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5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8 :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누구인가
“오래전의 일입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릴까 했는데…………….”
스즈키는 머뭇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주름 잡힌 얼굴엔 수 심이 가득 차 있었고, 그 말을 옮겨 주는 사이토도 긴장된 표정 이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스즈키가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제까지 그토록 심한 공포에 시달려 왔으 면서도 정작 자신과 침착하게 마주하는 것을 보니 과연 관록 있 는 정치가답다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사이토는 마치 스즈키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옮겨 주고 있 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더 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만약 제가 죄 가 있다면 신부님은 어쩌시렵니까? 절 그냥 내버려 두실 건가요. “아니면 …………….”
스즈키의 목소리에는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 신부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법관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속죄하고 뉘우치기만 한다 면 야훼께서는 다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카인도 동생을 죽였지 만 참회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지 않았습니까?”
스즈키는 다시 한번 깊이 뭔가를 생각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스즈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음.
박신부가 먼저 질문을 했다.
“당신들 육인방이 명왕교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명왕교와 칠인방의 관계는 단순한 후원 관계였는데 명왕교에서 이자나미 신의 성역화 사업 등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 관계를 끊었다고 하셨지요?”
스즈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가 되물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엇입니까?”
“명왕교는 단순한 후원 단체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지요?”
“교주, 명왕교의 교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주라는 말을 듣고 박 신부가 눈을 빛냈다.
“혹시 교주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속명은 모르겠으나 법명은 묘렌이라 했습니다.”
“그 교주는 여자였지요?”
“예,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신비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어떤 힘 말입니까? 주술력?”
“아닙니다. 그때는 그런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스즈키는 한숨을 내쉬면서 머뭇거렸다.
“우리 칠인방의 사람들은 모두 묘렌에게 빠져 있었습니다.” 박신부는 눈을 크게 떴다. 스즈키의 말은 박 신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위협이나 협박한 게 아니라면 분명 주술력 을 보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칠인방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그 러니까 묘렌 교주에게 인간적으로 매혹되었다는 것입니까?”
“글쎄요, 무어라 해야 할까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겠 네요. 결코 범상한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그녀를 맨처음 보았을 때 어떤 묘한 감정을 느꼈으니까요.”
“묘한 감정이라뇨? 그게 어떤 것입니까?”
스즈키는 다소 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척이나 사랑하던 여 자가 있었지요. 가스미라고 불리던…………. 그러나 그녀는 일찍 세 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명왕교를 소개받고 교주인 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묘렌 교주의 모습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스미의 얼굴을 떠올렸죠. 묘렌은 가스 미와 놀랄 만큼 닮았었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놀랄 만큼 외모나 행동까지 닮았었던가요?”
“글쎄요.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뭐랄까 사 람에게는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 습니까? 음, 처음에는 그냥 느낌이 비슷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는 데차차 지나면서 보니 일거수일투족이 가스미를 빼다 박은 것 같더군요.”
“좋습니다. 그런데 스즈키 씨는 그랬다고 치더라도 칠인방의 다른 사람들이 교주에게 매혹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스즈키가 눈을 크게 뜨더니 박 신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모두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예?”
박신부가 의아한 듯이 스즈키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칠인방의 다른 사람들도 가스미란 분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명왕교 교주를 멀리하게 된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서로 몰래 교주와 만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기에 남모르는 질투심 같은 게 있었죠. 그래서 둘 이상 있을 때에는 결코 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사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만의 불문율이었죠. 그런데 그러다가…….”
“그러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요, 그날이었죠.”
“그날이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다카다가 주먹으로 데쓰오를 쳤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치다니요? 싸웠단 말입니까?”
“예. 우리는 그때까지 무척이나 의가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적을 놓고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곳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본인 들은 서로 속마음이 어떻든지 대놓고 거친 말투를 쓰지 않는다 고 한다. 한 번이라도 거친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과의 관 계를 영원히 끝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하물며 정치가 인 그들의 세계에서,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먹으로 치고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스즈키는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이토도 무척이나 긴장된 듯 스즈키의 말이 자주 끊어지자 덩달아서 말을 더듬 으며 통역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우린 놀랐습니다. 게다가 다카다 가 그런 행동을 한 원인이 다름 아닌 묘렌 때문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더더욱 놀랐습니다. 가장 연장자였던 요시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우리는 그날 밤 당장 회의를 열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회의였습니까?”
“요시다도 묘렌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는 바로 그날에서야 둘의 싸움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묘렌에 대 해 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느낌이라면?”
“제가 가스미의 모습을 묘렌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시다도, 이토도, 데쓰오도, 그리고 다 카다. 히로시, 나카무라까지도 모두 그녀에게서 자신들이 좋아 했던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박 신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이 한 여인에게서 각각 좋아했던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다니! 한 두 명이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곱 명은 서로 취향 도, 경력도, 과거사도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말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으음, 기억이 납니다. 요시다는 어려서 죽은 딸의 모습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카무라는 나이 든 어머님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다카다는 얌전하고 우울에 빠져 있는 듯한 과거의 연인과 닮았다고 했고, 히로시는 수다스 럽고 명랑한 성격에서, 이토는 조숙하고 순진한 면에서, 데쓰오 는 활달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에서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말했 습니다. 같은 행동 하나를 놓고서도 이렇게 의견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실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놀라움은 컸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분노 또한 그에 비례했죠. 우리 모두가 그녀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묘렌은 인간이 아니라 여 우일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박신부는 한숨을 내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 사람이 아니 라 일곱 사람에게 각각 다른 감정으로 느낄 수 있게 하다니. 상 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술이나 최면 같은 것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일곱 사람이 모두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고, 더군다나 최면이나 주술에 걸렸다면 그 런 사실을 그들 스스로 유추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스즈키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떨구었고, 사이토도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박 신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즈키도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몸을 한참이나 떨더니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멀리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슴 아 팠을겁니다. 아무리 상대가 요물 같은 여자였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던 진정한 연인의 모습을 한 여인을 멀리 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누구에게라도 가 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일은요?”
“한 사람이 결의에 불복했습니다. 교주와의 사이가 생각 이상 으로 발전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이 다카다?”
스즈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의 입에서 부지불 식간에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점점 무엇인가 해결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카다는 남몰래 명왕교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좋지 않은 일 도 떳떳하지 못한 일들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엔 우리도 다카다
가 왜 그런 짓들을 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배후 에 명왕교가 있었던 거죠.”
“어떤 일들이었습니까? 혹시 다카다가 사직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독직 사건?”
스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건은 우리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예?”
“실제로 다카다의 행동은 그런 독직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야쿠자들과 관계된 일이었죠.”
“야쿠자?”
“예. 다카다와 묘렌은 야쿠자들을 포섭해 신도로 만들기 시작 했습니다. 무술에 능한 자들, 혹은 교도소에 갇히거나 불우한 지 경에 있는 자들을 다카다는 권력과 돈으로, 묘렌은 정신적으로 세뇌시켜 갔습니다. 그래서 명왕교의 세력이 급속도로 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묘렌은 그런 자들을 수련시키고 이상한 술법 을 써서 권능을 부여했습니다. 그렇게 수련된 자들은 점차 명왕 교의 중심인물이 되어 갔고……………..”
“그러면 명왕교의 명왕들이 바로…………….”
“맞습니다. 처음엔 야쿠자들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다른 종 교인이나 은둔자, 학자까지 가세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이적을 보여 주는 것만큼 사람을 끌기 쉬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가 이적을 보여서 신앙심을 북돋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삼았던 것처럼 사람들도 역시 그런 식으로 명왕교의 노 예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박 신부는 우울해졌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 가가 나타나서 ‘나야말로 예수의 재림이다’라고 하면서 물 위를 걷는다거나 죽은 자를 살린다면 사람들이 과연 그 사람이 흑마 법사인지, 사기꾼인지 아니면 메시아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사기라고 치부하거나 아니면 열광적인 신도가 되어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대중의 논리는 흑백론적인 면이 짙다. 그런 권능 을 보일 수 있었다면 명왕교의 세력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도 무 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참 만에 스즈키가 중얼거리며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습니다. 다카다를…….”
“몰아냈다는 말입니까?”
“예, 그대로 두면 다카다는 더더욱 일을 저지를 것이고, 그렇 게 되면 칠인방 전체가 매장당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 떻게든 다카다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매번 시도는 수포로 돌 아갔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묘렌에 대한 연정을 증오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일단 다카다를 파 멸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독직 사건을 만들어서 우리 스스로가 그를 성토함으로써 명왕교의 노예가 되어 버린 다카다를 몰아내 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닥쳐올 주위의 비난까지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요?”
박 신부는 눈빛을 빛내면서 스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 즈키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다. 가련할 정도로 몸 을 떨면서 손으로 주머니며 주변을 더듬었다.
“스즈키 씨, 코카인을 자주 사용하십니까? 야마모토 씨가 권 유했다고 하던데요?”
박 신부는 스즈키가 너무도 가련해 보여서 간신히 기운을 끌 어 올려 스즈키에게 약간의 기도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자 스즈키는 용기를 얻은 듯 몸을 추스르더니 입을 떼었다.
“다카다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묘렌을………….”
스즈키의 말이 끊어졌다. 박 신부는 스즈키를 다그쳐 물었다.
“묘렌을 어떻게 했나요?”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즈키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내 딸아이 의 몸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박 신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슬픈 눈초리로 스즈키를 바라보 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빙의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이 산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서 기생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산 사람의 육체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오키에 양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 다. 그래서 나이 어린 오키에 양이 명왕교의 교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오키에 양이 교주 노릇을 한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었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것 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스즈키는 몇 차례 눈물을 닦고는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다섯 명을 죽게 만든 것이 오키에의 짓이라는 말입니까?”
“오키에 양의 짓은 아닙니다. 명왕교 교주였던 묘렌의 소행임 이 분명합니다. 저는 오키에 양이 나이 든 중년 여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고, 마음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바꾸는 것도 직접 보았습니다. 강한 영기도 느낄 수 있었고요.”
“아아!”
스즈키는 애써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는 듯, 이를 악문 채 흐느꼈다. 박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입니다. 우리는 아직 명왕교에 잡혀 있는 상탭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또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렇게 영과 관련된 일에는 여기 계신 두 분보다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모르고 있는 사실 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박 신부는 스즈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힘 있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키에 양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사이토가 박 신부의 말을 전해 주자 스즈키는 퀭한 눈으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스즈키의 말을 통역해 들려주는 사이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키에…………… 오키에를 없애 버릴 겁니까?””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됩니다.”
박신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 경호원들과의 싸움에서만도 두 사람이 죽고 여럿이 중상을 입었다. 비록 오발에 의한 것이었 지만 박 신부는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희 생자를 내서는 안 되었다. 제아무리 위험에 빠져 있거나 상대가 악한 자라고 해도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박 신부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스즈키는 이토록 심한 부상을 입고서도 동요하는 빛 없이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말하는 박 신부의 모습을 보고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정말 오키에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제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겠습니다.”
스즈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미뤄 두 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묘렌, 그리고 다카다도 우리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만….”
“음, 역시!”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 이다. 그렇다면 묘렌이나 다카다가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도 이 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묘렌은 복수를 하려는 것이군요.”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복수를 하려 했다면………….”
스즈키 더듬거리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옮겨 주느라 사이토는 무척이나 고생하는 것 같았다. 통역을 하는 사이토도 스즈키처럼 더듬거렸다.
“저부터 죽였을 겁니다. 요시다 히로시, 이토…………….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제가 바로 진범이기 때문입니다.”
박 신부는 눈을 크게 뜬 채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스즈키는 박 신부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분명 묘렌이 바라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녀 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슨 말씀이십니까?”
“묘렌이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그 정도의 일이 아닐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크고 무서운…………. 우리가 그녀를 해친 것도 그것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아!”
박 신부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 정도의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박 신부도 막연하게나마 하고 있었다. 단순히 복 수만을 위한 것이라면 힘들게 명왕교를 재건하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남에게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묘렌이 뭔가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는 스즈키의 말은 사실일 것 같았다. “아까 제게 말하려고 했던 비밀이라는 것이 그것이었습니까?”
스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물론 제가 그들을 해친 진범이라는 것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판단하고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스즈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 말하겠습니다. 차근차근 들어 주십시오.”
“좋습니다. 계속하세요.”
“모두가 묘렌에게 홀려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묘렌 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습니 다. 그 결과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성질의 것은 물론 아닙 니다.”
박신부는 긴장했다.
“어떤 것입니까?”
“묘렌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했습니다. 여성적인 것. 여자의 힘으로, 현재의 세상은 남성이 지배하고 있 고, 이제 그 세상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이상 지속되어서 는 안 된다고 묘렌은 주장했습니다.”
“남성적인 세상? 그리고 한계에 이르렀다고요?”
“묘렌은 수많은 신비주의 서적들과 예언서들을 수집해서 오랫 동안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 “습니다.”
“묘렌이 만든 명왕교는 밀교의 한 분파가 아니었던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일본의 전래 종교인 신도의 사상과도 많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스즈키의 말 속에서 몇 번인가 이자나미라는 말이 되풀이되었 다. 박 신부는 이자나미라는 말을 듣자 감이 잡혔다. 명왕교에서 칠인방에게 요구했던 것이 이자나미 신의 성역화 작업이었다. 이자나미는 여신으로서, 죽고 난 뒤 자신의 남매이자 남편이었 던 이자나기 신에게 배신당해 깊은 원한을 갖게 된 신이라고 했 다.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나미 신의 성역화 문제, 그리고 명왕교의 신도들이 쓴다 는 노의 흰 가면 ・・・・・・ . 그런 것 같군요.”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묘렌은 엄청난 힘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혼란 하게 하고 그 틈을 타서 …………….”
스즈키가 더 말을 하려는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 신 부는 얼른 쉿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고, 사 이토와 스즈키도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박신부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렸고, 손 도 뒤로 돌려 묶인 것처럼 보이게 꾸몄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 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박 신부는 눈을 뜰 수 가 없었다. 지금 당장 손이 자유롭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슴의 부상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해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여럿인 듯했다. 그들은 박 신부를 들 고 나가려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어떻게 할까 궁리해 보았다. 지금 스즈키와 사이토에게서 떨어진다면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면 묘렌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 이었는지도 들을 수 없게 된다. 지금 저항을 한다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박 신부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안타까운 마음 에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들것에 눕혀진 박 신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감촉을 느꼈다. 둥글고 단단하고 조그마한 것. 그러나 생각할 틈도 없이 박 신부 는 아까처럼 번쩍 들렸다.
현암이 지쳐 한참 동안 누워 있는 사이에도 귀자모신은 석상 처럼 몸이 굳어 버린 채 앉아 있는 승희의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쉴 사이 없이 중얼거리면서 독경을 하기도 하고 절을 하기도 하 다가는 종내 승희처럼 가부좌를 틀고 깊은 명상에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명왕교의 여신도들은 어느새 뺑소니를 쳐 버렸 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현재는 귀자모신이 이곳의 우두머 리격인 모양인데 우두머리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달아나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간 연희는 꽁꽁 묶인 채 갑판 바닥에 뒹굴고 있던 도 운을 발견하고 풀어 주었다. 갑판에는 핏자국만이 흥건할 뿐, 대위덕명왕을 비롯한 무술가들도 모두 도망쳐 버렸는지 다른 사람 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운은 기절한 채로 계속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헛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연희가 도운을 끌고 다시 선 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까지도 귀자모신과 승희는 마주 보고 앉 아 있었고 현암은 누워 있었으며 준후는 그 옆에서 해동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니? 그것이 우리나라의 상고 문자로 되어 있다는 예언서니?”
“네. 파자(字)로 되어 있어서 당장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 네요. 그런데 부분적으로 해독한 것 중에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어요.”
“어떤 건데?”
“나중에 말해 줄게요. 그것보다 아라에 대해 어서 물어봐 주세 요. 이곳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머리카락마저 잘릴 지경이 되었다면 그건……………”
연희도 아라의 일을 생각해 내고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귀자모신을 보고는 머뭇거렸다. 승희가 애염 명왕의 모습이 된 다음에 몸이 굳는 것은 자주 보아 왔던 일이지 만 귀자모신도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한 참이나 주저하던 끝에 몸을 조금 건드리자 귀자모신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떴다.
“왜 건드리는 건가? 한참 삼매경에 빠져 있는 터에 …………. 명왕화신의 진신을 직접 뵈옵게 된 이 기회를 어찌하여 방해하는 것인가?”
연희는 귀자모신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기가 막혔으나 일 단은 협조를 얻어야만 했다.
“이제 우리를 믿고 도와주시는거죠?”
“자네들이 여기서 멍하니 있는 동안 나는 애염명왕과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네. 자네들은 의인이라는 계시가 있었어. 아까 무 례하게 손찌검을 한 것은 미안하네. 나로서는 자네들을 무단 침 입자로 생각했던 것이니 이해하게나.”
“하지만 우리는 명왕교로부터 총격을 받았고, 당신들은 같은 편마저도 사살해 버렸어요. 게다가 아라라는 어린아이까지 납치 했어요.”
“그럴 리가 없네. 명왕교가 제아무리 세력이 미약한 종파라고 는 하지만 범죄 단체나 사교는 아닐세. 오히려 자네들이야말로 왜 우리 교주를 해쳤는가?”
“교주를 해치다니요? 아까 당신들이 던진 머리카락이 교주의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죠? 어째서?”
“그렇다네. 교주의 머리카락처럼 보였으니까.”
“어떻게 알았지요? 당신도 초능력이나 투시력 같은 것이 있나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머리카락은 어린 여자아이의 것이 분명하다네. 그리고 그것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 정도는 나도 희미 하게나마 읽을 줄 안다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명왕교의 교주가 어린아이란 말입니까?”
귀자모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 후와 현암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지 만. 귀자모신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정말로 그대들이 우리 교주님을 해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리는 명왕교의 교주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다만 키가 작 은 여자라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이상한 일이군. 머리카락에선 분명 교주님의 체취가 느껴졌는데………….”
귀자모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런 귀자모신을 반쯤은 다그치고 반쯤은 어르면서 계속 말했다.
“그건 명왕교 측에서 던진 겁니다. 우리가 처음 배 위에 올라 왔을 땐 이상한 진법이 쳐져 있었어요. 또 우리를 흥분시켜서 안 개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려고 누군가가 그 머리카락을 집어 던 졌구요.”
“그럴 리가! 진법을 친 것은 내가 맞네. 그러나 어떻게 진 밖으 로 물건을 집어 던져서 도발시키는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우리는 이 배에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오는 도중에도 총격을 받고 보트가 폭파되기까지 했어요.’
연희의 말에 귀자모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였다.
“우리는 총 같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 명왕교는 종교 단체이 지 테러 집단은 아니란 말일세.”
“그러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던 여자는 그 총을 맞고 죽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고 배 안에서도 여러 번 총격이 가해졌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종의 의식을 진행중이라 그 의식을 방해하려 고 무단으로 침입해 들어온 자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쫓아내긴 하네만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네. 명왕교도 불가의 한 분파로 자비를 중요시하는데 그런 일은 결 코 있을 수 없지.”
연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연희는 막 정신을 차린 현암과 눈 만 멀거니 뜨고 쳐다보고 있던 준후에게 귀자모신의 이야기를 일러 주고 한참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현암과 준후도 고 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조금 있다가 현암이 말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배 밖에서 총격을 받은 것도 사실 이고 애염명왕의 현신이라던 여자가 죽은 것도 사실인데. 그리 고 배 안에서도 총질을 해대는 누군가에게 월향검을 날린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가만있자…….”
“뭐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위덕명왕은 우리를 죽이려 한 것 같지 가 않아요. 그가 무술가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우리가 모두 배 위로 올라오고 난 다음이었어요. 만약 그가 먼저 왔다면 준후 와 내가 진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도운이나 승희, 연희 씨 모두를 잡고도 남았을 겁니다. 대위덕명왕도 대위덕명왕이었지 만 그와 같이 왔던 무술가들은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어요.”
그러면서 현암은 부동심결을 쓰고 운기행공을 한 뒤에 혼자 남았을 때 벌어진 일들을 연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현암 씨 상처가 그토록…………….”
“그러나 지금 귀자모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그들은 내가 대위덕명왕의 다리를 부러뜨리기 전 까지는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진작부터 흉기를 사용해서 대위덕명왕과 함께 살초()를 썼다면 내가 이길 수 없었을 거 예요.”
“그건 그래요. 귀자모신도 처음에 우리와 싸우면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고 그랬었지요.”
“연희 씨, 귀자모신에게 왜 준후를 잡아 가두었느냐고 물어봐줘요.”
연희가 묻자 귀자모신은 짧게 답했다.
“우리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꼬마가 잡혀 왔지. 진을 뚫고 결계를 부수려고 했다고 해서 잡아 온 것이네. 우리는 그냥 나중에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본 뒤에 풀어 주려고 했었지.”
“왜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려 했지요?”
“당연하지! 조선, 아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꽁꽁 묶고 그토록 험하게 싸웠지요?”
“저 꼬마가 묶여 있으면서도 비전의 술수를 사용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야. 소환술을 써서 괴물 같은 것을 불러내기 까지 했으니. 너 같으면 멍청히 당하고만 있었겠느냐? 나는 그래 도공연히 다치게 할까 봐 호의를 가지고 많이 봐준 것이었다네.” 설명을 듣고 보니 그 또한 그럴 만했다. 그러나 현암은 그 말 을 전해 듣고 토를 달았다.
“네 가지만 물어봐 줘요, 연희 씨. 첫째, 아라와 후지코가 정말 잡혀 있느냐는 것. 둘째, 지금 치르려고 했던 의식이 어떤 것이 냐는 것. 셋째, 명왕교의 목적은 무엇이고 왜 사람을 꺼리는지, 명왕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넷째, 명왕교 교주는 도대체 누구인지…………….”
“차근차근히 물어보도록 하지요.”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는 일단 귀자모신에게 첫 번째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귀자모신은 짧게 답했다.
“사람들을 납치한 일은 없다네. 전혀 몰라. 그러나 이 배의 아 래쪽 선실은 신도들의 참선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장기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외부의 신도들도 몇몇 있는 것으로 아니까 직접 찾 아보도록 하세. 내가 안내해 주겠네.”
연희가 그 말을 통역해 주자 현암과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마음이 급했지만 혼자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귀자모신이 잘린 머리카락을 교주의 것이라고 말한 이 후에는 준후도 설마 했지만 일단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명왕교 교주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보다는 아라 가 중요했다. 자기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었지만……
연희는 귀자모신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귀자모 신은 고개를 저었다.
“본교의 의식을 함부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말해 주겠네. 당신들은 우리를 무슨 사교로 여기는 듯한데 우리는 결코 폭력적이거나 사악한 술수를 쓰는 종교가 아닐세. 행하던 의식은 우리가 믿는 신에게 경배드리는 것에 불 과한 것이라네.”
“그러면 명왕교의 목적은?”
귀자모신은 낄낄대며 웃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득도하여 널리 중생을 구원하는 것 말이네.”
“그런 것 말고 구체적으로 정해 놓은 목표 같은 것 말이에요.”
“음, 그건 차차 이야기해 보아야 할 것 같군. 꽤 시간이 걸릴테니까. 그건 그렇고 나도 물어볼 것이 있다.”
“뭐지요?”
“자네들이 배 위에서 총격을 받은 것이 분명한가?”
“틀림없습니다. 현암 씨의 말로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고 합니다.”
“검은 옷? 어떤 복장이었나?”
연희는 현암에게 몇 마디를 물어보고 말했다.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고 하는군요.”
그 말을 들은 귀자모신의 얼굴빛이 해쓱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연희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귀자모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연희는 네 번째의 질문을 했다.
“그러면 또 묻겠습니다. 명왕교의 교주는 누구입니까?”
“묘렌.”
“묘렌이 명왕교 교주의 이름입니까?”
“그렇다네. 세상에서는 부동명왕의 현신이 교주인 것으로 착 각들을 하고 있지만 그는 대리인일 뿐이고 실제의 교주님은 근 래에는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네. 이미 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연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 말을 전해 주자 현암이 한마디했다.
“그래서 경찰 측의 파일에 교주가 부동명왕의 현신이라고 나와 있었군. 그런데 실제의 교주가 산 사람이 아니라니요?”
연희도 그것이 궁금하던 참이라 귀자모신에게 물었다.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니요? 아까는 명왕교 교주가 작은 여 자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명왕교의 교주님은 돌아가셨다네. 그러나 교주님의 신비한 힘으로 환생한 것이라네.”
“그랬군요. 그러면 현재 교주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오키에, 오키에라고 하지.”
연희가 그 말을 현암에게 일러 주자 현암의 얼굴이 흠칫하면 서 흔들리더니 긴장으로 파리하게 질려 갔다. 현암은 칠인방 사 건의 희생자들 파일에서 오키에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현 암은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언가 말을 하 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연희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오키에, 아니 묘렌 교주의 현재 나이는요?”
“오키에는 아홉 살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묘렌 님이 살아계셨 다면 아마 쉰 살쯤 되셨을 것이라네. 그리고 현재의 교주님에 대 해서는 우리도 말 못할 것들이 많으니 너무 깊이 묻지는 말기 바라네.”
“렌은 언제 죽었나요?”
“1985년이었지.”
“오키에의 나이가 아홉 살이니 그렇다면 오키에는 묘렌이 죽은 다음 해에 환생한 셈이군요. 정말 묘렌이 환생한 것이 틀림없 다고 한다면 말이죠.”
귀자모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나 실제로 오키에가 묘렌 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그러니까 1992년이었다네.”
“그때까지는 왜 몰랐지요?”
“생각해 보게나. 아무리 환생했다고 해도 말을 하고 어느 정 도의 지각은 갖추어야 의사소통을 할 것이 아니겠나? 여섯 살이 된 해에 교주님은 어린 몸을 이끌고 우리를 찾아와서 자신을 밝 히셨다네. 교주님이 돌아온 사실을 알고 나는 너무도 기뻤지. 교 주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명왕교는 몹시 어려웠어. 교주님이 없 었던 칠 년 동안 나와 명왕들이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지 모를 거 야. 교주님이 환생하지 않았으면 이 정도의 재건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네.”
“칠 년이라……. 그동안 새 교주를 뽑지 않았나요?”
“교주님은 유서를 남기셨네. 자신은 죽더라도 반드시 환생해 서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뒤를 캐려고 하지 말라고도………”
“뒤를 캐다니요?”
“교주님의 죽음은 여러 모로 이상한 면이 많았지. 내 생각엔 누군가가 교주님을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는데도 교주님은 우리가 보호하겠다는 것을 거부하고 그냥 은둔해 버리셨네. 그 후 얼마 안 있어 유서를 담은 편지가 배달되어 왔지.”
“죽었는데 어떻게 편지를 보낼 수 있나요?”
귀자모신은 웃었다.
“교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러는가? 교주님은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와 약속을 하셨다네. 즉 어느 대리 인에게 편지를 맡겨 두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다가 정해진 약속 시간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유서를 보내도록 조치해 두셨 지. 빈틈없는 분이셨어.”
“그러면 정말로 교주, 그러니까 묘렌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군요.”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아는 수가 있네. 우리의 주술력이 그 정도로 무능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점을 쳐 보았지. 틀림없이 묘렌 님의 혼백은 몸에서 빠져나갔고, 몸은 땅속 깊이 잠들어 계 시다네.”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술법자 가 교주의 생사 여부를 짚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런 점괘가 나왔다면 묘렌이 죽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귀자모신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굳어 있는 승희를 향하 여 정중히 합장하며 절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명왕의 진신을 보게 되어 이나마 알려 준 걸세. 질문은 그만 하고 자네들이 찾으러 왔다던 여자아이와 아가씨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러 가세. 내가 안내하겠네. 이 배는 아주 넓고 사람들도 꽤 많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더 있었지만 후지코와 아라를 찾는 것이 더 급했다. 연희와 준후는 몸을 일으켰다. 현암은 상처가 중했고 승희는 몸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둘은 이곳에 그냥 남아 있기로 했다.
귀자모신은 도망쳤던 명왕교의 여신도들을 불러 현암의 상처 를 보살펴 주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이 방에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다른 명왕들까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엄 명을 내리고는 몸을 움직였다. 연희와 준후는 조금 걱정이 되기 는 했지만 귀자모신이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귀자모신도 명왕교 내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모양이 었다. 총질을 하고 습격한 자를 자신이 직접 찾아내기 위해 같이 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연희와 준후는 현암과 승희를 방에 남겨 둔 채 귀자모신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것에 옮겨진 박 신부는 몸이 흔들리면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낯익은 문소리. 아까 자신이 있 었던 지하실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공연히 올려 보냈다 내려 보냈다하고’
지하실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야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 키에의 목소리였다. 쩔쩔매면서 변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야마 모토였다.
‘또 무엇이지? 왜 오키에가 야마모토를 야단치는 것일까?’
박 신부는 아까처럼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 이 엄습해 왔지만 억지로 고통을 참고 계속 정신을 잃고 있는 척 했다. 손을 묶었던 끈이 끊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 히 박 신부를 묶고 있는 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박 신부의 몸 을 밧줄로 둘둘 말아 묶어 버렸다. 간신히 풀어 낸 포박을 다시 쓰게 된 것이 영 불쾌했지만 오키에가 바로 앞에 있는 터라 어 쩔 수가 없었다. 대신 박 신부는 야마모토가 오키에에게 야단맞 는 틈을 이용해 미약한 능력이지만 몰래 오키에를 영사해 보기 로 작정했다. 제령이나 엑소시즘의 의식으로 영을 몰아내는 것 은 부상을 입은 박 신부로서는 힘도 부족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 으니 영사라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짐작대로 오키에의 몸 속에는 다른 영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 렌의 영에 빙의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또 다른 그림자도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건 뭘까?’
그러나 오키에는 박 신부가 다시 영사를 할 틈을 주지 않고, 야마모토에게 뭐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박 신 부를 들고 온 자들도 같이 따라 나가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혹 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박 신부의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면서 말을 걸었다.
“이제 다 나갔습니다. 눈을 뜨셔도 됩니다.”
박 신부는 의아하게 여기면서 서서히 눈을 떴다. 해쓱하게 질린 야마모토의 얼굴이 보였다.
“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교주가 당신을 마취시키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치료하는 데 필요하니 당신을 위층으로 올려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 니다. 그런데 왜………….”
박 신부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야마모토는 자신을 일부러 마취를 시키지 않고 치료에 편하다는 거짓말로 위층에 올려 보내 도망치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키에가 자 신을 위층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오게 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야마모토는 박 신부가 그 틈을 타서 도망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박 신부는 어차피 여기 스즈키나 사이토를 남겨 두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도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당신, 그런 몸을 해 가지고 혼 자서 뭘 하겠다고 그러는 겁니까? 묘렌 교주의 능력이 얼마나 강 한데 당신 혼자 어쩌겠다고.”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온 것이오. 지금 그 사람들이 위험에 빠져 있어요.”
야마모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뒤로 돌아섰다. 박 신부는 나직하게 야마모토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풀어 줄 생각을 한 겁니까?”
“교주는 변했소. 교주는 전부터 인간 이상의 능력을 보여 왔고 나는 그런 교주를 신처럼 믿었소.”
“교주에게 실망했나요?”
야마모토는 등을 돌려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인명을 구하는 의사요. 아무리 그 목적이 높은 데 있다. 고 해도 복수라는 명목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소. 직업 때문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도 그렇소. 그리고 지금의 교주는……………”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잔학한 일들 이 ‘대의명분’이나 ‘모두를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서 행해져 왔던 것일까? 모두를 위한다는 허울을 쓰고 있더라도 그것이 생명을 경시하는 사상이라면 진정으로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야마모토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교주를 믿고 따르기로 맹세한 몸이오. 교주를 버 릴 수는 없소. 그리고 스즈키는………….”
야마모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야마모토는 마음속으로 깊은 번민을 하는 것처럼 보 였다.
“스즈키는 교주를 죽였소. 그리고 다카다도. 그는 용서받을 수 없소. 절대로!”
“알고 있소! 그렇다고 피로 피를 갚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바보짓이라도 할 수 없소! 다카다는 내 친구였소. 그 사실은 스즈키도 모를 것이오.”
“당신과 다카다 씨가 친구였다고요?”
“스즈키의 전속 의사로 고용된 이후에 나는 다카다를 알게 되 었소. 그리고 묘렌 교주도. 그러나 그때는 스즈키와 다카다의 사 이가 좋지 않은 때였소. 그래서 나는 다카다와 친분이 생긴 사실 을 감출 수밖에 없었소. ……다카다는 좋은 사람이었소.”
‘그랬구나.’
박신부는 야마모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다카다는 십 년 전에 죽었다. 야마모토가 스즈키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이 십오 년 전이라 했으니 오 년 정도 교 제를 한 셈이다. 야마모토의 모든 행동이 다카다의 복수만을 위 한 것이었다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명왕교를 위해 일을 하면 서도 복수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의사인 야마모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스즈키를 해칠 수도 있었을 텐데…………. 한 가지 생각이 박 신부의 뇌리를 스쳤다. 스즈키에게 코카인을 권한 것 은 야마모토였다. 그리고 스즈키가 그토록 고통 받는 것은 명왕 교에서 보낸 환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야마모토는 장기적으로 스즈키에게 고통을 주면서 파멸시키려고 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묘렌 그녀는………….”
야마모토는 말을 하다 말고 감정이 복받치는지 고개를 숙였 다. 박 신부는 그런 야마모토의 표정을 보고 느껴지는 게 있었 다. 야마모토 역시 묘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구나!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여자. 그것이 바로 묘렌이다!’
정말 무서운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박 신부는 몸을 떨었다. 스 즈키도 다른 칠인방의 사람들도, 그리고 야마모토까지도……………. 어쩌면 명왕교와 관련이 있는 명왕들이나 야쿠자들도 그러한 힘 때문에 설복당하고 명왕교의 충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들의 연인. 아니, 꼭 연애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 다면 묘렌의 궁극적인 힘은 무엇일까? 여자, 모두를 끌어들일 수 있는 힘, 미모나 사랑도 아닌・・・・・・ . 그렇다면?’
이자나미! 박 신부는 등골이 오싹했다. 대신 이자나미! 사랑 과 미를 갖추고 있었으나 공포와 증오로 변형된 대모신, 틀림없 었다. 지금의 묘렌은 틀림없이 이자나미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묘렌, 그녀의 정체였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이자나미는 황천에 갇혀 버렸다고 했 다. 그런데 그 힘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전설이 전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설이 구체화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그 전설이 은유나 비유로 위장된 글자 그대로의 진실일 경우였고, 또 한 가지는 전설을 믿는 자들에 의해서 실제의 일들이 비슷하게 흘러가게끔 인력으로 유도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정감록의 사상이 진실이다 허위다 말이 많 지만 실제로 정감록의 예언대로 신라 이후에는 왕씨의 고려 가. 고려 이후에는 이씨의 조선이 들어서서 오백 년씩을 이은 것 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우연이라는 조건을 제외하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첫째, 정감록의 말이 글자 그대로 맞는 예언일 경우 와 두 번째 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왕씨나 이씨가 왕조 건국의 꿈을 갖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심을 돌려서 결국은 개국 에 성공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일지라도 예언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의 예언은 결정론 적인 운명이 아니라 개척적인, 아니 미래지향적인 예언이라고나할까?
지금까지의 신력은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빌려서 힘을 꺼내어 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묘렌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아 닌 것 같았다. 물론 묘렌이 이자나미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꾸만 박 신부는 그것만이 아닐지도 모른 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인간이 신의 양상을 직접 나타낸다는 것 은 인간 세상에 대해 좋건 나쁘건 인간 이외의 영이나 신적인 존 재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그 힘을 직접적으로 미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박 신부는 승희가 떠올랐다. 승희가 악인이 될 수는 없을 테지 만 승희의 몸속에도 신이 봉인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일들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이미 예고되어 있고 그렇게 되리라고 예정된 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빈 거사가 일행에게 했던 말이 떠올 랐다. 세상이 흔들리고 천지의 조화가 흔들린다고, 그리고 잊혔 던 악의 힘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고. 지금 명왕교와 묘렌, 이자 나미의 경우도 그것에 해당되는 것일까?
‘문제가 심각하다!’
박신부는 암담해졌다.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세상은 혼란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쟁이나 파괴와 같은 그런 물리적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인간 세상이 흔들리 는 혼돈! 물질과 이성과 인간의 마음에 의해 움직이던 세상에 그 런 미지의 힘들이 끼어들게 됨으로써 오는 혼란은 도대체 어떤 양상을 띨 것인가? 전쟁이나 파괴, 살육 같은 것이 아니고라도 얼마든지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가치 관의 부재, 인간성 상실, 소외, 생명의 경시, 종교와 신앙의 쇠퇴,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과학과 이성과 기술에 대한 믿음의 몰락, 미래에 대한 불안, 생각해 보면 혼세가 시작되었다는 조짐은 어 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앰플 병 안에 든 것은 마취제가 아닙니다.”
야마모토의 말에 박 신부는 정신을 차렸다. 야마모토는 박신 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암담한 생각에 빠져서 자신의 안색이 몹시 파리해진 모양이었다. 야마 모토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감정에 치우쳐 있는 듯 마 치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아 보였다.
“전 느낄 수 있습니다. 최후의 선택은 신부님이 해 주십시오. 앰플 병 안에 든 것을 이용하시든 이용하지 않으시든……”
그 말만 남기고 야마모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 신부는 야마모토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 앰플 병이 라니? 아까 야마모토가 일부러 떨어뜨리고 간 듯한 앰플 병을 자신도 보기는 했다. 내가 집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그보다 박 신부는 야마모토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전까지 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몸에서 희미한 영기가 읽혔다. 방 금 앰플 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풀리자 희미하게나 마 영기가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야마모토의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앗!”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짧게 신음 소리를 냈다. 방금 야마모토의 얼굴에 비친 또 다른 얼굴은 박 신부도 본 적이 있는 사람과 많이 닮아 있었다. 흥분한 박 신부가 몸을 움찔하자 매달 려 있던 줄이 저절로 투툭 하고 끊어졌고 박 신부는 쿵 하고 땅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 신부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또르르 굴 렀다. 아까 보았던 앰플 병이었다. 그것이 언제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떨어진 충격으로 더욱 심 해진 통증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앰플 병 같은 데에는 관심을 돌릴 겨를조차 없었다. 이를 악물고 박 신부는 아 까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야마모토의 얼굴을 되새겨 보았다. 틀 림없었다. 그것은 다카다의 얼굴이었다.
준후와 연희는 귀자모신을 따라 좁은 배 안의 통로를 통해 아 래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에 귀자모신은 품에서 좀 흉측하게 보이지만 정교하게 만든 가면 하나를 꺼내어 얼굴에 쓰고, 옆에 있는 선반에서 두 개의 흰 가면을 집어 두 사람에게 주었다.
“이걸 얼굴에 쓰게나.”
준후가 볼멘 표정으로 징그럽다는 듯 가면을 쳐다보았다. 연희가 물었다.
“이걸 꼭 써야 하나요?”
귀자모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배는 명왕교의 총본산이니만큼 이 안에서는 자네들도 명왕교의 격식을 존중해 주어야 하네. 안 그러면 돌아다닐 수 없어.”
연희가 되물었다.
“가면은 왜 쓰는거죠?”
귀자모신은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세의 모습을 버리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지.”
그러나 연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겠지. 가면을 쓰면 당 사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되지. 비밀 유지 에도 적당하고………..?
그러나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귀자모신은 용모는 추악해 보여도 마음은 그리 못되지 않은 것 같았고 신앙심도 깊어 보였다. 한마디로 단순해 보였다. 지금도 엄숙한 목소리로 경의를 갖추는 게 꾸며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첫 인상과는 달리 상대를 의심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가면을 쓰기는 했으나 두 사람의 복장은 눈에 띄는 평상복 그 대로였다. 아까 보니 여신도들은 모두 가운 비슷한 것을 입고 있 었는데 귀자모신은 두 사람의 복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길을 가면서 준후는 연희에게 귀자모신에 게 『해동감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귀 자모신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우리 명왕교는 예언서에 대해 관심이 많다네. 교주님의 명도 있었고 나 자신도 점복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여러 책자를 수집 했지. 그러다가 옛 총독부 소관의 문서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 「해동감결도 끼어 있기에 구해 온 것이지. 그러나 해독할 능 력이 없어서 그런 사람을 찾고 있던 중에 자네들을 만나게 된 걸 세. 아까 무작정 손찌검을 한 데 대한 사과의 뜻으로 그 책은 저 꼬마 신동에게 줌세.”
귀자모신은 그러면서 자신이 아까 화를 낸 것은 책 때문이 아 니라 다짜고짜로 책을 빼앗은 행동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며 준 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자모신은 준후가 귀여운 모양 이었다. 나이가 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서였을까? 아까 서로 죽 기 살기로 싸울 때와는 또 다른 귀자모신의 면모를 보는 것 같았 다. 준후는 신동이라고까지 칭찬을 받자 마음이 풀렸는지 씨익 하고 겸연쩍게 웃었다.
“대신 그 책을 다 번역하게 되면 내게도 가르쳐 주게나. 내가 아끼던 귀아반마저 부서졌으니 나도 뭔가는 얻어야 덜 허탈할 것 아닌가? 대충 보니까 한문도 있지만 대개는 파자로 씌어 있어 서 조선의 옛 글자를 모르고서는 해독할 수도 없겠더군. 그것만 해준다면 내 귀아반에 대한 것은 기분 좋게 잊어버림세.”
준후는 수틀 생각을 하자 기분이 언짢았다. 분명 그것도 영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나 현암이 월향검을 갖고 있는 것 처럼 귀자모신에게도 그와 비슷한 사연이 있으리라 여기고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연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이전의 우리나라의 고서는 발견된 것이 하나도 없 다고 들었는데, 저건 그냥 고서가 아니라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예언서라면………… 세상에 공 개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그들은 배의 깊숙한 곳 에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명왕교의 신도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 은 계단으로 개조되어 길이 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통로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려야 했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자 귀 자모신은 꽤 길게 뻗어 있는 복도로 일행을 인도했다. 복도의 입 구는 노의 가면을 쓴 명왕교 신도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귀 자신이 다가서자 얼른 인사를 했다. 그러나 길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귀자모신이 불쾌한 듯 그들에게 호통치는 소리를 연희는 귀 기울여 들었다.
“볼일이 있어서 그러니 냉큼 물러서라.”
“예? 아, 예. 하지만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
“볼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았느냐? 여기가 정숙해야 하 는 참선장인지는 나도 안다. 그러나 긴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 물 러서도록 해라.”
“귀자모신님은 이곳의 책임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은 부 동명왕님과……………..”
“어허!”
귀자모신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들은 쭈뼛거리면서도 끝 까지 양보할 기색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우리 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분들은 내 손님이다. 정말 길을 못 비키겠다는 말이냐? 명왕교 최고 호법인 내가 못 가는 곳도 있다더냐?”
“그러나 교주님의 엄명이 있어서…….”
“허허허. 원 참!”
귀자모신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묻겠다. 명왕교에서 팔대 호법 중의 하나인 부동명왕의 직 위가 높으냐, 아니면 최고 호법인 나 귀자모신의 위계가 높으냐? 어서 대답해 보아라.”
귀자모신의 다그치는 말에 그들은 다소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러나는 뭐 말라비틀어진 그러나냐? 도대체 나를 제쳐 놓고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 한번 보아야 하겠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다만…….”
“손님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려고 작정을 했구나. 너희들 혼 좀나 볼 테냐?”
그제야 두 신도는 머쓱해하면서 물러섰다. 귀자모신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다는 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귀자모신은 연희와 준후를 데리고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복 도 양옆으로는 많은 방이 주욱 있었고 각 방문마다 작은 창문들 이 달려 있었는데 전부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귀자모신이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참선장이 언제 이렇게 음침하게 변해 버렸나?”
귀자모신이 문 하나를 슬며시 잡아당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주어 더 세게 잡아당겨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귀자모신은 입구를 지키던 두 신도들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 았으나 어느새 두 사람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허, 이상하다. 이럴 수가!”
귀자모신이 의아한 듯 몇 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귀자모신이 사람들을 부르려고 복도로 몸을 돌리려는데 저편에서 붉은 가 면을 쓴 덩치 큰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아까 복도 입 구를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귀자모신이 고집 을 피우자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부동명왕에게 일러바친 모양이 었다.
현암에게서 부동명왕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준후와 연희는 흠칫 놀랐지만 부동명왕은 가면을 쓰고 있는 연희와 준 후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잠시 후 부동명왕과 귀자모신 간에 는 들어가서 보겠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는 입씨름이 벌어졌다.
“자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한 위치가 되었나? 어떻게 나의 행동을 사사건건 간섭할 수가 있는 것이지?”
“이곳은 교주님의 명에 의해 제가 관할하는 곳입니다. 간섭하 지 마시오. 그건 월권입니다. 교주님께 직접 말하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좋다. 내 교주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 그러나 일단은 둘러보 고 난 후에 하겠다.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니 참견하지 마라!”
“안 됩니다. 절대 문을 열어 줄 수는 없소!”
“자네 참 많이 컸군그래! 야쿠자 생활 때도 이런 식이었나?”
비록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부동명왕은 그 말을 듣자 화가 나 는지 씩씩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내 말이 뭐 잘못되었나? 지금 분명 무슨 일들을 꾸미고 있지? 배 안에서 아까 큰 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가?”
부동명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당장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는 것 같았다.
“자네들, 혹시 나 모르게 사람들을 납치한 적은 없었나? 내 듣 기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리가..”
“닥치시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런 적 없소!”
“정말 없다면 뭐가 켕겨서 나의 행동을 간섭하는 것이지?”
“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뿐이오! 당신이야말로 출입이 금지 된 장소에, 그것도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다니!”
부동명왕이 악을 쓰다시피 했지만 귀자모신은 예의 비꼬는 듯 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 직접 교주님께 따질 것이네. 교주님을 모시는 몸으로 잘못 된 일은 간언하여 바로잡을 수도 있도록 해야지. 자네의 잘못도 모조리 고하겠네!”
“알아서 하시구려. 난들 혼자서 이 일을 했을 것 같소? 나도 교 주님의 명을 받고 그런 것이오! 누군 그런 여자 따위를 잡고 싶어 서 잡은 줄 아시…………”
말을 하다가 말고 부동명왕은 아차 싶은 모양이었다. 실언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실언이었다. 귀자모신의 몸이 파르 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스르르 곤두서고 있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교주님은 그런 적이 없어 요. 절대로………….”
귀자모신은 부릅뜬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다가섰고 부동명왕은 주눅이 든 듯 어깨를 쪼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귀자모신은 부 동명왕의 바로 앞까지 다가서더니 음침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이 명왕교 내에서…………… 응?”
부동명왕은 더더욱 고개를 숙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귀자모신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악을 썼다.
“이런 교를 말아먹을 놈들! 악당의 본성을 저버리지 못하고 그런 짓들을 하는 거냐! 내 교의 이름을 더럽히고 악행을 일삼 은 네놈들을 모조리 …………….”
귀자모신이 분노에 떨면서 악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부동명왕 도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가운 안에 가리고 있던 양팔을 뻗어 귀 자모신의 아랫배 부분을 힘껏 후려갈겼다. 상상도 못할 만큼 빠 른 기습이었다. 부동명왕이 몸을 움츠린 것은 주눅이 들어서가 아니라 남몰래 공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부 동명왕의 공격에 귀자모신의 몸이 뒤로 붕 날아 연희의 몸에 부 딪히며 데구르르 굴렀고,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준후가 큰 소리로 연희를 불렀다.
“연희 누나!”
손을 거둬들이고 있는 부동명왕의 모습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 다. 그 손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고 손바닥은 보라색으로 흉하게 물들어 있었다. 전에 현암과 대적 할 때에 썼던 대수인의 수법에 독까지 사용한 것이다. 준후는 그 수법이 무엇인지 채 알지는 못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에잇! 흉악한 놈! 비겁하고 더러운 놈!”
연희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쓰러진 귀자모신을 부축 해서 가면을 벗겨 냈다. 무방비 상태에서 난데없는 기습을 받은 귀자모신은 가면을 벗기자 헉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피를 울컥 뱉어냈다. 귀자모신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부동명왕이 다 시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준후가 발을 탕탕 굴렀다. 우보법의 방 위를 밟은 것이다. 부동명왕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자 잠시 놀 란 듯했다. 그러나 곧 이얍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발 한쪽을 떼 어 냈다. 실로 놀라운 괴력이었다. 부동명왕도 나름대로의 술법 자라 꽤 깊은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준후의 우보법으로도 완전 히 통제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준후는 부동명왕이 힘으로 발 을 떼자 자신도 튕기듯 한쪽 방위를 뗄 수밖에 없었다. 준후는 비틀거리면서 뗀 발의 방위를 고쳐 밟고는 소리를 쳤다.
“바람!”
고함 소리와 동시에 준후가 몸을 팽그르르 팽이처럼 돌리자 한 줄기의 강한 바람이 부동명왕 쪽으로 밀려들었다. 부동명왕 의 뒤에 섰던 두 명의 신도들은 그 바람에 밀려 우당탕거리며 뒤 로 쓰러져 버렸고, 부동명왕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대여섯 발 자국 뒤로 밀려갔다. 부동명왕은 현암에게 일격을 당해 참패한 데다 자기 허리밖에 오지 않는 꼬마에게 당한 게 자존심이 몹시 도 상했는지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그사이 연희는 귀자모신을 일으켜 세운 다음 등에 업었다. 업고 보니 그저 깡마르고 가냘픈 노파에 불과했다. 그리고 준후에게 소리쳤다.
“준후야, 어서 물러나! 위층으로!”
준후는 소리를 듣자 재빨리 돌던 몸을 멈추고는 수인을 짚어 서 한 줄기 뇌전을 부동명왕의 발 앞에다 내쏘았다. 부동명왕은 그저 작은 아이에 불과해 보이는 준후가 이토록 신기한 수법을 쓰는 것을 보자 놀랐는지 뇌전의 기운을 보고는 껑충 뛰어 뒤로 한참을 물러섰고 그 틈을 타서 연희는 귀자모신을 업은 채 사다 리를 기어 올라갔다. 준후도 재빨리 그 뒤를 따라서 엄호하는 자 세로 뒷걸음질을 해서 올라갔다. 그들은 복도를 달렸다. 그러자 연희의 등에 업혀 있던 귀자모신이 정신이 든 듯, 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의무실로……. 이건 반란이야. 일단 의무실로…………….”
“의무실이 어느 쪽이지요?”
“쭉 가서 왼쪽으로, 그리고 사, 사다리를…………….”
연희는 계속 달음질쳤고 준후는 따라가다가 뒤에서 무슨 소리 가 들리자 끙 하면서 옆에 쌓여 있던 나무 상자 뭉치를 밀었다. 그러자 빈 상자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복도는 거의 막혀 버렸다. 준후가 계속 상자들을 무너뜨리면서 달려간 덕분 에 그들은 무사히 의무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의무실에 도착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누워 있었 다. 모두 다 건장한 남자들이었는데 압박붕대를 감고 부목을 댄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타박상을 심하게 입은 사람들 같았 다. 그 사람들을 보고는 귀자모신이 놀라며 간신히 말했다.
“대, 대위덕・・・・・・ . 그리고 팔야차장! 왜 모두가 이렇게…. 그러자 다리를 완전히 붕대로 칭칭 감은 남자 하나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어느 조선인 침입자를 막으려다가 그만 이렇게 됐습니다. 엄 청난 놈이었어요. 그런데 귀자모신님, 놈들이 안까지 들어왔나 요? 왜 이리 소란스럽지요?”
연희는 찔끔했다. 아까 현암, 도운과 난투극을 벌였다는 대위 덕명왕이 전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했더니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줄이야. 오해가 생기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재빨리 귀자 모신에게 말했다.
“현암 씨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까 대위덕명왕을 비롯해 여러 무술가들과 겨뤘다고 했어요. 그러니 오해가 없도록 해 주세 요.”
귀자모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안타깝게도 연 신 밭은기침을 해 댈 뿐 말은 하지 못했다. 귀자모신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할 수 없이 연희가 일본말로 대신 말했다.
“그 한국 청년과 일본인 승려는 우리와 같은 일행입니다.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뭐라고? 너희가 도운 땡초와 그놈과 한 패거리라고?”
팔야차장이라고 불린, 팔에 깁스를 한 청년 하나가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귀자모신이 피 로 범벅이 된 입으로 간신히 부르짖듯이 말했다.
“나중에 내가설, 설명하겠다. 그들은 손님이다. 오해가… 오 해가 있었으니 일단은 안으로 모셔라. 그리고 모반자들을………….”
“모반자라뇨? 대체 누가?”
“나를 암습…………. 부, 부동…….”
귀자모신은 안간힘을 써서 말을 했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만 푹 쓰러져 버렸다. 그때서야 팔야차장들은 깜짝 놀라면서 연희의 등에서 귀자모신을 끌어내려 침대에 눕혔다. 연희는 일 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팔야차장들은 귀자모신처럼 명왕교의 정통교도 같았다. 그러나 대위덕명왕에 대한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대위덕명왕은 부동명왕과 함께 현암과 싸웠다고 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대위덕명왕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연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위덕명왕이 딱딱한 얼굴로 연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위덕명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귀자모신님은 속고 계신 거다! 저자들은 우리의 크나큰 적이 다! 어서 모두 잡아 묶어라!”
그러자 팔야차장의 하나로 보이는 젊은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귀자모신님께서는……………”
“귀자모신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시다!”
“그렇지 않습니다! 귀자모신님의 술법이 어떤 것인데 이렇게 당하신단 말입니까! 부동명왕의 모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부동명왕의 모반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저자들도 우리 편은 아니다! 잡아 묶어라!”
연희와 준후는 그 바람에 미처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와르르 달 려드는 그들에 의해 금세 묶였다. 처음에는 재갈까지 물리지 않 았는데 대위덕명왕이 명령하는 바람에 연희가 악을 써가며 저 항하다가 그만 입까지 틀어막혀 버렸다. 연희가 항변하려고 했 지만 팔야차장들은 연희보다 자기들의 상관인 대위덕명왕의 말이 우선이었다. 준후도 뭐라 대처할 사이가 없었다. 둘을 묶고난 팔야차장들이 조심스럽게 대위덕명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모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요?”
“귀자모님이 잘못 아신 걸 게다. 부동명왕은 그럴 사람이 아 니다. 내 직접 이야기를 해 보겠다.”
연희는 바보 같은 팔야차장들이 너무도 답답해 발을 동동 굴 렀다. 지금이라도 귀자모신이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그 런데 팔야차장 중의 한 사람이 대위덕명왕에게 따지고 들었다.
“귀자모신님은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분은 암습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동명왕에 대해서는 경계하 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강경하게 나가자 대위덕왕도 할 말이 없는지 주저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서 그 사람에게 말했다.
“좋다. 그러면 여기로 오는 통로를 막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게 해라! 그런 다음 교주님께 연락을 드려서 지금 벌어진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명령을 받도록 하자. 그리고 너는 당장 올라 가서 우리를 쓰러뜨린 그놈을 이리로 데리고 와라. 그놈이 아직 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 우리 모두가 덤벼도 안 됐는데 어떻게 저 혼자서…”
“바보 같으니! 귀자모신님의 명이라 이야기하고 데리고 와라. 땡초와 여자도 함께. 여자 한 명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놈이 들어오는 순간 머리통이라도 내려치면 일은 간단해진다. 절대 겁먹지 마라. 놈들은 틀림없이 방심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귀자모신님은…………….”
“이 바보야! 그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그놈들이 애염명왕을 죽였단 말이다!”
그 말을 듣고 팔야차장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연희 는 대위덕명왕의 엉큼한 속셈을 밝히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 뭐 라고 할 수가 없었다. 대위덕명왕의 말을 듣고는 야차장 한 명이 밖으로 나갔다. 대위덕명왕은 부상당한 몸으로 귀자모신에게 손 을 뻗쳐서 맥을 짚더니 말했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시다. 어서 병원으로 옮겨야겠다. 만약 부동명왕의 모반이더라도 너희를 쫓지는 않을 테니 들것을 천으 로 가리고 빠져나가라. 시비는 뒤에 가리기로 하고 지금은 귀자 모신님의 안위가 걱정이다.”
그 소리를 듣자 야차장들은 대경실색하더니 우르르 달려들어 서 귀자모신을 떠메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연희는 암담했다. 귀자모신까지 나가 버렸으니 이제는 대위덕명왕이 마음대로 술 수를 부릴 수 있을 것이었다. 연희는 더 심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연희가 몸부림치는 통에 뭔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호주머니 에 있던 세크메트의 눈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세크메트의 눈은 승희가 가지고 있는 터라 제대로 연락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만이 현암에게 상황을 알리는 유일 한 방법이었다.
현암은 서서히 눈을 떴다. 옆에서는 승희가 여전히 돌처럼 굳 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도운은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잠든 듯했다. 도운의 발목엔 새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다행 히 귀자모신의 말대로 명왕교의 여신도들은 그들을 힐끗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도운 도 치료해 준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현암에게 다가와 물 수건을 건네주었다. 현암은 얼굴과 머리에 엉긴 피를 닦아냈다. 다른 여신도 하나가 붕대를 가지고 와서 현암의 눈치를 조심스 럽게 살폈다. 안 그래도 상처가 쑤셔 오는 판이라 현암은 명왕교 의 여신도들이 하자는 대로 웃통을 벗고 상처를 소독한 후에 붕 대를 감았다. 한결 고통은 덜했으나 공력이 빠져나간 허탈감은 여전했다.
일단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공력이 탈진한 상태로 있는 것은 불안해서 가부좌를 하고 운기행을 시작했다. 그러 나 완전히 삼매경에 빠져들어서 정식으로 운기 하는 것이 아니 라 귀를 열어 두고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 는 태세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약간의 공력이 회복된 것 같아서 현암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월향검을 꺼내어 정성스럽 게 닦았다. 월향검이 떨리는 느낌을 보아 이제는 많이 안정된 것 같았다. 현암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월향검의 날은 아 무런 흔적이 없이 깨끗했고 손잡이에만 약간 피 얼룩이 남아 있 었다. 과연 명검은 명검이었다.
현암은 월향검의 손잡이 부분까지 정성스럽게 문질러 닦고 왼 손의 칼집에 집어넣은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쉬고 나 자기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어지럼증은 여전했고 목이 말랐다. 현암이 여신도에게 서툰 영어로 물을 달라고 하자 여신 도 중의 하나가 그 말을 알아듣고 시원한 물을 한 컵 가져다주었 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발소리가 들려왔 다. 곧 문이 열리면서 아까 현암과 대적했던 무술가 중의 한 사 람이 들어왔다. 현암도 깜짝 놀랐지만 무술가도 당황하는 눈치 였다. 그가 들어오자 명왕교 여신도들은 그에게 무어라고 떠들 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현암 쪽을 가리키며 여신들을 향해 큰 소 리로 떠들어 댔다. 여신도가 한참 동안 뭐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 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가 곧 강경한 어조로 무어라 말하자 이번에는 여신도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그자는 현암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현암은 귀자모신의 말도 있고 해서 그냥 고개만 갸웃해 보였다.
그자는 몹시 서툰 영어로 여자와 어린아이가 밑에서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현암도 아까의 일은 유감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서 서두르라고 말했다.
현암이 서서히 몸을 움직여 나가려고 하자 그자는 도운과 승 희도 손가락질해 보였다. 현암은 의아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도운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그자는 한쪽 팔로 현암의 부축을 받아 도운 업었다. 현암은 승희를 업었다. 승희의 몸은 뻣뻣해 져 있었지만 현암은 간신히 마디를 풀어 들쳐 업고서 그자의 뒤 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더 무거운 도운을 자신이 업을까도 생각 했지만 나중에라도 승희가 알면 성질을 부릴 것 같아 그만두었 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코웃음이 나왔 다. 현암은 무술가의 뒤를 따라 선실을 나서며 복잡한 통로로 접 어들었다.
박신부는 마음을 추스른 다음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방금 본 야마모토의 얼굴은 다카다와 닮았고 그의 몸에서는 영기도 느껴 졌다. 지금의 모습을 볼 때 다카다의 영이 야마모토에게 빙의되 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진작 알지 못했 을까? 스즈키가 환영을 보고 난 다음에 박 신부는 매우 긴장해서 야마모토에게 영적인 기미가 일어난다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었다. 그런 생각으로 야마모토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했었는데……………. 그때 다카다의 영이 야마모토의 몸속 에 들어 있었다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는 다카다의 영이 야마모토의 몸속에 없었던 걸까? 만일 그렇다면 빙의된 영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단 말인가?
지금 박 신부가 고민에 빠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보통의 빙의 상태는 오갈 곳 없는 부유 령이나 원한령이 사람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오기 때문에 한번 몸속에 파고든 영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그 사람의 몸을 가지 려 한다고 알고들 있지만, 다카다같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승 천하지 않은 경우라면 여러 사람의 몸을 옮겨 다닌다고 해도 하 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박 신부는 미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사건 하나를 기억해 냈다. 자신을 묶고 있다가 저절로 풀어 진 줄과 자신이 분명 집어넣은 적이 없는데도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앰플 병을 생각했다. 그것도 다카다의 영이 한 짓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의 사념을 물리적으로 구체화시킨다면 줄을 조금씩 갉아서 끊어지게 만든다거나, 조그마한 앰플 병을 집어 넣는 일 따위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라도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보통 영이 행하기는 어려운 일. 혹시 다카다도 명왕교에서 모종의 술법을 익혔거나 그런 힘의 일부를 나누어 받았던 것은 아닐까?’
박신부는 앰플 병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자세히 관찰하니 앰 플 병에 든 내용물은 단순한 마취제 같지 않았다. 끝 부분을 정 성 들여서 아주 조금만 꺾었다가 꼼꼼히 밀랍으로 봉해 놓은 것 이 보였다. 앰플 병의 끝을 살짝 꺾고 주사기 같은 것으로 내용 물을 빼낸 뒤 다른 것을 채웠음이 분명했다.
‘이것을 사용하든 말든 내 판단대로 하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 일까? 그리고 이 내용물은 무엇일까?’
박 신부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썼지만 안의 내용물에 대해선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결 론은 단 한 가지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영양제나 치료약일 리는 만무했고 마취제도 아니라면 ・・・・・・ 혹시 독약이 아닐까? 순간 박 신부의 눈이 빛났다.
‘그럼, 오키에를 죽여 달라는 뜻인가?’
박신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카다도 묘렌의 야심이 단지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라 더 큰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래서 묘렌이 하는 일을 저지하려고 하는 걸 거야. 가만있자. 하지만 이 약을 쓴다고 혼 령이 되어 버린 묘렌이 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오키에일 테고, 오키에가 죽더라도 묘렌은 또 다 른 여자의 몸에 빙의되어서 또 얼마든지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키에를 죽여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럼. 독약이 아니라 다른 것일까?’
박신부는 답답했다. 어째서 다카다의 영은 속 시원히 밝혀 주 지 않고 그냥 가 버렸을까? 박 신부는 궁리 끝에 달리 생각해 보 기로 마음먹었다.
‘하나씩 정리해 보자. 먼저 다카다는 묘렌에게 깊이 빠졌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묘렌에게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고 내게 도움을 청해 어떤 식 으로든 결말을 내려 한다. 그러나 다나카의 영이 하는 모습으로 보아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아. 애매모호하게 간접적인 도움 만 줄 뿐이지. 그래! 그래서 아까 스즈키에게 나를 데려다 주었 을지도 몰라. 사건의 전말을 알게 해 주어서 나 스스로 판단하게 하려고……………..’
박 신부의 추론이 맞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 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박 신부는 현암과 준후, 그리 고승희와 연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아까 오키에는 자신을 미 끼로 이용하여 그들까지 이곳으로 끌어들일 작정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현암이나 준후가 믿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들이 어떤 함정을 어떻게 파 놓았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힘으로 스즈키와 사이토를 구해 내든 지, 아니면 혼자만이라도 탈출해서 일행과 합류한 연후에 다시 들어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 모두를 구해 내기에는 상처가 너무 심했고, 일행과 합류한 뒤에 다시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렸다. 그사이 명왕교 측이 도망치거나 인질들을 해칠 우려도 있었다.
‘무리를 하더라도 일단 해 보자. 그 수밖에 없다. 나잇살이나 먹어 가지고 인질이나 되는 못난 꼴은 보일 수 없지.’
박 신부는 마음을 다잡으며 앰플 병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아라라고 했던가? 아까 오키에의 앞에서 울며 발버둥 치던 한국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그 아이도 구해 내야지. 그리고 스즈키도 사이토도 오 키에도……………..’
박 신부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어 손에 쥐고는 기도를 올 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상처가 심해 온몸이 저릴 정도로 통증이 왔지만 입술을 깨물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계단 위쪽으로 올라간 박 신부는 지하실 바깥쪽 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대위덕명왕은 그다지 심하지 않은 부상을 입은 야차장들을 일 단문 주위에 배치해 놓았다. 그들은 저마다 흉기를 들고 매복한 채로 한참동안 기다렸으나 현암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위덕명왕 은 초조했는지 교주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준후는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또다시 이렇게 묶인 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형도의 술수라도 써서 줄을 끊어 볼까도 했지만 하루 종일 싸워서 몸이 지쳐서인지 그것마 저도 잘되지 않아서 속으로 울상을 짓고 있던 참이었다.
대위덕명왕이 전화를 하는 도중 야차장 중의 한 명이 문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를 치자 다른 야차장들이 흉기를 들고 우 르르 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문 근처에 닿기도 전에 문이 왈칵 열리면서 피로 범벅이 된 옷을 입은 현암이 우당 탕 뛰어들었다. 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대위덕명왕은 미처 전화도 끊지 못한 채 품속에서 날카롭고 기다란 바늘 몇 개 를 꺼내어 현암에게 날렸다. 준후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 했지 만재갈을 문 입에서는 신음 소리만 새어 나왔다. 삽시간에 현암 의 뒤통수에 야차장들의 몽둥이가 퍽퍽 소리를 내며 작렬했고 현암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푹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준후는 어쩔 줄을 몰라서 미친 듯 기운을 끌어 올리려고 몸에 힘 을 주었다. 그때 마주 묶인 채 쓰러져 있던 연희가 준후에게 현 암쪽을 가리키며 눈짓을 해 보였다.
준후가 의아해서 쓰러진 사람을 보니 그것은 현암이 아니라 피 묻은 현암의 재킷을 걸친 야차장 중의 한 명이었다. 다른 야 차장들도 놀랐는지 어어 하고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서고 있는데 꺄아아악 하는 귀곡성이 찢어질 듯이 들리면서 월향검이 쏜살같 이 날아 들어왔다. 그 기세에 야차장들은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월향검은 무서운 기세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대 위덕명왕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대위덕명왕은 도망도 채 치지 못하고 한 손에는 수화기, 다른 한 손에는 던지다 만 바늘 을 든 채 항복하는 듯한 자세로 기겁을 하며 벽에 붙어 섰다. 신 통하게도 월향검은 대위덕의 목 바로 앞까지 날아와서는 허공에 서 덜컥 정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귀곡성을 울리고 있어서 그 소 리가 마치 여차하면 목에 구멍을 내 버리겠다는 협박 소리처럼 들렸다. 월향의 서늘한 기세에 야차장들은 기가 죽어 몸을 덜덜 떨었다. 그때서야 현암이 굳은 얼굴로 선실로 들어왔다. 준후는 현암이 어떻게 알고 왔을까 궁금했으나 현암은 혼자 온 것이 아 니었다. 뒤에는 안색이 해쓱하게 질려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부 비고 있는 승희가 있었다.
현암은 뚜벅뚜벅 거침없이 방으로 걸어 들어온 다음, 덜덜 떨 고 있는 야차장들을 뒤로 하고 연희와 준후에게로 다가와 줄을 풀어 주었다. 준후는 연희가 빙긋이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는 연 희가 세크메트의 눈으로 승희와 통신을 했을 거라 짐작했다.
대위덕명왕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사시가 되어 목 바로 앞 에 협박하듯이 떠 있는 월향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가 대덕 위명왕의 손에 들려 있는 수화기를 현암에게 가리켰다. 현암이 고개를 끄덕하면서 월향검에게 손을 뻗자 월향검은 현암의 손으 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대위덕명왕은 질려서인지 꼼짝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연희는 대위덕명왕이 들고 있는 수화기를 빼앗다
시피 해서 끊어 버렸다. 그제야 준후가 반가운 듯이 현암에게 물었다.
“저 아래 부동명왕인가 하는 자도 있었는데 어찌 되었죠?”
“그자를 만나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 그러나 덕분에 승 희도 깨어났으니………. 지금쯤 아마 푹 자고 있을 거야.”
“햐!”
준후는 활짝 입을 벌리고 웃었다. 현암이 야차장의 말에 속아 의무실로 내려오고 있는데 도중에 예상치도 않은 부동명왕과 마 주치게 되었다. 부동명왕은 준후의 뒤를 쫓아 여기저기를 뒤지 다가 의무실로 가는 중이었다. 현암은 부동명왕과 대적하기 위 해 승희를 던지듯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 바람에 승희가 충 격을 받아 깨어난 것이었다. 월향검이 있는 마당에 부동명왕쯤 은 현암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월향검이 몸 주위를 빙빙 돌자 부동명왕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기겁을 해 버렸고 현암은 부들 부들 떨고 있는 그를 간단히 한 방에 쓰러뜨려 버렸다. 정신이 든 승희는 투덜거리면서 연희와 준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며 무심코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어 들다가 연희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현암 이연희에게 말했다.
“후지코는 찾아보셨나요?”
“아뇨, 아직 부동명왕인가 하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
“연희 씨가 저와 함께 다시 가 봅시다. 승희하고 준후는 아저씨들을 잘 감시하고 있어라. 밖에 쓰러져 있는 도운 스님도 간호 해 드리고.”
승희와 준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연희와 현암은 선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과는 달리 지하실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조금 열 고 보니 밖을 지키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중상을 입고 마 취까지 된 박 신부를 엄중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모 양이었다. 박 신부는 계단을 올라온 것만으로도 벌써 정신이 가 물거렸다. 숨이 찬 것을 애써 참으며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어 손에 쥔 박 신부는 근처에 굴러다니던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 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경비를 서는 남자는 마침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참이어서 박 신부의 한 방에 라이터와 담배를 떨어 뜨리고는 조용히 기절해 버렸다. 박 신부는 지하실에 그 남자를 끌어 넣고는 바닥의 라이터와 담배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 다. 그러고는 갑자기 떠오른 듯 남자에게 돌아가서 몸을 뒤져 보 았다. 다행히도 소음기가 달린 권총 한 자루가 나왔다. 총 따위 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할 수 없었다.
탄창을 살펴보니 총알은 네 발분이었다. 박 신부는 아파오기 시 작하는 상처를 감싸 쥐고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최대한 빨리 걸 음을 옮겨서 계단 쪽을 살펴보았다. 계단 위에도 인기척은 느껴 지지 않았다. 박 신부는 아까 자신이 옮겨졌던 방으로 걸음을 옮 겼다. 스즈키와 사이토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방에도 복도에 도 경호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 좀 의아했지만 어쨌든 지금이 기회였 다. 박 신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보았지만 이미 사이토 와 스즈키도 어디론가 옮겨진 듯 보이지 않았다. 아까 결박을 풀 어낸 것이 들통 나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박 신부는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다른 방문 앞으로 가서 기색을 살피 다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층은 이상하게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경호원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지만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얼른 벽에 몸을 붙인 박 신부는 귀를 기울여 보았 다. 오키에, 아니 묘렌이었다. 묘렌은 좀 낮은 톤의 중년 여자의 음성으로 깔깔거리며 전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박 신부는 묘렌 과 대적할 생각은 없어서 조심스럽게 옆에 있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창고인지 너저분하게 물건들이 쌓여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는 아주 좋았다. 박 신부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데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 신부는 혹시나 하고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보니 오키에가 경호원들과 함께 사이 토와 스즈키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스즈키는 떨 리는 눈으로 경호원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 스즈키 를 지키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그들이 계단으로 내려가자 박 신부도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갔 다. 그들은 다행히 일층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일단 그들이 지하실 계단 쪽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안심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로 보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들을 구할 방 법이 없었다. 또한 오키에가 직접 저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보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오키에나 다른 경호원이 자신 이 도망친 것을 알고 찾기라도 한다면……………. 비상수단이라도 사 용해야만 했다.
박신부는 주머니 안에 들었던 라이터를 손에 꼭 쥐었다. 그러 고는 눈을 딱 감고 주변에 불에 탈 만한 것들을 모은 뒤, 바깥을 한 번 살펴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불을 붙인 다음 밖 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숨 가쁘게 다시 일층까지 내려가서 지하 실 입구로 들어섰다. 한 십여 분 있으니 매캐한 냄새가 났고 몇 분 더 있으니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 들이 빠르게 왁자지껄 계단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문틈으로 보 고 박 신부는 일층의 오른쪽 복도에서 몇 명의 경호원이 불이 난 곳으로 올라가는지 세어 보았다. 두 명. 아까 네 명이 오키에와 함께 갔으니 아마도 그 이상의 인원만 없다면 그곳에는 오키에
와 스즈키, 사이토 그리고 두 명의 경비원만이 남아 있을 것이었 다. 박 신부는 심호흡을 하며 기운을 모으면서 이후의 일을 마음 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쪽이에요.”
연희가 현암에게 손짓을 해 길을 안내하면서 아까의 밀폐된 선실에 다다랐다. 중간에 두어 번 명왕교도들과 마주친 적은 있 었지만 그들은 현암의 험상궂은 몰골과 마주하자 꽁무니를 빼면 서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수월하게 목적지까 지 갈 수 있었다. 현암이 선실의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문은 덜 컹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연희가 말했다.
“문은 잠겨 있어요. 여기 서 있던 보초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던데.”
현암은 대답 대신 월향검을 꺼내어 약간의 검기를 주입했다. 힘을 들이지 않고 종잇장을 자르듯 철문을 주욱 긋자 철컹 하고 쇳덩이 같은 것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은 수월하게 열 렸으나 방엔 아무도 없었다. 반대쪽의 문을 열자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 사람을 보고는 찔끔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미라와 같은 몰골이었다. 퀭한 두 눈에 쑥 꺼진 뺨과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가는 팔과 다리, 여자였다. 현암은 이제껏 흉한 꼴 을 많이 보아 왔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자의 모습은 너무도 비참했다. 지나치게 바싹 말라서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자는 현암이 들어왔는데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가만히 벽 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굶겨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잔혹한 놈들!’
현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곳에는 식 사를 하고 난 빈 그릇들이 보였다. 그릇들에는 음식물이 꽤 남아 있었는데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어? 그렇다면 굶긴 것이 아닌데 그러면 왜……………’
현암은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의 맞은편 벽에는 단상이 있었고 그곳에는 청동으로 만든 묘한 형 태의 조각상이 하나 보였다.
“현암 씨, 뭐 하세요?”
밖에서 걱정되는 듯 연희가 말했다. 현암은 할 수 없이 그 뼈 와 가죽만 남은 여자를 달랑 들어 밖에 내놓았다. 여자는 저항도 하지 않았다. 현암이 들어 옮길 때마다 가냘픈 신음 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연희는 눈물 을 글썽거렸다.
현암은 굳게 입을 다물고 침중한 얼굴로 방들을 돌아다니면서 문을 부수고 안을 살펴보았다. 그 많은 방마다 똑같이 바싹 마른 여자가 한 명씩이 있었고 현암은 그 사람들을 계속 업어서 밖으 로 내놓았다. 누가 후지코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그 여자들 은 하나같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밖으로 실려 나간 다음에는 조금씩 원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연희는 여자들에게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갇히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입을 모 아 말하길, 자신들은 명왕교를 신봉하던 신도인데 치성을 드리 기 위해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연희는 의아하게 여기며 여 기 후지코라는 사람도 있느냐고 물었고 저쪽에서 한 여자가 고 개를 까닥하는 것을 보았다.
“후지코 양, 당신도 치성을 드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가요?”
후지코는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현암도 방을 다 살펴보 고는 연희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왜 이곳에 왔지요? 언제부터?”
후지코는 말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연희는 고심한 끝에 세 크메트의 눈을 생각해 내고는 승희에게 후지코의 마음속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승희가 읽어 낸 투시는 삽시간에 연희에게 영 상처럼 전달되었다.
“아!”
연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현암은 연희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연희 씨, 왜……..”
“끔찍한 일이에요. 승희가 방금 후지코 양이 겪은 일들을 보여주었어요. 이리로 잡혀 오고 나서 갇힌 채로 매일매일 힘과 정기를 빼앗기고………..”
“정기를 빼앗긴다고요?”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아요. 방 안에 있는 저 청동 조각상. 알게 모르게 그것을 볼 때마다 얼이 빠지고 정신이 몽롱해지고 힘이 빠져나가고,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겪었나 봐요. 그 러면서도 명왕교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하 고, 또 음기의 발동을 위한다고 밤이면 가면을 쓴 남자 신도들이…….”
연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말을 끊었지만 현암은 그 내 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암의 양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다른 사람의 정기나 기운을 모아 힘을 내는 술법은 이미 많이 보 아 왔다. 현암은 끝없이 나타나는 이런 미친 짓들이 지긋지긋하 게 느껴졌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 이게 과연 올바른 것 이란 말인가? 이유가 어떻든 간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 른 사람의 존엄성과 생명마저도 짓밟을 수 있다는 근거는 도대 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왕교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을 영광 으로 알라고?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헌신짝 내버리듯 강 요하고도 태연할 수 있는 종교나 교리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괴물인가.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될 수 있다는 말, 아니 사람의 목숨이나 가치를 그러한 정량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단 말인가.
“명왕교는・・・・・・ 그리고 교주는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현암은 무겁게 말했다. 그러자 연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잠시만요. 명왕교에서는 후지코의 모습을 면밀하게 사진 찍 고 음성도 녹음해 간 적이 있었다는군요.”
“말씀 안 하셔도 이제 알 듯합니다. 적어도 그들이 무엇 때문 에 그랬는지는…..”
“무엇 때문이죠?”
“명왕교의 인물들은 독심술을 쓸 줄 압니다. 아마도 교주가 그 렇겠지요. 그리고 환영술을 쓸 줄도 알지요. 나는 갑판 위에서 그들이 보낸 환영과 싸웠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가장 사무친 일은 동생 현아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그들은 알 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환영을 보내어서 나를 무력하게 만들려 고 했습니다.”
연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준후도 그랬어요. 준후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자신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고 했어요. 아, 그 렇다면…….”
“칠인방의 인물들 중 다섯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 은 모두 뭔가에 놀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죽 음은 환영과 깊게 관계되어 있을 겁니다. 만일 그 환영이 우리의 경우와 흡사했다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 인들의 모습이었을 거구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환영이라고요?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참혹한 말을 듣고 참혹 한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일까 요. 더군다나 그 환영들은 단순한 환영만이 아니라 물리력을 행 사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나 준후에게는 통하지 않았겠지만 경동 맥이나 심장에 물리력을 가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연희는 비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후지코를 잡아 왔을까요? 현암 씨나 준후 의 경우처럼 그냥 읽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모든 능력이 다 갖춰졌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러니 처음에는 환영을 보낼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겠지요. 칠인 방의 다섯 명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꼭 여인들이 한 사람씩 실 종되거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분명 명왕교의 소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차 힘을………..”
현암은 잠시 말을 끊고 바싹 마른 주위의 여인들을 슬픈 눈으 로 돌아보았다.
“이렇게 여인들의 정기와 힘을 끌어 모아서 그 힘을 완성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맞아요! 그것이 교주의 정체일 겁니다. 아까 분명히 대위덕명왕도 세상은 여성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 다는 말을 했었다지요? 누구에게나 환영을 보낼 수 있고 여성의 음성적인 기운을 모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 교주………….”
현암이 나직하게 긴장된 소리로 말을 맺었다.
“무서운 힘입니다. 그냥 사용되는 주술력이나 물리력보다도 더욱 무서운 힘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명왕교의 교주, 오키에라 고 했던가요? 그녀가 이 모든 사태의 핵입니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단연코!”
현암은 긴장하고 있었다. 연희는 현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상을 당하고 이제는 말라 버린 검붉은 피 얼룩으로 뒤덮인 옷 을 걸친 파리한 얼굴. 저런 상태로도 싸우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연희는 이미 오랫동안 현암을 보아 왔지만 현암이 가진 의지의 힘이 도대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현암의 월향검이나 내력, 태극기공도 대단한 것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현암을 강한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저런 의지가 아닌가 싶었다.
“일단 돌아갑시다.”
현암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쓰러져 있는 여자들을 대강이나마 달래 준 뒤 간신히 몸을 일으키게 된 사람은 부축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기다리라고 하고는 후지코를 자 신의 등에 업었다. 현암도 한 명을 업고 서너 명의 여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