 릴 듯이 대들던 귀자모신이 왜 갑자기 악의를 감추고 이야기하 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면 혹시 나 현암이나 도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희는 또랑또랑하 게 대답했다.

“뭘 묻겠다는 거지?”

“아무래도 궁금해서 그런다. 너희들 조선에서 왔지?”

“한국에서 왔다.”

“아, 그래. 그래, 원 참 뻣뻣하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 아니 한국에서는 이 꼬마를 당할 사람이 없겠지?”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어서 연희는 고개를 갸 웃했다. 그러자 귀자모신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이 꼬마, 보면 볼수록 대단하더구나. 혼백을 불러내는 술수도 그럴듯했는데 오행술의 뇌전을 쏘지를 않나, 사람의 발을 땅에 붙이는 술수를 쓰지를 않나……………..”

“우보법이라는 술수지.”

“아, 그래. 그렇군. 오늘 크게 견문을 넓혔다. 요렇게 어린 나 이에 그런 대단한 주술들을 사용하다니 용하단 말이야. 그런데 눈 큰 아가씨. 조, 아니 한국에서는 이 꼬마가 최고겠지? 아마도 주술로는 가장 강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을 거다.”

“뭐?”

“준후의 재주가 놀랍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고 미숙한 점이 많 지.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현암 씨나 박 신부님의 힘도…………….”

“뭐? 현암은 누구고 박 신부? 아니 신부란 작자가 힘이 있으 면 얼마나 있다는 게냐? 그자들도 주술을 쓴다는 말인가?”

“이 자리에 현암 씨나 신부님이 같이 있었다면 너도 이렇게 잘 난 척은 못했을 거다. 더군다나 현암 씨의 스승이셨던 한빈 거사 님 같은 분이 계셨다면 아마도 …………..”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믿어 주지도 않는 게 우리 같은 주 술사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그렇게도 많단 말이냐?” “이 사람들은 주술사가 아니다. 남과 다른 특이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주어진 것이다. 결코 자신이 잘나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길 들었다.”

연희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귀자모신이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쁜 짓이라니, 누가 나쁜 짓을 한단 말이냐? 가만히 있는 배 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고 부하들을 때려눕힌 것은 너희가 아 니더냐?”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군. 그렇다면 사람들을 납치하고 주 술로 사람을 해치고, 우리를 총으로 저격하고 자신들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같은 편마저도 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는 짓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게냐?”

연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자모신이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험담이냐? 우리 명왕교는 침묵과 은둔을 미덕으로 삼는 종파다.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다니?”

“시치미 떼지 마라. 우리는 후지코라는 여자를 찾아서 이곳까 지 왔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명왕교의 명왕이라고 자칭하는 작 자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 라 너희들은 무자비하게 너희 신도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것도 명색이 명왕이라는 사람을 말이다.”

연희는 애염명왕이 죽었을 때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승희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그런 사실들을 전해 들었기 때 문에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말을 하는 도중 연희는 자신 도 모르게 흥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귀자모신은 연희의 말을 듣고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뭐, 뭐라고? 누굴 죽였다고? 지금 죽은 자가 누구라고 했느냐?”

“애염명왕의 현신임을 자처하던 여자였다.”

“저, 저런 거짓말. 그럴 리가!”

“더구나 너는 우리가 무턱대고 배에 뛰어들었다고 나무라지 만, 너희는 한국에서 온 어린아이 한 명을 이유도 없이 납치했 다. 그리고 배 위에 진을 벌여 놓고는 그 아이의 잘라 낸 머리카 락까지 집어 던졌지. 그 머리카락이 바로 이것이다.”

연희는 아까 다른 사람들이 흥분하여 안개 속으로 뛰어든 순 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고 아라의 잘린 머리카락을 주워 주머니 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말을 이으면서 연희는 리본이 달린 머리 카락 뭉치를 꺼내 보이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걸 보란 말이다! 이 아이는 어디에 있지? 또 후지코라는 여 자는 어디에 있는 것이지?”

“그, 그럴 리가 없다. 명왕교는 그런 사교 집단이 아니다. 우 리의 목적은 비밀에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아이, 어린아이라니? 그건………………

귀자모신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리더니 눈을 부릅뜨 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머리카락을 이리 내놓아 보아라! 어서!”

연희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머리카락 뭉치를 귀자모신에 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준후의 손을 묶 은 끈과 입을 막은 재갈을 풀어 주었다. 귀자모신은 얼이 빠진 듯,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수틀에 문지르면서 주문 같은 것 을 중얼거리고 있었을 뿐, 이쪽은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여러 명 의 여신도들을 땅에 붙여 놓고 있던 참이라 달리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준후가 입을 막은 재갈이 풀리자 연희에게 자그만 소리 로 물었다.

“도대체 뭐죠? 어떻게 되어 가는 건가요?”

“나도 잘은 몰라. 그러나 저 할머니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물론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연희도 생각이 복잡했다. 자신들은 이곳이 명왕교의 악행이 이루어지는 총본산인 것으로 여기고 밀어닥쳤다. 승희의 투시에 의하면 이곳에 히로시의 딸인 후지코가 잡혀 있다고 했고, 명왕 들의 방해를 받았으며, 총격을 받았고, 아라의 잘린 머리카락이 내던져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귀자모신의 언행을 보아서는 무언가 이상했다. 귀자모신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으로 보아 연극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자모신이 마음먹고 한 번만 손을 놀리면 모든 게 끝나는 판인데 이런 연극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었다.

준후를 풀어 준 연희는 승희에게 가려고 하다 귀자모신이 크 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라서 멈추어 섰다.

“아악! 교주, 교주!”


현암은 배의 한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 었다. 태극기공 중의 한 구절인 ‘투’ 자결을 응용하여 칼을 뽑아 든 두어 명의 무술가들을 쓰러뜨렸으나 자신도 여러 곳을 맞아 서 몸을 가누는 것조차 어려웠다. ‘투’ 자결을 응용하면 상대가 현암의 공격을 막아 내더라도 힘은 그대로 전달되어 방어와 상 관없이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현암은 일단 위험한 칼을 빼어 든 상대부터 하나씩 쓰러뜨렸던 것인데, 적들 이 수법을 알아채고는 먼발치에서 한 대씩 돌아가면서 치고 빠 지는 식의 전법으로 나오고 있었다.

숫자도 많았지만 상대는 모두 무술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다. 현암의 눈이 밝고 몸놀림이 빠르다지만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바가 없었으니 고단자들의 몸놀림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더 군다나 지금은 공력도 그리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또 그들을 하나 쓰러뜨리자면 그사이 다른 자한테서 엄청난 강타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이라 아무리 공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힘이 거의 빠져 버려 눈앞이 가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도 없지 않았다. 예전의 현암 같 았으면 이런 무술의 고수 여럿과 동시에 싸워서 이렇게까지 온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까 대위덕명왕과의 싸움이 후부터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마음속을 비우고 물 흐르는 듯이 움직이면 거의 공격을 피하거나 상대의 허점을 잡아낼 수 있었 기에 그나마 두어 명의 무술가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아쉽게도 그런 순간들은 매우 짧은 동안 이루어졌고, 그 후 로는 그런 기분을 의식하면 그런 상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 대에게 허점만 노출시켜 공격을 당했다.

의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세계. 그러나……………. 오늘의 싸움으로 현암은 무도(武道)의 깊은 일면을 엿보게 되 었다. 그러나 아직 그 상태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해 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냥 손발도 아니고 쇠파이프나 스패 너 같은 흉기들로 인한 타격은 그야말로 심한 고통이었다. 특히 검도의 술법으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자의 공격은 한결 매서워 서 공격을 받아 낼 때마다 느끼는 통증은 다른 자들의 갑절 이상 이었다.

상대도 그렇게 무수히 강타를 당하고도 버티어 내는 현암이 질린다는 듯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현암의 오른팔이 마치쇳덩이와 같아서 칼도 들어가지 않고 파이프로 공격해도 아 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인 지 그중의 하나가 다시 기합을 넣으며 현암을 넘어뜨리기 위해 현암의 다리 쪽을 노리고 공격을 가해 왔다. 현암은 간신히 몸을 껑충 띄우면서 공격을 피했고 그 순간 덮쳐드는 다른 한 명의 스 패너를 오른팔로 막았지만, 몽둥이로 가슴팍을 내지르는 공격은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었다.

“윽!”

가쁜 신음 소리를 터뜨리면서 공중에 몸을 띄웠던 현암이 한 쪽 구석으로 나가떨어졌다. 놈들 셋이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재 빠른 동작으로 현암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도저히!’

현암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단전에 힘을 주며 공력을 끌어 올렸다.


연희와 준후는 귀자모신이 비명을 지르자 놀라서 잠시 동안 멍하니 귀자모신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가득 잡힌 얼굴이 일그 러지다가 서서히 분노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그런 변화를 지켜 보던 연희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 준후에게 속삭였다.

“내가 주었던 저 머리칼, 틀림없이 아라의 것 맞지?”

“맞아요. 연희 누나도 아라를 보았잖아요. 그런데 왜요?”

준후는 잊어버리고 있던 아라의 일이 떠오르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준후는 아까 명왕교의 진을 깨고 먼저 뛰어 들었다가 여기 있는 명왕교의 여신도들의 덫에 걸려들어 구조 물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사이 온몸이 묶인 채 안으로 끌려 들어오고 말았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 려리매를 불러내어 저항하던 중에 연희와 승희의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준후가 이곳에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든 원인은 명왕교 측에서 아라를 납치하고, 또 머리카락까지 잘라 서 던져 버렸던 것에 있었던 만큼, 아라 생각이 나자 준후가 흥 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귀자모신은 무서운 눈 매를 하고는 연희를 불타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눈매가 얼 마나사나웠는지 연희는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거짓말도 유분수지. 그렇게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거짓말로 명왕교의 최고 호법인 나 귀자모신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느냐?”

귀자모신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오자 연희는 깜짝 놀라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라니! 아니다! 그 머리카락은 틀림없이…………….”

“이 머리카락은 우리 교주님 것이다! 너희들은 우리 교주를 해치고도 뻔뻔스럽게도 거짓말로….”

귀자모신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연희였다. 준후는 귀자모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멀뚱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곧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우보법의 술수를 풀고 귀 자신의 공격에서 연희를 보호하려고 앞을 막아섰다. 몸이 꼭 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던 여신도들은 우보법의 술수가 풀리자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 듯, 힘에 밀려 와르르 넘어졌다가 허둥지 둥 몸을 일으켜 귀자모신의 뒤쪽으로 도망치듯 몸을 피했다.

연희는 도대체 귀자모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라 의 아할 따름이었다. 머리카락이 명왕교 교주의 것이라니? 알 수 없 는 노릇이었다. 연희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귀자모신은 길 게 기합을 넣었다. 주술력을 자신의 무기인 수틀에 집중시키는 모양이었다. 귀자모신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는 대단했 다. 평생을 수련해 왔던 것이리라. 준후마저도 엄청난 영기에 몸 을 떨었다.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면서 소매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이번에 특별히 가지 고 왔다던 검은 부채 벽조선이었다. 귀자모신과 준후의 모습을 지켜보던 연희가 입을 열었다.

“잠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희의 교 주라니! 그럼 너희 명왕교도들이 스스로 교주의 머리카락을 잘 랐다는 말이냐?”

연희가 빠르게 물었으나 대답 대신 귀자모신이 내쏘는 수틀이 맹렬한 기세로 맴을 돌며 연희와 준후를 향해 덮쳐 들어왔다.

“누나, 위험!”

준후가 재빨리 연희 앞을 막아섰다. 준후는 왼발을 쿵 소리가 나게 짚으면서 왼손의 두 손가락을 세워 앞으로 쭉 뻗고 오른손 에 들었던 벽조선을 활짝 펴들었다. 그러자 준후가 편 벽조선의 가장자리에 검은 기운이 삽시간에 주욱 늘어나듯 맺혀 갔다.

“하앗!”

준후가 앙칼지게 기합을 넣으면서 벽조선을 떨치자 거기에 맺 힌 검은 기운이 마치 살아 있는 덩어리처럼 꿈틀거리면서 허공 을 날아 들이닥쳐 오는 귀자모신의, 무섭게 회전하는 수틀과 맞 부딪쳤다.


현암은 차츰 몸속으로 차올라 오는 공력을 느끼면서 상대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지금 현암은 모험을 하려는 중이었다. 자신의 손발만으로는 자신에 대해 이미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 는 저 무술 고수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탄’ 자이나 부동심결 같은 큰 수를 또 쓸 만한 공력도 없었다. 만일 그러한 공력이 있다 해도 부동심결이 악령도 아닌 이 사람들에게 과연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탄’ 자결로 사람을 해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쓸 수 있는, 아니 자신의 뇌 리에 떠오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준후와 승희, 연희 씨마저 보이지 않는 터에 더 이상 이자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끌 수는 없는 일 ….’

현암은 일단 끌어 올릴 수 있을 만큼의 공력을 끌어 올려 단단 히 그 힘을 안에 갈무리한 다음, 고함을 지르면서 세 명의 고수 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들도 현암의 오른팔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현암이 몸을 날리며 공격해 오자 날랜 동 작으로 몸을 피했다. 크게 휘두른 오른팔이 빗나가자 현암은 일 부러 몸을 조금 휘청하면서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켰다. 그 기회 를 놓치지 않고 세 개의 무기가 나란히 현암의 오른쪽 어깨를 노 리고 날아들었다.

‘이때다!’

현암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있는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오른쪽 어깨 부위로 밀어붙였다. 원래 현암의 혈도는 단전으로 부터 오른쪽 팔로만 통해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제대로 진기 가 유통되지 않았다. 현암의 몸은 흘러나오는 공력으로 보호되 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의 타격까지만 흡수할 수 있을 뿐이어서, 휘둘러 대는 무기나 무술 고수의 날카로운 타격을 오른팔 외의 다른 부분이 견디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른팔로 공력을 모아 보아야 현암의 능력 을 익히 알고 있는 저들이 모두 피해 버릴 것임은 분명했고, 또 손에 든 무기의 끝조차 현암의 오른팔에 마주치게 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따라서 현암은 어깨로 공력을 밀어 올리면서, 손 부근의 혈도를 운용하는 방식을 어깨 부근의 혈도에 적용 하여 크게 ‘투’ 자 결과 ‘발’ 자결을 시전했다.

현암이 전력을 다해 밀어낸 진기는 그대로 현암의 막혔던 혈 도를 밀어 터뜨리듯 지나가 어깨 부근에 팽팽히 맺혔고, 바로 그 때 세 사람의 무기가 현암의 어깨에 작렬했다.

“으악!”

“헉!”

“크아악!”

그들은 그들의 무기가 현암의 어깨를 내리쳤다고 느꼈다. 그 러나 순간, 마치 무언가에 의해 그들의 몸이 집어 던져지듯이 뒤 로 튕겨져 나갔다. ‘투’ 자결을 응용한 현암의 공력은 일단 현암 의 어깨를 공격한 상대의 무기를 타고 그들의 팔과 전신으로 순 식간에 파고들어 갔고, 곧바로 ‘발’ 자결로 바뀌면서 그들의 몸 을 안에서부터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현암이 내쏘 는 공력을 맞은 그들은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발작을 일으 키며 뒤쪽으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처박혀 버렸고 잠시 동안 단 말마적인 경련을 보이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우욱!”

현암의 속이 뭉클해지면서 눈앞이 아릿해졌다. 그리고 오른팔 이 떨어져 나간 듯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공력이 오른쪽 어깨의 혈도를 타고 흘러나가 상대를 쓰러뜨릴 수는 있었지만, 반면에 혈도를 그렇게 무리한 방법으로 뚫는 바람에 현암에게도 이상이 온 것이었다. 현암은 몸을 비틀거리면서 오른팔로 땅을 짚어 중 심을 잡으려고 했으나 마음과 달리 현암의 오른팔은 움직여 주 지 않았다.

현암의 몸이 바닥에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현암의 입 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데 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와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현암의 뺨 을 흥건하게 적시면서 주위로 번져 나갔다. 곧이어 현암의 몸속 에서는 펄펄 끓는 듯한 기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돌 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주화입마…………….’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공력을 썼고 너무 많은 타격을 당했는데 남은 공력을 무리하게 혈도로 밀어 붙이는 바람에 주화입마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었다. 예전에도 현암은 이 주화입마로 인해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 었다. 그때는 도혜 스님이나 한빈 거사 같은 분들이 구해 주기라 도 했지만 지금 이곳은 일본, 그것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명왕교 배의 갑판 위였다. 현암은 억지로라도 왼손을 뻗어 몸을 일으키 려고 했으나 갑자기 온몸에 진저리가 쳐지면서 다시 털썩 그 자 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아까 간신히 왼팔 소매에 찔러 넣어 두었던 월향검이 쨍그랑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그쪽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이미 눈앞은 희미하게 흐려져 왔다.

‘아, 월향, 너는, 너는 왜…………….’

그러나 눈꺼풀만 아주 조금 움직이고 있을 뿐, 더 이상 현암의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월향의 언저리로 현 암이 쏟아 낸 붉은 선혈이 서서히 흘러가고 있었다.

우르릉쾅!


준후가 쏘아 낸 검은 기운이 귀자모신의 수틀과 맞부딪히자 놀랍도록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사방의 강철 벽이 쩌렁 쩌렁하게 울렸다. 귀자모신의 수틀과 준후의 벽조선이 뿜어낸 검은 기운은 서로 튕기어 뒤로 밀려 나가는 듯했다. 준후가 쏘아 낸 검은 기운에 귀자모신은 몸을 크게 휘청했으나 준후는 그 자 리에 입술을 꼭 다물고 서 있을 뿐이었다. 공력으로만 따지면 준 후는 귀자모신의 적수가 못 되었다. 다만 준후는 일본말을 알아 듣지 못해 귀자모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단순히 명왕교의 상 위 직급의 인물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게다가 벽조선에 깃 든 일종의 신력을 끌어내어 귀자모신의 힘과 부딪힌 것이지 자 기 스스로의 힘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렇게 커다란 격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귀자모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신력을 끌어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었다. 실제로 귀자모신은 준후가 불러낸 리매를 단 일격에 수틀 속으로 빨아들이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은 밀교의 힘과 비슷한 파사의 기운이었기 때문에 정령에 가까운 리매가 힘을 쓰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리 밀교에서 가지를 쳐서 나온 명 왕교가 사파라고는 해도 저 노파가 어째서 저런 정통 밀교에 가 까운 술수를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준후의 능력으로는 수 십 년간이나 수련을 쌓은 귀자모신을 결코 이길 수는 없을 것 같 았고, 그러다 보니 신력을 빌리거나 도교의 술수를 응용하여 귀 자모신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준후는 이렇게 벽조선의 힘을 응용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 신계와 인간계의 관계. 인과율 의 대법칙, 즉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대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터에 자신의 힘이 아닌 신력을 이렇게 끌어다 씀 으로써 준후가 치르게 되는 대가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의미했다. 준후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 었다.

이 세상에서 지낼 날이 또 며칠 줄어들겠구나.’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데 몰두할 겨를이 없었다. 귀자모신은 준 후의 일격에서 밀렸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는 수틀을 실로 교묘하게 조종하여 크게 호선을 그리게 한 다음 손에 잡아 들었다. 준후는 속으로 북받쳐 오르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벽조선을 힘 있게 쥐었다.

‘아무리 내 생명이 단축된다고 해도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연희 누나도, 승희 누나도, 그리고…..?’

이번에는 귀자모신이 수틀을 빙글빙글 돌리는 동시에 몸을 빠 르게 회전시켰다. 옆에서 가슴을 졸이며 쳐다보고 있던 연희는 눈이 어지러웠지만, 준후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 다. 곧이어 귀자모신이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던 그 자세 그대로 길게 소리를 쳤고 그와 더불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바늘 들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승희를 쓰러뜨렸던 단장침이었다. 준후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벽조선을 편 다음 자신의 몸 앞으 로 크게 부쳤다.

“바람!”

준후가 큰 소리로 외치자 부채에서 일어난 바람은 놀랄 만큼 거세게 나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폭풍우와 같은 기세가 되어 귀자모신 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해일처럼 밀려 가는 기세였다. 순간 귀자모신이 날리던 단장침은 기세를 잃고 허공에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놀란 귀자모신은 수틀을 앞으로 세워 바람을 겨우 막아냈다. 귀자모신의 얼굴에 핏줄이 솟구치 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바람을 버텨 보려 했지만, 발이 그대로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때 연희와 준후는 비로소 귀자 모신의 수틀에 새겨진 문양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붉은 글씨 로 수놓인 야릇한 문자들범자(梵)이었다. 거기에는 섬뜩 하게 수놓아진 어린 아기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기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용을 쓰는 듯 보였고 실제 로 조금씩 인상을 찌푸려 가며 준후가 일으킨 바람에 저항하려 는 듯 실밥으로 된 얼굴을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연희는 소스라 칠 정도로 놀라서 헉하는 소리를 내었으나, 준후는 연희와는 다 른 의미에서 깜짝 놀랐다. 그런 다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 르게 소리를 질렀다.

“귀자모신! 어째서 이런 곳에 ……………,”

놀란 준후는 벽조선에 쏟아붓던 힘을 거두었다. 그러자 귀자 모신이 해쓱해진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수틀을 내리고 노한 표정 으로 준후를 노려보았다. 벽조선으로 일으킨 이 바람을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대로 버텨 낸 귀자모신은 준후가 이제껏 보아 왔던 일본의 어떤 사람들보다도스기노방이나 홍녀 등등-공 력 면에서 뛰어났다.

준후는 연희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누나, 저 할머니가 혹시 귀자모신을 자처하지는 않았나요?”

“으, 응? 그래, 맞아. 바로 자신이 귀자모신이라고 그랬어.”

연희가 놀란 듯 말하자 준후는 엄숙한 표정으로 귀자모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귀자모신도 그에 지지 않고 불타는 듯한 눈 길로 준후를 마주 쏘아보았다. 연희는 대체 준후와 귀자모신이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또 당황스럽기도 하여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만치에 쓰러져 있던 승희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연희 의 눈에 들어왔다. 연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승희의 온몸 은 조금씩 붉게 변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어가는 현암의 머릿속에는 온갖 사념이 맴돌아 소 용돌이치듯 뒤엉켜서 떠오르고 있었다. 준후, 박 신부, 승희, 연 희…………. 그리고 한빈 거사, 도혜 스님, 현아, 그리고 누군가의 또 다른 모습도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 들의 얼굴들과 모습들이 솟구치듯 떠올라 한데 엉켰다가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자신이 지켜 주지 못했던 동생 현 아. 현아가 다정한 미소를 띠고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 오빠.

현아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일어나야지. 어서 일어나야지.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일어나야지. 그러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미안하다. 미안하다, 현아야…………….’

그래서는 안 돼. 오빠, 어서…………….

현암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몸은 고사하고 눈꺼풀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었 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앞이 새빨간 것 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현암은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 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늑했다. 그래, 이제야 현아의 곁 으로 가는가 보다. 현아야, 우린 곧 만날 수 있겠지. 그러면 이 지 긋지긋한 고통의 나날들에서 해방될 수 있겠지.

‘미안하다. 현아야. 그러나 이제는………..?

현암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몸을 잡아 위로 휙 끌어 올리는 바람에 잠시 나마 누렸던 안온한 기분은 깨어져 버렸다. 그리고 곧 어깨 부분 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 이건?’

현암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현암 의 머릿속에 잠시 비추어진 환영인지도 몰랐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어깨 부분을 단호한 자세로 어루만지고 있는 사 람이 보였다. 희고 깔끔한 한복, 그리고 곱게 빗은 머리를 한 그 모습은…………….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 나 오래전에 잠시 본 듯한 어느 여인이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굽 어보고 있었다. 굳게 입을 다문 채 싸늘하지만 한없이 마음에 와 닿는 표정을 한 얼굴. 현암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전에 보았던, 아주 잠시 보았던 여인. 월향이었다.

‘월, 월향?’

격심한 아픔이 자신의 어깨를 도려내는 듯하더니 어깨로부터 시작하여 온 전신에 삽시간에 시원하게 풀려 내려오는 듯한 느 낌이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위로 치받쳐 올리는 듯한 느 낌도 들었다.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를 귓속 가득히 듣고 있다가 현암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서서히 온몸에 전류 같은 것 이 퍼져 나가더니 잃었던 감각이 하나둘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 고는 현암은 살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 쓰러져 있지 않고 잠시 전에 본 환영에서처럼 누가 치켜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쯤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까? 현암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보았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낯익 은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월향검의 광채였다.

“워, 월향. 네가!”

현암의 몸을 위로 치켜 올린 것은 월향검이었다. 그러면서 월 향검은 현암의 어깨 속을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고 거기서 솟구 치는 피가 검신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 고현암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정신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혈도가 막혀 주화입마가 되려는 것을 월향이 어깨를 찔러 피를 내 풀어 주었구나!’

정신은 비록 돌아왔지만 머리는 어지럽고 온몸에는 기운이 하 나도 없었다. 너무 많은 피를 쏟은 탓일까? 현암은 이를 악물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간신히 균형을 잡고 앉은 자세를 취한 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왼손을 뻗어 어깨에 파고든 월향검을 꼭 쥐 었다. 월향검의 파르르 떨리는 듯한 감촉이 손으로 전달되었다. 그 순간 현암의 머리엔 월향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파노 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월향의 모습이 떠올랐 는지는 현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현암이 뛰어들었던 진은 강한 음기로 이루어진 것이라 승희나 연희가 지나가지 못했던 것처럼 여성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것을 알지 못했던 현암은 월향검을 가지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월향검 자체는 생물체가 아닌 칼이었기 때문에 안으로는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칼 안에 깃들어 있던 월향의 영은 큰 타격을 받 았던 것이다. 월향은 현암의 명령에 따라 처음에는 무리를 하면 서 움직이려 했지만 결국은 진의 강한 기운에 견디지 못해 힘을 잃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다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다가 진의 기운이 걷히고 우연히 현암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칼에 적셔지는 바람에 기운을 되찾은 것이었다. 귀검인 월향에게 피 는 생명체의 힘을 전달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현암도 그 것을 알아 월향의 기운을 돌리는 데 닭의 피를 종종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로 월향이 잃었던 기운을 차리게 된 것이고 주화입마에 빠져들 뻔한 현암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러한 내용들이 마치 직접 겪고 본 것 처럼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확실하게 단 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 거의 생사의 갈림길을 넘으면서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 월향과 영적으로도 완전히 이제까지는 월 향만이 현암의 의사를 알아들었다-소통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현암은 월향검을 꼭 쥐었다. 월향검은 상처를 자신이 입은 것 처럼 슬퍼하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현암은 눈을 감은 채 월향검을 향해 중얼거렸다.

“아무 염려 말아. 괜찮아.”

현암은 월향에게 말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 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현암은 피를 엄청나게 흘린데다 쓰 러진 채 피를 토했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피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현암의 눈만은 광채를 내고 있었다. 눈을 뜬 현 암은 자신의 상처나 아픔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만이 뇌리에 가득할 뿐이었다. 바로 월향이 그랬던 것처럼.

“준후를 찾아봐야지. 그리고 신부님도 승희도, 연희 씨도.”

기력이 빠진 현암은 몇 번이나 쓰러질 뻔하다가 몸을 일으켰 다. 그리고 왼손에 쥔 월향을 습관적으로 왼쪽 손목에 꽂혀 있는 칼집에 넣으려다가 오른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고는 그냥 왼손에 꽉 쥐었다. 그러자 월향검은 현암에게 이쪽으로 가 라는 듯, 한쪽 방향으로 현암의 손을 밀었다. 현암은 거의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월향이 이끄는 대로 조금씩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으으음!”

박신부는 깊은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떴다. 어느 결엔가 고통 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비몽사몽간에 현암과 준후가 자신을 구하려고 왔다가 명왕교도들에게 잡히는 환상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아, 안 돼!”

박신부는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통증이 밀려오는 바람에 말 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사지가 묶여 있는 것처럼,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상처가 심하오.”

아래쪽에서 애써 감정을 삭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신부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격심하 게 느껴지던 가슴의 통증은 조금 전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요?”

“나요.”

대답하면서 그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박 신부가 가늘게 눈을 떠 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스즈키의 주치의 야마모토였다. 야 마모토의 손에 들려 있는 가위가 번쩍하고 빛나자 박 신부는 몸 을 흠칫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가위로 손에 들고 있던 반창고 를 잘라 내더니 박 신부의 다리께에 갖다 붙였다.

“상처가 심합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시다니 대단한 정신 력입니다. 다른 곳도 심하지만 다리의 상처가 가장 심합니다. 어 쩌면 ……………..”

야마모토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웅얼거리는 것 같 기도 했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박 신 부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보다 야마모토가 어째서 자신을 치료해 주는지가 더 궁금했다.

“당신은, 왜 나를………….”

박신부가 힘겹게 말하자 야마모토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짓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얼비쳤다. 야마모토는 박 신부의 다리를 처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의사요. 교주님의 명령도 있고.”

“무슨 명령?”

야마모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그의 표정이 밝지 않 은 것을 보아 아마도 교주인 오키에가 현암이나 준후를 유인하 는 미끼로 쓰기 위하여 자신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해 두라 는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짐작했다. 아직까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고 불편한 자세로 매달려 있는 것도 그대로이기는 하지만, 통증은 아까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호흡도 많이 편해 졌다. 의사 출신이라 자신의 상처를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박신 부는 진정으로 야마모토가 지금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야마모토도 박 신부가 그런 생각 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듯 나직하게 말했다.

“명령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도 의사요.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야마모토가 자신을 치료해 준 이유를 알게 되자 박 신부의 관 심은 어느새 다른 곳에 쏠렸다. 오키에와 같은 어린아이가 어떻 게 해서 명왕교의 교주가 되었을까. 어떻게 아버지 모르게 이 모 든 일들을 꾸민 것인지, 또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수족같이 부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교주, 어째서 교주가 저토록 어린…….”

야마모토는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요.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소.”

“그게 무슨 일이오?”

“오키에는 이전의 교주님께서 환생하신 것이오.”

“환생?”

박 신부는 의아했다. 아까 들은 오키에의 두 가지 상반된 목소 리 중 나직한 여자의 음성은 오키에 본인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 다. 그러나 환생이라면 그런 두 가지의 음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 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환생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주의 영이 오키에의 몸에 빙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다. 그편이 더 타당성이 있었다. 교주의 영이 오키의 몸에 빙의되어 있다면 지금까지의 상태로 보아 그가 오키에의 몸과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런 상 태라면 다른 자들에게 환생한 것이라고 보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언행을 하면 그 사 람이 마치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더군다나 평소에도 주술력이 상당했던 명왕교의 교주라면 신도들한테 여러 가지 이 적을 많이 보여 주었을 것이고, 그런 능력 있는 교주라면 환생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박 신부는 야마모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박 신부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었다. 야마모토를 비롯하여 명왕교의 주변 인물들이 지적 능력 이 모자라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욱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 터이고 그런 사람 들이니만큼 자신의 눈앞에서 믿지 못할 것들을 실제로 체험했다 면 더욱더 현혹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박 신부는 추리했다. 그런 타입의 사람들은 항상 옳다고 여기던 이성적인 가치관이 허물어졌을 때,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맹렬하게 그런 것에 복 종하는 법이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리 고 그런 이유로 우린 그분을 따르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고…………….”

야마모토의 중얼거림은 박 신부의 추리를 더욱 뒷받침해 주 었다. 박 신부는 야마모토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무리를 하면서 간신히 몇 마디를 입 밖에 냈다. 

“당신은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소?”

박 신부는 야마모토가 명왕교에 깊숙이 관계된 인물일 것이 라고 추측했다. 스즈키의 다른 측근이 명왕교도였다면 아주 오 래전부터 명왕교를 신봉하고 있었어야만 그 정도의 역할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자면 자연히 명왕교가 하는 일에 대해서 도 마땅히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박 신부의 판단이 맞은 듯했다. 야마모토는 그 말을 듣자 몸을 흠칫 했다. 박 신부의 말이 평상시 야마모토가 가졌던 고민의 핵심을 찌른 것 같았다. 예전에 의사 생활을 해 보았던 박 신부였던지라 인명을 다루는 의사인 야마모토가 사람을 해치는 명왕교의 일에 누구보다도 강한 반발심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짚어 낸 것이다. “우리는 복수를 하는 것뿐이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 하지 마시오.”

“복수?”

야마모토는 더 해 줄 말이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가려고 뒤로 돌 아섰다. 박 신부는 그런 야마모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 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야마모토는 복수라는 말을 썼다. 그렇다 면 누구의 복수인가? 혹시 다카다가 아닐까? 다카다는 정말 칠 인방이 살해한 것일까? 그래서 복수를 한다는 것일까? 

“누구, 다카다?”

나가려는 야마모토의 등 뒤에다 대고 박 신부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야마모토는 고개를 휙 돌려서 불타는 듯한 눈으 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뱉듯 말했다.

“다카다? 물론 그것도 그렇지. 그러나 그것보다는 교주의 복수요!”

“교, 교주?”

박 신부는 깜짝 놀랐다. 명왕교 교주는 지금 영으로 변해 빙의 되어 있건, 아니면 진짜 환생을 했건 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교주의 복수라니? 교주도 누군가에 의 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인가? 혹시 교주가 칠인방에 의해서? 박신부는 충격이 꽤 컸던지 잠깐 현기증이 났다. 잠시 후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복수를 복수로 갚는 것. 피를 피로 흘리는 것은………………”

“그만두시오. 나는 교주의 명을 따르고 피를 섬기는 단순한 신 도에 불과할 뿐이오!”

“신도? 그렇다고 해도…………….”

야마모토는 더 이상을 말을 하지 않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 신 부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음, 저 사람은 일본인이지.’

박신부는 야마모토의 태도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지 척 관계에 있는 나라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은 가치관을 비롯해 서 여러 가지 것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다혈질인 데 비해 소극적인 사람이 많다. 또한 그들은 오랫동안 주종관계 를 기반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직도 그런 관념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그런 면을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로 분석했는데 그것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을 크게 구별 짓는 것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선비가 되기 위 해 노력했다면, 일본인들은 사무라이가 되어 두 자루의 칼을 차 기 위해 노력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옳은 말이라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직간하는 것을 충정의 근본으로 삼았다면, 일본인 들은 어떤 명령이라도 주군의 말에 따르고 틀린 명령일지라도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을 최선의 미덕으로 삼았다. 사실 배반 이 판을 치고 책략과 술수가 난무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최 소한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만은’ 명령 한마디에 불만 없이 죽어야 떳떳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본인이었다.

오래전의 일이라고 해도 그런 가치관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다 시 자식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것이며, 결코 사라지는 것 이 아니다. 일본의 정치가 한국의 정치보다 엉망진창이고 공공 연히 ‘정치 후진국’이라는 말을 들어도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 사 람들이 보면 놀랄 만큼 정치에 무관심하다. 또 일본인들은 혹독 한 노동 조건과 박봉 속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가난하고 근 면하게 불평 없이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을 본받자’ 등의 구호가 한국 사회 에서 많이 나왔으나 일본을 그대로 본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박 신부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바였다. 그런 그들의 외형만 을 보고 일본을 본받자는 건 섣부른 판단일지 몰랐다. 우리에게 는 그런 식으로 윗사람의 의견을 무저항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하는 가치관이 없었다. 그리고…………….

아니,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고 박 신부는 마음을 돌렸다. 머리 가 아파왔고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여기는 일 본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 금박 신부에게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오키에의 함정에 현암과 일행들이 걸려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명왕교의 비밀은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아내는 일들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욱더 중요했다.

박 신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기력이 빠져나가서인지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끔씩 머리가 어 지러웠다. 그러나 아까처럼 극도의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 으로 보아 야마모토가 많은 양의 진통제를 주사한 것이 틀림없 었다. 어지럼증도 진통제 때문인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질끈 감 았던 눈을 다시 떴다.

박 신부는 지하실로 보이는 방의 벽에 양손이 비끄러매인 채 반쯤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불이 켜져 있어서 주변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손에 조금 힘을 주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묶여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 니었으나 그다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박신부는 기운을 조금 가다듬은 뒤 힘을 주어 바닥을 둘러보 았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앰플 병이 몇 개 보였다. 아마도 야마모토가 자신에게 주사하고 버린 빈 약병 같았다. 그중에 한 개는 끝부분이 잘리지 않은 새것이었다. 약병의 레이블이 똑똑 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의사였던 박 신부로서는 낯선 앰플이 아 니었다. 그것은 마취제 약병이었다. 박 신부는 다시 한번 바닥을 둘러보았다. 야마모토가 말끔히 가방에 정리해 갔는지 빈 앰플 들 몇 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바닥은 깨끗한 편이었다.

‘야마모토는 저 마취제를 나에게 주사하려고 가지고 왔다가 깜박 잊고 그냥 간 것일까?’

박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 신부에게 상당히 강한 영력이 있다는 것은 명왕교의 인물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조금 전에 박 신부는 단신으로 오라의 기도력을 이용하여 십여 명의 경호원들을 이겨 내지 않았었던가. 그렇다면 오키에가 자신을 인질로 이용하기 위해 붙잡아 놓았다면 마취시켜 놓는 편이 훨 씬 수월할 것이다. 오히려 그편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야마모토는 약병을 흘리고 게다가 나를 마취시키지도 않고 그 냥 갔군. 다른 것을 다 치웠는데 유독 저 하나만은 그냥 바닥에, 그것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떨어뜨려 놓고 가다니. 그렇다면?’ 야마모토가 다른 것들은 챙기면서 약병을 떨구고 갔다는 것이 얼른 이해하기 힘들었다. 의사들은 항상 의료 기구들을 철저히 챙기도록 교육받는다.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수술 시 환자의 몸속에 의료 기구를 넣어 둔 채 봉합하는 따위의 끔찍한 일이 생 길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야마모토는 퍽 노련하고 냉정한 의사 였다. 그런 야마모토가 비록 작은 앰플 병이라지만 그것을 떨구 고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 한 가지 의문 나는 게 있었다. 야마모토는 분명 자신과 마지막까지 대화를 하다가 나갔다. 만약 오키에로부터 마취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 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마모토의 속셈은 뭘까? 본인이 나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아니면 이것을 기회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고?’

그러나 두 가지 다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도우려면 묶인 끈 부터 풀어 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치게 만들었어 야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그 사실이 발각된다고 해도 치료를 하려면 끈을 풀어야만 했고, 그 와중에 박 신부에게 기습을 당해 놓치고 말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박 신부는 끈으로 묶인 팔에 힘을 주어 보았다.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묶여 있는 상태라면 마취병 하나 놓고 간 게 대수일 수는 없었다. 그것만으로 함정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또한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분명 단순한 실수 같지는 않은데…………….’ 

박 신부는 혹시 야마모토가 자신을 마취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박 신부는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는 그 앰플 병을 바라보 면서 야마모토의 진의가 어떤 것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연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준후와 귀자모신을 바라보는 동안, 준후와 귀자모신은 상대를 꿰뚫어 버리려는 듯 서로를 쏘아볼 뿐 아무도 먼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연희는 미처 모르고 있 었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은 서로 영능력을 이용하여 대화를 나누 는 중이었다. 아까 귀자모신의 수틀과 준후의 벽조선이 부딪힌 순간, 서로 다른 두 개의 법기를 통하여 어떤 교감 같은 것이 전 해져 온 것을 준후와 귀자모신은 느끼고 있었다. 준후가 사용한 벽조선은 무가의 기술에 도교, 밀교의 것들을 융화하여 만들어 진 것이고, 귀자모신의 수틀은 밀교의 공력을 기본으로 만들어 진 법기였다. 서로 비슷한 점은 있었지만 어째서 그런 법기를 통 하여 의사 전달까지 가능했는지는 준후도 귀자모신도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서로에겐 있었다.

귀자모신, 당신의 수틀 속에 깃든 영은 대체 누구지요?

네가 알 바 없다!

아이의 영을 그 안에 담아 두고 있지요?

귀자모신은 불법을 수호하는 천신 중의 하나예요! 비록 사악한 나찰이었지만 각성해서 호법이 되었고 특히 아이들을 지켜 주었는데…………….

귀자모신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당신이 윤회하여 환생해야 할 아기의 영 을 수틀 속에 가두어 두고 힘을 불러내는 데에만 쓰다니!

귀자모신은 원래 나찰의 일종으로 사악한 마귀였다. 오백 명 의 자식이 있던 그 여자 마귀는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잡아 자기 자식에게 먹여 자기 자식들을 길렀다. 이런 귀자모신의 행패를 본 석가세존은 친히 불력을 발휘하여 귀자모신의 자식들을 빼앗 고는 감추어 버렸다. 오백 명이나 되던 자식들을 모조리 잃어버 린 귀자모신은 크게 비탄하여 비로소 남의 자식을 잃게 한 죄를 깨달았고, 다른 이들의 고통의 크기를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 는 후회와 회한에 빠져들었다. 결국 귀자모신은 불타를 찾아 자 발적으로 속죄를 청해 자식들을 돌려받은 뒤 사악한 마귀의 탈 을 벗고 호법의 한 반열에 들게 되었다.

준후는 바로 그런 까닭에 이 귀자모신에게 더욱 분노하고 있 었던 것이다. 아무리 법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보통 수틀로는 그 렇게 자유자재로 운신하는 신통력을 가질 수 없었다. 준후가 짚 어본 바로는 그 안에 현암의 월향검과 비슷하게 어떤 영이 깃들어 있고 영의 힘이 수틀의 공력을 크게 좌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수틀 속에 갇혀 있는 영은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월향의 경우와 같이 자발적으로 깃들어 있는 영은 아니라고 준후 는 보았다. 그 때문에 준후는 귀자모신을 꾸짖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귀자모신은 마음속으로 크게 대갈하고는 수틀을 허공에 던져 영력을 끌어 올리면서 양 손바닥을 마주쳤다. 준후도 지지 않고 벽조선을 펴 들고 왼손 검지와 중지를 꼿꼿이 세워 벽조선의 부챗살에 댄 다음 발을 크게 움직여 방위를 밟아 나갔다. 귀자모 신의 수틀은 허공에 떠오르더니 미친 듯한 속도로 회전하다가 쏜살같이 무언가를 내뿜었다. 색실이었다. 영력을 받은 색실은 가느다란 창처럼 사방으로 눈부시게 뻗어 나갔고 순식간에 허공 에 오색의 선을 긋듯 여기저기 꺾이다가 준후를 향해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직녀루사공(女淚絲功)*!”

준후가 입술을 깨물고 벽조선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빠르 게 회전시켰다. 회오리바람처럼 준후의 몸이 핑그르르 도는 것 과 동시에 벽조선의 검붉은 기운이 준후의 몸을 감싸고 같이 돌 았다. 사방에선 수십 개의 선이 허공에 그어지는 것처럼, 색실들 이 일시에 준후의 몸이 있는 곳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이건 꿈일 거야. 말도 안 돼!”

그간 퇴마행에 여러 번 참여해서 믿지 못할 일들을 많이 본 연 희로서도 두 사람의 엄청난 격돌을 보고는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준후의 몸이 있는 곳으로 수십 가닥의 색실들이 찔러 들어가고 있었고 쇳소리와 같은 딩딩딩 튕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손가락을 깨물 었다. 퍽 하면서 검붉은 기운이 사방에 폭발하듯 퍼져 나가자 꼿 꼿하게 덮쳐들던 색실들이 힘을 잃은 듯 사방으로 나풀거리며 휘날렸다. 잠시 후 검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준후의 모습이 나타 났다. 준후의 안색은 몹시 파리했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 으며 약간씩 붉은 기운이 몸에 비쳤다.


*소설상의 가상의 술수로 직녀가 눈물로 실을 짠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


“준후야!”

연희는 초췌한 준후의 모습을 보고 낭패를 당했다고 여기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준후는 미간을 한번 찡그리더니 연 희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한편 저쪽에서는 수틀을 양손으로 받쳐 든 채 귀자모신이 멍 한 얼굴로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귀자모신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연희의 귀에 들려왔다.

“직녀루사공을 알아보다니. 게다가 막아내기까지 하다니…………… 이 이럴 수가!”

연희는 준후와 귀자모신 양측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준후도 상처를 입었지만 귀자모신도 큰 타격을 입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 쓴 주술이 기력 소모가 대단했던 것인 듯 탈진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쓰러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원 세상에 사람들 같지도 않아.’

연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쓰러져 있는 승희 쪽으로 눈을 돌 렸다. 승희의 몸은 조금 더 붉어진 듯했으나 아까와는 달리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연희는 준후의 뒤로 돌아 승희가 있는 쪽으 로 서둘러 걸음을 옮겨 갔다. 귀자모신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 게 뜨며 수틀을 오른손에 옮겨 쥐고 한 번 허공에 떨치자 단장침 몇 가닥이 쏜살같이 연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준후가 싸 늘하게 외치면서 벽조선을 날리자 벽조선은 허공을 빙글빙글 돌 면서 연희에게로 날아드는 귀자모신의 단장침을 모조리 막아내 고 준후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귀자모신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놈! 조그마한 재주가 있다고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 불다니! 내가 정말로 너를 이길 힘이 없는 줄 아느냐? 내 본때를 보여주마!”

준후는 귀자모신의 말하는 투로 보아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희는 일단 귀자모신을 준후에게 맡겨 두고 승희에게로 달음질쳤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승희의 몸은 아 까보다 조금 더 붉어졌고 숨 쉬는 소리가 커진 것 같았다. 승희 의 몸에는 아직도 단장침이 서너 개 꽂혀 있었다.

연희가 승희를 반쯤 안아 일으켜 세우고는 침들을 뽑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뒤로 물러서 있던 명왕교의 여신도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가 비명이 나는 쪽으로 눈을 돌리자 문을 통해 터벅거리며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온몸이 피로 물 들어 있어 마치 핏덩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연희는 소 름이 끼쳤지만, 곧 반가움에 눈을 크게 떴다. 온몸에 피를 뒤집 어쓴 채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현암이었다. 귀자 모신도 준후를 향해 다시 공격을 하려다가 눈을 돌려 현암을 보 고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고, 준후도 고개를 돌리더니 반가움과 안쓰러움이 섞인 소리로 현암을 불렀다.

준후가 소리를 지르는 그 짧은 순간을 노련한 귀자모신은 놓 치지 않았다. 귀자모신은 기합조차 넣지 않은 채 온몸의 기를 모 으는 듯 부르르 몸을 떨더니 수틀을 허공에 날렸다. 아까만큼 현 란하게 날아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빠른 속도로 몇 줄기의 색실이 수틀에서 뻗쳐 나갔다. 귀자모신이 선보인 직녀루사공이 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 색실들은 모두 준후의 오른손에 쥐어진 벽조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채 손을 쓰기도 전에 준후의 손에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 고준후는 손에 든 벽조선을 놓치고 말았다. 허공에 떨어지던 벽 조선은 귀자모신이 수틀을 또 한 번 흔들자 색실에 말려서 귀자 모신의 손에 척 하고 들어가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준후는 상처를 입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쥔 채 이를 악 물고 귀자모신을 노려보았다. 그때 천천히 걸어 들어오던 현암 이 갑자기 서더니 쿵 소리를 내며 몸을 꼿꼿하게 한 채 앞으로 쓰러졌다. 놀란 연희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혀, 현암 씨!”

현암이 쓰러지자 놀라서 뒤쪽 벽에 숨어 있던 명왕교의 여신 도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미처 승희 의 몸에 박혀 있는 단장침을 빼 주지도 못한 채, 그들의 앞을 가 로막고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그러나 여신도들은 주춤하는 듯싶더니 예의 구불구불한 단검 을 빼들고는 협박하듯 서서히 연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깔깔깔.”

벽조선을 빼앗아 손에 쥔 귀자모신은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러고는 수틀을 거머쥐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 니 수틀을 준후에게 내밀어 보였다. 준후는 입술을 깨물고 수인 을 맺어 보려고 했지만 다친 오른손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 었고, 벽조선이 없으면 주술을 쓰더라도 귀자모신의 직녀루사공 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암과 승희는 쓰러져 있었고, 연희도 서서히 주위를 에워싸며 다가서는 여신도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때 귀자모신이 여신도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뜻밖이어서 연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잠깐! 저 여자를 이리로 불러와라!”

“네?”

여신도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춤거리자 귀자모신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리로 데리고 오란 말이다! 안 들리느냐?”

“아, 예.”

여신도들은 귀자모신의 두 번째 호통이 떨어지자 연희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연희는 그 자리에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하하하. 내 네게 할 말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너희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할 말이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해라!”

연희는 소리를 지르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쓰러진 현암의 몸을 뒤집어 바로 눕힌 다음 손으로 대강이나마 얼굴에 묻은 피 를 훔쳐 내었다. 그러면서도 평소와는 다른 사나운 눈으로 주변 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좋다. 좋아. 내 저 꼬마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런다. 저 꼬마에게 내 말을 전해 다오. 직접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어째 방법이 부드럽지가 못한 것 같아서 그렇다.”

준후의 벽조선과 귀자모신의 수틀이 마주쳤을 때 둘은 마음속 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둘의 법기가 마주친 순간 교감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벽조선이 이미 귀자모신의 손에 들 어가 있는 상태에선 아까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연희는 그런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귀자모신에게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현암이 정신 차릴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희는 귀자모신에게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희가 다짜고짜로 뛰어들어 우리 의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또 우리 교주를 해쳤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조금 있다가 시비를 가리기로 하고……………..”

귀자모신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뜸을 들였다. 그러고 나서 잠 시후 준후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꼬마는 밀교의 비술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술수에 정통 한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내가 이겼지만, 배울 점도 많은 게 사실 이다. 내 이 아이에게서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게 있구나.”

“그게 뭐냐?”

“우선 이 아이에게 물어봐 다오. 이 아이가 이런 비술들을 알 고 있다면 필경 상고(上古)의 고대 문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게 다. 우선 그걸 물어보아라.”

연희는 귀자모신의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갑자기 귀자모신은 고대 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사실 언어학이라면 자신의 전공 분야인데. 연희는 귀자모신의 말을 준후에 게 일러 주었다. 그러나 준후는 고개를 끄덕해 보일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연희는 준후의 태도에서도 이상한 점을 느꼈지 만 준후의 뜻을 그대로 귀자모신에게 전했다.

“알고 있을 거라 한다.”

“음, 그렇군. 물론 내가 말한 것은 조선의 상고 문자를 말함이다.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상고 문자? 그럼 이두를 말하는 것인가?’

연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 말을 준후에게 전하자 준후는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

“지금 알려져 있는 이두나 향찰은 우리나라의 고대문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쓴 하나의 방편에 불과 할 뿐이지요.”

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 자체가 아닌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글을 적었다는 것은 우리의 말이 중국의 말과는 고대부 터 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필경 그 다른 말을 적도록 만들어진 문자도 있어야 한다는 게 언어학을 연구한 연희의 지 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 그러한 고대 문자가 있 었다는 것은 연희로서도 금시초문이었고, 설령 그런 고대 문자 가 있었다고 해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구와 시간을 필요로 할 터였다. 연희는 자기 나라의 고대 문자도 모르면 서 언어학을 한답시고 다닌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단군왕검이 만드신 우리나라의 상고문은 신시 문자라고 해 요. 그리고 그보다 조금 후에는 가림토 문자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이두의 원형이자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 모양의 원형 이 된 거예요.”

“아!”

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너는 그 글들을 읽을 줄 아니?”

“네.”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고 연 희에게 의미 있는 듯한 눈짓을 하면서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연희는 왜 저러는가 싶어서 준후를 바라보다가 귀자 모신에게 소리쳤다.

“신시 문자나 가림토 문자라면 여기 있는 준후가 읽을 수 있다 고 한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오호라! 그래그래.”

귀자모신은 고개를 서너 번 끄덕거리면서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그 조선의 옛 글자를 아는 사람을 하나도 볼 수 없었 는데 여기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구나. 너희가 소란을 부린 죄는 죽어 마땅하나 이것을 해석해 준다면 내 너희를 해치지 않고 목숨만은 살려 줄 터이니 한번 해 보아라.”

귀자모신은 벽조선을 자신의 허리띠에 끼우고는 품속을 뒤적 여서 낡은 책자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겉에 쓰여 있는 글 자는 거의 전서체(篆書體)에 가까운 옛 한문 같았고 거리도 꽤 되어서 연희는 한참 동안 눈을 깜박거리고 나서야 간신히 제목 을 읽을 수 있었다.

“해동감결?”

연희가 책 제목을 입에 올리자마자 준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흘러나온 준후의 목소리는 평소와 는 전혀 다른 중년 남자의 굵직하고 울림이 큰 목소리였다. 준후 는 호통을 치면서 허리를 쭉 폈다. 평소의 조그맣고 야리야리하 던 준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몸도 쭉 늘어나 예전보다도 훨씬 커졌고 가느다란 팔다리며 조그마한 가슴도 터질 듯한 근육으로 넘쳐나서 헐렁하던 한복이 꽉 끼일 정도였다. 얼굴도 많이 달라 져 있었다. 위엄과 분노가 가득 찼고, 어딘지 모르게 험상궂기까 지 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눈이었다. 준후의 눈을 꽉 채우던 귀여운 검은 눈동자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온통 흰 자위로 뒤덮 인 준후의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철철 흐르는 듯했다. 연희는 놀 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준후는 커진 몸 을 비호처럼 날려 귀자모신을 향해 덤벼들었다.

“아, 강신술! 이 꼬마 녀석이 어느 틈에!”

귀자모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준후는 속으로 은밀히 강신술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 이다. 명이 줄어든다고 평소에 박 신부와 현암으로부터 강신술 은커녕 소혼마저도 금지당했지만, 벽조선마저 빼앗겨 버린 후에 는 이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연희 가 ‘해동감결’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란 나머지 힘을 끌어서 귀자모신에게 덤벼든 것이었다.

『해동감결』

준후는 그 책을 본 적이 있었다. 해동밀교의 최후가 적혀 있다 던 그 책. 준후에게는 그것이 지금은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와 연 결된 단 하나의 끈처럼 생각되었다. 그 책은 영원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일본에 있다니………….

준후가 달려들자 귀자모신의 수틀에서 색실들이 어지럽게 준 후의 몸으로 날아들었고 삽시간에 준후의 몸은 색실들로 칭칭 감겨 버렸다. 그러나 준후는 사방이 쩌렁쩌렁해질 정도로 고함 을 치면서 손을 길게 뻗어 귀자모신의 손에 들려 있는 해동감결 』을 움켜쥐었다. 귀자모신이 호통을 치며 수틀을 날리자 준후 의 몸은 칭칭 감고 있던 색실에 끌려 공중으로 휙 낚였지만 손에 는 어느새 『해동감결』이 쥐어 있었다.

“이, 이놈이!”

귀자모신이 해동감결』을 빼앗으려는 듯 다시 수틀을 조종하 자 준후의 몸은 뒤로 원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강신술을 써서 힘을 늘리기는 했지만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서 귀자모신에게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듯했다. 그러나 준후는 몸을 꼭 움츠 린 채로 고통을 참으며 죽어도 책을 놓지 않겠다는 듯 품에 끌어 안았다. 이를 보자 귀자모신은 더더욱 분노에 떨었다.

“해석을 해 주면 살려 준다 했는데 오히려 책을 빼앗다니! 이 제 더 이상 네놈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겠다! 어서 내놓지 않으면 살계를 범하더라도 당장 죽이고야 말겠다!”

귀자모신은 무섭게 호통을 치면서 준후의 몸을 마치 가벼운 종잇조각처럼 휘말아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 께 준후의 몸은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고 다시 반대편 벽에 부딪 혔다. 연희가 고개를 저으면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준후의 몸은 여전히 사방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준후야, 책을 버려. 어서! 그게 뭐기에, 어서!”

연희가 울부짖으며 소리쳤지만 준후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몸을 꼭 움츠렸다. 죽어도 책을 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준후야!”

연희가 악을 쓰다시피 울부짖고 있는데 누군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놀란 연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은 손, 정 신을 차린 현암의 손이었다. 현암의 눈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일그러져 있었지만 입술은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여, 연희……. 준후에게.”

“뭐라고요?”

“이, 이……. 어, 어서……………

현암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힘겹게 연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자신의 왼손을 풀어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월향검이 보였다. 

“어서 준후에게 던…………….”

연희는 현암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월향검을 빼 들었다. 그러 자 불똥이 튀면서 바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희의 손에 아찔 할 정도로 충격이 느껴져다. 그러나 그 충격이 어디서 비롯된 것 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월향검을 귀자모신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준후 향해 집어 던졌다.

준후의 몸은 좌우의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고 있었다. 준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몸에 끌어 올렸던 강신술의 기운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휘둘리다가는 정신을 잃 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준후는 손에 쥔 『해동감결』만은 놓지 않 았다.

「해동감결」은 단지 준후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 아니었다. 이 『해동감결』에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언들이 실려 있다는 것을 준후는 알고 있었다. 강신술을 사용하면 준후 의 의식은 반 정도밖에 남지 않게 마련이고 몸에 깃든 영의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만, 준후가 너무도 간절히 『해동감결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의 와중에도 책을 쥔 손은 결코 펴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몸이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간다고 느끼는 순간, 준 후는 자신의 몸을 끌어 올리던 힘이 무언가에 의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몸이 땅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동시에 어디 선가 낯익은 은빛 호선이 번쩍이는 게 보였고 곧이어 귀에 익은 귀곡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 월향검이 내는 소리는 평상시 의 꺄아악 하는 소리가 아닌, 왠지 모를 슬픔에 찬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준후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준후의 몸에서 빠져나가려던 강신력이, 준후가 기운을 되찾자 다시 몸 속에 밀려들어 더욱 큰 힘으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귀자모신 에게 달려드는 순간, 준후는 아랫배에 시큰한 통증이 오는 동시 에 쾅 하고 몸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 귀자모신의 수틀이 준후의 배를 강타하고는 벽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강신술로 몸에 힘을 돌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귀자모신이 수틀을 끌어당기자 극심한 통증이 몸속을 파고들 었다. 다시 저 수틀로 얻어맞는다면 끝장이다. 준후가 일어서려 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준후의 손으로 싸늘한 것이 날아들어 와 쥐어졌다. 월향검이었다. 준후는 직접 검을 다루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준후가 불러낸 신령은 검을 손에 잡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손에 쥔 검에서 우웅 소리와 함께 현암이 사용할 때보다 는 훨씬 짧은 한 자 정도 길이였지만 검기가 솟구쳤다. 이제 준 후가 더 생각할 일은 없었다.

월향검에서 쏟아지는 검기가 눈부시게 허공에 그어지고 있었 다. 그리고 귀자모신이 쏘아 낸 단장이 월향검의 검기에 휘말 려 그대로 부스러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힘이 다해 가고 있었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통증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신술을 쓴 이상 지금 준후의 몸은 준후의 것이 아니었다. 준후 의 몸에 깃든 신령은 준후의 고통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로지 적을 제압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준후의 몸은 엄청난 고통에도 주저 없이 크게 움직여 허공에 날아올랐다. 무리에 견디다 못한 몸이 삐걱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물가물한 준후의 눈에 귀자모신이 긴 머리카락을 무섭도록 꼿꼿이 곤두세운 채 수틀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는 엄청난 소리와 충격, 몸의 모든 곳에서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고통과 함께 귓속에서 웅웅거리 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깜박 정신을 잃었나 보다. 박 신부가 눈을 떠 정신을 차린 건 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볼까 하 다 박 신부는 그냥 눈을 감고 잠든 척 가만있기로 마음먹었다.

박 신부의 귓전으로 두어 명의 남자 목소리와 오키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본말로 지껄이고 있어서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 을 수 없다는 게 박 신부로서는 한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박 신부는 슬며시 실눈을 뜨고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키에 가 남자에게 무언가 지시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두 남자는 오키에가 나갈 때까지 꼼짝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박 신부 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박 신부는 얼른 눈을 감고 계속 정신 을 잃은 척했다.

두 남자는 한동안 박 신부를 살펴보다 박 신부의 양팔에 묶인 끈을 풀고는 박 신부를 들것에 눕혔다. 박 신부는 몸이 움직여지 자 온몸을 찌르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박 신부를 들것 위에 눕힌 두 남자는 박 신부의 신음 소리 따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들것의 앞뒤로 섰다. 박 신부는 두 사람 이 눈치채지 못하게 힐끗 바닥을 보았다. 그러나 바닥에 있었던 마취약 앰플은 사라지고 없었다. 박 신부는 이상해서 자세히 보 려다가 남자들이 들것 앞뒤로 자리를 잡자 얼른 눈을 감았다. ‘그 앰플 병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사이 누가 들어온 것 같지 는 않은데……………

박 신부는 몸에 기도력을 모으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비록 자신을 옮기는 자들은 둘뿐이었지만 이 문 밖과 이곳 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자들이 분명 경계를 서고 있을 터였다. 섣불리 소란을 일으켜서는 승산이 없었다. 게다가 고통 은 아까보다 덜 하지만 심한 부상을 당한 몸으로 다시 이들과 맞 부딪쳐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은 기회를 엿보는 것이 좋을 듯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흔들리는 들것에 실려 지하실 을 나갔다.

박 신부의 머리가 위쪽으로 들려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위 층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어느 방의 문을 열더니 그 들은 박 신부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박 신부의 손발을 묶고는 방 밖으로 나가버렸는지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뒤 이어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에서 무언가 하기 위해 박 신부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박신부는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은 후로도 한참이나 더 조용 히 방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눈은 뜨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방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 귀를 기 울이고 있자니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다. 더 신경을 집중해 보 니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실눈을 뜨고 방 안의 동 정을 살폈다. 방에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밧 줄에 묶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워낙 희 미해서 그들이 확실히 누군지는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박 신부 는 조금씩 몸을 꿈틀대면서 자세를 바꾸려고 했다. 간신히 몸을 틀어 그쪽을 보니 그 두 사람은 박 신부도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스즈키와 사이토였다.

박 신부는 주기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탈출은커녕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쉽지 가 않았다. 아직은 진통제의 힘 때문인지 간신히 버텨 낼 수 있 었지만 묶인 끈을 풀 수는 없었다.

‘주여!’

박 신부는 눈을 감고 고요히 기도력을 모으려고 애쓰기 시작 했다. 진통제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모으자 터진 물탱크 에서 물줄기가 뻗치듯 힘이 새어 나가는 듯하면서 통증이 엄습 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문 채 계속 자신의 팔을 묶고 있는 끈에 생각을 집중했다.

‘이 속박을 풀어 주시옵소서. 저 때문만이 아니라 저들도 구하 기 위함입니다. 구해 주소서.’

한참을 기도를 올리면서 힘을 쓰던 박 신부는 어느덧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양손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기도력을 집중하여 줄을 끊어낸 것일까? 아니, 그보다 박 신부는 성령의 기운이 자 신을 구해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신부는 성호를 한 번 그은 다음 양손을 서서히 움직여 보았다. 아까 가슴을 찔린 상 처 때문인지 왼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팔만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뿐이지만 그나마도 움직일 때마다 형언할 수 없 는 심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박 신부는 간신히 줄을 치워 내고는 뒤로 뒤틀린, 남의 팔처럼 느껴지는 왼팔을 천천히 앞으로 돌 렸다. 박 신부의 왼손에는 베케트의 십자가가 꼭 쥐어져 있었다. 박신부가 베케트의 십자가를 쥐고 있다기보다는 베케트의 십 자가가 박 신부의 손에 매달려서 놓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 다. 그러다 베케트의 십자가 왼쪽 모퉁이에 짓눌린 줄의 가느다 란 가닥이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박 신부는 깜짝 놀랐다.

‘아니, 베케트의 십자가가 이 줄을 끊었단 말인가? 나는 왼손 을 움직일 수 없는데.’

돌이켜 보아도 박 신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베케트의 십자가를 쥐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울 때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왼 손에 쥐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자신이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기 억은 베케트의 십자가를 풀어 허리에 차고 오키에와 스즈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베케트의 십자 가가 지금 자신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십자가로 줄을 끊은 것도 아니고 오직 기도만 했을 뿐인데 어떻게 손목을 묶고 있던 줄이 끊어졌을까? 의아했지만 박 신부는 일단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박 신부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왼손에서 풀어 허리에 넣고 오 른팔에 의지해서 스즈키와 사이토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이 가물거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 분이 들었고, 그때마다 박 신부는 숨을 가다듬으며 억지로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면서 몸을 끌었다. 간신히 사이토가 있는 곳까지 간 박 신부는 사이토의 몸을 툭툭 쳤다. 사이토가 꿈틀거 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사이토는 박 신부를 보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중상을 입은 박 신부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 신부의 사제복은 여기저기가 찢긴데다 흥건한 핏자국이 곳곳에 배어 나와 있었다. 박 신부가 손가락 하 나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이자 사이토는 고 개를 끄덕였다.

박신부는 허물어질 듯한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면서 사이 토의 손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사이토는 그리 다친 곳이 없 었던 듯, 손이 자유로워지자 즉각 몸을 일으켜 재갈과 자신의 발 을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일을 마치고 난 사이토가 낮은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박 신부는 그 소리를 듣자 긴장이 풀렸다. 간신히 미소를 지으 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했지만 다시 온몸에 통증이 밀려오면 서 스르르 의식이 사라졌다. 박 신부는 잠시 부탁한다는 듯한 표 정을 지으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는 격언을 되뇌면서……………..


.

연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에 자신이 똑똑히 보았던 광경들을 떠올려 보았다. 준후의 손에 들린 월향검 이 거센 귀곡성을 지르면서 허공을 날고 있었던 것, 그와 동시에 날아들어 오던 귀자모신의 수틀이 월향검에 의해 반으로 쩌억 갈라지면서 각각 저절로 불길에 타오르며 사라지던 것, 그렇게 둘로 쪼개진 수틀에서 어린아이의 커다란 비명 소리와 새빨간 기운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가 허공에 흩어져 버린 것. 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한동안 어두운 적막이 흘렀다. 

“내, 내 귀아반(兒盤)*이!”

한참 동안의 적막을 깨고 귀자모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허공에 길게 울려 퍼졌다. 귀자모신이 이때까지 사용해 오던 수틀의 이 름이 귀아반인 듯했다. 귀아반은 월향검과 격돌하다 스스로 타 들어가 재로 변해 버렸다.

준후는 힘겹게 눈을 떴다. 기운을 다 써서인지 몸에 깃들었던 대력검신(神)**의 기운은 어느새 사라져 없었고, 대신 온몸 이 욱신거리고 쑤셔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 나 그때까지도 준후의 손에는 월향검이 꼭 쥐어져 있었다. 준후 도 귀자모신이 질러 대는 비명을 듣긴 했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설상의 가상의 법기(器)로 귀자모신이 들고 다니는 수틀

** 큰 힘을 가지고 큰 칼을 휘두르는 신장.


“내 평생의 노력으로 만든 귀아반이 ……………. 죽여 버리겠다! 모 조리 죽여 버릴 테다!”

귀자모신은 소리를 지르면서 양팔을 크게 펼쳐 만세를 부르듯 이 위로 치켜 올렸다. 안 그래도 흉측스러운 귀자모신의 헝클어 진 반백의 머리카락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곤두 서더니 뱀처럼 엉켜 가기 시작했다. 현암이 으윽 하는 소리를 내 면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풀썩 쓰러지는 것을 부축하며 연 희가 준후에게 소리쳤다.

“준후야, 위험!”

귀자모신은 미친 듯 기운을 끌어 올리다가 허리춤에서 준후에 게서 빼앗은 벽조선을 빼 들었다.

“이얏 죽어랏!”

귀자모신의 분노에 찬 고함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귀자모신 이 벽조선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수 십년 수련으로 쌓아 올린 공력이 있었고, 공력을 벽조선에 주입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위력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귀자모신 이 벽조선을 휘두르자 휘이이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한 줄 기의 강력한 바람이 바윗덩이처럼 뭉쳐서 준후가 있는 곳으로 덮쳐 들어갔다. 연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 렸다.

“월향! 위로!”

연희의 귀에 월향검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현암 이었다. 현암의 소리가 떨어지자 준후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월향은 현암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꺄아악 하는 귀곡성을 내 고는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올라갔고 준후의 몸도 월향에게 이끌 려서 이 미터가량 허공으로 치솟았다. 준후의 몸이 올라가는 것 과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귀자모신의 강력한 바람이 준후가 있던 자리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들이닥쳐 얇은 강철로 된 뒷벽을 움 푹하게 찌그러뜨렸다.

귀자모신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번 벽조선에 공력을 한껏 끌어 모았다가 내쏘았다. 덩어리진 바람이 아까보다도 더욱 빠 른 속도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준후에게 덮쳐들었다. 그 찰나, 반쯤 정신을 잃고 있는 준후가 힘이 빠져 손에 잡고 있던 월향검 을 놓치며 아래로 쿵 떨어졌고 귀자모신이 일으킨 바람은 그 사 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귀자모신은 약이 올라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준후에게 벽조선을 휘둘러 일격을 가하려 했다. 기력을 잃은 채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준후는 속수무책이었다. 막 귀자모신이 벽조선을 부치려는데 현암이 소리쳤다. 

“월향, 파사신검 제육초!”

파사신검의 여섯 번째 초식은 파사비선검(破邪飛旋劍)이었다. 현암이 몸을 움직여 귀자모신과 싸울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수법을 사용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싸울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과 월향검의 마음이 통했던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현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후를 놓치 고 어찌할 줄 모르는 듯 허공에 떠 있던 월향검이 매서운 기세로 빙글빙글 돌며 무지갯빛의 원호를 만들었다. 원은 귀자모신을 향하여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흐억!”

그렇잖아도 귀자모신은 조종하는 사람도 없이 저 혼자서 움직 이고 있는 칼을 보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칼이 자기를 향 해 공격해 들어오자 무척이나 놀란 것 같았다. 위기라고 느낀 귀 자신이 준후 향해 쏘아 내려던 바람의 기운을 돌려 급한 김 에 자기를 향해 들이닥쳐 오는 월향검으로 날려 보냈다. 강풍은 월향의 세찬 기세에 눌려 허공에 흩어졌다. 월향검도 그리던 원 을 흐트러뜨리고는 뒤로 밀려가다가 벽에 한 번 튕기고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현암과 연희, 둘의 입에서 동시에 안타까운 탄 성이 새어 나왔다. 특히 현암은 무의식중에 이까지 부드득 갈고 있었다. 방금의 초식으로는 분명 귀자모신의 바람 정도는 문제 가 아닐 줄 알았는데……………

그러나 자신이 공력을 월향에게 보내 준 것도 아니고 월향은 스스로의 염력만으로 검기를 맺고 또 초식을 전개한 것이니 아 무래도 현암과 같이 초식을 썼을 때보다 위력이 훨씬 못 미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세 번이나 공력을 쏘아 내고 나자 귀자모신도 힘이 드는 듯, 헉헉거리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귀자모신은 한숨을 돌리고는 이번에는 현암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다 죽어 가는 놈이 웬 술수를 부리는 게냐! 지독하기 짝이 없 구나! 내 너부터 없애 버리고 나서 나머지를 지옥에 보내 주겠다!”

귀자모신이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호흡을 고르면서 공력을 가다듬었다. 귀자모신의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게 연희와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귀자모신은 공력을 거의 끌어 올렸는지 현암을 향해 두 팔을 뻗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현암과 연희의 앞 을 가로막았다. 연희는 놀라서 앗 하며 소리를 질렀고 현암도 눈 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승희였다. 승희 의 온몸은 붉게 변해 있었고 몸에서는 가느다란 바늘이 주우욱 밀려나오다가 승희가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몸 밖으로 완전 히 밀려나 땅에 떨어졌다. 귀자모신에게 맞았던 단장침이었다. 승희는 엄숙하고 알 수 없는 영기가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귀자모신은 그런 승희의 모습을 보고 놀란 나머지 뒤로 몇 발자국 비틀거리면서 물러서다가 넘어질 뻔했다. 귀자모신은 얼 굴에 당혹과 놀라움을 가득 담은 채 떨리는 입술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연희는 귀자모신이 더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며, 명왕 화신 구현. 그것도 명왕 스스로의 의지로…………….”


박 신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잃 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으나 박 신부가 눈을 떴을 때는 사이토 와 스즈키 두 사람 모두가 밧줄과 재갈을 다 풀고 박 신부를 걱 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려 있었고, 불안함에 짓눌려서인지 한 십 년씩은 더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박신부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사이토 가입을 열었다.

“신부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박 신부는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 두 사람이 멀쩡하다고 해도 명왕교와 맞서 대적할 힘 이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 은 마음에 박 신부는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 다. 스즈키가 뭐라고 말을 하자 사이토가 그 말을 옮겨 주었다. 

“다친 데는 어떠시냐고 물으십니다.”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그건 그렇고 나로서는 이번 사건의 전모를 알 수가 없군요.”

사이토가 박 신부의 말을 전해 주자 스즈키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왕교의 일 말씀입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십수년간이나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모두 명왕교와 한통속이 돼 버렸는지…………….”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박 신부는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실은 스즈키 씨의 따님 인 오키에 양도 명왕교도입니다.”

먼저 사이토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박 신부는 괴롭지만 냉 정한 눈으로 사이토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스즈키는 박 신부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사이토를 쳐다보았고 사이토는 더듬거리면서 박 신부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박 신부 는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에게서 박 신부의 말 을 전해 들은 스즈키는 튀어 나갈 듯이 놀라며 소리를 지르려 했 다. 박 신부가 재빨리 손가락 하나를 스즈키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러자 스즈키는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다급한 표정으로 박 신부 에게 변명을 하듯 떠들어 댔다. 박 신부가 일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충격이 큰 듯했다. 박 신부는 스즈키 가 주절대는 것을 가로막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명왕교의 최고 인물인 교주입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괴사건들은 오키에 양이 꾸민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이토마저도 질린 얼굴빛을 한 채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오키에 양은 이제 겨우…… 아 니, 어린아이가 어떻게 명왕교의 교주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무서 운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러면 조금 말을 바꾸지요. 아마 오키에 양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박 신부는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이야 기를 해 나갔다.

오키에는 아이일 뿐이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명왕교 교주의 영 에 의해 지배받고 있어, 교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거의 틀 림없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심으로는 스즈키가 몹시 가여웠지만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박신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사이토와 스즈키는 연신 고 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을 설득시키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 요되었다. 한참 후 스즈키가 울음을 터뜨렸다. 박 신부도 뭐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감정에 치우 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명왕교 교주의 영만 오 키에 양에게서 떼어 놓으면 오키에 양은 다시 평범한 어린아이 로 돌아올 테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가 묻는 것에 대해 모두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스즈키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더 울먹이다가 결국 은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토도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제 생각으로는 칠인방과 명왕교는 분명 전에 말씀하신 것이 상의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오키에 양의 몸속에 빙의된 명왕교 교주의 복수를 위 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 세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토가 박 신부의 말을 통역해 들려주자 스즈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참 망설이다가 스즈 키는 박 신부의 얼굴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 신부는 스즈 키를 마주 보며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스즈키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결심한 듯 한숨을 내쉬면서 명왕교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땅에 쓰러졌다가 간신히 고개만 쳐든 준후, 숨 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현암이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연희는 지금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귀자모신의 단장침에 혈도를 제압당하여 쓰러 져 있던 승희가 스스로 일어나 귀자모신의 앞을 막아섰다는 것 뿐이었다. 물론 승희가 애염명왕의 화신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때면 으레 그렇듯 온몸이 붉게 변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넘 친다는 건 그들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승희의 신력은 원래 바깥으로 내보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승희의 몸 안 에 내재되어 있는 애염명왕의 힘은 어디까지나 승희의 몸을 경 계로 삼고 있는 듯, 승희 자신을 보호하거나 투시하거나 힘을 빌 려 주는 등 간접적으로 힘을 쓰는 것 말고 그 힘을 밖으로 드러 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승희의 몸속에 있는 신력이 스스로 귀자모신의 앞을 막고 나선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많은 영 능력자나 술사가 승희를 보고 정통적인 신의 화신이 아닌 뭔가 다른 형태 같다고 했다. 심지어 신이 인간의 몸속으로 유배를 온 것이라고까지 말한 철기옹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이제 유 배가 풀리고 신력의 금기가 깨졌단 말인가? 승희, 아니 애염명왕 의 마음속에서 직접 울려오는 소리가 방 안 가득히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싸우지 말지어다.

귀자모신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것 같았 다. 석가세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밀교에서 게다가 자신이 숭배하는 명왕의 신력과 의지가 눈앞에 모습을 보이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더군다나 승희, 아니 애 염명왕의 몸은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야릇한 기운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승희의 몸 전체가 붉은 불꽃으로 이글이 글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귀자모신은 아까 승희가 자 기의 공격에 무력하게 쓰러져서인지 지금 보이고 있는 승희의 모습이 허세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듯,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을 흘리고는 있었지만 벽조선을 든 손을 내리려 하지도 않았고 싸울 태세를 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귀자모신이 몸을 떨면서 땀을 흘리는 동안 현암은 뭔가 퍼뜩 떠올라 냅다 크게 소리를 쳤다.

“안돼! 그래서는 안 돼!”

현암은 비명을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러나 무리를 해서인지 현암의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고 상처를 입은 어깨에서도 다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현암은 몸 을 부르르 떨고는 천천히 몸을 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암은 극 도의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킨 것 같았다. 현암은 몸을 펴자 자신 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연희는 돌아보지도 않고 훅 하고 숨을 깊 이 들이마신 다음, 재차 크게 소리쳤다.

“신력을 끌어내지 마시오!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소!”

현암이 내지르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사방을 울렸다. 그 메아리가 사라질 무렵 땅에 떨어졌던 월향검이 꺄아악 하는 귀곡성 을 내면서 현암의 왼손으로 날아 들어왔다. 저쪽에서는 준후가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연희는 긴장한 나머지 숨소리 까지 죽이면서 잡고 있던 현암의 옷자락을 놓고는 몸을 움츠렸 다. 현암의 행동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애염명왕의 신력이 정말로 밖으로 발휘될 수만 있다면 귀자 모신 따위는 문제가 아닐 텐데, 현암 씨는 도대체 왜 저럴까?’ 

그러나 지금 비장한 각오를 한 현암에게 그 이유를 물어볼 수 도 없었다.

승희, 아니 애염명왕의 화신은 이제 완연히 새빨간 불꽃 같은 영기로 뒤덮여 있었다. 겉모습은 승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결 코 승희는 아니었다. 훨씬 더 엄숙하고 위엄이 감도는 붉은 얼굴 이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간신히 지 탱하고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번쩍거리며 광채를 뿜고 있었다. 귀자모신은 몸을 떨고 있다가 승희가 고개를 돌리자 기회는 이 때라는 듯, 벽조선에 공력을 모아서 현암 쪽으로 떨쳐 내었다. 그러자 방금 전 월향검까지도 밀어내 버린 엄청난 바람의 덩어 리가 벽조선에서 뿜어져 나와 현암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닥쳐왔 다.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현암은 똑똑히 그 모습을 쳐다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간 붉은 광채가 사방을 훤히 비추었다. 귀자모신이 뿜어낸 엄청난 바람은 글자 그대로 그 광채의 위세에 눌려 흔적도 남기 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기가 막히게 사라져 버려서 현암 마저도 놀라 흠칫했다. 하지만 귀자모신이 받은 충격은 현암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 쏘아 낸 그 가공 할 위력의 바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자 너무도 놀란 나 머지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서다가 털썩하고 땅에 주저앉는 것 이었다. 고개를 현암에게로 돌렸던 승희, 아니 애염명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면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우아한 동 작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아 참선의 자세로 가부좌를 틀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그 모습을 홀린 듯 지 켜보았다. 일순간의 정적이 모두를 휩싸고 있었다. 어느새 승희 의 몸에 일던 불길은 자는 듯 가라앉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현암의 마음속으로 무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스스로의 생각대로 하여라. 그날이 올 때까지는……………. 이제 곧 그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라뇨?

너희가 빌려 쓰는 힘의 주인들이 오는 날이 멀지 않았도다. 최선을 다하라.

도대체 무슨?

현암은 흠칫하며 반문하였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것처럼 현암은 좌우를 두리 번거리며 살펴보았다. 현암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지조차 잠시 잊어버린 듯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고통마저도 없었다. 잠시 후 주변의 상황 을 다시 기억해 내었지만 현암의 귓전에는 그 목소리가 채 가시 지 않고 길게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빌려 쓰는 힘의 주인들이 오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현암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우는 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자모신이었다. 그러 나 쓰러진 것은 아니었고 벽조선을 내던진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현암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연희 쪽을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희가 현암 이 자기를 쳐다보자 더듬거리면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귀자모신이 명왕의 화신을 뵙고도 대적하려 했던 자신이 부 끄럽다며 저렇게 울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연희는 머뭇거리다가 얼굴에 웃음을 띤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귀자모신은 물론 명왕교도이긴 하지요. 그러나 명왕교도 따지고 보면 밀교의 한 분파예요. 자신이 숭배하는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으니 저럴 수도 있겠지요.”

현암은 아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지금 귀자모신이 겪은 일은 기독교도가 예언자나 성자를 보고 기적을 체험한 것과 흡사한 경우였다. 연희가 계속 말했다.

“잘됐어요. 지금 귀자모신은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른다고 하는군요.”

현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비틀거리는 준후에게로 다가 갔다. 준후도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현암이 가까이 가 서 손을 내밀자 준후는 현암이 내민 손을 붙잡고는 끙 하는 소리 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현암 형. 아까 소리친 것은………….”

현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준후는 귀자모신 쪽 을 바라보고는 현암의 몸에 기대어 승희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연희는 유심히 승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승희의 몸 은 예전에 애염명왕에게 몸을 빌려 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빳 빳하게 굳어 있었다. 귀자모신은 그런 승희 앞에 꿇어 앉아 절을 올리고 울면서 바닥에 계속 머리를 찧고 있었다. 현암은 비틀거 리면서 승희의 옆에 앉았다. 귀자모신이 마음을 돌린 이상 이제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리 애염명왕의 화신이더라도 승희는 어디가지나 승희 야 해. 인간들이 치고받는 일이 위험하다지만 신력이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위험한 것인지도 몰라. 한빈 거사님이 말씀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준후도 현암의 말이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야, 너도 애염명왕의 목소리를 들었니? 마지막에 하던 말을………….”

“예.”

“지금까지 인간이 빌려 쓰고 있던 힘의 원주인들이 돌아온다 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겠니?”

준후에게 질문을 던진 현암은 어두워진 얼굴로 눈을 감고 스 스로 깊은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고통 때문인지도 모르고 긴장 이 풀려서인지도 몰랐다. 현암이 눈을 감자 준후와 연희는 편안 히 눕혀 주었다. 그러고 나서 준후는 자신이 얻은 「해동감을 펼쳐 보았다. 귀자모신의 공격에 뺏기지 않으려고 책을 움켜쥐 는 바람에 구겨졌던 부분들을 펴면서 기쁜 얼굴로 찬찬히 훑어 보았다. 연희가 준후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그 책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난리를 쳤니?”

준후는 연희의 물음에 아무 말 없이 웃음을 짓고는 다시 책속 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희가 해동감』이라는 책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박 신부와 준후만 알 뿐, 현암도 거의 모 르는 내용이었으니까. 준후는 주위를 휙 돌아보더니 귀자모신이 떨어뜨린 벽조선을 집어 들고는 소매 속에 넣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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